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 시그널
칼리엔 제베라 x 리시안 시나레타 AU
“너, 예쁜 사람 한 번 찍어보지 않을래?”
부활절 연휴가 끝나고 회사로 복귀한 화요일 아침. 수상쩍게 상냥한 미소를 지은 선배가 칼리엔 제베라에게 쑥 말을 걸어왔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함을 확인하던 칼리엔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선배를 향해 눈을 돌렸다.
“일감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 업계에 예쁜 사람이 한두 명인가. 누구길래 이렇게 뜸을 들여요?”
그으게 말이지. 말을 늘어뜨리는 저 꼴은 더욱 수상했기에 칼리엔은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고 아예 의자를 빙글 돌려 선배를 마주 보았다. 묘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선배의 시선 끝에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나눠마시는 선배들이 모여있었다. 그중 한 명이 칼리엔과 눈을 마주치고 샐쭉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 커피 마실래?”
저쪽은 또 유난히 다정해서 수상쩍었다. 회사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나쁘진 않은 편이었으나, 오늘은 연휴가 끝난 화요일 아침이었다. 저렇게 밝게 막내 사진사에게 인사할 타이밍은 결코 아니었다. 세상 희망 다 죽어가는 몰골로 회의실로 들어오라는 전언을 힘없이 건넸으면 몰랐을까.
그러고 보니 선배들이 나 들어올 때 뭘 보면서 숙덕이고 있지 않았나. 나한테 뭐 원하는 게 있나. 칼리엔의 머리가 더 굴러가기 전에, 처음 말을 건 선배가 뚝 자르고 들어왔다. 미소가 한층 밝아져 있었다.
“칼리엔, 요즘 일 없지? 일감이 영 들어오질 않으니 놀면서 월급 받는 지경이잖아. 우리야 그렇다 쳐도 막내 너는 경력 한두 개쯤 쌓아야 실적도 오를 텐데. 그래서 말인데, 이거 한번 봐봐.”
수상쩍다 못해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릴 지경이었다. 칼리엔은 폭탄을 만지는 심정으로 선배가 반강제로 떠넘긴 의뢰서를 받았다. 두꺼운 종이 파일철을 열자 메일로 보내진 의뢰서를 인쇄한 내용과 이력서 한 장이 칼리엔의 눈에 들어왔다.
“와, 예쁘다.”
조건반사적으로 나온 감탄에 옆의 선배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4년 사진사로 일하면서 이렇게 예쁜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처음 봤을 땐 새로 데뷔한 아이돌인 줄 알았다니까.
칼리엔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절세미인의 위력은 굉장했고, 칼리엔도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호감이 생기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후에 칼리엔은 회상한다. 미인계에 홀려서는 안 됐었는데.
신인 모델, 리시안 시나레타. 남자였구나, 착각할 뻔했네. 나이는… 나랑 동갑이고. 의뢰는 xx향수 브랜드 화보 촬영. 여기 이름값 좀 있는 브랜드 아닌가? 이 좋은 기회를 왜 나한테 넘겨주는 거지?
칼리엔의 이성이 다시 자리 잡고 굴러가기 시작했다. 의심이 가득한 눈길에 선배는 성자가 빙의한 듯 사람 좋은 미소를 활짝 머금었다.
“너한테 언제까지 우리 잡일만 시킬 순 없잖아. 네 포트폴리오 만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이런 기회 또 없다, 막내야.”
여전히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도 의뢰용 메일함은 텅 비어있었고, 칼리엔은 포트폴리오가 부족한 신입 사진사였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미팅 날짜가 언제예요?”
“내일 오후 2시. oo스튜디오에서. 거기 서류에 명함 찝어놨어.”
그럼 그쪽에다 네 이름하고 연락처도 전달해놓을게! 일이 아주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발 벗고 나서서 막내의 경력을 쌓아주려는 선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칼리엔은 다시 리시안 시나레타의 사진을 응시했다.
“진짜 예쁘긴 예쁘네요. 아이돌 아닌 거 맞아요? 아니면 배우거나?”
“확실하게 아니야. 아이돌 제의받았었다는 소문이 있긴 한데 진짜인지는 모르겠고. 만나서 보면 왜 아이돌이나 배우는 안 하는지 알게 될 거야.”
타고난 외모에 천부적인 모델 재능까지 있는 건가? 물어보기도 전에 선배는 빠르게 떠나갔다. 칼리엔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인터넷 검색창을 켜서 향수 브랜드를 입력했다. 기간이 촉박했으니 당장 브랜드 공부를 시작해도 부족했다.
제 일방적인 오해가 정정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칼리엔은 까맣게 몰랐다.
* * *
리시안 시나레타는 확실히 세상에 둘 없을 미인이었다. 식후 냉커피를 빨아 먹으며 칼리엔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비단결 같은 은색의 긴 머리카락에 하얗고 고른 피부, 신이 공들여 빚은 이목구비에 보석을 박은 듯한 푸른 눈동자, 늘씬하게 쭉 뻗은 황금 비율의 신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화보 감이네. 신은 참 불공평하기도 하지. 작게 피어오른 불만을 집어넣고 칼리엔은 사교성 좋은 미소를 띠며 테이블 반대편에 있는 클라이언트 팀에게 인사를 건넸다.
“화보 촬영을 담당할 칼리엔 제베라입니다. 그쪽이 모델 리시안 시나레타 씨 되시죠? 사진보다 인물이 훨씬 좋으시네요.”
리시안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칼리엔이 제가 말실수했나 돌아볼 무렵 매니저가 과장된 웃음을 터트리며 옆에 앉은 리시안의 등을 두드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베라 씨. 우리 모델이 조금 낯가림이 심해서요.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예요.”
아, 예. 저쪽도 신입이라고 했었지. 이래서 아이돌은 아니라고 했던 건가? 세상은 넓고 진상은 그보다 많으니, 이 정도 낯가림이야 칼리엔에겐 애교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칼리엔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촬영 날짜를 금요일 오전으로 잡았다.
이때 칼리엔은 눈치챘어야 했다. 방금 보여준 리시안의 ‘낯가림’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것을.
“…모델님, 조금만 더 웃어주시겠어요? 아니, 입꼬리만 올리는 미소 말고, 진심에서 우러나오게.”
칼리엔은 서른두 번째로 카메라를 던지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제 월급보다 비싼 카메라는 죄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저 얼음장 같은 얼굴에다 먹다 남은 커피라도 던지고 싶었다. 미지근해진 커피를 저 잘난 얼굴에 부으면 도로 냉커피가 될 텐데. 칼리엔은 카메라로 얼굴을 가리고 이를 갈았다.
단언컨대 칼리엔은 그 어떤 촬영에도 이만큼의 난항을 겪은 적이 없었다. 대학교 동아리 시절,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공모전에 제출할 대작 한 장 건지겠다고 악으로 깡으로 버텼을 때도 이토록 눈앞이 깜깜하진 않았다. 그때 사진 보정까지 마치고 몸살로 사흘을 앓아누웠었지. 이번 촬영이 끝나면 일주일 휴가라도 신청해서 요양하고픈 마음이었다.
밀려오는 두통을 꾹꾹 눌러 담으며 칼리엔은 10분 휴식을 선언하고 등받이 없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신경질적으로 의뢰 내용을 다시 손에 들고 노려보아도 상황은 똑같았기에 칼리엔은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xx향수 브랜드의 신작, ‘다가오는 봄.’ 차가운 겨울의 탑노트 밑으로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미들노트와 베이스노트가 특징이며 향수병이 세련되게 뽑혀 정식 출시 전부터 마니아층에서 관심을 끌고 있었다. 향수에 대한 지식을 벼락치기로 배운 칼리엔도 각종 SNS에서 기대 평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칼리엔의 시선이 잘 꾸며진 스튜디오로 향했다. 환하게 켜진 조명등 아래 둥글고 하얀 대리석 탁자. 뒤에 깔린 하얀색의 배경천. 작은 꽃병에 꽂혀있는 파스텔 색감의 조화와 꽃병 옆에 놓인 향수병까지. 촬영장은 흠잡을 데 없었다.
이제 화보의 꽃, 저 아름다운 모델을 이 완벽한 세트에 더해보자. 조금 떨어져 매니저와 서 있는 리시안에게 가늘어진 눈길이 닿았다. 다섯 시간 넘게 촬영 NG를 거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흐트러진 곳 한 군데 없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세트와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자, 그럼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모델님, 겨울이 가고 곧 올 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설레는 느낌으로!”
“모델님, 표정이 한겨울이에요. 테마가 봄이라는 점을 기억해주세요.”
“…모델님, 자세는 좋은데 얼굴이 너무 딱딱해요. 조금만 웃어보시겠어요?”
모델님, 모델님, 아주 입에 붙어서 지긋지긋했다. 혹시 지시가 너무 까다로웠나 싶어 최대한 간단하고 간결하게 요청을 해봐도 처음 시작했을 때와 달라진 점이 없었다. 이쯤 되면 인간적으로 리시안의 안면근육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길가에서 아무 일반인을 데려다가 촬영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시안 시나레타는 얼굴만 예뻤지, 표현력은 절망적이었다.
아니, 따지자면 그에게 재능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담당 사진사 빡치게 하는 재능!
칼리엔은 과거 제 마음속의 발언을 철회했다. 신은 공평했다. 신은 리시안 시나레타에게 천상의 외모를 주는 대신 최소한의 사회성과 인간미를 박박 긁어서 회수해간 게 틀림없었다.
벌써 저녁 6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칼리엔은 퇴근하고 싶었지만 쓸만한 사진을 건지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초점을 맞췄다. 현장 스태프가 다가와 칼리엔에게 캔 커피 하나를 건넸다가 핏발 선 칼리엔의 하늘색과 주황색 눈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 많이 힘드시죠?”
“네, 많이 힘드네요.”
빈말로도 아니라고 하지 못할 만큼 칼리엔은 심적으로 매우 지쳐있었다. 탁, 하는 시원한 소리와 칼리엔이 캔 커피를 따서 들이켰다. 카페인이라도 들어가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런 칼리엔의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스태프가 소리를 한 층 낮춰 칼리엔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정말 잘하고 계셔요… 저번에는 차라리 위약금을 부르는 대로 줄 테니 다른 사람 찾아보라고 뛰쳐나간 분도 계셨거든요.”
와우, 선임 화끈했네. 그거 설마 내 직장 선배는 아니겠지. 적극적으로 이 일을 칼리엔에게 떠넘긴 선배를 떠올려보면 근거 없는 의심은 아니었다. 칼리엔이 푹 한숨을 쉬고 제일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런데 저 모델, 지금 일부러 비협조적으로 구는 거예요? 아니면 진짜 일을 못 하는 거예요?”
전자면 칼리엔은 당장이라도 의뢰서로 리시안의 뺨을 후려치고 나갈 의향이 있었고, 후자면… 솔직히 모르겠다. 칼리엔 역시 입사 1년 차 햇병아리였기에 신인이 일 좀 못한다고 타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화보에 들어갈 한 컷 못 뽑는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칼리엔이 미간을 문지르자 스태프가 해탈한 듯 웃음을 내비쳤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 거예요, 아마…. 그랬다면 모델님 소속사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걸요? 초기에 표정 연기를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 컨셉이나 구도를 찍을 때는 문제 없었는데, 최근 들어 비슷한 이슈로 불화가 계속 생겼거든요. 그래서 저 모델님의 촬영이라면 기피하는 분들도 꽤 생겼고…. 혹시 사진사님도 그만두시려는 건 아니죠?”
불안감이 스태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칼리엔이 엎고 나간다면 처음부터 다시 사진사를 섭외해서 시간과 비용 둘 다 있는 대로 날릴 테니, 어떤 당근을 흔들어서라도 칼리엔을 잡아보겠다는 기색이 눈에 훤했다.
칼리엔이 묶어 올린 제 푸른색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리시안이 의도적으로 훼방 놓고 있는 게 아니라면 어차피 칼리엔에게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뒷감당을 생각 안 하고 나가기엔 업계에서 칼리엔의 입지는 아직 부족했고, 포트폴리오에 추가할 경력 하나하나가 아쉬웠다. 그리고 솔직히, 저 얼굴이 아깝긴 했다.
할 수밖에 없다면 어쩌겠나.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칼리엔이 벌떡 일어서자 스태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러나 불쌍한 스태프를 안심시키는 건 나중에 해도 될 일이었다. 칼리엔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리시안 시나레타와 매니저가 동시에 칼리엔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찬바람 쌩쌩 날리는 리시안과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매니저에게 칼리엔이 통보했다.
“내일 시간 좀 내주시죠.”
* * *
이건 대단히 큰 희생이었다. 칼리엔은 리시안이 귀한 토요일을 반납하는 직장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기를 바랐다.
아니, 몰라도 괜찮았다. 유의미한 발전만 보여준다면 칼리엔은 기꺼이 일요일도 희생할 의향이 있었다.
칼리엔이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각이 되기까지 15분이 남아있었다. 칼리엔은 벽에 대충 기대 기다리려다가 눈부시게 하얀 블라우스 소매를 힐끗 보고 다시 허리를 곧추세웠다. 드라이클리닝을 줘야 하는 옷이다. 때 타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괜히 편한 셔츠와 청바지 대신 예쁘고 비싼 옷을 입고 나왔나 살짝 후회되긴 했지만, 외출복을 손수 골라주고 뿌듯해하던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면 가끔은 마음껏 멋 부리는 것도 괜찮겠지 싶었다. 칼리엔이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소매 끝에 프릴이 달린 얇은 블라우스와 오랜만에 꺼낸 새파란 롱스커트의 조합은 깔끔하면서 화사했다.
누구 동생인지 옷은 참 잘 고른다니까, 흐뭇하게 중얼거리는 칼리엔의 목소리 위로 건조한 인사가 겹쳤다.
“일찍 나왔군요.”
고개를 들자 칼리엔 앞에 오늘도 얼굴만큼은 끝내주게 아름다운 리시안 시나레타가 서 있었다. 하얀 셔츠, 검은색 슬림핏 바지에다 청회색 카디건을 걸친 모습은 누가 봐도 모델이 틀림없었다. 옷걸이 하나는 기가 막히네, 칼리엔이 감탄했다.
“패션 감각이 좋으시네요. 본인과 어울리는 옷 골라내는 일도 쉽진 않은데.”
본인 이미지에 이 정도로 신경 쓸 센스가 있다면 조금 희망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봄꽃처럼 피어나던 칼리엔의 희망은 다음 말로 산산이 조각났다.
“매니저가 어제 골라주고 갔습니다.”
그럼 그렇지. 칼리엔은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좌절하기엔 일렀다. 그리고 리시안의 발언도 끝난 게 아니었다.
“매니저가 전할 말이 있다더군요. 아직 무명이니 데이트 정도는 괜찮지만, 미래는 모르는 법이니 이목 끄는 건 삼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눈이 멀쩡하기는 한데, 인내심의 한계도 있는 사람이거든요?”
칼리엔이 정색했다. 아무리 상대가 미인일지라도 그런 오해는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폭탄 발언을 던진 후 제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리시안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얼굴로 먹고사는 직업만 아니었다면 한 대 쳤을지도 몰랐다.
시간은 금이니 갑시다. 하해와 같은 너그러움을 발휘해 칼리엔은 대화를 끊고 앞서 걸어갔다. 리시안이 칼리엔 뒤에 따라붙어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디로 가는지는 듣지 못했는데, 오늘 외출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칼리엔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학습하러 갑니다.”
봄. 봄이란 무엇인가. 봄은 연인들의 계절이다. 따스함과 설렘이 가득한, 숱한 미디어에 나오는 분위기 있잖은가. 말로 풀어서 설명하지 않아도, 아 그거 뭔지 알지, 동조하게 되는 그런 포근한 공기 말이다.
하긴, 말로 설명해서 될 일이었으면 칼리엔이 피 같은 토요일을 시내 한복판에서 리시안 시나레타와 보내고 있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소중한 주말을 전부 날리기엔 아까웠기에, 일단은 저녁 준비 전에 집에 귀가하는 게 목표였다. 칼리엔은 바로 첫 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영화관?”
“네. 참고로 영화 선택지는 없습니다. 이미 예매까지 마치고 왔거든요.”
기계에 예매번호를 입력하고 표를 뽑은 칼리엔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매점을 가리켰다. 간식을 사고 싶다면 그것까진 막지 않으니 본인 돈으로 사드시면 됩니다. 고개를 젓는 리시안에게 칼리엔은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모델인 만큼 식단관리를 철저하게 하는가 보지. 물론 그럴 필요 없는 칼리엔은 한 손에 팝콘과 다른 손에는 콜라를 들고 푹신한 영화관 의자에 안착했다. 칼리엔의 취향에서 조금 비껴간 영화 선정이었지만, 기왕 온 거 최대한 즐겨야 돈이 아깝지 않았다.
“티켓값 대신 다 보고 나서 감상을 요구할 테니 집중해서 봐주세요.”
일부러 리시안 쪽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고 눈을 광고에 고정했다. 어쩔 수 없었다. 칼리엔이 생각하기에도 이번 달에 새로 개봉한 멜로 영화와 차도남의 정석 리시안 시나레타는 안 어울리다 못해 괴이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두근두근 설레는 감정을 학습시키기엔 이만큼 훌륭한 교실이 따로 없었다. 이후 칼리엔이 입을 다물고 팝콘을 씹으며 광고만 바라보자 리시안 역시 말을 걸지 않고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만족스러웠다. 전개가 뻔하긴 했지만, 배우의 뛰어난 연기와 신경 쓴 연출 덕에 칼리엔은 잠시 옆자리의 임시 학생을 잊고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다음에 루리와 같이 와 볼까, 동생에게 추천할 생각을 하며 칼리엔은 텅 빈 팝콘 통과 콜라 컵을 분리수거하고 돌아서서 리시안을 마주했다.
숙제를 점검할 시간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더군요.”
그 정도야 충분히 예상 범위 내였으니 리시안의 첫 감상에 칼리엔은 실망하지 않았다. 원래 배움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부터 시작하는 법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라는 재촉에 리시안은 성실하게 제 의문점을 꼽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주인공들의 행동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경 쓰였습니다. 비 오는 날 작은 우산 하나를 나눠 쓰는 이유가 뭘까요. 설령 우산 하나만을 가져왔다 치더라도 편의점이라도 들러 우산을 하나 더 사면 해결되지 않습니까.”
온갖 로맨스의 클리셰라고 부를 수 있는 같은 우산 쓰기 수법이 식상하다고 욕먹는 건 들어봤어도 비효율적이라고 비판받는 건 처음 봤다. 어이가 사라져서 입만 뻐끔거리는 칼리엔에게 리시안은 자비 없었다.
“또 남자 주인공이 경영학과 학생인 설정이던데, 왜 동아리 활동은 유화를 선택한 건지 이해가 안 갑니다. 미술을 특별히 좋아하는 기색도 없었는데.”
당연히 여자 주인공이 미술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여주에게 관심 있는 게 보이지 않았나? 그 열렬한 구애를 눈치채지 못했단 말이야? 칼리엔의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지만, 불행히도 리시안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심하게 싸워서 헤어지고, 재회해서 다시 결합하는 것도 황당했습니다. 이미 서로 맞지 않는 게 증명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학습 능력이 없는 겁니다.”
내가 당신 때문에 더 황당한 것 같습니다. 학습 능력이 바닥을 치는 사람은 바로 네놈입니다. 뻐근해지는 목덜미를 세게 문지르며 칼리엔은 그만 됐다고 리시안의 감상을 잘랐다. 여기서 더 이어졌다간 종일 아껴 써야 할 인내심이 단번에 바닥나서 못 해 먹겠다고 화보 팀에 전화할 것만 같았다. 미간을 모은 채로 칼리엔은 리시안에게 손짓했다. 리시안은 칼리엔을 따라 얌전히 영화관을 나왔다.
그래. 첫술부터 배부를 순 없다고 했다. 우선 루리에게 오늘은 조금 늦게 들어갈 것 같다고 문자부터 보내고,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자. 칼리엔이 스마트폰을 켜자 화면이 친절하게 오후 1시임을 알려주었다.
정신이 이렇게나 피곤한데 고작 1시밖에 안 됐다니, 하루가 너무나도 길었다.
죽어가는 칼리엔 앞에 놓여있는 건 단순한 초코라떼가 아니었다. 이건 휘핑크림이 올라간 부활 포션이요, 설탕을 떡칠한 피로회복제였다. 음료에 들어간 초코칩을 전투적으로 씹으며 칼리엔은 리시안을 노려보았다. 리시안은 말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영화관 학습 참사 이후, 칼리엔은 리시안을 끌고 온갖 데이트 명당이란 명당은 전부 방문했다. 영상 학습이 부족했다면 현장 학습으로라도 메꾸겠다는 결심은 져가는 진한 주황빛 노을 아래 바스러지고 말았다.
작은 길거리 공연, 봄꽃이 만개한 산책로, 관광 명소로 유명한 공원. 하다못해 막판엔 노래방을 찾아 일부러 사랑 노래만 선곡하고 리시안에게 마이크를 떠넘겼다. 음과 박자는 기가 막히게 맞추면서 그렇게 건조하게 구애의 팝송을 부르는 것도 재주였다. 결국 마지막 남은 곡까지 노래방 기계가 100점을 선사하는 꼴을 보고 칼리엔은 탈진했다.
신이시여,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노래방 근처 야외 카페에 앉아 칼리엔은 단숨에 초코라떼 반 잔을 비웠다. 점심도 대충 때우고 저녁 시간이 다가와 칼리엔의 위장이 허기짐을 호소할 만도 했으나, 하루를 무의미하게 날렸다는 허무함이 커 배고픔을 느낄 정신도 없었다.
“정말,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그 어떤 것에도 설레본 적 없나요? 그게 사람이 되었든, 물건이 되었든, 상황이 되었든. 불법적인 일만 아니라면 다 괜찮으니까요.”
“모르겠습니다.”
정말 일말의 여지없는 칼 같은 답변에 칼리엔은 해탈했다. 이젠 울고 싶은 마음도 안 들었다. 그래, 내일이라도 당장 화보 팀에 전화해서 계약금 물고 담당 사진사 바꿔 달라고 해야겠다. 포기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져 칼리엔은 매장 컵을 입에 대고 웅얼거렸다.
“솔직히 여태 이 업계에서 안 잘린 게 용하네요…. 모델 일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닌가 봐요?”
“그것도 크게 생각해보진 않았습니다. 싫어하진 않습니다.”
“아, 예. 주제넘은 참견 같긴 하지만 기왕 매일 하는 일이라면 좋아하는 쪽이 행복하지 않을까 싶은데, 모델님이 알아서 잘하시겠죠.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그래도 칼리엔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마쳤다. 업계 바닥은 좁았고 리시안과 달리 칼리엔은 이 일을 오래 하고 싶었기에 평판을 신경 써서 관리해야 했다. 어디를 가든 그렇겠지만, 입소문은 무서운 법이었다. 칼리엔이 초코라떼를 마저 비우고 스마트폰을 켜서 루리에게 곧 들어가겠다고 문자를 보내는 순간, 리시안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쪽은 사진 찍는 일을 좋아하는 겁니까?”
“그럼요.”
제 일에는 그리 무덤덤하게 굴면서 칼리엔의 일엔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의외였으나, 칼리엔은 순순히 대답하며 일어섰다. 같이 일어날 기색 없이 저를 빤히 응시하는 리시안에게 무언의 압박을 느껴, 칼리엔은 어깨를 으쓱이고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렌즈를 통해 제가 보는 세상을 확실한 이미지로 남겨서 타인에게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직업이니까요.”
“사람마다 보는 시선이 그렇게 다릅니까?”
“당연하죠. 그 어떤 두 사람도 똑같은 세상을 보지는 않아요. 그게 가족이든, 연인이든, 아무리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저는 말이나 글자로 전달할 수 없는 걸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애초에 사진 촬영도 베루리아에게 제가 본 풍경을 보여주려고 시작한 취미였다. 외진 계곡에서 튀는 물줄기, 흐린 날 학교 도서관 위로 뜬 무지개, 잠시 매화 안으로 날아든 꿀벌 같은, 오래 머무르지 않는 순간들. 제 눈을 거쳐 기억에만 남게 되는 그런 순간들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어 칼리엔은 카메라를 들었다.
“…그건 조금 궁금하긴 하군요.”
예상하지 못한 협조적인 반응에 칼리엔이 눈을 깜빡이며 리시안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칼리엔은 리시안의 얼음 같은 얼굴을 스치고 간 미세한 표정 변화를 잡아챘다. 당연히 설렘은 아니었고 애틋한 감정의 무언가도 아니었으나, 칼리엔이 공공장소인 것을 잊고 외치기엔 충분했다.
“이거야! 호기심을 살려보자!”
어찌나 흥분했는지 갑작스레 말을 놓았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저 찰나를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게 제일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저를 올려다보는 리시안을 일으켜 세우며 칼리엔은 동생에게 오늘 세 번째로 문자를 보냈다. 미안, 루리야. 늦을 것 같다. 집에 가면서 맛있는 거 사갈게.
일단은 빈 배부터 채우고 리시안의 학습 커리큘럼을 새로운 방향으로 수정해야 했다. 막차 탈 각오는 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늦어질 리시안의 귀가 시간은 칼리엔의 알 바 아니었다.
* * *
보통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은 절대로 사무실에 웃으며 출근하지 않는다. 적어도 칼리엔의 회사 선배는 그렇게 굳게 믿었다. 예외는 하나, 월급날이거나, 또는 둘, 그 사람이 회사 사장이거나. 어느 쪽도 해당하지 않았기에, 칼리엔의 선배는 밝은 얼굴로 출근한 칼리엔을 보며 안쓰럽게 혀를 찼다.
우리 불쌍한 막내가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정신이 나갔구나.
“갑자기 웬 커피에요?”
“많이 힘드니?”
이건 또 무슨 동문서답이지. 칼리엔은 따듯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컵과 조심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선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칼리엔의 자료 파일철을 힐끗거리는 선배의 눈길을 보고 나서야 칼리엔은 커피의 의미를 눈치챘다. 칼리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 알고 넘긴 게 맞았군요?”
“미안해. 내가 오늘 좋은 데서 점심 살게.”
선배는 빠르게 자진 납세했고 칼리엔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사과받겠다는 의미로 커피를 마셨다.
“맛없으면 두 번 사주셔야 해요. 저 주말까지 반납해가면서 쓸만한 사진 뽑느라 정말 고생했거든요? 그래도 잘 끝나서 망정이었지.”
“잘 끝났다고? 그 리시안 시나레타랑?”
급격히 높아지려는 선배의 목소리를 칼리엔이 다급하게 입술에 검지를 대며 저지했다. 관심 끌지 마요! 저 피곤한 거 싫어요! 다행히 둘을 신경 쓰는 동료 직원은 없었다. 아침이라 다들 너무 피곤한 탓이었다. 칼리엔이 책상 칸막이 밑으로 손짓하자 선배가 매우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델 다루기 엄청 힘들다고 소문이 파다한데, 잘 마쳤다고? 계약을 잘 파기한 게 아니라?”
“그런 소문이 붙어있는 폭탄을 아무것도 모르는 제게 떠넘긴 거였다고요? 저 이거 기억해둘 거예요?”
“밥 두 번 살게. 아무튼 말해봐. ‘다가오는 봄’ 화보 촬영 건 아니었어? 그 사람 데리고 어떻게 봄 테마를 찍은 거야?”
혹시 가짜 봄 (false spring) 테마로 변경해서 찍었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눈길을 보냄과 동시에 칼리엔이 입술을 위로 끌어올렸다. 차라리 그랬으면 주말까지 희생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요.
“봄을 기다리며 설레게 만들 수 없다면,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라도 살려줘야 하지 않겠어요?”
이젠 반대로 선배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눈빛을 칼리엔에게 고정하자 칼리엔이 싱긋 웃으며 얄밉게 대꾸했다. 다음 달이면 공식 광고 나올 테니까 직접 보고 확인하세요. 선배가 기어오르는 막내에게 헤드록을 걸기 전에 칼리엔의 폰이 울렸다. 칼리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밀며 복도로 도망갔다.
그때 헤드록을 당하든 말든 전화를 씹었어야 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칼리엔은 또 후회했다.
이미 선약이 있다고 말했어야 했다. 선배가 점심을 사주겠다고 했으니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됐든 저도 리시안을 주말에 불러낸 전적이 있으니, 리시안이 매니저를 통해 요청해 온 점심은 응해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 칼리엔은 선배와의 점심을 다음으로 미루면서까지 나왔다.
대형 실수였다. 물론 책임은 칼리엔이 아니라 리시안에게 있었다.
“사양하지 말고 드세요. 음식이 입에 맞으면 좋겠군요.”
솔직히 지금 스테이크가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몰랐다. 칼리엔은 최대한의 사교성을 끌어올리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제 월급으로는 엄두도 못 낼 고급 레스토랑에 예약까지 해가며 칼리엔을 제 앞에 앉힌 사람은 리시안 시나레타가 아니었다.
“네… 그런데 엘로하임 그룹의 사장님께선 제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아드리엘 상티모니아가 고개를 들자 검은색 머리카락이 창백한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회분홍색 눈동자 안에 담긴 건조함이 누군가와 진저리칠 정도로 똑같아 칼리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가족은 닮는다더니, 이걸 이렇게 알고 싶진 않았는데. 칼리엔이 이 사태의 원인이자 아드리엘 상티모니아의 양아들인 리시안 시나레타를 티 나지 않게 노려보았다. 어쩐지 그렇게 욕먹으면서도 일감이 들어오는 게 저 얼굴뿐만 아니라 인맥의 영향도 있었구나 싶었다.
“얘기가 길어질 수 있으니 나중에 이야기하고 우선은 편하게 먹도록 하죠.”
편하기는 개뿔, 이 숨 막히는 분위기에 체할 것 같았다. 칼리엔은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약국을 들러 소화제를 살 계획을 세우며 모래를 씹는 기분으로 묵묵히 고기를 입에 넣었다.
어떻게 비웠는지도 기억 안 나는 메인 요리를 치우고 차와 디저트가 나온 후에야 아드리엘 상티모니아가 다시 칼리엔을 똑바로 응시했다. 칼리엔은 긴장하면서도 빨리 끝내고 돌아가겠다는 일념 아래 그 시선을 마주 보았다.
대체 왜 저를 부른 걸까. 혹시 토요일에 리시안을 끌고 데이트 장소를 돌아다녔다는 얘기가 사장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나? 드라마에서나 볼 줄 알았던 ‘이 돈 먹고 내 아들한테서 떨어져’를 당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기엔 너무 점잖아 보이긴 하는데. 내가 더 싫다는 의사를 어떻게 예의 바르게 전달하지? 하여튼 리시안 시나레타는 칼리엔의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화보용 사진을 미리 받아보았습니다. 리시안 특유의 분위기를 죽이지 않으면서도 향수 컨셉을 잘 살리셨더군요. 담당 사진사가 리시안을 잘 이끌어주었다는 얘기를 들어서 한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대놓고 칭찬을 들을지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칼리엔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아니요, 다 모델님이 잘 협조해주신 덕분인걸요. 당연히 진심 한 톨 안 들어간 빈말이었다. 그래도 제 뺨을 때리려 만남을 주선한 건 아닌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칼리엔이 약간 긴장을 풀고 따듯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제의하고 싶은데. 리시안의 다음 촬영도 담당 사진사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마시던 차가 기도로 넘어가는 바람에 칼리엔은 새빨개진 얼굴로 냅킨에 기침했다. 아드리엘 상티모니아와 리시안 시나레타는 칼리엔이 진정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이내 간신히 기침을 멈춘 칼리엔은 리시안에게 불타는 눈빛을 보냈다. 의미는 명확했다.
이게 무슨 개소리입니까. 말리세요.
리시안은 기가 막히게 칼리엔의 의도에 반대되는 대답을 내놓았다.
“잘 부탁하지.”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 놈이었다. 그런데 이 자식은 나와 언제부터 친해졌다고 말을 놓지? 설마 이거 토요일에 대한 복수인가? 칼리엔이 황망한 표정으로 아드리엘 상티모니아를 바라보았으나, 기적같이 발언이 철회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해진 답은 하나였다.
“……저도 본업이 있는 터라, 스케줄 확인해서 고려해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편할 때 연락해 주세요.”
번쩍이는 금박을 입힌 명함이 칼리엔의 손에 쥐어졌다. 레스토랑을 떠나며 칼리엔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그저께 화보 팀에 전화하지 않은 게 실책이었다. 골치 아픈 고민거리가 생겨버린 칼리엔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예의 바르게, 그러나 단호하게 쳐내야 한다. 리시안 시나레타의 담당으로 일하다간 제명에 못 죽는다. 철벽을 준비하는 칼리엔의 속이 답답해졌다. 역시 약국부터 가야겠다. 소화제가 절실했다.
그리고 미래에 칼리엔 제베라는 한탄한다. 그때 두통약과 청심환을 같이 사뒀어야 했다고.
Written 22-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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