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시여, 이 기도를 들으신다면
칼리엔 제베라 x 리시안 시나레타 AU
숨조차 함부로 쉬기 버거운 어둠 속에서, 칠흑의 옷을 입은 성녀가 홀로 무릎을 꿇었다. 가까운 곳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촛불이 켜졌다. 동시에 눈앞에서 석상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하얀 대리석 얼굴에 새겨진 표정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아서인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미미하게 흔들리는 작은 촛불 사이로 들리지 못한 한숨이 아스라이 흩어졌다.
얇은 천 사이로 돌바닥의 차가운 기운이 고스란히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딱딱한 바닥에 배기는 무릎보다 그 한기가 견디기 더 어려웠기에, 성녀 칼리엔은 끝부터 파리해지는 입술을 조그맣게 떼었다.
“신의 진실 된 종, 겸허히 전능하신 분 앞에 엎드려 오늘도 은총을 구하나이다.”
어둡고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고귀한 손길로 보호해주심을 감사히 여기며 자비를 찬양하옵고…. 이제 집중하지 않아도 익숙해진 기도문은 술술 흘러나와 칼리엔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처음 이 기도실에 반강제로 앉혀졌을 땐 도저히 기도문이 기억이 나질 않아 한나절을 무릎 꿇고 앉아있어야 했다. 몇 년이 지난 기억이었지만 그때 느꼈던 공포심만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 후엔 부러 반항심에 기도문을 틀리게 외우기도 고작 몇 번이었다. 그 고집이 자신의 몸과 정신만 갉아먹는 짓이라는 걸 깨닫기엔 오래 걸리지 않았기에, 칼리엔은 이제 사뭇 순종적인 태도로 기도문을 읊고 최대한 빨리 기도실을 나서게 되었다.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어설픈 감언이설에 회유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용서의 의식이 코앞으로 닥쳐온 지금, 이런 쓸데없는 반항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신이시여. 이 기도를 들으신다면……
기도문이 끝난 후 기도실에 남겨진 묵언 속에 칼리엔의 입술이 보이지 않게 달싹였다. 창백한 촛불이 위태롭게 깜빡이다 암흑으로 꺼져 들어갔다.
Terror Adhaerens :: Kajiura Yuki
그 성당의 가장 깊은 내부에는 성녀가 살고 있다. 마을의 낮은 판잣집 사이에서 날카롭게 하늘을 향해 뻗은 성당 건축물은 십 리 밖에서 봐도 이질적이었고 또 고압적이었다. 가장 높게 솟은 중앙의 검은 첨탑에는 커다랗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나 있어, 밖을 지나가는 마을 주민과 미사를 드리러 내부에 발을 들인 이들 전부를 황홀케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당에서 사는 성녀님은 얼마나 축복을 받은 여인일까. 아아, 성녀님, 부디 오늘도 신의 부름을 받으시어, 몽매한 저희를 보살펴주시옵소서. 순수하고도, 순진하고도, 이 얼마나 무지한 수많은 기도가 성당에 쌓여왔던가.
오늘도 희미하게 들려오는 신실한 신도들의 목소리에 칼리엔은 조소를 지었다. 귀를 틀어막아도 텅 빈 기도는 환청처럼 들려왔기에, 칼리엔은 대신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머리카락을 덮은 검은색 베일이 커튼처럼 빛을 차단했다. 그 어둠은 익숙해서 안온했지만, 동시에 너무도 무거워 숨이 막혔다.
빛을 보고 싶다.
오래되어 거의 빛이 바래버린 소망, 그럼에도 숨 쉬는 횟수만큼 자주 떠올리게 되는 소원. 칼리엔은 고개를 들었다. 사방으로 막힌 차가운 검은 돌벽에는 작은 창문 하나 없었다. 누런빛을 발하는 전등이 머리 위에서 삐걱거렸다.
고작 딱딱한 침대 하나, 허튼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모서리가 둥글게 갈린 책상과 의자만 있는 이 방을 칼리엔은 늘 끔찍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곳과 아침저녁으로 들여보내지는 기도실을 제외하고, 성당에서 칼리엔이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햇빛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던가.
모든 마을 주민이 주일미사를 보는 소성당에서 받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운 광채를, 칼리엔은 이 첨탑에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려한 색채의 기억마저 시간에 흘러 퇴색될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칼리엔은 성당의 첨탑에 죄인처럼 갇혀있었다.
‘죄인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이 성당에서 성녀님보다 고귀하신 분이 누가 계실까요. 이곳의 대주교님조차 감히 성녀님에게는 고개를 숙여야 하시는데. 그저 신이 내린 성스러운 임무를 끝마치실 때까지 성녀님을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하는 일이니, 부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십시오.’
성녀 칼리엔의 질문에 드물게 ‘예’, ‘아니오’, ‘알겠습니다’ 외의 대답을 해주었던 사제였다. 그러고 보니 그 사제를 그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자신에게 해주었던 약간의 친절을 섞은 답변 때문에 사제직을 박탈당하고 성당에서 쫓겨나게 되었을까.
칼리엔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군가를 동정할 처지가 아닌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지겹도록 치 떨리는 이곳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가오는 용서의 의식을 떠올리며 칼리엔은 떨려오는 두 손을 맞잡았다. 차가워진 손을 잡아줄 이가 달리 없었다. 그대로 기도하듯 손을 이마에 붙였다. 경건한 기도보단 고독한 몸부림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신이시여, 이 기도를 들으신다면….”
매일 소리 내어 올려야 하는 기도만 아니었다면 칼리엔은 아마 자신의 목소리조차 까먹었을 터였다. 거울 하나 보지 못해 자신의 얼굴을 망각한 지 오래된 것처럼.
“…그래서 신이 답을 해주던가?”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곳이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감옥 같은 방이라는 걸 깨달았을 땐, 자신이 소리 내어 한 말인 줄 알았다. 그것조차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나선 자신이 드디어 미쳐버린 줄로 알았다. 성녀의 방에 감히 발 들여 그리 격식 없이 말을 건넬 사람은 적어도 이 성당에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천천히, 칼리엔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기름칠 되지 않은 오래된 인형처럼 뻣뻣한 움직임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고개를 돌리면 나타났던 것만큼 갑작스레 사라질까 하는 걱정이었을까. 그러나 칼리엔이 완전히 몸을 돌린 후에도 그 사람은 여전히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사람이, 맞겠지?
눈을 반쯤 가리는 검은 베일 아래로, 칼리엔은 하얀 구두를 눈에 담았다. 조금씩 시선을 올리자 칼 주름이 잡힌 하얀 바지가, 하얀 정장 재킷이, 어두운 빛 아래에서도 찬란한 은발의 머리카락이 차례대로 박혀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칼리엔이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을 때.
눈을 가리고 있는 하얀 천 아래로 창백한 얼굴의 윤곽이 드러났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음에도 대단한 미형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인 이였다. 무단으로 침입한 정체 모를 이에게 두려움을 느끼기도 전, 칼리엔은 홀린 듯 물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하얀 베일에 가려지지 않은 파리한 입술이 미약하게 비틀렸다. 그것이 어떤 감정의 표현이었는지는 몰랐다. 어쩌면 감정 한 톨 들어가지 않은, 칼리엔의 질문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의 답이 이 견고한 성당의 첨탑에서도 들리던가?”
원하던 대답은 결국 듣지 못했다.
* * *
새로운 감시자. 칼리엔은 정체불명의 하얀 사람을 그렇게 정의했다. 처음 그가 자신의 방으로 찾아왔을 땐 적잖이 당황해 그를 제대로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나타난 것처럼 홀연히 사라진 후, 칼리엔은 그 기이한 만남을 곱씹으며 수상한 점을 하나씩 집어낼 수 있었다.
첫째, 그가 자신의 방으로 출입한 경로. 성녀의 방은 첨탑에서 가장 엄격히 보호되고 감시되는 곳이었다. 성당에서 높게 대우받는 주교급의 성직자조차 함부로 칼리엔의 방에 드나들지 못했다. 유일하게 칼리엔과 독대를 요청할 수 있는 이는 대주교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대주교를 숱하게 보아왔기에, 칼리엔은 이 하얀 사람이 대주교는 아니라 한눈에 알았다. 그 전에, 성당에서 그 같은 사람을 본 적 없다고 칼리엔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는 문을 통해 당당히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한순간엔 없었고, 다음 순간에 갑자기 존재했다. 희한한 마술이라도 쓴 것처럼.
둘째, 그의 옷차림. 성당의 모든 성직자는 전부 검은 수단을 입었다. 그것은 대주교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고, 칼리엔 본인 역시 수단은 아닐지라도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신의 검은 양들 사이에 저토록 새하얀 색이라니.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에서 칼리엔은 문득 대성당의 교황은 하얀 수단을 입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교황 직속의 사람인가? 교황이 신의 은총을 받아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쓸 수 있다는 소문은 간간이 들려왔었다. 그 교황의 직속이라면, 불가사의한 방법을 써서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 수단이 아닌 정장을 입고 있었다는 점이 조금 걸렸지만, 대도시에서 왔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스스로 납득시켰다. 용서의 의식에 참관하려 일찍 도착한 모양이지.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 그래서 신이 답을 해주던가. 당황해 그때 제대로 답하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혼자라고 생각해 아무런 경계심 없이 마음속 꾹 숨겨둔 본심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랬다면 대성당에서 온 저 감시자는 곧바로 대주교에게 칼리엔의 말을 그대로 고했을 것이고, 자신은 의식의 날까지 차갑고 어두운 기도실에 갇혀 회개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을 불신하는 성녀라니, 이 얼마나 불경한 의심이고, 어리석고 안타까운 죄업이고, 한 치 오점 없이 깨끗해야 하는 신의 양에게 치명적인 낙인인가.
“그래서, 신의 답을 들은 적이 있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성녀라 불릴지라도 저 또한 한낱 하찮고 죄 많은 인간에 불과한데, 성스러운 신의 음성을 귀에 담기엔 한참 부족한 몸일 테지요.”
오늘도 찾아온 하얀 감시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애써 둘러댄 변명이 통했는지 칼리엔은 알 수 없었다. 당당히 거짓을 고하기엔 그 역시 교황처럼 거짓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을까 두려웠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더 처참하고, 비참해질 수 있는지 칼리엔은 알고 싶지 않았다.
빨리 떠나줬으면 좋겠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자니 먹은 것도 없건만 위액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감시당하는 것도 몇 년 전 성당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이었던가. 일주일에 한 번, 대주교와 독대하는 피로감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매일 갑작스럽게 칼리엔의 방에 나타나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다시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사라지는 그가 불편했다.
차라리 얼굴이라도 보였으면 조금 나으려나. 칼리엔은 눈치가 빨랐고, 사람을 판단하는 데엔 도가 텄다 자부했다. 그러나 하얀 감시자의 눈이 베일로 늘 가려져 있어서 그런지, 칼리엔은 유독 그를 읽을 수 없었다.
자신을 매일 찾아오는 저의가 무엇인지. 매일 똑같은 질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가 자신에게서 듣길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그가 다시 홀연히 떠난 후 홀로 남은 방이 유독 적적하게 느껴졌다. 신이시여, 이 기도를 들으신다면…. 입에 익어버린 단어들을 소리 없이 읊조려보는 자신의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역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고귀한 죄인의 독백은 적막하게 흩어졌다.
* * *
“주교님께서는 신의 음성의 은총을 받은 적이 있으신가요?”
칼리엔이 역으로 질문하는 날이 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하얀 감시자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칼리엔 역시 충동적으로 질문한 후 자신이 정해둔 어떤 선을 넘었다는 걸 깨달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전과는 다른 불편한 적막이 둘 사이에 머물렀다.
“내가 주교라 말한 적은 없는 것 같다만.”
아. 칼리엔이 속으로 탄식했다. 확실히, 하얀 감시자는 자신의 계급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전부 칼리엔의 추측에 불과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칼리엔은 순순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구태여 계급 같은 사소한 문제로 감시자와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에 칼리엔은 너무나도 피로했다.
“그렇다면 불러드려야 하는 호칭을 알려주시겠어요? 혹시 추기경님이신가요?”
하. 한숨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헛웃음 같기도 했다. 이쪽도 아닌가. 혼란스러운 감정은 다행히 칼리엔의 표정까지 번지지 않았다. 칼리엔은 잠자코 기다렸다. 섣부른 추측을 하기보단 그의 답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얀 감시자는 더는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칼리엔의 신경 줄이 점차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시계조차 없는 방에서 초침이 흘러가는 환청마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더는 숨 막히는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칼리엔이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대주교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칼리엔은 잠시 얼어붙었다. 살얼음 같은 공기가 재차 들려오는 두드림에 의해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칼리엔은 이내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한 명을 독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대주교와 하얀 감시자를 동시에 상대해야 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칼리엔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고, 선택지가 없다는 것 또한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저항 없이 방문을 열었다. 발목까지 오는 검은 수단을 입은, 머리가 회색으로 샌 위압적인 중년의 남성이 방안으로 들어와 칼리엔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칼리엔은 조용히 숨을 삼키고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성녀 칼리엔, 대주교님을 뵙습니다. 이곳까지 어찌하여 발걸음 하셨는지요?”
“곧 다가오는 의식 절차에 관해 말씀드리려 들렀습니다만, 누군가와 같이 계셨습니까?”
“네, 저분과….”
여전히 저 하얀 감시자를 뭐라 칭해야 할지 몰라, 칼리엔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바닥에 꽂혀있던 시선이 그에게 힐끔 가 닿았다. 어차피 칼리엔이 그를 소개하지 않아도 이 성당으로 파견된 이상, 이미 대주교와 면식이 있을 터였다.
“성녀님……. 누구를 칭하는 것인지요? 이 방에 저와 성녀님 외에 또 누가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했기에, 대주교의 당황한 어투에 칼리엔은 아연실색했다. 세차게 흔들리는 칼리엔의 시선이 대주교와 하얀 감시자 사이를 오갔다. 하얀 감시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칼리엔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대주교의 날 선 눈빛이 방안을 빠르게 훑었으나, 하얀 감시자가 서 있는 공간엔 아무도 없다는 듯 투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곳에 누군가가 있습니까? 다그치는 말에 칼리엔이 더듬더듬 변명하듯 답하려 했던 순간이었다.
“저기… 눈을 가린 하얀 정장의….”
“거기까지. 더 놔두면 귀찮은 일만 벌어질 것 같군.”
좁은 방 안에서 하얀 감시자의 발이 칼리엔과 대주교 사이로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자신의 바로 앞에 서 있음에도 대주교는 여전히 그를 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가 길고 하얀 손가락을 대주교의 눈가에 뻗자, 칼리엔은 하얀 감시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설 뻔했다. 맹세코 대주교를 존경하거나 소중히 여겨서는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하얀 감시자에게서 소름 끼치는 오한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칼리엔은 팔로 얼굴을 가렸다. 머리 위에 쓴 검은 베일이 벗겨져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느꼈지만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을 맞닥뜨린 칼리엔은 그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대주교가 들어온 이후 문은 쭉 닫혀있었으니, 사방 금 하나 없는 이곳에서 바람이 불 리 없었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을 견디며 칼리엔은 간신히 팔 사이로 대주교와 하얀 감시자를 바라보았다. 하얀 감시자는 그새 바닥에 무릎을 꿇은 대주교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오늘의 일을 기억하는 것을 허하지 않겠다. 전부 잊고 나가라.”
차분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방안을 웅웅 울렸다. 바람이 한층 거세져 칼리엔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씩 잦아들어, 다시 방안에 고요함밖에 남지 않았을 때까지, 칼리엔은 눈을 뜨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대주교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얀 감시자만이 움츠러든 칼리엔을 무감각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칼리엔의 베일처럼 그의 눈을 가리던 천 또한 날아간 것인지, 칼리엔은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하얀 감시자의 눈에는 새파란 보석이 박혀있었다.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희미한 전등 아래에서도 각도에 따라 수많은 푸른색이 반사되어 칼리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엔은 마른침을 삼켰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칼리엔은 저게 무엇인지,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악마는 이 세상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사람을 현혹한다. 그것이 때로는 남성의 모습으로, 여성의 모습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추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숨기지 못하는 단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으니.
“보석 눈동자…….”
칼리엔의 신음 같은 탄식에도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적막을 사이에 두고 성녀와 악마는 대치했다. 억 겹 같은 시간이 흐른 후,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먼저 넘은 것은 칼리엔이었다.
“당신은, 악마인가요?”
“그렇다고 한다면. 너에게 달라지는 점이 있나?”
애매하게 돌아온 답이 날카롭게 정곡을 찔러 칼리엔은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비식거리며 칼리엔은 바닥에 떨어진 베일을 주워들었다.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성녀인데 악마에게 계속 존대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겠지?”
짐짓 불손한 그 태도에도 하얀 감시자, 하얀 악마는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칼리엔은 그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와 살짝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둘의 키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아 칼리엔은 고개를 크게 꺾지 않고서도 푸른 보석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잊고 있던 하늘의 색이 저럴까, 멍하니 감상하던 칼리엔의 눈에 익숙하고 어색한 모습이 들어찼다. 고이 깎이고 다듬은 보석에 비친 것은.
묶이지 않아 가슴께까지 흘러내려 오는 짙은 푸른색의 머리카락. 빛을 보지 못해 하얗게 바랜 얼굴. 집중하느라 깊게 모인 눈썹 아래의 하늘색 눈동자. 그 속에서 일렁이는 불길한 주황색의 불길까지.
타인의 눈을 빌려, 몇 년 만에 눈에 담는 자신의 얼굴을, 칼리엔은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하얀 악마는 그런 칼리엔을 그대로 두고, 단 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래서 신이 네 기도에 답을 해주던가?”
상념에서 깨어난 칼리엔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한 답이 말릴 새도 없이 입술 틈새에서 흘러나왔다.
“글쎄. 악마는 답해줄 생각이 있으신가?”
푸른 보석 눈동자가 두어 번 깜빡였지만, 이번에도 칼리엔에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 * *
그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바랐던 시간이 어색할 만큼, 칼리엔은 이제 하얀 악마가 찾아와 머무르는 찰나를 매일 기다리게 되었다. 악마와 내통한다는 죄책감이 들었던 것은 아주 잠시였고, 오래 고립되어있던 칼리엔에게 말을 붙여주는 이는 그밖에 없었기에, 칼리엔은 악마의 속삭임마저도 기쁘게 말동무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악마라면 혹시 알려나? 신은 진짜로 존재하긴 하는 거야?”
가령 이렇게 깊게 숨겨놓은 벌 받아 마땅한 속마음을 꺼내도 그에게선 아무런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인간의 죄업이 깊어질수록 기뻐할 악마였으니까.
다만 악마의 대리석 같은 서늘한 표정엔 한 치 변화 없었다. 하얀 악마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이후로 그는 더는 베일로 자신의 눈을 가리지 않았다. 대주교의 갑작스러운 방문 이후로 손을 썼는지, 불시에 찾아오는 성당의 사람 또한 사라졌다.
대주교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칼리엔의 질문에 하얀 악마는 제대로 답할 가치도 없다는 투로, 물이 흘러가듯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었다.
그저 기억을 손보았을 뿐이다. 나를 제대로 눈에 담지도 못하는 영안이 어두운 자이니, 그 이상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지. 왜, 혹시 영구적인 해를 입혔을까 걱정이라도 했나?
무심한 어조에 칼리엔은 입가를 끌어올렸다. 날카로운 눈꼬리가 굳게 제 자리를 지켰다. 그럴 리가, 그런 사람까지 신경 쓰기엔 내 코가 석 자인데.
“그렇게 곤란한 질문이었나? 처음부터 나에게 신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나 물어본 건 그쪽이었는데 말이지.”
“곤란해지는 건 내 쪽이 아니라 너일 텐데.”
저렇게 대답을 피해 가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러나 오늘이라고 그에게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도 아니기에 칼리엔은 주눅 들지 않았다.
사실 말동무가 아니라 그저 신세 한탄할 상대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칼리엔은 그의 반응이 어떻듯 개의치 않고 조곤조곤 위험천만한 불평을 이어나갔다.
“내 입장에선 솔직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거든. 진짜 전지전능하신 신이 이곳을 굽어살피고 있다면, 과연 이딴 악한 짓을 저지르는 곳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었을까?”
도전적인 칼리엔의 말에 하얀 악마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기다란 은발이 수려한 얼굴 한쪽으로 쏠려 흐트러졌다. 그러나 그 창백한 입술 사이에서 나온 말은 아름답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인간다운 오만이지. 유한한 미물들이 그렇게 일일이 신경 쓸 만큼 가치 있을 존재라 생각한다는 점이.”
칼리엔은 잠시 발끈했지만 이내 그가 어떤 존재인지 머릿속으로 상기시키고 화를 삭였다. 하기야, 악마가 인간을 가치 있는 존재로 바라볼 거라 잠시나마 기대한 제 잘못이지. 악마가 신보다 인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면 그것대로 웃길 노릇일 테니 말이다. 칼리엔은 팔짱을 끼고 침대의 딱딱한 프레임에 등을 기댔다. 자세만큼 삐딱한 말투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대단하신 무한의 시간을 사는 악마 나리께선 그럼 어떤 이유로 누추한 이곳까지 와서, 한낱 미물인 나한테 신경을 쓰고 있을까?”
“희한한 질문을 다 하는군. 정작 네가 나를 불렀다는 자각조차 못 하는 건가?”
“…내가?”
내가 언제? 라고 따지기도 전에 하얀 악마의 시선이 떨어졌다. 파란 보석 한 쌍이 제 방문으로 향하는 걸 봐서 벌써 기도실로 자신을 데려갈 사람이 올 시각이 된 것 같았다. 칼리엔의 시선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갔다가 급히 돌아갔다. 그가 다시 사라지기 전에 의미심장한 말에 관해 더 캐물을 심산이었건만.
칼리엔의 입이 다시 열렸을 때 그 하얀 악마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어, 성녀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 * *
이제 이틀 밤밖에 남지 않으셨습니다. 용서의 의식을 위해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시고 내일 아침 기도 시간에 맞춰 기도실로 모시겠습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의 끝을 알리는 목소리는 놀랍도록 무감정했다. 그에 칼리엔은 분노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무슨 큰 영광이라도 되는 듯 감격한 표정을 짓는 대주교가 꼴도 보기 싫어, 칼리엔은 빠르게 등을 돌렸다. 탑 꼭대기에 있는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자신을 방까지 데려다준 사제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칼리엔은 방문에 기대 털썩 주저앉았다.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자 미약하게 떨리는 것이 보여 주먹을 꾹 쥐었다. 이렇게 감금되어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고작 한때.
“정작 끝이 닥쳐오니 계속 살고 싶은 걸까. 참으로 인간답고, 우습고, 처량하게도.”
자조적인 웃음은 그저 혼잣말뿐이었으니, 누군가 그에 답해 주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지극히 인간다운 본능이긴 하지.”
칼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하얀 악마가 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꼰 채, 자신을 새파란 보석 같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오늘도 지겹게 할 일이 없어서 찾아왔느냐고 타박 같은 인사를 건넸을 테지만, 지금만큼은 홀로 상념에 잠겨있고 싶었다. 그러나 하얀 악마는 마음이 복잡한 칼리엔에게 그런 여유 따위 선사하지 않았다.
“네가 성녀라 떠받들어진다 하여 다른 인간과 다를 거라 생각했다면, 그것 또한 인간다운 오만이고.”
“누군 성녀 따위 되고 싶었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비명처럼 토해낸 말은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처절했다. 칼리엔의 두 눈에 기묘한 불길이 번뜩였다. 그것이 분노에서 기인한 것인지, 억울함이 넘쳐흐른 것인지, 미처 눌러내지 못한 비참함이었는지는 칼리엔조차 알지 못했다. 그렇게 제 말을 유일하게 받아주는 이에게 악을 썼다. 그것이 사람이었든, 신이었든, 악마였든, 이틀 후 죽을 성녀에겐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누군 여기 갇혀있고 싶어서 죄수처럼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고 살겠냐고! 성서에 나오는 어린 양 마냥, 신을 위한 제물로 바쳐지고 싶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겠냐고! 타인에 의해 생명의 끝이 재단되고 싶은 이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절망의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온 절규를 들으면서도, 하얀 악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칼리엔을 제지하지도 않았기에, 칼리엔은 목이 쉬어 잠잠하게 잠겨 들어갈 때까지 깊숙이 숨겨둔 가장 어둡고 추한 마음마저 모조리 꺼낼 수 있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계속 살고 싶어. 언젠가 내 유한의 끝에 다다른다 하더라도, 나는 누군가의 고귀한 도구가 아닌, 온전히 나로서 내게 주어질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어.
그러니, 신이시여. 이 기도를 들으신다면. 당신이 진실로 존재하는지 증명해주시옵소서. 저들의 맹목적인 믿음대로, 당신이 정녕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우신 신이라면, 어찌하여 그들의 악행을 두고 보는지 말해주소서.
당신의 신도를 자처하는 이의 죄를 사하여 주지 마옵소서. 받아 마땅한 징벌을 내려주소서. 비참한 영원을 약속하는 대신 약속된 유한이란 위안을 내려주소서.
답해주소서. 이 기도를 들으신다면 답해주소서. 누구라도 좋으니, 이 기도를 들으신다면, 저에게 답해주소서.
한 번도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기도가 흘러나왔다. 매일 머릿속으로 되뇌어 이제는 숨 쉬듯 자연스러워진 기도를 울음같이 꺼내었다. 용서의 의식이란 멋들어진 명칭의 껍데기를 벗기고 난 후 남은 건 성녀의 가치 없는 죽음밖에 없었다. 제단에 쌓인 죄를 씻긴다는 명목으로, 칼리엔의 피가 그들의 차가운 손에 의해 흐를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죄 없는 성녀의 고귀한 희생으로 신의 용서를 구했다며 눈물 흘리며 감격해 하겠지.
그렇게 성녀 칼리엔이 죽은 후, 삶은 아무런 변화 없이 흘러갈 것이었다. 전의 성녀가 죽고 난 후 칼리엔이 성녀가 된 것처럼,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성녀를 뽑고, 첨탑에 가두고, 그렇게 지극히 소수만 알 비극은 반복되어 간다. 신 따위가 존재할 리 없는 잔인한 비극이.
거의 탈진해버린 칼리엔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칼리엔은 지친 얼굴로 눈만 굴려 자신의 앞에 선 하얀 악마를 올려다보았다. 한겨울의 서리 같은 무표정은 여전했으나, 푸른 보석 눈동자엔 기이한 빛이 서려 있었다.
하얀 악마가 소리 없이 한쪽 무릎을 꿇어 시야의 간격이 좁혀졌다. 기다란 하얀 손가락이 눅눅해진 칼리엔의 얼굴에 와 닿았다. 그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은 대리석과도 같아서, 칼리엔은 기겁하며 떨쳐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뺨에 잠시 머물렀던 손가락이 눈물처럼 얼굴선을 타고 내려 칼리엔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피할 길 없이 칼리엔은 아름답고도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푸른 보석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미처 마르지 못한 물방울 한 줄기가 눈에서 흘러 이슬처럼 손가락 끝에 맺혔다.
“그리하여 네 부르짖음에 답하였으니. 이젠 내 물음에 답하거라. 악마에게 닿을 만큼 네가 처절히 염원한 것이 무엇이지?”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해, 네 고귀한 영혼을 나에게 넘길 각오가 되어 있나?
검은 성녀는 하얀 악마를 말없이 마주 보다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 * *
붉은 실크 천이 깔린 제단 앞에 선 성녀의 머리 위로 스테인드글라스의 찬란한 빛이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성녀의 머리카락 위로 덮인 검은 베일 때문에 성녀의 일렁이는 눈동자에 담기는 빛은 없었다.
성녀의 뒤에는 대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무릎을 꿇고 한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가 뒤섞여 으스스하게 울려 칼리엔은 눈을 질끈 감고 싶어졌다. 그러나 칼리엔에겐 자신이 처한 이 상황에서 차마 눈 돌리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너는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곳에서 어떻게 버텼을까.
눈을 감지 못한 대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미하게 비릿한 맛이 혀에 감도는 걸 보아하니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지금 누군가 그의 얼굴을 본다면 파리하게 창백해진 얼굴에서 붉은 입술만이 이질적으로 보이겠지.
서늘해지는 마음을 한 켠에 둔 채, 칼리엔은 제단을 흐릿해지는 시야에 담았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애써 물기를 도로 삼켰다. 저 뒤에 있을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도 내보이기 싫었다. 그 어떠한 만족감도 주고 싶지 않았다.
너도 그랬을까, 베루리아.
성년도 채 맞이하지 못한 어린 여동생이 신의 계시를 받아 성녀로 발탁되었다며 성당으로 들어가던 날이 아직도 눈에 선명했다. ‘자주 찾아갈게’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베루리아는 사제들에 의해 연행되다시피 눈앞에서 사라졌다. 차라리 다행이었을까. 네게 하려고 했던 마지막 말이 거짓말이 아니게 되어서.
그 이후로 칼리엔은 베루리아를 보지 못했다. 매주 미사를 드리며 베루리아의 안부를 물었지만, 사제들은 거짓 웃음을 지으며 막연하게 성녀님은 잘 지내고 계신다고만 답했다. 애원해도, 화를 내도, 돌아오는 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3년 전, 그날이 오기까지는.
“준비되셨습니까, 성녀님?”
칼리엔은 잠시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만 뒤로 돌렸다. 기도 의식이 끝났는지 대주교는 어느덧 칼리엔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과거의 쓴 추억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는지 신경이 곤두선 와중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해 칼리엔은 스스로를 타박하려다 말았다.
내가 이제 뭘 한다 해도 바뀌는 일은 없겠지.
내가 베루리아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처럼.
그래도 갑자기 그 하얀 악마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래서 신이 답을 해주던가? 칼리엔은 아직도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차마 답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 맞았을 것이다.
나에게 답해줄 신이 있었다면, 베루리아의 죽음 역시 막아주지 않았을까?
베루리아를 데려갔을 때만큼 갑작스럽게 자신을 새로운 성녀라 칭하며 온 사제들을 칼리엔은 의심하면서도 뿌리치지 못했다. 이 길 외에 베루리아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요원했기에 칼리엔은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가 족쇄를 채웠다.
베루리아가 죽었으리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 역시 성녀가 되어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렇게 조금씩 절망은 칼리엔을 좀먹었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꺾어버렸다. 언젠가 맞이할 같은 운명을 기다리며, 칼리엔은 죽지 못해 살아갔다. 이 순간만을 두려워하고, 기다려오며.
우악스러운 힘이 칼리엔을 제단 위로 떠밀었다. 엎드리다시피 제단 위로 푸른 머리칼과 검은 베일이 쏟아졌다. 검붉은 마호가니 색 제단에 물방울 하나만큼의 얼룩이 졌다. 칼리엔은 눈을 감았다. 이곳에서 눈물 하나조차 함부로 흘리기 아까웠다. 긴 기다림 끝에 자신에게 도래한 결말을 기다렸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겠지. 나는 아직 네 답을 기다리고 있다.”
소름 끼치는 적막을 깨뜨린 예상치 못했던 음성에 칼리엔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제단 건너편에 선 하얀 악마의 차가운 얼굴이 칼리엔을 무감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왜, 어떻게 이곳에?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악마의 손길보다 차가운 날붙이의 감촉이 등 뒤를 날카롭게 찔러오자 타오른 재처럼 흩어졌다.
지금, 이 순간 왜, 어떻게가 그리 중요했을까. 이것이 정녕 내 마지막이라면, 후회하지 않기 위해, 들어주는 이가 악마밖에 없다 할지라도, 내가 남기고 싶은 유언은….
칼리엔은 환하게 웃었다. 날것의 쓰디쓴 상처를 눈에 머금은 채로 눈가를 휘어 웃었다. 피가 돌아 붉어진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나는… 염원해. 죄지은 자들에게 그에 맞는 징벌이 내려지기를 원해. 죄 없는 이들의 피를 흘린 자들의 피가 똑같이 흐르기를 소원해. 나는 결코 결백한 성녀로 죽지 않을 거야. 그에 따른 대가는 무엇이든 치를게.”
영혼이든 뭐든 가져가도 좋아. 내게 남은 가치가 그것뿐이라면 전부 네 손에 넘겨줄게. 그러니 답하소서. 당신이 악마이든 뭐든, 내 부름에 답하소서. 들려오는 당신의 음성이, 견고한 이곳에 갇힌 내 귀에 닿기를.
네 부름에 답하러 왔다. 길고 하얀 손이 칼리엔의 눈앞에 환영처럼 머물렀다. 세상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천천히, 칼리엔이 손을 뻗었다. 하얀 손 둘이 맞닿았다. 마치 촛불이 바람에 꺼진 것처럼, 성당이 이질적인 어둠에 휩싸였다. 겨울바람같이 서늘한 속삭임만이 칼리엔의 곁에 머물렀다.
“응답하지 않는 네 신을 저버리고, 내 손을 잡아. 그리고 증명해 봐. 너의 유한한 생명이 나의 영원에서 가질 찰나의 가치를.”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숨을 거두려던 대주교도, 자신의 희생을 기다려온 사제들도, 저를 집어삼키려던 제단도, 공허하게 반짝이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도. 칼리엔은 눈을 감았다. 다시금 어둠 속에서, 성녀였던 이가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그리하여, 신이시여. 이 기도를 들으신다면. 그것이 악마라 할지라도, 나는 내 가장 비참한 곳에서 손을 내밀어준 이를 따르겠나이다. 당신을 내버린 이의 죄를 사하여 주지 마옵소서. 받아 마땅한 징벌을 내려주소서.
그리고 타락한 이 길의 끝에서, 내 소중한 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 비참한 영원을 약속하는 대신 약속된 유한이란 위안을 내려주소서.
Written 2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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