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루미] 바람이 불지 않는 곳

2편

루미네가 폰타인을 떠난 것은 공작의 의뢰 이후 이주일이 더 지나서였다.
동굴 안에서 몸을 추스르는데에 반나절이 걸리고, 메로피드 요새로 돌아가자마자 무서운 기세의 시그윈에게 잡혀가 나흘간 요양을 했고, 치료해준 수간호사에게는 애석하게도 낫자마자 라이오슬리와 과학원의 추가 의뢰까지 들어왔다.

호수 일부를 물들인 기이한 번개원소는 사라졌으나 루미네의 보고를 바탕으로 찾은 천년묵은 진주 기린(과거 문헌에서 찾은 이름이라했다. 페이몬이 묻길, 정말 천 년이나 산거야?)은 기절했다 깨어난 루미네를 얌전히 지켜봤다는 보고가 무색하게 영역으로 들어온 생명체를 자비없이 지져버린 탓이었다.
그 탓에 루미네는 도와준 것이었으니 허용되지않을까~ 하는 가설이 나와 다시 수중 동굴로 들어가니, 진주 기린은 일정거리 이내로 접근하지 않으면 공격을 하지 않고 평온히 있었다.
측정용 비콘을 설치하고 회수하는 등 연달아 이어지는 의뢰를 뛰다 정신을 차리니 2주가 지나있었다.

"리월로 갈꺼야. 오늘 바로."

이제 물도 번개도 지겨워.
조사 때문에 폰타인 과학원과 메로피드 요새를 왕복하길 십수번째.
보고서를 쿵 소리나게 올려두며 내뱉은 선언에 당황하지 않은 것은 페이몬 뿐이었다.
스산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과학원 사람이고 메로피드 사람이고 말리거나 질문할 생각도 못한 채 멀뚱멀뚱 멀어지는 등을 배웅할 수 밖에 없었다.
정리가 어느정도 된 이후 세세한 조사를 전부 과학원 측에 떠넘겨버린 메로피드 요새는 어쨌든, 조사를 도와줄 인원을 찾는 것도 힘든 과학원 측은 뒤늦게 루미네를 애타게 찾으며 우는 사람이 속출했지만 이미 항구에서 배를 타고 폰타인을 떠나버린 여행자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짙은 습기를 머금은 폰타인의 공기와 확연히 다른 리월의 공기에 마음부터 들떴다.
짧지않은 시간동안 익숙해진 물원소의 푸른빛 대신 바위원소의 황색빛이 자리를 채우자 진짜로 물 속으로 잠수할 일이 없어졌다는 실감이 들어 해방감이 훌쩍 커졌다.

"그으럼~ 이제 어디 갈꺼야?"

"음... 망서객잔으로 가자."

"히히, 그럼 출발!"

발에 닿아오는 땅은 단단하고, 공기 중의 어렴풋한 귤향도 없다.
날듯이 걷는 걸음이 가벼워 같이 들뜬 페이몬도 걸친 별빛이 반짝거렸다.
당장 날고싶을 정도로, 뺨에 닿아오는 바람이 상쾌했다.

---

바람씨앗을 아는가?
마음에 든 행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 또 멋대로 떠나버리는, 바람의 나라인 몬드에서 종종 보이는 바람의 정령이다.
바람 씨앗이 보이는 것이 몬드 밖에 없다해서, 바람의 정령이 바람의 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적화주를 거니는 항마대성이 와글와글 떠드는 바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은, 바람씨앗과 닮은, 리월을 뛰어다니는 바람의 정령이 있어서였다.

'그 아이가 온데!'

'지금 어디야? 아직 물의 나라야?'

'바위 원소를 둘렀어! 봐도봐도 신기해!'

'항마대성, 그 아이가 온데!'

재잘재잘 떠들면서 목소리를 실어다주는 바람의 정령에 여행자가 망서객잔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얻은 소는 얼추 정리가 끝난 적화주를 둘러보다가 객잔의 반대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좀 더 멀리까지 정리를 해 볼 생각이었다.
어느 누군가가 걷는 길목과 요마를 정리하기로 한 범위가 겹치는 것은, 그냥 우연일 뿐이다.

눈치없이 튀어나오는 보물 사냥단을 걷어차고, 어슬렁거리던 우인단과 싸우며 걷는 길은, 특이하게도 츄츄족같은 마물와 만나는 일이 없었다.

"엄청 다쳐와서 얼마나 놀랐는데! 으으, 나도 따라갈 걸 그랬어!"

"그랬으면 페이몬 넌 물 속에서부터 감전되서 정신을 못 차렸을지도 몰라."

"그치만! ...그렇게 위험할 줄 알았으면 누구라도 도와달라고 했을텐데... 아님 라이오슬리라도 데려가라고 했을거야!"

공작으로서 업무가 있으니까... 라는 변명은 이미 의뢰를 받기 전에 짧지않은 티타임을 가졌다는 진실 앞에서 무너졌다.
의뢰주 본인을 데려가는 건 좀 그렇지 않냐는 말에도 페이몬은 강경했다.

"소를 불렀는데도 못 왔다며, 앞으로 물 속을 탐색할때는 누구든 도와달라 그러자! 너 혼자는 절~대절대 안돼!"

"...불렀다고?"

어쩐지 주변의 바람이 뚝 그친 기분이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 곳에는 창에 묻은 피를 채 털어내지 못한 소가, 희게 질린 얼굴로 서있었다.

"소! 어, 어디 아픈거야?"

순간 반가워하던 페이몬이 인사대신 걱정부터 할 정도로 소의 안색이 창백했다.

"내 이름을 불렀다고."

"어...어어어... 그게...."

금빛 눈이 루미네에게 꽂힌 채 미동도하지 않았다.
생채기 하나라도 찾아내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옅은 멍자국하나조차 보고싶어하지 않은 것 같기도했다.
그 심상치않은 기세에 둘은 변명하듯이 루미네가 얼마나 멀쩡하고 건강하고 튼튼한지, 방금도 우인단이며 보물사냥단을 깔끔하게 쓰러트려버렸는지 떠들어댔다.
두 사람의 필사적인 연설에 진정했는지, 아니면 별다른 상처나 흉터를 찾지 못해 포기했는지, 살랑살랑 다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듯 눈을 감은 소가 창에 남은 피를 털어버리고 무기를 갈무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듣고 싶었다.
시식같은 평화로운 일에나 저를 불렀으면서 전투 중에 저를 찾을만큼 위험했는지, 그것을 자신이 이제껏 몰랐다면 대체 어디에 있었던건지....
지금 상처가 없다해서 진실로 다치지 않았던건지.

"폰타인에, 바람도 안통하는 수중동굴이었어.
아마 그래서 소도 못 들었던 걸거야."

보호해주기로 계약한 상대에게서 면죄부가 건네졌지만, 그걸 받을만큼 뻔뻔했다면 그는 오래전에 창을 내려놓았을 터였다.

"...다친 곳은?"

"음...."

꽤 긴시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기억 못 할만큼 많이 다쳤거나, 의식을 잃어 기억이 나지않거나. 둘 중 하나임을 직감한 소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요마의 기운을 찾기 위해 잠시 집중했다.
그의 손에 정리되어 흩어져버릴 흔적만 남은 걸 확인한 소가 눈을 뜨자, 그의 앞에는 여전히 상처하나 없는 루미네가 있었다.
위험한 것들을 전부 치워 안전해진 장소에, 멀리 떠났던 여행자가 돌아왔다.
무사귀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객잔으로 가는 길인가?"

"응."

"동행하지."

소는 아주 오랜만에 리월항을 다녀와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층암거연이 아니어도 그를 부르는 소리가 전해지지 않는 곳이 있단 걸 알았으니, 대책을 세울 수 없는 그는 존경하는 이의 지혜를 빌리기로 했다.

이렇게 길어질 스토리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어두워지는 스토리를 어떻게 수습했더니 후일담까지 가져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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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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