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협화음 합주곡
칼리엔 제베라 x 리시안 시나레타 AU
Beethoven Sonata No.17 Tempest 3rd Movement
그런 날이 있다. 유독 일이 꼬이고, 조율 안 된 피아노 음처럼 모든 게 어긋나고, 기분전환으로 산 커피마저 잘못 나와 인생보다 배로 쓰게 느껴지는. 정말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그런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공부고 약속이고 중요한 일정이고 다 팽개치고, 따듯한 코코아나 타서 아늑한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가고 싶어지는 것이 만인의 마음이렷다.
화창한 목요일 오후 5시 40분. 엘로하임 음악대학교의 비어있는 연습실 안. 한창 낡아버린 졸업 학년 칼리엔 제베라는 매우 집에 가고 싶었다.
아침부터 알람이 울리지 않아 1교시 강의에 지각할 뻔했고, 덕분에 아침을 걸러 오전 내내 강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기쁘게 교내식당으로 달려갔더니, 무슨 사고가 있었는지 문을 닫아버려 처량하게 편의점에서 산 빵 하나로 점심을 때워야 했다. 우울하게 들어간 오후 강의에서는 다음 주까지 내야 하는 과제 폭탄을 맞아버렸다. 이번 주에 내야 하는 레포트를 마무리하고 주말에 놀 계획이 전부 수포가 되었다. 빈 연습실에서 그 레포트를 쓰려고 사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원액을 실수로 쏟아부은 건지 평소보다 세 배는 써서, 칼리엔은 얼굴을 왈칵 찡그렸다.
“과제 다 죽었으면…….”
어느 정도 순화된 푸념에는 칼리엔이 자신의 수업만 듣는 줄 아는 교수에 대한 원망(과 미약한 살의),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을 이 과제 지옥에서 꺼내줬으면 하는 부질없는 소망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기적같이 학교가 폭삭 가라앉거나 교수가 과제를 취소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기에, 칼리엔은 우는소리를 하면서도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레포트 마감일까지 딱 이틀이 남아있었고, 노트북의 창은 여전히 백지였다.
제목을 쓰는데 3분, 자신의 이름과 교수, 수업 명을 쓰는데 다시 1분. 그러고 나니 쓸 게 사라졌다. 칼리엔은 머리를 부여잡고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내가 피아노 치려고 음대에 들어왔지, 레포트 쓰려고 들어왔나. 연주 발표를 이렇게 시켰으면 또 몰라, 왜 학교 다닌 4년간 연주 횟수보다 레포트 쓴 횟수가 더 많은 것 같지. 얼음이 다 녹아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생명처럼 빨고 있던 칼리엔의 귀에 청량한 기계음이 울렸다. 칼리엔이 반색하며 스마트폰을 낚아챘다. 다 미래의 업보가 되어 돌아오겠지만, 지금은 레포트 작성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룰 수 있는 핑곗거리라면 두 팔 벌려 환영이었다.
[ 칼리엔, 오늘 저녁 집에서 먹어? ]
여동생인 베루리아에게서 온 문자에 칼리엔은 잠시 갈등했다. 오늘 그냥 집에 갈까? 어차피 여기 죽치고 있어 봐야 집중도 안 되고, 레포트라면 굳이 빈 연습실이 아니라 집에서 써도 괜찮지 않나? ‘응’이라고 문자를 보내려는 순간 메시지 하나가 추가로 화면에 떴다.
[ 아, 연습하고 있으면 이거 못 보려나? 피아노 연습 언제 끝나? ]
엥? 칼리엔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웬 연습? 전공 특성상 연습은 매일 일과나 다름없긴 했지만 베루리아가 말하는 연습은 왠지 그 뜻으로 쓴 게 아닌 것 같았다. 칼리엔은 의문을 그대로 담아 답장을 보냈다.
[ 뭔 연습? 오늘 과제 때문에 연습은 좀 미룰까 했는데 ]
[ ? 칼리엔, 내일 연주 발표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 까다로운 교수님 수업이라서 연습하려고 일주일 내내 연습실 잡아놓은 거라며? ]
칼리엔은 베루리아의 메시지를 한 번 보고, 시계를 한 번 보고, 다시 메시지를, 그리고 아직 텅 비어있는 레포트 문서를 봤다. 절박한 비명이 작은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이럴 수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속으로 오만가지 욕을 퍼부으며 칼리엔은 노트북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문서 저장도 안 했지만, 어차피 제목과 이름밖에 쓴 게 없으니 딱히 상관은 없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걸 끄는 게 우선이었다.
죽을상을 지으며 칼리엔은 연습실의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 뚜껑을 열었다. 고맙다 루리야, 너 아니었으면 내일 교수님 앞에서 공개 처형당할뻔했다. 문자로 대충 감사 인사를 보내며 칼리엔은 손가락을 쭉 폈다. 노트북 타자만 몇 번 두들기다 말았더니 손가락이 굳어있었다.
워밍업 곡으로 뭘 치지. 스케일을 한두 번 오르내리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왜 교수들은 과제를 마치 짠 듯이 단기간에 몰아서 주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튄 질문이었으나 저녁 시간이 됐음에도 집에 가지 못한 칼리엔의 분노가 그 의문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아, 열 받는다. 그래, 오늘은 그거로 워밍업하자. 워밍업 곡 수준은 아니지만 좀 틀려도 괜찮으니 당장 건반에 화풀이할 곡이 필요하다.
그것이 다소 울적해진 목요일 오후 6시, 빈 연습실에 분노의 베토벤 소나타 템페스트 3악장이 울려 퍼지게 된 사건의 경위였다.
내가, 이러려고, 음대에, 들어왔나요. 정말, 폭풍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나, 무사히, 졸업할 수는, 있나요. 한마디 한마디를 내려치며 칼리엔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비교적 차분하게 끝나는 마무리도 악보를 싸그리 무시하고 힘있게 내려치고 나니 스트레스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완벽함과 상당히 먼, 분노만 듬뿍 들어간 연주였지만 칼리엔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연습에 불과했고, 인생 전부를 완벽하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자, 그럼 과제 곡이 뭐였더라. 악보를 뒤적이려 고개를 튼 칼리엔의 눈에 문가에 서 있는 인영이 들어왔다. 놀라서 순간 다시 비명을 지를뻔했지만, 이곳이 학교라는 것을 상기하고 간신히 목 안쪽으로 참아 눌렀다. 그래, 이 바쁜 시기에 나만 늦게까지 학교에 갇혀있지는 않겠지. 저자도 과제 지옥에 갇힌 불쌍한 영혼의 동지이겠거니. 그런데 이 연습실로 찾아온 이유가 뭐지? 너무 시끄럽게 쳤나? 칼리엔은 방문객을 자세히 살펴보려 아예 몸을 틀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은색의 머리카락에, 눈은 희한하게 한 가지 색으로 통일할 수 없는 푸른색이었다. 옷은 죄다 검은색이라 무난하게 사람들 틈에 묻힐만했으나, 저 얼굴은 도저히 어디를 가도 그냥 지나칠 만한 미모가 아니었다. 이런 미인이 학교에 있었나? 적어도 같은 전공이었으면 한 번쯤은 봤을 만한데, 피아노 전공은 아니겠지. 실용음악과인가? 아니면 작곡과? 성악?
“피아노 전공인가?”
칼리엔이 방문객 내지는 불청객을 뜯어보며 고민하던 와중 그가 물었다.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칼리엔은 그가 남자인 것을 깨달았다. 얼굴만 보고 착각할 뻔했다. 제 정체성도 정체성이었거니와, 칼리엔은 편견을 가지진 않았다만, 보통 저 정도 장발을 가진 남학생은 흔치 않았기에 실수할 뻔했다. 그런데 전공은 대체 왜 물어보는 거지. 어차피 피아노 앞에서 분노의 연주를 하다가 들킨 꼴이 영락없는 고통받는 피아노 전공생이었기에 칼리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학년?”
“4학년. 왜 물어보는데?”
초면인데 말이 짧다? 칼리엔은 가늘어진 눈으로 자신의 신상을 터는 얼굴만 예쁘고 예의는 밥 말아 먹은 불청객을 응시했다. 조금 시끄럽게 굴었다 해도 주의만 주고 가면 될 터인데, 어디 신고하려 저러는 건가. 연습 소음에 주의하겠다 말하고 저 불청객을 쫓아내려던 때, 그가 다시 입을 열고, 전혀 예상치 못한 제의를 꺼냈다.
“잘됐군. 너, 나와 같이 졸업 공연에서 합동연주 하자.”
* *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에르바나의 흥미 다분한 질문에 칼리엔은 마시고 있던 커피 컵을 테이블 위로 쾅 내려놓았다. 짙은 갈색 액체가 넘치듯 출렁거렸으나 다행히 테이블 위에 엎질러지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어떻게 됐기는. 당연히 거절했지.”
딱 잘라 말하는 칼리엔을 보며 에르바나는 등을 의자에 기댔다. 흐음, 그래? 좀 아쉽네.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진담이 반 섞인 것을 알아챈 칼리엔이 자신의 친구를 째려보았다. 내 고통을 즐거운 구경거리로 삼다니, 그러고도 내 친구냐? 원망 섞인 칼리엔의 눈빛에 에르바나는 빙긋 웃으면서 바닥을 치는 제 친구의 기분을 달래줄 겸 낱개로 포장된 초콜릿 두 개를 그에게 밀어주었다. 칼리엔은 사양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화를 내고 있자니 당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너 걔가 누군지 정말 몰라?”
여기서 에르바나가 지칭하는 ‘걔’가 칼리엔이 그날 마주한 불청객임을 칼리엔은 모르지 않았다. 칼리엔이 뚱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걔가 누군지 알아야 해? 소심한 반항에 에르바나는 씩 웃으며 칼리엔의 커피를 빼앗아 마시고 입맛을 다셨다. 글쎄, 우리 학교에서 리시안 시나레타를 모르면 간첩 아닐까?
에르바나의 말대로 칼리엔은 그 불청객, 리시안 시나레타가 누군지 모르진 않았다. 칼리엔은 리시안을 처음 만난 일주일 전을 회상했다. 그래, 그때는 그가 그 유명한 ‘리시안 시나레타’인 줄은 몰랐지. 예의 없는 또라이를 재수 없게 만난 거라고 생각해 연습도 관두고 그대로 짐을 싸서 뛰쳐나온 것까진 좋았다 (물론 덕분에 다음날 연주 발표를 말아먹은 것까진 좋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지, 리시안 시나레타가 그렇게 끈질긴 또라이일 줄은. 칼리엔은 한숨을 쉬며 에르바나의 손에서 제 커피를 다시 빼앗아 원샷을 때렸다. 리시안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피아노 전공에다 졸업 학년이라는 사실 뿐이었기에, 칼리엔은 그 이후로 그를 다시 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이 학교가 작은 편도 아니고, 전공마저 다른데 그를 학교 내부에서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리시안의 집착에 무지했던, 그런 속 편한 가정을 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떻게 자신의 신상을 캔 건지, 수업마다 쫓아다니며 앵무새처럼 똑같은 제안을 반복하니 칼리엔은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이름은 둘째치고 어떻게 자신마저 종종 헷갈리는 강의 스케줄을 꿰고 있는지 반쯤은 물어보고 싶었다 (다른 반은 그를 영원히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칼리엔은 과 수석도 아니었고, 달리 특출난 학생은 아니었던지라 더욱더 의아했다.
물론 그것 역시 과거 이야기였고, 현재 칼리엔은 나름 학교 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칼리엔은 그 사실이 굉장히 반갑지 않았다. 사람들이 칼리엔은 모를지언정, 리시안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는 한둘이 아니었기에 일어난 참사였다. 자신과 관련도 없는 강의실을 찾아와 한결같이 칼리엔만을 찾아대니, 지루한 과제에 찌든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쟤 리시안 시나레타 아니야? 아 그 바이올린 천재라는? 걔가 왜 피아노 실기 강의실에 와있대? 칼리엔 제베라 찾으러 왔다는데. 그게 누구야? 어… 누구더라, 저기 파란 머리. 에르바나 친구 있잖아. 아하, 근데 왜 찾아온 거래? 몰라, 그런데 벌써 사흘째 계속 오고 있다는데? 뭐야 뭐야, 나 촉이 왔어. 혹시 그 천하의 리시안 시나레타가 쟤한테 한눈에 반해서 저러고 있는 거 아냐? 이러쿵저러쿵.
아, 진짜 젠장할. 칼리엔은 테이블 위로 주먹을 꾹 쥐었다. 칼리엔과 에르바나가 앉아있는 교내식당에서도 그를 힐끔거리는 학생이 꽤 있었다. 쟤 걔 아니야? 리시안 시나레타의 고백을 받고 찬 그? 이쯤 되니 칼리엔은 와전되는 소문에 남아있던 어이 마저 사라졌다. 아주 소설을 써라 써. 정말, 리시안 시나레타의 예쁘고도 싸가지 없는 얼굴을 몰랐던 평온한 일상이 눈물 나게 그리웠다.
“그 정도 실력파라면 파트너가 누가 됐든지 졸업 공연은 문제없을 거 아냐! 졸업도 벌써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거냐고!”
절규하는 칼리엔을 딱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에르바나가 칼리엔의 어깨를 따듯하게 토닥였다.
“그렇게 생기지 않아서 상당히 저돌적인 면이 있었구나, 얼음 공주님.”
에르바나가 지칭하는 ‘얼음 공주’가 누굴 가리키는지 칼리엔이 알아듣는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괴상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칼리엔이 되물었다. ‘얼음 공주’?
“유치하게 무슨 별명이 그래? 아니, 그보다 왜 얼음 공주야?”
“차갑고 도도한데 예쁘긴 엄청 예쁘니까?”
“아하.”
리시안 시나레타가 미치도록 싫기는 했지만, 칼리엔조차 에르바나의 발언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미인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지라도 리시안은 미모는 취향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칼리엔은 신이 리시안을 만들며 외모에 모든 힘을 쏟아붓고 성격은 발로 대충 때운 게 틀림없다는 설을 밀고 있었다. 전투적으로 초콜릿을 씹어먹는 칼리엔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에르바나는 목소리를 죽여 소곤거렸다.
“근데 진짜 아니야? 아니, 다른 말은 아니고. 혹시 흑심을 가지고 너 계속 쫓아다니는 거 아니냐고. 졸업 공연 가지고 그러기엔 집착이 새삼 남달라서.”
“나도 그 생각 안 해본 게 아닌데, 걔 눈을 본다면 너도 아니라는 걸 확신할걸? 아주 담백하게 그지없이 누군가한테 집착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할지는 몰랐는데 그 개… 걔가 그걸 해낸다니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은 간신히 자제했다. 그래도 칼리엔은 나름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했기에,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에르바나도 그런 칼리엔의 말을 믿었기에 달리 토 달지는 않았다.
“이렇게 된 거 그냥 공연 한 번 같이 해주고 손 터는 건 어때? 그 리시안 시나레타니까 딱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 같은데. 왜, 초등학생 때부터 나가는 콩쿠르마다 대상을 타서 바이올린 신동이라고 불렸었잖아? 실력은 보장될 거 아냐?”
“싫어. 걘 인성이 보장 안 돼. 한 번 잘못 엮였다간 내 인생이 피곤해질 거라고 감이 말해주고 있어.”
그냥 확 학교 측에 신고 넣어버릴까. 내 일상을 위협하는 스토커 자식이 있다고. 칼리엔의 한탄에 에르바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소용없을걸? 리시안 시나레타가 현악과의 자랑이라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걔 학교 이사 아들이래. 아드리엘 상티모니아 이사님 있잖아.
“성이 다른데?”
“이사님 결혼 전 성이 시나레타라던데.”
에이씨, 이 더러운 세상. 칼리엔이 아파오는 머리를 문지르기 시작하자 에르바나는 진심이 듬뿍 담긴 조언을 해주었다. 연 있는 사람 건드리는 거 추천하지 않아, 피곤해지는 건 빽 없는 너일 테니까.
“그런데 말이야, 칼리엔.”
“또 왜.”
“얼음 공주님 등장하셨다. 너 튀어야 하지 않을까?”
칼리엔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에르바나의 말대로 교내식당에 막 들어선 리시안 시나레타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게 누군가를 찾고 있는 모양새였고, 그 누군가가 자신일 거라 칼리엔은 완성된 제 다음 과제를 걸 수 있었다. 다행히 아직 칼리엔을 발견하지 못한 듯싶었기에 칼리엔은 빠르게 가방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땡큐, 에르바나. 난 이만 간다.”
“화이팅~ 나중에 커피 한잔 사줘.”
짧은 인사를 끝으로 칼리엔은 반대편에 있는 출입구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 * *
하지만 도망 다니는 것도 결국 하루 이틀이었다. 리시안은 여전히 칼리엔의 강의를 하루도 안 빠지고 출석하다시피 하고 있었고, 그의 집착보다 칼리엔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이 먼저였다.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기들은 물론이요, 학교 내에서 어디를 가나 달갑지 않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받는 것도 짜증이 났다.
리시안 시나레타를 확실히 끊어내야 할 이유가 차곡차곡 쌓이던 중, 설상가상 베루리아에게 스토커 아닌 스토커가 붙었다는 것마저 들키고 말았다. 미쳤어? 그걸 그냥 뒀어? 기겁하며 급기야 자신이 그를 만나서 따끔하게 한마디 하겠다는 걸 말리느라 칼리엔은 진땀을 빼야 했다.
자신이 적당히 알아서 떼어내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서야 칼리엔은 베루리아를 다시 앉힐 수 있었다.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잖아, 루리야, 나 못 믿어?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아야 했던 지난밤을 떠올리며 칼리엔은 강의실에 앉아 이를 갈았다.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낸다. 리시안 시나레타가 오늘부터 기적같이 오지 않는다면 최고의 결말이겠지만, 그럴 확률은 제로에 수렴할 거라 확신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저 망할….”
강의가 끝나기도 전에 문밖으로 보이는 은색 머리카락에 혈압이 치솟았지만, 교수님 앞에서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려 노력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칼리엔은 교수님의 입에서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노트와 필기구를 가방 안에 던져넣고 강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강의실 밖에서 기다리던 리시안이 입을 채 열기도 전에 칼리엔이 무서운 기세로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넌,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
그 해괴한 광경이 강의가 끝나고 몰려나오는 학생들의 시선을 단번에 끈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칼리엔은 그 점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한계에 몰려있었다. 이렇게는 피 말려 못 살겠다. 오늘은 나 살고 너 죽는 거다. 마치 죄인을 연행하듯 자신보다 약간 큰 리시안을 질질 끌고 가는 칼리엔의 모습에 그 누구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칼리엔이 빈 강의실에 리시안을 던져넣다시피 했음에도 그는 얄미울 정도로 침착했다. 보통 사람이면 당황할 만도 했는데, 저렇게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도 능력이면 능력이었다. 문을 쾅 닫고 난 후 칼리엔은 팔짱을 끼고 지난 2주간의 원한을 담아 리시안을 노려보았다.
“내가 참, 할 말이 많은데.”
“합동연주 해주기로 결정한 건가?”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지?”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면 화도 안 난다는 사실을 칼리엔은 처음 깨달았다. 기분 같아서는 벽에다가 제 머리를, 아니, 저놈의 머리를 박고 싶었다. 어쩌다가 이런 참신한 또라이한테 걸리게 되었는지 참 의문이었다. 전생을 믿지도 않았건만, 지난 생에 어떤 큰 죄를 지었나 묻고 싶어졌다.
“일단 이유나 들어보자. 그렇게 대책 없이 날 스토킹한 데엔 이유가 있을 것 아냐. 왜 하필 나고, 왜 졸업 공연에 그렇게 집착하는데?”
리시안 시나레타 정도면 졸업 공연에서 발로 연주해도 졸업에 영향 갈 일은 없을 것이었다. 뭐든지 자신이 최고가 아니면 배기지 못하는 완벽주의자인가? 그럴싸한 추측이었지만 그것이 왜 리시안이 칼리엔을 합동 연주 파트너로 고집하는지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칼리엔은 성적으로는 과에서 중상위권이었고, 실전 연주도 눈에 띌 만큼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겸손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칼리엔으로선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리시안의 답은 의문을 해소하기는커녕, 칼리엔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영혼을 담은 연주를 하기엔 네가 적격인 것 같아서.”
…이건 또 뭔 뚱딴지같은 소리지? 리시안은 필요한 모든 설명을 마쳤다는 듯 다시 조용해졌고 칼리엔은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적격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는 제쳐두고서라도, 영혼이라는 단어가 타칭 ‘얼음 공주’ 리시안의 입에서 나올만한 단어였던가? 저렇게 안 어울리는 것도 재주였다. 칼리엔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해. 사람은 독심술을 못 하니까 전후 사정 다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라고.”
칼리엔의 요구에 리시안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래봤자 눈썹을 살짝 모은 정도였지만, 그마저도 칼리엔이 리시안의 얼굴을 본 것 중에 제일 표정의 변화가 컸다. 칼리엔은 슬쩍 시선을 벽시계에 주었다. 빨리 끝내고 안락하고 평온한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처음이라고 하면, 모디샤 교수님의 실기 수업에서 연주 발표가 있었는데.”
“아, 뭔지 알 것 같다. 설명은 이제 됐어.”
칼리엔이 리시안의 말을 단번에 잘라먹었지만, 리시안은 딱히 기분 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개까지 끄덕이는 저 모습을 보아하니, 칼리엔이 빨리 알아들은 걸 더 만족해하는 듯했다. 저러니까 당연히 밉보였겠지. 전공이 갈려 모디샤 교수의 수업을 칼리엔이 들은 적은 없었지만, 그가 연주에는 영혼이 담겨있어야 한다는 염불을 외는 괴짜라는 것은 건너 들어 알고 있었다. 가끔 교내식당에서 영혼의 기준이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며 분노를 터트리는 현악 전공 학생도 심심찮게 보였다.
“확인차 물어보자. 모디샤 교수님이 너한테 연주에 영혼이 없다며 보충해오라고 했어?”
“보충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만. 발표에서 B를 받긴 했다.”
저런. 그 정도 점수라면 칼리엔은 충분히 만족하고 넘어갔겠지만, 리시안은 어렸을 적부터 천재라 일컬어진 바이올린 신동이었다. 매번 칭찬만 받아왔을 그에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굴욕이었겠지. 칼리엔이 짐작하건대 정교한 연주법으로 유명한 리시안의 발표는 아마 흠잡을 곳 없었을 테다. 그놈의 ‘영혼’만 빼면 말이다. 칼리엔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 난 너 못 도와줘. 나도 그 교수님이 말하는 영혼을 담은 어쩌고는 연주 못 해.”
“저번에 들은 피아노 곡만큼만 칠 수 있다면 충분할 거다. 연습이 확실히 부족하고 많이 틀리긴 했지만, 미묘하게 사람을 집중시키는 힘은 있더군.”
“칭찬을 하든지 악평을 하든지 하나만 해줄래?”
리시안의 멱살을 다시 쥐고 싶은 충동이 들어 칼리엔은 주먹을 대신 쥐었다 폈다. 침착하자, 아무튼 이제 이야기도 들었고, 거절할 명분도 생겼으니 곧 그를 완전히 떼어내고 평온한 학교생활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7살짜리 아이에게 이야기하듯, 칼리엔은 친절하고도 천천히 설명했다.
“그건 감정을 담은 연주였지, 영혼을 담은 건 아니야. 게다가 손 풀기 연습용이었으니 그걸 토대로 파트너를 고르기엔 한참 부족하지 않을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분노의 피아노 내려치기였다고. 분노가 영혼이라면, 영혼을 갈아 피아노 칠 수 있는 사람은 이 학교에 깔리고 널렸어. 파트너는 적당히 친구나 친구의 친구 통해서 알아봐.”
“알아볼 수 있는 친구가 없다.”
“그거 자랑 아닌데? 뭐가 그렇게 당당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더 이상 털릴 어이도 없었다. 이쯤 되니 칼리엔은 리시안하고 대화를 시작한 것 자체가 실수가 아니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네가 친구 없는 게 내 탓은 아니지, 교수님 통해서라도 알아봐! 급기야 비명 같은 절규를 내뱉는 칼리엔에게 리시안은 굴하지 않았다.
“네 연주를 들은 순간부터 마음은 정했다. 바꾸고 싶지도, 바꿀 일도 없어. 그러니 나와 합동 연주를 하자.”
리시안 딴에는 굉장히 노력 들인 설득임엔 틀림이 없었다. 리시안 인생에 이렇게 말을 많이 한 적도 드물 거라 칼리엔은 어쩐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칼리엔이 그토록 염원하는 평화는 소중했다. 리시안이 학교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라는 장점도, 그의 얼굴만으로 사람 여럿 홀릴 수 있을 거란 사실도,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다면 설렜을 법한 말도, 2주간 저 집착에 시달린 칼리엔의 철벽을 뚫을 수 없었다. 칼리엔은 활짝 웃었다.
“절대로 싫어.”
불협화음의 합주가 될 것이 뻔한 연주는 결코 사양이었다.
Written 21-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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