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칼리 (래디에센트 크로니클)

장마 속 호흡

칼리엔 제베라 x 리시안 시나레타

누군가 말하길 절망은 물속에서 호흡하는 감각과 비슷하다 했다. 한 줌 공기를 얻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은 시련이 되며, 살아가려 발버둥 칠수록 무거운 무게가 온몸을 짓누른다. 들이키고 내쉬는 것이 더는 공기인지 눈물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 그렇게 천천히 잠겨간다. 간절히 누군가가 수면 위에서 손을 내밀어주기를 바라며.

혹은 빠르게, 고통 없이 숨이 꺼지기를 바라며.

* * *

점차 수분이 공기보다 많아지는 기분에 칼리엔은 눈을 떴다. 멍하니 사색에 잠겨있을 때는 몰랐던 장마의 소음이 거세져 있었다. 빗물이 창틀 끄트머리에 부딪혀 요란하게 튕겨 나갔다. 귓가에 울리는 소리만큼은 시원했다. 소리만큼은. 후덥지근하고 끈적한 공기가 머리 팔다리 할 것 없이 달라붙어 칼리엔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아.”

손가락이 중간까지 잘 내려가다 엉켰다. 능숙하게 한 손으로 머리카락 위쪽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 다시 빗어보려 했지만 푸른 머릿결은 뻑뻑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공기에는 수분이 이렇게 많은데 내 머리카락은 왜 기름칠 덜된 양철 같지? 입속으로 투덜대던 칼리엔은 결국 뿌연 거울 앞에 앉았다. 묵고 있는 여관이 전체적으로 낡았던지라 녹슨 거울 이곳저곳에 금이 가 있었다. 사실 방에 거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거울로 비춰보니 머리카락 꼴이 가관이었다. 어깨에 닿는 부분부터는 아예 군데군데 뭉쳐있었고, 그나마 빗겨지는 윗부분은 흡사 정전기를 맞은 듯 제각기 붕 떠 있었다. 머리카락에 곱슬기가 섞여 있는 게 죄다, 죄. 칼리엔은 다시 짜증을 꾹꾹 눌러 담으며 머리카락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또 왜 그 모양인가?”

불난 집에 기름, 아니, 엉킨 머리카락에 습기를 붓는 저 말을 하는 입을 한 대 때려주면 아주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칼리엔은 눈을 꾹 감았다 뜨며 한 차례 말을 걸러냈다. 거울을 통해 방 건너편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있는 리시안을 노려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보면 몰라서 물어? 습기 때문에 난리가 났다. 왜.”

아까 나갔다 오면서 머리 젖었을 때 제대로 말렸어야 했는데. 바로 빗질부터 할걸. 아니, 이게 왜 내 탓인가. 다 장마 탓이다. 이래서 난 남부가 싫어. 북부에는 가끔 호우는 와도 장마 따윈 없었는데. 추운 날씨엔 껴입으면 괜찮기라도 하지, 이건 뭐 다 벗을 수도 없고, 머리카락을 깡그리 밀어버릴 수도 없고.

중얼중얼, 리시안은 점차 말씨가 험악해지는 칼리엔을 응시했다. 칼리엔의 머리카락을 쳐다보는 보석 같은 눈에 순수한 의문이 깃들었다.

“날씨가 습해지면 머리카락이 저절로 엉키나?”

아니 저게 약 올리나. 칼리엔이 눈을 치켜뜨자 리시안이 자신의 말이 틀렸냐고 묻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찰랑이는 은색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쏟아지자 칼리엔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가. 머리카락이 이 습도에 저 정도로 멀쩡하면 의문을 가질 만한가. 아니, 그런데 왜 저렇게 찰랑찰랑한 건데? 타고난 직모여도 그렇지, 따로 관리라도 하는 건가? 본 적은 없는데. 역시 타고난 건가. 리시안에게 평생 시기 따위 느낄 리 없다고 생각했건만, 저 머리카락만큼은 조금 부러워졌다.

요모조모 뜯어보는 칼리엔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리시안의 얼굴은 한결같이 평온했다. 흡사 동화에 나오는 설녀가 존재했다면 리시안을 상당히 닮았겠지 싶을 정도로. 뜬금없는 방향으로 흘러간 생각에 칼리엔은 멈칫했다. 설녀, 눈이라….

갑자기 칼리엔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손끝에 하얀 안개가 서리자 그제야 리시안의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찾아왔다. 칼리엔에게 보일 리 없지만, 그의 손에서 생성되는 얼음 틈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혼돈의 기운을 감지한 탓이었다.

“능력 남발하지 마라.”

쓰면 쓸수록 혼돈의 힘을 억누르기 까다로워진다고 말했을 텐데. 차분한 리시안의 훈계에 칼리엔은 바로 능력을 거두어들였다. 조금 시원해질락 말락 하던 공기가 다시 살인적인 습도에 눅눅해졌다. 칼리엔의 확 찌푸려진 얼굴은 덤이었다.

“능력 쓰면 하루에 얼마나 쓴다고. 머리카락 푸는 동안 조금만 습도 줄여보겠다는데. 그럼 네가 내 머리 정돈해 줄 거야?”

큰 뜻 없이 뱉은 불평이었다. 사실 리시안이 대꾸하리라곤 기대도 안 했다. 그랬기에 제 머리카락 푸는 데 다시 집중하던 칼리엔은 리시안이 등 뒤로 다가와 제 손에 든 빗을 툭 건드렸을 때 화들짝 놀라 움찔했다.

“왜, 또 왜. 능력 안 쓴다고.”

“정돈 해달라고 했잖은가?”

순간 칼리엔은 리시안이 농담하는 줄 알았으나,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리시안의 표정은 몹시 진지했다. 논리상 농담이라는 고도의 기술을 리시안이 벌써 습득했을 리 없다는 결론까지 나오자 칼리엔은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지 고민에 빠졌다.

리시안이 머리카락 정돈하는 방법을 알기는 하나? 빗질까지야 크게 어렵진 않겠지만. 묶는 방법은 아나? 저 머리 땋은 걸 보니 기본적인 지식은 있는 것 같긴 한데.

맡겨도 괜찮은가, 진심으로? 고민 때문인지, 습도 때문인지, 점점 머리가 무겁게 지끈거렸다. 칼리엔은 결국 생각하기를 관뒀다. 그래, 애 하나 가르친다고 생각하고 어디까지 하나 보자. 칼리엔은 빗을 리시안에게 건네고 팔짱을 끼었다.

“그럼 어디 한번 해 봐.”

호기롭게 리시안에게 머리를 맡겼지만, 칼리엔은 영 불안했다. 당연하게도, 리시안은 머리빗보단 단도를, 머리끈보단 목을 졸라매는 사슬을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리시안이 빗질을 시작하자마자 자비 없이 확 두피가 당겨지는 느낌에 내 머리카락하고 원수졌냐고 칼리엔은 버럭 화내야 했다. 살살 하라고, 살살! 내 머리 다 빠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이후 리시안이 손에 힘을 뺐는지 잡아당기는 힘이 약해져 나름 견딜만했다.

빗질은 그렇다 치고, 머리 안 삐져나오게 묶는 방법을 알고 있기나 할까? 이미 물어보기엔 늦었다는 감에 칼리엔은 그저 말없이 거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동안 옅은 숨소리와 머리카락이 머리빗 사이로 흘러내리는 소리, 시원하게 내리는 빗물의 소음만 공간을 채웠다. 창문 커튼은 열려있었지만 들어오는 햇빛이 한 줌 없어 방은 우중충했다. 빗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멋대로 붕 뜨는 머리 가닥을 보며 칼리엔은 조금 우울해졌다.

“하여간 비가 이렇게 연달아 쏟아지면 기분이 영 별로란 말이지.”

빗질하던 손길이 잠시 멈추자 칼리엔은 거울에 비친 제 머리카락에서 리시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완벽한 머리카락 상태를 뽐내는 리시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약간 모았다.

“비와 기분에 상관관계라고 할 게 있었던가?”

공감성 능력치가 바닥을 찍고 있는 리시안에게 설명하기 참 어려운 문제였다. 비가 오면 머리도 아프고 머리카락도 산발이 돼서 싫다. 이건 리시안에게 해당 사항이 없으니 패스. 비가 오면 옷도 젖고 공기도 꿉꿉해서 기분이 나쁘다. 이 역시 리시안은 별로 개의치 않아 할 것 같았다. 비가 오면 해도 빨리 지고 시야 확보가 안 된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니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기 수월하다고 뭐가 문제냐 역질문이 날아올 것 같았다. 홀로 답답해지는 마음에 칼리엔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있어. 넌 모르겠지만 그런 게 있어. 그런데 넌 비 오는 날에 대한 안 좋은 추억도 없어?”

리시안이 말없이 다시 칼리엔의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입가가 평소보다 굳게 다물린 게 아무래도 칼리엔의 질문에 답하려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아, 있긴 하다. 그걸 안 좋은 추억이라 명명할 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뭐야, 뭔가 있나? 기대치 않은 수확에 칼리엔은 제 머리카락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조차 잊고 리시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리시안의 목소리엔 높낮이가 없어 좋은 이야기꾼이라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었지만, 칼리엔은 피어오르는 호기심에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드물게 날이 따듯해서 눈 대신 비가 내린 날이었지. 엘로하임 신전에서 시커 시험이 치러졌었다. 열댓 명 정도가 응시했던가. 그중 최종 합격자는 나밖에 없었다.”

안 좋은 기억을 말하라고 했지, 자기 자랑을 하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한쪽 눈썹을 둥글게 휘었지만 리시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빗질까지 끝내고 머리를 묶으려 손을 멈추지 않는 건 칭찬해줄 만했으나, 그 대단한 시커 시험을 한 번에 합격한 리시안도 머리 묶는 경험은 부족했는지 손길이 조금 서툴렀다. 칼리엔이 평소 묶는 방법을 얼추 따라 할 만큼 눈썰미는 있었지만, 고르지 않게 울퉁불퉁 튀어나온 곳곳이 거슬렸다.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풀어서 제대로 묶을 생각을 하며 칼리엔은 머리카락에서 아예 신경을 끄고 리시안을 재촉했다. 그게 왜 안 좋은 기억인데?

“나와 사이가 안 좋은 사제가 하나 있었다. 그 사제도 시험에 응했으나 떨어졌지. 평소에도 길을 막는 심술 정도는 부렸었다만, 그날은 눈이 뒤집혀서 무기까지 들고 공격해오더군.”

칼리엔은 어쩐지 저 사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노 조절 안 되는 행동이야 정당화할 수 없겠다만, 자신도 주기적으로 리시안의 멱살을 잡을 만큼 빈번히 열이 뻗쳤기에 왠지 남 이야기 같지 않았다. 리시안의 이야기는 빠르게 마무리 지어졌다. 가만히 서서 목숨을 내어줄 생각은 없었기에 적당히 반격했지. 결국 서로 상처 입고 싸움은 끝났다. 양쪽 다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어서 이걸 안 좋은 기억이라 보기엔 부족할 수도 있군.

“아니, 안 좋은 기억 맞잖아? 생각보다 살벌한 추억이잖아? 네 안 좋다는 기준은 대체 뭔데?”

칼리엔이 기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시안은 얇은 머리끈으로 칼리엔의 머리카락을 묶다가 삐져나온 곳을 발견했는지 다시 푸르고 머리카락을 한 손에 모았다.

“임무에선 그보다 살벌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니까. 불구가 된 것도 아니고. 신전 내부에서 싸움을 일으켰다는 죄로 따로 가벼운 징계를 받긴 했다.”

지금 징계가 문제가 아닐 텐데. 칼리엔은 머리가 다시 지끈거려 눈을 감고 미간을 문질렀다. 리시안을 만난 후로 두통이 부쩍 는 것을 오늘도 이렇게 실감했다.

“그래. 그런데 보통 사람 기준에선 그런 걸 안 좋은 기억이라고 쳐. 기억해 놔. 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비 오는 날이면 남은 흉터가 쑤신다거나 그러진 않나?”

“그런 사소한 일로 몸이 아프다면 어떤 날씨 건 평생 컨디션이 좋은 날이 없을 것 같다만.”

미묘하게 설득력 있는 논리에 칼리엔은 더 논쟁하기를 포기했다. 이만하면 리시안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의 하루 치 일과는 충분했다. 예전에 용병 길드장님이 말하길, 사람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랬다. 에르바나가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은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다고 치고. ……하나만 더 묻자. 이건 대체 뭐야?”

논쟁은 파하기로 했지만, 도로 눈을 뜨자마자 칼리엔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칼리엔은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이 묶인 부분을 가리켰다. 거울에 비친 꼴이 이런데 어떻게 못 본 척 넘어갈 수 있겠는가. 이건 뭐야? 설명해 봐.

“보다시피 리본이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 줄 아나. 칼리엔이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왜 리시안이 대뜸 머리끈 위로 왕 리본을 묶었는지, 그전에 이 리본은 어디서 났는지, 지금 이게 나한테 어울릴 거라 생각한 건지. 하다못해 무난한 하얀색이나 하늘색 리본이었으면 칼리엔은 눈감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이 자식, 색맹인가? 아니, 그냥 색에 대한 감각이 없는 건가? 칼리엔의 푸른 머리카락과 눈이 아플 정도로 새빨간 리본은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안 어울렸다. 빨간 리본과 리시안을 번갈아 쳐다보는 칼리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리본에 무슨 문제라도? 너도 나한테 종종 묶어주지 않았었나?”

그렇게 뻔뻔하게 나온다면 할 말이 없었다. 심심할 때 리시안을 앉혀두고, 옷이며 액세서리며 인형 놀이를 한 건 맞았기에, 그걸 보고 배웠다니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아니, 다시 생각해보자. 난 적어도 나름 어울리게 꾸며줬다. 이 새빨간 색을 보고도 왜 할 말이 없어. 칼리엔은 이를 바득 갈았다.

“일단 다음에 뭘 가르쳐야 할지는 잘 알 것 같다. 너는 그때까지 내가 골라주는 옷만 입어라. 적어도 사람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옷 고르는 실력은 내가 죽기 전에 어떻게든 네 머리에 쑤셔 넣어 주마.”

칼리엔이 씩씩대며 리본을 다시 푸르고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모습을 보며 리시안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어느 정도 칼리엔에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그의 단순한 듯 복잡한 생활 방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논제였다.

일단 빨간색은 안 좋아하는 것 같군.

그렇게 오늘도 리시안은 엉뚱한 지식을 머릿속에 적립했다.

* * *

누군가 말하길 감정은 빗물처럼 마음을 적신다 했다. 절망 또한 무수한 감정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떤 이의 마음에는 소나기처럼 긍정이 격하게 내렸다 가고, 어떤 이의 마음은 장마처럼 무거운 부정에 휩쓸려 침몰한다. 어떤 이의 마음은 비 한 번 맛본 적 없는 땅처럼 메말라 있다.

하지만 메마른 땅에도 비가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눈물방울처럼 작은 흔적이어도, 살아가는 이상 변화는 언젠가 찾아온다. 한두 방울이 지나가는 소나기가 되고, 점차 높게 세워진 둑은 빈틈을 보여 넘치기 마련이다.

장마 속 호흡하는 절망을 공감받기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다만, 언젠가 이 장마를 지새우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순간이 오기를 고대한다.

하나, 둘, 물줄기가 창문을 두드려 온다. 끝나지 않는 장마 전선 아래, 비는 계속 내린다.


Written 2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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