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

[DAI]닻이 올랐으니

컬린 / 침입자 DLC 엔딩 시점

늘 비벼먹는 그 드림

에필로그 이후 스스로 잘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마법사인 인퀴가 어떻게 자유롭게 살 수 있었는가… 부분) 어쩌다 그렇게 된 걸까~를 고민하다가 이런 글을… 당연히 날조한 구석도 많고 잘 모르는 설정도 많기 때문에 실제 설정과 다르더라도 이 세계는 그런 설정이구나~ 넘어가주시기를

침입자 DLC 엔딩 즈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므로 인퀴 침입자 DLC 스포에 주의할 것!!

인간귀족 배경이 해안도시 오스트윅이라는 점+인퀴 손에 박힌 게 하필 ‘닻’이라는 명칭인 점 때문에 자꾸만 바다-항해와 연관짓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죠… 바다 근처의 육지(트.저택)에서 > 마법사 협회라는 일종의 등대(뇌피셜임)로 이동했다가 > 등대 박살 후 구조선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떠다니다가 > 심문회라는 거대한 배에 올라타 닻을 내린 후 > 닻이 사라진 후에 다시 각자의 항해를 떠나게 되었다는 거… 제법 좋지 않나요? 전 늘 이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해당 사항을 염두에 두시면 제 모자란 문장력과 비유도 제법 납득이 가시리라 생각하며

쓰면서 들은 노래: Dawn in the Adan · Ichiko Aoba (앨범 커버에 여성의 나체 사진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밖에서 재생할시 주의할 것)


컬렌은 아직도 아이언 불이 축 늘어진 이블린과 데빈을 양어깨에 둘러멘 채 거울 밖으로 튀어나왔던 순간이 방금 일어난 일인 양 생생했다. 거울을 부술 것만 같은 기세로 뛰어나온 아이언 불은 답잖게 얼굴이 질려있었다. 심지어는 뒤를 따라 나온 도리안조차 평정을 잃은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와줄 사람을 부르던 아이언 불은 급한 대로 근처의 천을 긁어모은 후 그 위에 심문관들을 눕혔다. 그 모든 긴박한 행동을 지켜보던 컬렌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애써 억누른 채 아이언 불의 팔을 붙잡고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크게 다친 겁니까? 쿠나리는요?”

“아, 쿠나리 쪽은 전부 해결됐어. 그런데…”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치료사들을 전부 부르게! 그 엘프가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알 수 없으니 마법사들도 불러주면 더 좋고. 최대한 빨리!”

“아냐, 치료사까진 필요 없을지도 몰라. 무슨 짓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피가 전혀 나질 않아. 깔끔하게 팔만 뚝 잘라갔어. 하하, 능력 좋은 개자식.”

“팔을 잘라갔다고요? 그게 무슨—”

“맙소사, 심문관님!”

분명 그렇게 생생했는데도 심문관들의 상태를 확인한 이후의 순간은 이상하리만치 두루뭉술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일사불란하게 병력을 지휘한 것 같기도, 치료사들이 방 안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던 것 같기도 하다. 그 가운데에서 컬렌은 가장 먼저, 사이좋게 누워있는 심문관들이 숨은 쉬고 있는지를 확인했던 것 같다. 고통에 신음하는 심문관의 — 제 아내의 숨소리를 확인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게 다였다. 누가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 후의 기억이 부자연스럽게 끊겨 있었다. 마침내 컬렌이 누군가 제 어깨를 강하게 붙드는 손길에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아무도 없는 텅 빈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령관! 정신 차리십시오!”

“카산드라…”

“심문관들은 자신들의 본분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니 뒷일은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심… 심문관들은…”

“생명엔 지장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좀 진정이 됩니까?”

“뭐, 뭐가 뭔지, 대체…… …죄송합니다. 잠시, 잠시, 바람을 좀 쐬어야겠습니다.”

컬렌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산드라가 부축하려 했으나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젓고선 꾸역꾸역 자신의 두 발로 방을 나섰다. 사령관님, 괜찮으십니까? 그런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는데, 분명 제 옆에서 말한 것일 텐데도 어쩐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걸 들으며 컬렌은 이 모든 게 사실 자신의 악몽은 아닌지를 의심했다. 리륨의 금단증세로 인한 악몽은 특히나 생생하고 고약한 편이니 이렇게 현실적인 악몽을 한 번쯤 꿀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혹은, 어쩌면 그저 이 모든 게 악몽에 불과한 것이기를 바랐던지도.

비척비척 걸어가 문을 여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하늘 가득 번진 핏빛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던 컬렌은 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한데 신선한 공기를 폐부 가득 들이마시고 있음에도 자꾸만 호흡이 모자랐다. 눈앞이 이지러지는 느낌에 컬렌은 떨리는 손으로 발코니의 난간을 겨우 붙잡고 섰다. 그러고 있자니 문득 떠나기 직전, 마지막 회의에서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하던 이블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블린은 도통 아픈 티를 내는 법이 없었다. 특히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내가 흔들리면 모두가 흔들릴 테니까요. 나는 언제나 괜찮아야 하죠. 안 괜찮은 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게요. 언젠가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을 때 이블린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었다. 그 말대로 이블린은 언제나 ‘괜찮았다’. 그랬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도저히 고통을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블린의 쥐어짜 내는 듯한 비명과 함께 그를 집어삼키려는 듯 탐욕스럽고 거칠게 번쩍이는 불길한 녹색 빛을 바라보며, 컬렌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 상황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컬렌은 잔뜩 엉망이 된 머릿속을 비집으며 적절한 한마디를 찾으려 애썼지만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이블린을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사실 하고 싶은 말은 그전에 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은 돌아올 겁니다. 당신을 잃는다고 생각하면… 코리피우스와의 마지막 전투를 앞두었을 때, 꼭 지금처럼 서로를 껴안은 채 당신의 무사 귀환을 빌었었다. 그때의 당신은 어떻게든 날 안심시키며 돌아오겠노라 약속했었지. 그러나 진실로 마지막 전투를 앞둔 지금의 이블린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컬렌을 놓아주었다.

당시 컬렌은 그저 상황이 긴박하기에, 다른 동료들이 우릴 보고 있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이블린은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블린은 끝까지 컬렌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컬렌은 그게 이블린이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 여길 때의 버릇이라는 걸 알았다. 결국 그 자신조차도 안심하지 못해서, 혹은 이미 예정된 끝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전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하자, 컬렌은 닻이 제 심장에 박혀버린 것처럼 미친 듯이 불타오르는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당신은 어때요? 당신에게도 고민이 있을 텐데, 어떻게 견디고 있습니까?”

이제는 정말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용의 시대 9:41년의 늦여름. 그에게 너무 칭얼거리기만 한 것 같아 민망한 마음 반, 그가 그랬던 것처럼 저 역시 그의 짐을 들어주고 싶다는 마음 반으로 건넸던 질문에 이블린은 꽤 오래 고민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이블린은 묘한 표정으로 컬렌을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피한 채 눈을 데룩 굴리더니 대뜸 이런 말을 했다.

“…협회가 재건될까요?”

“아, 당신은 마법사이니 그 부분이 걱정되긴 하겠군요.”

“네… 아마 당연히 재건되겠죠.”

“그럴 겁니다. 물론 확신할 순 없지만, 테다스 남부가 다시 평화를 되찾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을 테니까요.”

“……만약 재건이 안 된다면 어떨까요?”

이블린은 여전히 컬렌을 바라보지 않은 채 시선을 멀거니 저 너머의 설산에 두고 있었다. 컬렌은 이블린의 시선을 따라 쫓다가 무심코 이블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때 이블린은 어쩐지 무척이나 슬픈 눈을 하고 있었는데, 그걸 보자마자 컬렌은 이블린이 바라는 바를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협회가 재건되지 않기를 바랍니까?”

“아뇨! ……아니,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 모든 게 끝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하게 돼요. 언제까지고 전쟁이 지속되진 않을 거잖아요. 우리가 반드시 전쟁을 끝낼 테니까.”

“물론입니다. 그걸 위해 심문회가 존재하는 거니까요.”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러고 나면, 그다음엔 어떻게 될까요? 언제부턴가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

이블린은 그렇게 말하며 흐리게 웃었다. 그 미소가 퍽 서글펐던 것을, 컬렌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컬렌이 이블린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러 간 것은 카산드라의 말대로 후속 대처를 지시한 후로부터 몇 시간이 더 지났을 때였다. 심문관님께서 의식을 되찾았답니다. 병사의 보고에 컬렌은 읽고 있던 문서를 내팽개친 채 궁전 내에 마련된 임시 병실로 달렸다.

“컬렌.”

“렐리아나, 심문관님께서는……”

“들어가 보세요. 나보단 당신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렐리아나는 고개를 가벼이 까딱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컬렌은 그 자리에서 두어 번 숨을 고른 후 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손이 볼품없이 떨리는 바람에 컬렌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다시 숨을 고르며 애꿎은 문고리를 힘주어 쥐어야만 했다. 들어오세요. 그리운 목소리에 컬렌은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켜며 문을 열었다.

“…심문관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선 컬렌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침대에 누운 채로 자신을 향해 휘적휘적 흔들리고 있는 이블린의 손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컬렌은 전신의 긴장이 풀려, 비틀거리지 않도록 두 다리에 힘을 단단히 줘야만 했다. 다행히 상태가 심각하진 않은 모양이군. 평소처럼 장난칠 기운이 있으신 걸 보니. 컬렌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이블린의 얼굴을 살폈다. 이블린은 무척 지쳐 보였고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당신 얼굴 보니 좋네요. 다신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잔뜩 갈라진 가냘픈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물기가 어려 있어서, 컬렌은 저도 모르게 볼 안쪽을 꾹 깨물었다. 제 얼굴을 봐서 좋다는 아내에게 꼴사나운 몰골을 보이곤 싶지 않았다. 그런 컬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블린은 일어나는 걸 도와달란 손짓이나 했다. 컬렌은 이블린의 등 뒤에 베개를 받쳐준 후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주었다. 그 뒤 탁자 위에 있던 컵에 물을 따라 건넸는데, 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왼손으로 컵을 잡으려다 텅 비어있는 자리와 마주하곤 멋쩍게 웃었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죠. 오른손도 쓸 줄 알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곤란해질 뻔했어요.”

“팔은… 어떻게 된 겁니까?”

“닻만 제거하는 방법이 없었나 봐요. 하긴 코리피우스도 닻을 떼어내진 못했으니까… 꽤 과격하긴 한데, 그래도 닻 때문에 죽는 것보단 낫죠.”

컬렌은 이블린이 부러 가볍게 말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이블린 자신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였을 테지만, 컬렌을 위로하고 싶단 마음도 분명 있었으리라. 그 끝에 “데브는 괜찮대요?” 묻는 것을 보며 컬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와중에도 참 여전한 사람이다 싶어서.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출렁였는데,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그다음 말이었다.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 싶긴 했거든요. 그래서— 짠, 봐요. 당신이 준 반지는 이쪽에 끼고 있었어요. 잃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이제 왼손 약지엔 못 끼겠지만…”

이블린이 짠— 하고 보여준 오른손 약지엔 결혼식 때 컬렌이 끼웠던 반지가 얌전히 끼워져있었다. 컬렌은 마치 홀린 듯 이블린의 오른손을 끌어와 반지를 조심스레 쓸어보다가, 이블린의 손가락에 짧게 입맞췄다가, 끝내 그 손에 얼굴을 파묻고선 고개를 떨궜다.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지만 컬렌은 이블린 앞에선 언제나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됐으므로 이제와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블린의 가느다란 손가락 위로 물방울이 하나둘 볼품없이 떨어졌다.

“…컬렌?”

“…당신이 울질 않으니까요. 저라도 대신 울어야겠습니다.”

“난 괜찮아요.”

“아뇨, 괜찮지 않으셔야 합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괜찮다는 겁니까……”

이블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제 손을 타고 전해지는 떨림을 느꼈다. 어깨를 들썩이는 와중에도 컬렌은 이블린을 붙잡은 손에 최대한 힘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컬렌의 두 손이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희생할 이유는 없었어요, 이브. 창조주께서도 무심하시지, 대체 당신께 얼마나 많은 짐을 지워야 직성이 풀리신답니까?”

“그런 말 해도 돼요?”

“들으시라죠! 들으시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 컬렌을 보며 이블린은 문득 일전에 조세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 때문에 또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이블린도 그런 취미는 없었다. 남을 위해서라면 영계에라도 기꺼이 뛰어드는 무모한 취미 말이다. 애초에 그는 독실한 성직자도 아니고, 제 목숨을 던져가며 남들을 돕는 직업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아니… 어쩌다 보니 그 비슷한 걸 가지게 되긴 했나?).

이블린은 그저 운 나쁜 마법사였다. 이걸 오롯이 ‘운이 나쁘다’고 할 수 있을진 의문이었으나, 마법사가 된 것부터가 운 나쁜 일이었으니 아무렴 운이 좋다곤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했을 뿐이다. 모두가 그러지 않는다는 건 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보다야 나은 사람이라고 할 순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하고 싶어서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으므로 늘상 불안하고 두려웠다. 억울하기도 했다. 불평 한 번 하기 힘든 위치였으니까. 그랬기에 그래도 되는 상대에겐 맘껏 삐딱하게 굴었다. 내키는 대로 쏘아대면서도 머릿속으론 이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끊임없이 고려했다. 돌이켜 보면 참 피곤한 3년이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을 강제로 적출당하는 것. 그러지 않으면 닻에 삼켜져 순교하게 됐을 테니까. 지나치게 무거운 닻은 결국 배를 뒤집게 되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이제 이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지경까지 오고 나서야 이블린은 그를 내내 괴롭혀왔던 질문과 다시 마주했다. 그동안은 심문관이란 직책 밑으로 숨을 수 있었던, 무척이나 막막하고 무거운 의문을.

이블린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외롭진 않았습니까?”

“엄청 외로웠죠. 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내내 울었어요. 가족들이랑 헤어지기 싫어서.”

“울었다고요?"

“왜요? 내가 울었다니까 이상한가요?”

“그게 아니라…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제게 당신은 무척 강하고 의연한 사람이라서요.”

“후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노력한 보람이 있군요.”

“이곳에서도 울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그럼요. 대여섯 번 정도?”

“울고 싶으면 울어도 괜찮을 텐데요. 계속 참다간 결국 병이 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여긴 울 수 있을 만한 곳이 마땅찮잖아요. 지하실에 틀어박혀서 청승맞게 울 수도 없고. 애초에 그래도 소리가 다 들릴 거 같으니까.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조금만 더 참죠, 뭐.”

컬렌이 이블린에게 이후에도 당신과 계속 함께 하고 싶다 고백했던 날 밤. 둘은 서로의 몸 대신 온기를,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누워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몇 시간이고 계속돼도 질리거나 지치질 않아서, 그전까지 피로한 일정을 소화하고 온 둘임에도 이야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특히나 컬렌에게 이 시간이 무엇보다 값졌던 이유는, 좀체 제 속내를 내보이질 않았던 이블린이 자신의 은밀하고 연약한 구석까지 기꺼이 꺼내 보였던 데에 있었다. 이블린은 수줍게 자신의 과거와 생각들을 털어냈다. 트레벨리안 저택에서의 14년과 협회에서의 16년. 강제로 배교자가 된 후 마냥 믿음직스러웠던 성기사들이 두려워졌다던 지난 1년. 심문관의 무게가 버거웠던 순간들. 누군가의 죽음에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야 했을 때의 죄책감……

그리고 그 끝에는 가장 무거운 고민이, 진심이 있었다.

“있잖아요, 컬렌. 만약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내가 협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 날 잡아갈 건가요?”

“제가 더는 성기사가 아니란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그렇지만 성기사이긴 했잖아요. 게다가 당신은 마법사라면 이골이 날 테니.”

“제가 끔찍하다 생각하는 건 사람이길 포기한 소수의 마법사뿐입니다. 애당초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당신과 그들을 겹쳐보지 않는다고요.”

자칫 엉뚱해 보일 수도 있는 질문에 컬렌은 정석적인 답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그 답을 들은 이블린은 입을 꾹 다물더니,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내가 심문관이 아니게 된 후에도 당신과 계속 함께 하고 싶어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만약 살면서 딱 하나만 욕심낼 수 있다면 단번에 그걸 고르고 싶을 만큼……”

그렇게 말하며 이블린은 컬렌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컬렌의 답은 위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나 결국 해결책이 되진 못했다. 이블린에게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난제가 남아있었고, 괜찮은 해결법을 찾지 못하는 한 이블린이 내놓을 수 있는 답 역시 제 감정을 호소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컬렌의 품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따뜻했다. 이블린은 자신이 언제까지 이 사람을 이렇게 안아볼 수 있을지 재보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제 감정이 영원할 것처럼 말하지만, 부모 자식 사이의, 그리고 형제 사이의 사랑마저도 시간과 거리의 벽에 굴복하는 판에 그의 애정이 언제까지고 여전할 수 있다 믿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 온기를 놓아야 한다면, 또다시 소중한 이와 멀리 떨어져야 한다면, 이번엔 그 어떤 후회도 없도록 그 순간이 찾아오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아끼고 사랑하는 수밖에.

이블린은 자신이 이별에 익숙한 건지, 아니면 영원히 익숙해지지 못해 미숙하게 구는 건지 평생 구분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까? 제 처지를 받아들이고 그에 안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 없는 건 내가 철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 역시 평범한 사람이라서일까? 만약 전자라면, 마법사들은 평범하게 살 수 없단 걸 이해하면서도 자꾸만 마음 한 켠에 치밀어오르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은 대체 언제쯤 사라지게 되는 걸까?

이블린은 무심코 제 손의 닻을 쓸었다. 닻은 아직 단단히 박혀 있었다. 이 닻이 오르고 영원히 정박해 있을 것 같았던 배가 출항하면 이블린도 자신의 다음 항로를 정해야 할 테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이블린에게 소소한 위안이 되었다.


“…심문회를 해체하기로 했어요.”

이블린은 자신이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고 싶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왼팔이 다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욱신거리는 탓에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말일까? 아니, 분명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하기사, 이유 따위가 그렇게 중요한가?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섬길 수 없다는 것만이 중요할 테지.

그래서 이블린은 말을 이어나갔다. 가볍게 없었던 말로 하자고 무마할 수 있는 서두는 아니었으므로.

“겨울궁전에 도착한 뒤, 렐리아나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이제는 끝을 낼 때가 됐다고, 우리는 이제 심문회 없이도 테다스의 안녕을 위해 힘쓸 수 있다고. 그때 전 렐리아나에게 테다스는 여전히 심문회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세상이 아직은 위태롭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블린의 목소리가 젖어 들고 있단 걸 눈치챈 컬렌이 고개를 들었다. 축축해지기 시작한 것은 비단 이블린의 목소리만은 아니었다. 컬렌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이블린의 눈가를 쓸었다가, 이내 이블린의 뺨을 제 손으로 덮었다. 언제부턴가 이블린은 컬렌을 보고 있지 않았다. 꼭 성벽 위에서 제 고민을 이야기하던 그때처럼. 그래서 컬렌은 시선을 맞추는 대신 이블린의 눈을 살폈다. 그때처럼 무척이나 슬퍼 보이는 눈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모두를 위해서 심문회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필요로 했던 거예요. 심문회, 심문관이라는 자리를, 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어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도구로요. 그래서…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심문회를 도구로 이용하면 안 되니까, 게다가 어차피 나는 더 이상 안드라스테의 전령도 아니니까… 해체하겠다고 얘기했어요. 아까 전에요.”

이블린은 욱하고 치밀어오르는 눈물과 감정을 참아내고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 그에게 참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듯, 컬렌은 제 손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계속 닦아주었다.

어쩌면 그게 기폭제가 됐는지도 모른다. 아슬하게 넘칠락 말락 버텨왔던 감정들이 둑에 뚫린 구멍을 통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내게 남은 게 뭐죠? 난 더 이상 반짝이는 손을 가진 심문관이 아니에요. 이걸 봐요! 제 좋을 대로 남을 이용해 놓고선 그대로 똑 떼어가면 그만이죠!”

컵을 쥐고 있던 오른손이 떨리며 그 안에 담긴 물이 불안하게 출렁거렸다. 이블린의 감정도 딱 그런 모양새로 요동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이전의 삶으로 쉽게들 돌아갈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요? 이렇게 되면 전, 그냥 마법사로 돌아가야만 하잖아요. 협회가 재건됐으니까,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거라곤 그 빌어먹을 마법밖에 없으니까! 그 외에 내가 무얼 가졌고 무얼 원하든,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순간부터 그 모든 게 상관없어지잖아요. 갑자기 내 인생에서 나만 똑 떼어선 탑에 처넣어버리니까. 마법사란 그래야만 하는 거니까요!”

“…이브.”

“제가 너무 이기적인 거겠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고 살면서 감히 평범한 삶을 꿈꾸다니요, 가당치도 않은 일이죠! 하지만 컬렌, 성기사와 달리 마법사는 결혼할 수조차 없어요. 아시잖아요. 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데다 창조주의 저주가 이어지면 곤란할 테니까. 행여 자식을 낳더라도 같은 협회에 머물 수조차 없으니!”

“이브.”

“물론 전 카산드라를 믿어요. 카산드라는 분명 협회를 개혁할 거예요. 하지만 어쭙잖은 개선으로는 안 돼요. 난 좀 더 형편 좋은 죄수 같은 게 되고 싶지는 않…”

갑작스레 튀어나온 과격한 진심에 이블린은 반사적으로 제 오른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탓에 마구 출렁이던 컵이 마침내 한쪽으로 쓰러지며 이불을 검게 물들였다. 그에 멈추지 않고 데굴데굴 굴러간 컵이 바닥에 떨어져 날카로운 파편으로 나뉘어질 때에, 컬렌과 이블린의 시야도 깨진 거울과 마주하듯 불안하게 맞부딪쳤다.

이블린은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블린은 그간 참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반역파 마법사, 베나토리, 비비엔, 그리고 도리안과의 대화… 그 모든 게 영향을 주었겠지만 이블린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 건 그 중 어느 것도 아닌, 근 3년간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늘 업무와 책임감에 치여 사는 불안한 1년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블린은 그 속에서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삶의 절반 이상 머물렀던 협회에서의 조용하고 지루한 생활에선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는데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까지 만났으니 오죽할까.

그날 밤, 먼저 잠든 컬렌을 바라보면서, 이블린은 이제 돌이킬 수 없으리란 걸 직감했다. 한 번 알게 된 이상 더는 그전의 삶으로 만족할 순 없었다. 그 좁은 틈에 몸을 구겨 넣고 싶지 않았다.

협회는 기능해야 한다.

마법사들은 적절한 관리를 받아야 한다.

동시에, 마법사는 평범한 삶을 누려야 한다. 그들은 괴물이 아닌 사람이므로.

3년간 이블린을 가장 괴롭힌 것은 바로 저 모순이었다. 위의 조건들이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성기사들이 리륨 없이도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기적을, 마법사들이 빙의될 위험이나 강제로 안식화될 걱정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기적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이건 닻으로 봉합할 수 있는 단순한 균열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러한 기적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아주 긴 시간과 절대다수의 합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블린은 카산드라를 지지했다. 그의 대의에 공감했고, 그라면 그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일렀다. 기적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전의 갑갑한 삶으로 내몰리게 된 이블린에게는 더 이상의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당장 내일이면 평범한 마법사가 되어 협회로 돌아가게 될 테다. 그러므로 이블린은 당장 그 난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지금의 이블린에게 숭고한 대의 같은 건 존재치 않았다. 그저 살기 위해 도망치는 것에 불과했다. 혹자는 그 오스트윅 협회 출신이면서 왜 그렇게 나약하게 구냐며 손가락질하겠지. 그만큼 좋은 환경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그럼에도 이블린은 조용히 숨만 쉬며 살아가는 생활에는 넌더리가 났다. 다시 협회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이블린은 숨이 멈추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브!”

다음 순간, 이블린은 컬렌의 품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컬렌은 이블린을 힘주어 껴안은 채 그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진정하고 숨을 고르십시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컬렌의 손길에 이블린의 호흡이 차차 가라앉았다. 그제야 이블린은 제 심장이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두려웠던 것이다.

그걸 보며 컬렌은 카산드라의 방패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마법사들이 지금의 처우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풀어두기엔 너무 위험하므로, 개개인의 자유를 좀 억압하게 될지라도 확실히 관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 관리가 너무 느슨해도, 너무 지나쳐도 문제가 생기니 그 가운데에 존재할 적당한 합의점을 찾기만 하면 될 문제라고. 물론 그 적당한 합의점이 대체 무엇일진 알지 못했다. 결국 컬렌 역시 성기사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애초에 모두가 만족할 만한 지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까? 어쩌면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건 뻔한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고, 이 비정한 세상에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결말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컬렌은 일전에 이블린이 했던 질문을 회상했다. 내가 협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 날 잡아갈 건가요? 컬렌은 더 이상 성기사가 아니었고, 성기사의 책무에 얽매이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컬렌이 보기에 이블린은 위험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법사를 그 어떤 제약 없이 세상에 자유롭게 풀어두어도 괜찮은가? 괜찮다면, 그것이 비단 이블린 개인에 한정되어도 되는 걸까?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가 지나치게 많았다. 그래서 컬렌은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개중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 모두 쳐내자 가야 할 길이 보였다. 컬렌의 마음속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다.

바다 깊숙이 박혀있던 닻이 올랐다. 영원히 정박할 것 같던 배가 서서히 움직인다. 그대로 멈춰 서 있는다면 위태롭게 출렁이다 가라앉겠지. 침몰하지 않기 위해선 항로를 정해야 했다.

“…전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을 고르라면 분명 당신일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옳은지 확신할 순 없다. 컬렌은 제가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실은 옳지 않았던 경험을 숱하게 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테지. 이 문제에 대해선 특히나, 완전히 옳은 길은 존재치 않을 테니.

다만 컬렌은 이블린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옳았다’.

“…방법을 찾아봅시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요.”

이블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껏 일말의 불안감 없이, 온전히 확신에 차서 내렸던 선택들이 얼마나 있었던가.

언젠가 카산드라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은 세상을 뒤흔드는 결정을 내리면서도 언제나 확신에 차 보입니다. 당신처럼 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때 이블린은 그럴 수밖에 없었기에 그랬노라고 답했다. 카산드라의 말대로 제 선택은 모두 누군가의 인생을 — 심지어는 세상 전체를 송두리째 바꿀만한 것들뿐이었다. 그 선택들이 완전히 옳은 답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두가 이블린의 최선이었다. 이블린의 확신은 그곳에 있었다. 만약 다시 선택하라고 한다고 해도 또 그것을 고르리란 확신.

그러므로 이블린은 이번에도 제가 생각하는 최선을 고르기로 했다.

항로는 정해졌다. 돛을 활짝 편 배가 천천히 출항한다. 그것이 순항할지, 심지어는 옳은 항로를 따르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둘의 등을 떠미는 바람이 다정했고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경쾌했으므로, 적어도 가만히 앉아서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므로 둘은 당장의 항해를 즐기기로 했다. 서른 해가 훌쩍 지나고 나서야 찾아온 평화와 만족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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