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챠깡
로그 제목을 왜 이렇게 썼을까요?
“아키쨩, 잠깐 편의점 좀 들러도 될까요?”
돌연 걸음을 멈춘 여자가 길거리에 놓인 편의점을 가리켰다. 목소리가 담은 언어는 청유에 가까웠으나 치유리의 몸은 이미 편의점 쪽으로 기울은 채였다. 원체 그러한 성정이기도 하였으나 동행인의 성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그러던가.” 예상대로 쉬이 허락을 내뱉은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극채색을 담은 눈길 사이사이로 희미한 의문이 반짝 떠올랐다 스러졌다.
뭐 살 거 있어? 으레 할법한 질문조차 건네지 않는 사내의 모습에도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더울 텐데 같이 들어가요. 아니면 담배 피우고 있을래요?”
“……아니, 됐어. 너 금방 나올 거잖아. 아깝기도 하고… 언제는 피지 말라더니?”
“그건 아키쨩이 관리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는데도요?”
불투명한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선 여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요, 라고 묻는 듯한 시선에 아키토는 구태여 언어를 정제하는 대신 친구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래 들어서 가장 후덥지근한 날이기는 하였으나 내부는 얼핏 지나치다 느낄 정도로 시린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심해요, 나갈 때는 몸에 성에가 꼈을지도 몰라요.” “나가면 다 녹을 텐데 무슨 걱정이야.” “아, 그것도 그렇네요.” 으레 하는 헛소리를 흘려넘긴 사내가 음료 코너에서 커피를 집어 오는 사이, 매대에 진열된 상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치유리가 손뼉을 쳤다.
“찾던 물건이라도 있었어?”
“네~! 이거 보세요, 아키쨩!”
“………가챠?”
손바닥만 한 크기의 봉투가 여자의 손끝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파스텔톤으로 이루어진 앙증맞은 디자인 사이로 그려진 것은 일본인이라면 한 번쯤 보았을 산○오 캐릭터들이다. 저 안에 모든 캐릭터가 들었을 리는 없으니 랜덤 동봉이라는 것일 텐데…. 섬에서 나오니 오미쿠지가 아니라 합법 가챠에 손을 대는군. 결론을 도출한 친우의 속도 모르고 여자는 계속해서 종알거렸다.
“맞아요~ 갖고 싶었는데 저희 동네는 누가 다 쓸어갔더라고요. 아키쨩도 하나 골라볼래요?”
“하나만 사려고? 너 돈도 많잖아. 갖고 싶으면 그냥 상자째로 사면 되는 거 아니야?”
“아키쨩도 참,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이런 건 직접 뽑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실패했을 때를 계산하면 그게 더 아깝지 않나. 그보다… 뽑을거란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행운 앨리스 결정석이라도 받아뒀어?”
그런 건 아니지만……. 어물어물 말끝을 흐리던 치유리가 아무튼 하나 골라보라 닦달을 했다. 기어이 그가 고른 것까지 계산을 끝마친 여자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느낌이 좋네요. 아키쨩이 뽑아줘서 그런가?” “그럴 리가…….” “또 못된 소리를 하죠. 밥이나 먹으러 가요, 우리.” 그야말로 전형적인 도박 중독 같은 소리였다.
널따란 테이블 위로 그릇들이 들어섰다. 정갈한 찻잔과 녹차, 따뜻한 물수건 사이로 자그마한 간장 종지를 발견한 치유리의 눈이 사르르 휘었다. 평범한 그릇인 줄만 알았건만 간장을 붓자 얼룩무늬 고양이가 드러난 것이다.
“귀여워라…. 요즘은 이런 그릇도 많네요.”
“넌 옛날부터 이런 거 좋아하더라.”
“귀엽잖아요. 아키쨩도 옛날에는 액세서리 모으고 그랬으면서요.”
“액세서리? ………아아, 그거.”
우와, 잊고 있었어요? 잊었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그때 친구들 결정석 얻겠다고 발품 팔고 그랬었잖아요. 그거랑 그건 다르지 않나. 이제는 세피아 색으로 흐려진 옛이야기를 입가심 삼아 종알종알 떠드는 새, 편의점에서 사 온 봉투가 뜯겨나갔다.
“앗.”
하얀색, 하늘색, 그리고 파란색. 구름 속에서 엿보는 것처럼 여리고 흐린 색이 손끝에서 달랑거렸다. 축 늘어트린 귀와 동그란 눈과 마주한 치유리의 낯에 기쁨과 당혹이 얽혔다.
“원하던 게 아니야?”
“으음…. 비슷해요. 좋아하는 아이긴 한데 이미 집에 있거든요.”
“그러게 그냥 박스채로 사라니까.”
“얘는 어떡하지...... 아키쨩, 혹시 환자 중에 어린애들 많이 있어요?”
“너, 내가 어떤 의사인지 잊어버린 거 아냐? 그건 개인정보 보호법 때문에 말 못 해줘.”
“아아앗…! 그렇네요……. 쿠로미였으면 아키쨩한테 줬을 텐데 말이죠. 잘 어울리잖아요. 닮았고.”
너 날 그런 눈으로 봤었구나. 힐난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새 봉투를 꺼내든 치유리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번엔 아키쨩의 행운을 좀 볼까요? 말 돌리는 것이 명백한 모습에 가볍게 눈을 흘긴 아키토가 턱을 괴었다.
“아키쨩.”
“또 왜.”
“……혹시 예언 앨리스 있어요? 아니면 자기랑 닮은 걸 뽑는 재주라도 있다던가.”
어색하게 눈웃음을 친 치유리가 살랑살랑, 쿠로미가 인쇄된 아크릴 스탠드를 흔들었다. 우연이라지만 어쩜 이렇게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지. 신기하게 바라보는 여자와 달리, 그런 친우와 그 손에 들린 장난감을 감흥없이 바라보던 사내가 빙긋 웃음을 그렸다.
“안돼.”
“저 아직 아무 말도 안했어요.”
“주면 장식할 거냐고 물어볼 거잖아.”
“어, 어, 어떻게 알았어요? 절 너무 잘 아는 거 아니에요?”
“네가 너무 단순한 거야. 아무튼 안돼.”
호들갑을 떨던 것도 잠시, 입술을 삐죽인 여자가 차곡차곡 꺼낸 부품을 조립했다.
“하긴 아키쨩은 귀여워 해줄 것 같진 않아요. 모처럼 뽑은 거기도 하고…….”
“그게 중요한가? 그냥 필요하다는 사람한테 떠넘겨도 되잖아. 아니면 버리던가.”
“그치만 인연이라는게 있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으레 그러했듯, 치유리의 목소리가 노래하는 것처럼 낭랑하게 바뀌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단순한 성미 탓이었을까. 혹은 그와의 이런 담소가 그리도 즐거웠던 것일까. 그리 어려운 장난감도, 독특할 만큼 아름다운 부품이 있는 것도 아니었건만. 원하던 아이가 아니었다고 푸념하던 때와 달리 다소 천진하기까지 해 보이는 태도였다. 부품 조각 하나하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꿰맞추던 여자가 완성품을 양손으로 들어 올리며 웃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인연만을 유독 중요하게 이야기하지만. 물건이나 동물에도 인연이 있는 법이잖아요. 그리고 이건 1/9 확률을 뚫고 제게 온 거고요. 아키쨩이 골라주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테니 인연이 닿을 확률은 더욱더 낮아지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얼마나 귀한가요?”
“글쎄… 역시 잘 모르겠는데.”
에엥―. 그럴 수가... 시무룩한 손길로 스탠드를 테이블 위에 장식한 여자가 손끝으로 비죽 솟은 쿠로미의 귀를 두드렸다. 연극배우처럼 과장되었다 느껴질 정도로 극명한 태도였다. 다만, 시라미네 치유리가 더 이상 타니무라 아키토의 외양에 속지 않듯 타니무라 아키토 또한 시라미네 치유리의 그러한 면에 속지는 않았고.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옛날에 저희 결정석 교환했을 때 말이에요. 그것도 구하기 어려웠잖아요. 뿌듯하고 기쁘지 않았어요?”
“뭐… 그때는 그랬던 것 같긴 한데, 네가 생각하는 무게랑 내가 느낀 무게는 다를걸.”
“무게가요?”
옛날에 했던 이야기랑 비슷해. 어린 왕자의 장미와 길들인 여우, 애착에 얽힌 감정의 낱알이 몇 되지 않는 단어들 사이로 흘러들어온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과거의 파편과 감정들이 색채를 잃고 흐리게 반짝였다. 마치 물속에서 흐려지고, 퍼져나가는 물감처럼. 그러나 그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것은 여전히 검은색과 보라색, 그리고 붉은색이다.
“아키쨩은 항상 그렇게 깊이를 따지네요. 바닷물이 얕다고 해서 바다가 아니게 되지는 않는데. 깊이가 다르면 곤란한가요?”
“나는 곤란하진 않지. 하지만 오해가 생기면 귀찮아져.”
그런가요? 그런 거야. 시시콜콜한 이야기처럼 이어지던 대담對談은 직원이 들어서자 흐지부지 끝마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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