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y
그 이름은 친구
"당신은 글을 써야 돼."
"제임스…."
20분 가량을 말다툼만 했다. 칼리지 졸업을 앞둔 메리는 이제 절필하고, 직장을 찾을 것이라 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제임스는 차분히 마음을 굳힌 메리의 앞을 서성이며 절박한 투로, 그럼에도 특유의 정중함을 잃지 않은 채 졸라댔다. '글을 써, 메리 고드윈!' 떼를 부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메리도 제임스가 본인의 글을 얼마나 믿어주었고, 응원해줬고, 지원해줬는지를 알기에 '남의 일'이라며 차갑게 잘라낼 수가 없었다.
"말했잖아, 처음부터 글은 대학 동안만 쓰기로 했다고. 내가 정해둔 기간 동안 글을 완성하지 못한 것도 내 자질이야. 당신이 날 얼마나 응원해줬는지도 알아, 하지만 결정은 결국 내 몫이야. 제임스, 내 몫이라고."
"하지만…. 당신은 알잖아, 내가 당신의 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글을 쓸 때 제일 행복하잖아. 행복한 일을 해. 제발, 메리…."
"행복한 일이면 해야할 일도 내팽겨칠 수 있어?"
"… …. 그건 아니지만, 직업을 당장 가져야하는 것도 아니잖아. 가진다 한들, 일하면서 글을 쓸 수도 있는 거고. 왜 꼭 절필을 해야 해? 날 봐서라도 써줄 순 없어?"
"제임스…."
타이르듯이 말하면 제임스는 멈춰서선 메리를 내려다본다. 본인 일도 아니면서 더 슬픈 얼굴로 본다. 남의 일에 이토록 본인의 팔 다리가 잘려나간 양 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메리는 독특했던 첫만남-잃어버린 본인의 리포트를 찾아준 것은 고마웠지만, 원고를 완성한다는 약속을 해야한다니? 그런 건 본인에게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잖아.-을 다시 기억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남의 행복. 남의 즐거움. 남의 안정. 그가 본인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 이유는 가질 자격이 없어서일까,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손에 쥐었기 때문일까. 메리는 이따금씩 그것이 궁금했다.
"난 당신처럼 하고싶은 모든 걸 누리며 살 수는 없어. 난 돈도 벌어야하고, 나중엔 부모님도 부양해야 돼. 글은 일을 하면서도 쓸 수 있겠지, 그렇지만 회사 다니는 작가는 금방 글 좀 쓰는 회사원이 될 뿐이야. 당신은 알잖아?"
"… …."
그에게 이토록 선을 그어본 적이 있었나. 그의 표정은 자주 봐왔지만 깊이가 다른 애수. 꼭 '꿈을 접어라' 한 마디 들은 아이처럼 발걸음을 멈췄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메리에게 다가선다. 그리곤 카우치에 앉은 메리의 발치로 내려 앉는다. 손을 기도하듯 모아쥐고, 그것을 그의 입가로 가져간다. 손가락 끝에 입술을 대며 눈을 맞춘다. 어떤 빛도 반사하지 않는 검은 눈. 그 안으로 들어간 빛은 도망쳐나오지 못한다.
"메리, 나랑 결혼해."
"뭐?"
"나랑 결혼해, 메리."
메리가 할 말을 찾을 동안 제임스는 필사적으로 제 논리를 펼쳤다. '당신에겐 돈이 필요하고, 나에겐 당신을 도울 기회가 필요하다. 그러니 결혼하자. 나의 돈은 당신의 것이 되고, 난 당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할 자리를 얻으니 충분하다. 그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당신의 부모님은 흡족할 것이고, 당신은 행복할 것이며, 난….'
"당신을 도울 수 있어 행복할 거야."
"하지만 제임스…."
메리는 혼란스러웠다. 가장 친한 친구,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반자이자 파트너. 그를 그리 생각해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친우에 가깝지 연인은 아니었기에. 그렇다고 이제껏 제임스가 본인에게 로맨틱한 관심을 보인 적도 없었고, 오히려 그가 일평생 연애같은 걸 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말마따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소리이지 않은가. '당신에게 내 돈과 지위를 주고 싶어. 그러니 나와 결혼해.'라니.
"당신을 사랑해. 그러나 사랑하지 않아. 당신을 존경하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당신을, 꿈꾸게 하고 싶어. 난 단지 당신을…."
메리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놓을 수 없었다. 그의 절박함을 이해하는 친구로서, 그의 제일 단단한 부분을 깨버릴 수는 없었다. 그의 배려와 응원에 몇 번이고 다시 글을 쓸 수 있었고, 부모님의 날카로운 말도 견딜 수 있었다. 연인보다 단단한 친구. 사랑보다 의지가 되는 우정. 제임스와 메리, 그 둘의 관계는 어쩌면 처음부터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름이 저비스 펜들턴이라도 되었다면 제 대답이 좀 더 로맨틱했겠지만, 메리는 대학을 곧 졸업할 나이의 성인이었고 그에게 때늦은 연심을 품기엔 이미 든든한 친구였다. 메리는 제임스의 손을 잡고 그의 뒷말을 이었다.
"…돕고 싶은 거지."
제임스는 도움을 주면서도 항상 부탁하는 태도를 보였다. 언제나의 저자세, 의중을 살피는 눈빛, 불안해 가만 있지 못하는 손. 메리는 그의 배려가 좋았다. 저를 정중하게 대했고, 때때로 웃음짓게도 했다. 글을 읽는 취향은 닮았지만 노래 취향은 영 딴판인 점도 좋았다. 제일 좋아하는 곡을 들을 땐 표정이 우수에 차는 것도 좋았다. 그 이야기, 그의 마음 속 지하실에 가둬둔 옛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어쩐지 제 마음까지 아팠고, '네가 원한다면, 나중엔 내가 널 도울 수 있을 때 도울게' 같은 그와 닮은 말을 할 수도 있었다. 그가 바라는 일. 그가 해냈을 때 행복한 일은 이것이다. '자신을 돕도록 허락하는 것'. 메리는 대답한다.
"그래도 결혼은 안 돼."
"… …."
"그러니 2년 뒤에, 다시 청혼하도록 해. 그래야 내 부모님도 내가 부잣집에 팔려간단 생각은 안 하시지."
제 말이 끝나고도 잠시간 그는 슬픈 표정을 계속했다. 가만 앉아 그가 본인이 내민 도움의 손을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세워 앉았고, 마침내 메리를 끌어안았다. 두근거리는 진동이 몸과 몸이 닿은 곳에서 느껴진다. 잘게 떨리는 양 팔, 목덜미에 기대오는 머리칼. 고작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에 이리 기뻐하는 그를 거절할 수 있을 리가. 메리는 어린 아이에게 하듯 가만 등을 도닥였다. 울멍이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당신은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가 될 거야, 내가 보증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메리…."
메리는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결핍, 구멍, 어두운 어떤 부분까지도. 그렇기에 친구였고, 그렇기에 친구의 도움-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차피 메리 본인도 결혼 생각은 없었고, 혹 마음이 바뀐다 한들 2년이나 남은 것을. 거절은 그때해도 늦지 않고, 그는 본인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할 것이었다. 언제나 '돕게 해줘' 한 마디가 그의 말버릇이었기에. 그러니 메리 고드윈은 눈을 내리감고 대답한다.
"…그래, 고마워."
결혼식 피로연까지 마치고, 저택 2층에 자리한 침실로 걸음했다. '약속'했던 날로부터 2년 반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시간을 보내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목표, 내지는 완벽한 실패에 관하여. 그의 실패, 그가 그리는 이야기에 본인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조력자'로서, 필수였다.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것이 등장인물의 몫이다. 본인의 몫을 해내지 못하는 등장인물은 '잘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다. 그러니 이 '제임스'라는 인물의 고유한 틀을 깨는 것은 '약혼녀', 이제는 '아내'의 역할을 받은 메리 고드윈의 몫이 아니었다. 메리는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니까. 그의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를 응원하는 것.
그러니 메리는 제임스를 바라볼 때 이따금 그런 생각을 했다. 당신이 만일 내 글이 아닌 나를 사랑했다면, 그 어두움을 이겨내고, 복수나 실패따위 하지 않아도 괜찮단 한 마디를 건넬 수 있는 역할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 그러나 그 가능성을 오래도록 생각하진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이 독자를 의식한단 메타 연출의 경우 이미 한물 지났고, 그런 서술 트릭은 단 한 번 쓰일 때 즐거운 유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메리 버틀러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언젠간 그의 재단을 본인이 이어받을 것이고, 버틀러란 이름을 가진 자는 더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도록 도울 것이었다. 갈취와 약탈, 탐욕, 허영, 오만, 무례는 미래로 대물림되지 않을 것이다. '아내'란 역할을 받은 인물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것에 집중할 것이다.
"메리, 오늘은 당신하고 같이 자고 싶어."
잠옷마저도 새까만 파자마를 입은 제임스가 말했다. 이제 침대 옆으론 손잡이가 은으로 세공된 지팡이가 함께한다. 마찬가지로 검붉은 잠옷을 입은 메리는 고갤 끄덕였다. 바스락거리는 침구 사이로 몸을 밀어넣고, 새카만 그에게 양 팔을 벌려준다. 당신의 새카만 호의를 이제껏 받아준 이가 없었다면, 당신의 사랑하는 이, 당신의 친구가 받아주겠다. 당신의 자칫 두려운 이타심를 받아주겠다. 재를 묻히더라도 당신이란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어주겠다 약속한 나는 당신의….
"그래, 난 당신의 친구니까."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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