[소루미] 바람이 불지 않는 곳

물 아래는 바람이 닿지 않는다.
메로피드 요새의 공기는 흐름을 느낄 수 없고, 금속과 물의 비린내가 공기 중에 섞여 익숙해지기 전에는 잠들기 어렵게 만드는 원인들 중에 하나였다.
수면의 문제는... 질은 어떻든 피로한 몸 때문에 정말로 잠들지 못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게 금속과 물의 냄새에 익숙해져 맡을 수 없게되면, 흐르지않는 공기와 닿지않는 빛 때문인지.
물 아래임을 기억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넌 저 위에서 오면서 항상 물 위를 그리워하는군."

만날 때마다 차 타령하는 요새의 주인의 티타임에 어울려주면서 수제 파트 드 프뤼를 다과로 내놓았던 루미네는 라이오슬리의 말에 어디 먼 곳을 보던 시선을 메로피드 요새로 되돌렸다.
행복하게 젤리를 만끽하던 페이몬은 음악만 흘러나오던 침묵을 그제야 알아채고 입에 남은 걸 냉큼 삼켰다.

"왜 그래? 혹시 메로피드 요새가 답답한거야?"

"하긴, 너같은 모험가들에겐 이 물 아래가 진정한 의미의 감옥일테니까."

아주 드물게, 경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요새로 오는 모험가들은 이곳을 답답해해서 절대로 남거나 돌아올만한 죄를 짓지않는다는 첨언에 페이몬은 그럴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잠깐 딴 생각하고 있었어요."

머리를 흔들어 들러붙는 잡념을 마저 털어낸 루미네는 손목의 푸른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젤리로 손을 뻗었다.
맛있게 만들어진 달콤한 젤리가 발치에서 뻗어오는 이름없는, 혹은 이름을 잃은 것들의 환상을 털어내버렸다.
층암거연의 아래에서는 느긋한 티타임을 가질 수 없었고, 당시의 루미네는 물 원소를 다루는 법도, 파트 드 프뤼를 만드는 법도 몰랐었다.
이곳은 땅 아래가 아닌 물 아래였다.

잡담이 음악소리와 침묵을 밀어내고, 티타임이 끝나서야 공작에게서 정식 의뢰 내용을 들은 루미네는 벌써부터 피로가 한가득 쌓이는 기분에 방금 다 먹은 젤리를 더 먹고 싶었다.
피로를 풀어줄 단 것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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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로피드 요새의 배수관을 통과해 나온 폰타인 대호수의 한구역은 전문 다이버들도 꺼릴만큼 몸이 저릿해지는 번개 원소를 품고 있었다.
온몸이 따끔한 기분에 페이몬을 두고와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헤엄쳐나가니 일반적인 생명체들은 이미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정도면 원소를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나 조금 저린 수준일테니 평범한 사람은 감전사고 때문에라도 접근을 금지해야할 터였다.

'이나즈마보단 낫지만....'

라이덴 쇼군이 와타츠미의 신을 두동강 내며 만들어졌다는 고농도의 번개 원소를 머금은 강을 떠올려 비교해가며 번개 원소가 강한 곳으로 더 깊이 헤엄쳐가니, 강한 물살이 흐르는 수중 동굴이 루미네를 반겼다.
푸른 물 속에서 어렴풋이 자색번개가 비치는 듯했다.
물살을 타고 흘러온 끝은 숨 쉴 공간이 있는 동굴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젖은 머리를 넘기며 자신 대신 온몸이 저리다 난리쳐줄 파트너가 없는 것에 아쉬워하고 있으려니, 문득 주변의 기묘한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물 속에 일반적인 생명체가 없던 것과 반대로, 물 속보다 짙은 공기 중의 번개 원소 속에서 태어난 듯한, 자신을 향해서 통통 튀며 다가오는 보라색과 노란색의 슬라임 무리가 눈에 띄였다.
슬라임의 이전 단계인 원소 나비는 또 보이지 않는게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이 특이한 상황에 흥미를 가질 수메르의 지인들 몇 명을 떠올리며 검을 잡은 루미네는 빈 손에 물 원소를 휘감았다.

"휘몰아쳐라!"

슬라임 무리에 애먹기에는 루미네는 이런저런 경험이 과하게 많아 몸값이 아주 높은 모험가였다.
적의 숫자가 비정상적이라 다치지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투 후라기엔 멀쩡했다.
주변의 번개 슬라임 무리를 처리한 뒤 남은 응축액이며 원액을 주워보니, 그것만으로도 닿은 손끝이 조금 따끔거렸다. 이 역시 특이하다.
이곳은 예상보다 더 위험한 곳이었다.

번개 원소가 짙은 슬라임 응축액을 조금 챙기고 동굴 안으로 걸어들어가니 누가봐도 내가 원인이오. 하고 소리치는 듯한 처음보는 생명체가 있었다.
긴 보랏빛 몸체, 주변에 벽처럼 두르고도 바깥으로 세어나오는 번개 원소. 틀림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지 목 아래에 붙은 구슬이 눈이 아플 정도로 번뜩일 때마다 편히 있지 못하고 네 개의 다리로 허공을 휘젓는 모습이 불안해보였다.
그리고 몸을 빼기 어렵게도, 그 생명체와 루미네의 시선이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전투는 치열했다.
물 원소가 응축된 이슬방울이 썩 효과가 없는 것 같아 보기와 달리 물원소에 내성이 있나했는데, 살펴보니 상황이 조금 달랐다.
와타츠미의 산호 진주가 떠오르는 고운 빛의 구슬이 머금은 번개 원소로 다른 원소를 거부하는 것처럼 밀어내고 물원소를 흘려버린 것이었다.

'번개 배리어...가, 맞는 거겠지?'

배리어라면 보통은 두르고 있는 존재를 보호할 텐데, 아무리봐도 저 생명체 역시 진주의(루미네는 그냥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원소에 고통받는 기색으로 간간히 발작하며 높이 뛰어올랐다가 땅에 착지하지 못하고 부딫히는 등의 일이 벌어졌다.
그 예상할 수 없는 움직임에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있으리가 만무하니, 루미네 역시 부상이 급격히 늘어갔다.
오른손으로 쥔 검에 풀을, 빈 왼손에 바람과 바위를 실어가며 동굴의 주인과의 사투 끝에 기어코 위험할 정도로 강렬한 원소를 품은 진주가 박살났다.
그로인한 폭발에 휩쓸려 날아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던 루미네는 어렴풋이 유사한 과거의 언젠가를 떠올렸다.

'광야에서 길을 잃거나, 길에서 각종 악인이나 흉수를 만났을 때, 전쟁과 마주쳤을 때 내 이름을 부르거라.'

익숙해진 것과 다른 더 딱딱하고 감흥이 옅은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그 이후, 어떤 이유로 불러도 바람같이 등장하던 것도.

"소...."

그 이름을 입에 담은 게, 이 장소가 층암거연 아래의 동굴 형상을 한 기이한 공간과 닮아서라고 속으로 변명하며, 어둡기만한 천장과 기약없이 멀어졌다.

'여긴, 바람이 없어....'

그 날도, 지금도 알고 있었다.
소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다만 눈을 뜨면 망서객잔으로 달려가 불렀는데도 오지 않았다고 투덜거릴 생각이었다.
루미네는 그가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만드는 땅 아래와 물 아래가 조금 싫었다.

글쓰는 건 늘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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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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