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칼리 (래디에센트 크로니클)

편지에 잔향을 담아 보내라

칼리엔 제베라 x 베루리아 제베라

Winter Gerbera - E3 (music commission)

칼리엔에게,

오늘 마당에 거베라꽃이 피었어. 울타리 구석쟁이에 볕이 유독 잘 드는 곳 있잖아? 채소를 기르기엔 면적이 너무 좁다고 엄마 아빠가 내가 마음대로 쓰는 걸 허락해주셨거든. 우리 작년에 눈이 녹던 날 시장에서 사 온 꽃씨 기억나지? 마땅히 심을 곳이 없어서 계속 보관만 하다가 드디어 심을 수 있었거든! 하루도 빠짐없이 물을 줬더니 새싹이 트고 봉오리가 맺고, 하얀 꽃이 피어났어.

하얀 꽃잎이 수도 없이 많은 게, 진짜 화려하거든? 같이 볼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칼리엔이 마을에 다시 올 즈음이면 꽃은 다 지고 없겠네. 장기 의뢰가 자주 들어올 것 같다고 했으니까, 잠깐이라도 들리는 건 무리겠지? 아쉬운 마음을 담아 이번 편지에 꽃 한 송이를 잘 말려서 동봉할게. 칼리엔이 편지를 받을 무렵이면 향은 다 날아가고 없겠지만, 모양만이라도 보고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줘.

칼리엔은 잘 지내고 있지? 힘든 일은 없고? 밥도 제때 먹고 있고? 칼리엔이야, 옛날부터 뭐든지 혼자서 잘했으니까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눈에 안 보이니까 온갖 생각이 다 든단 말이야. 용병이라는 게 마냥 쉽고 안전한 일도 아니고! 너무 위험하다 싶은 의뢰가 들어오면 거절해야 해! 다음에 에르바나 언니한테 물어볼 거니까 숨길 생각은 하지 말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한테 소식을 숨겨서 쓰겠어?

다음엔 언제 볼 수 있으려나. 칼리엔을 마지막으로 본 게 겨울이었는데 벌써 봄이 오고 있네. 내 생일 때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일은 일이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말고! 저번 편지에서 엄청 티 나더라.

그거 알아? 칼리엔은 겨울엔 날 보러 와주니까, 난 꽃이 피는 봄보다 겨울이 좋더라. 올해도 칼리엔의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까 이번 겨울에도 꼭 와주는 거로 용서할게!

아무튼 잘 지내야 해. 편지 자주 해줘!

5월부터 겨울을 기다리는,

베루리아

* * *

칼리엔!

보내준 꽃씨 잘 받았어! 우체부 언니한테서 편지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 생각보다 무거워서 깜짝 놀랐지 뭐야. 두꺼운 봉투 덕에 젖지 않고 잘 왔어! 바로 꺼내서 습기 안 드는 곳에 잘 보관해두기도 했고. 잘 아껴뒀다가 내년 봄에 피어날 수 있도록 심을 테니까 내년엔 꼭 봄에도 들러줘! 내 생일 말고 더 나중에! 4월이면 여긴 아직 추워서 꽃은 볼 수 없을 테니까.

어떤 꽃이 필까, 벌써 궁금해지는 거 있지. 거베라처럼 크고 화려하고 꽃잎이 많을까? 우리 과수원의 사과나무꽃처럼 작고 아기자기할까? 장미처럼 진한 색을 품고 피어도 보기 좋을 것 같아. 이 마을은 기후가 추운 편이라 꽃은 잘 찾아볼 수 없으니까 뭐가 피어나도 설레는 마음은 같겠지. 엄마 아빠는 먹지도 못하는 거 쓸데없다고 하실 것 같지만, 예쁜 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니까.

그러니까 꼭! 와줘야 해! 나 혼자 설레발 치고 있으면 좀 뻘쭘하단 말이야! 그리고 혼자 보는 것보단 둘이 같이 보는 게 배로 즐거울 테니까.

에르바나 언니하고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고? 왜, 저번에 칼리엔이 마을에 왔을 때 에르바나 언니도 며칠 머물렀었잖아. 다른 사람들은 다 외부인이라고 눈치 보고 다가가지 않길래 내가 언니 거처나 그런 거 전담하기로 했었지! 칼리엔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언니가 칼리엔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물어보고 싶었거든. 귀찮을 정도로 이것저것 다 물어봤는데 친절하게 답해주더라고. 정말 괜찮은 언니더라. 칼리엔이 친구 잘 사귄 것 같아서 안심했어! 말 나온 김에 에르바나 언니한테 꽃씨 같이 골라준 거 고맙다고 전해줘!

벌써 여름이 왔어, 칼리엔. 봄이나 여름이나 겨울보다 훨씬 짧으니 이상할 일도 아니지만. 어제는 옥수수 수확하느라 하루종일 밭에 나가 있었어. 슬슬 내가 옥수수를 따는 건지 옥수수가 나를 따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니까. 완전 녹초가 되어버려서 어제 편지 쓰려다가 오늘로 미뤄버렸어. 이해해줘, 아직도 근육통이 장난 아니거든. 나중에 사과하고 포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짜 걱정이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올해 진짜 겨울까지 못 오는 거야? 의뢰 하나만 거절하고 오는 건 안 되겠지? 떼써서 미안.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건 나한테 너무 가혹한 일이야! 내가 마을 밖으로 나가서 칼리엔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 성인도 아니라서 허락을 못 받는다고. 이제 얼마 남았나? 10개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나도 스무 살이 될 테니까 그때까지만은 좀 자주 오려고 노력해줘. 엄마 아빠나 마을 어르신들 얼굴 보는 게 껄끄럽다는 건 알지만, 최대한 마주치는 일 없도록 노력해볼게.

…그냥 땡깡 부려봤어.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편지만 잊지 말고 꼭 보내줘!

과수원의 지친 노예가 되어버린,

베루리아

* * *

칼리엔에게,

오랜만에 보내는 편지 같아. 최근에 비가 엄청나게 퍼부어서 마을 뒷산에 산사태가 났거든.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길이 온통 진흙탕이 되어서 우편 마차가 마을로 들어오지 못했거든. 어른들 다 달라붙어서 도로를 복구하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어. 하고 싶은 말을 잔뜩 쌓아두기만 하다가 정작 편지를 보내려니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뭘 써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 거 있지? 좀 횡설수설해도 그러려니 해줘.

그래도 폭우 때문에 좋은 일도 있었어! 길이 엉망진창이 되어서 마을에 잠깐 들린 여행객 한 명이 나가지 못하고 며칠 더 머무르게 됐었거든. 앗, 좋은 일이라고 해서 갑자기 미안해지네. 그 사람한테 좋은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미안해요, 다니엘! 당신의 불운에 기뻐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어요!

아무튼, 그 여행객 이름이 다니엘인데, 마침 한가해서 그 사람하고 얘기할 기회가 있었거든. 물론 엄마 아빠는 외부인을 싫어하니까 가까이 갈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길 복구하느라 바쁘실 때 몰래 나갔다 왔지. 엄청 심심하기도 했고, 모처럼 바깥세상에 대해서 들을 기회가 왔는데 그냥 날려버릴 순 없잖아?

그 사람, 엘레시아 저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왔다고 했어. 어쩐지 여름인데도 옷이 두껍더라. 이 마을도 추운 편이긴 하지만 저 북쪽보다 훨씬 나을 테니까. (참고로 물어보긴 했는데, 여름이 짧긴 하지만 내내 눈만 오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 그 사람도 눈이 싫어서 남쪽으로 내려온 거냐고 물었는데, 엄청 웃더라고. 그건 아니고 그냥 여행하고 싶었대. 많이 부러워지더라.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해서 맘먹고 훌쩍 떠나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성인이 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칼리엔이 속한 용병 길드를 아는지 물어봤는데 이름만 들어봤고 자세히는 모른다고 하더라. 그 사람 처음 봤을 땐 용병 같아서 혹시나 하고 물어봤는데 아닌가 봐. 근데 검 쓰는 게 능숙해 보였거든. 몸놀림이나 그런 것도. 칼리엔이나 에르바나 언니를 좀 보다 보니 그런 게 눈에 들어오더라고. 내가 눈치는 좀 빠르잖아? 아니면 솔레유 제국이 건재하던 때 기사라도 했던 걸까? 기사는 대부분 귀족이라고 했는데, 귀족도 사용인 없이 혼자 여행 같은 걸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래디아타 대륙을 떠날 생각이라고 했는데,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좀 아쉽다. 그 사람, 상당히 잘생겼었거든. 칼리엔 만큼 말이야!

비가 눈만큼 지긋지긋한,

베루리아

* * *

잔소리쟁이 칼리엔에게,

글자밖에 없는 편지에서 이렇게 선명하게 목소리가 들리는 착각은 처음이었어. 솔레유 제국이 망하고 초능력자가 사라지기 시작한 걸 몰랐다면 칼리엔이 음성 보존 능력자라도 구했다고 의심했을걸. 근데 좀 억울하다! 나도 아무에게나 말 걸고 다니는 거 아니야! 상식적으로 내 몸 사릴 줄은 안다고! 아니면 진작에 칼리엔 따라서 마을을 뛰쳐나갔겠지! 애초에 다니엘이 정말 위험한 사람 같았으면 마을 어르신들이 마을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셨을걸? 그런 데선 얼마나 철저하신 분들인데.

진짜 별일 없었어! 얘기도 그렇게 오래 못했다고.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한가득 남아있었는데. 그건 칼리엔이 다시 왔을 때 답해주는 거로 하자. 각오 단단히 하고 돌아오도록 해! 밤낮 안 가리고 질문 세례에 시달리게 될 테니까!

그런데 초능력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다니엘도 한때 초능력자였다고 했다? 능력이 뭐였는지 물어봤는데 알려주지는 않더라. 어디를 가든 이제 초능력자가 거의 남아있지 않대. 난 아직 이해가 잘 안 가지만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 세상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안 된다나? 그 사람 정말 귀족이었던 게 아닐까 싶어, 그렇게 어려운 말을 하는 걸 보니까.

칼리엔 초능력은 어때? 아직 잘 쓸 수 있어? 저번 겨울에 만들어준 얼음 토끼가 정말 귀여워서, 올해도 만들어 달라고 하고 싶었거든. 될 수만 있으면 일 년 내내 보존하고 싶었는데, 봄이 오자마자 녹아버렸어. 다니엘은 초능력이 없어지는 게 좋은 일이라고 했지만, 난 칼리엔의 능력이 오래오래 갔으면 좋겠어. 칼리엔은 어떻게 생각해?

저번 편지를 쓸 때만 해도 좋아하는 원피스를 입을 정도로 따듯했는데, 벌써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지기 시작했어. 이번 겨울에도 눈이 많이 오려나? 외투하고 장화가 많이 얇아졌는데 올해 새롭게 마련해야 할 것 같아. 바람만 부는데도 이렇게 추운데 눈까지 오면, 생각도 하기 싫어. 역시 이 마을을 떠나야겠어. 그래도 반년 정도는 좋아하는 옷을 입고 싶은데 하도 추워서 고이 옷장에 모셔두고만 있다니까.

칼리엔은 어디로 간다고 했더라? 보내준 편지에서 의뢰받아 떠나기 직전이라고 했으니까 이 편지를 볼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네. 부디 여기보단 따듯한 데로 가길 바래. 아, 칼리엔은 더운 거 싫어했었지? 더위 먹지 않게 조심하고! 그리고 다녀온 곳 잘 기억했다 어땠는지 얘기해줘!

그곳에선 바다가 보일까? 최근에 책에서 바다 그림을 본 적 있거든. 진짜 새파란 물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까? 그게 진짜 가능할까? 너무 궁금하다.

몸조심해서 다녀와, 칼리엔. 답장 기다리고 있을게.

항상 칼리엔을 걱정하고 부러워하는,

베루리아

* * *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는 칼리엔에게!

진짜, 진짜 멋있다! 그림엽서 너무 고마워! 물감이 이렇게 다양한 색상을 표현할 수 있을 줄이야! 파랑의 종류가 정말 많구나. 하긴, 칼리엔의 머리카락만 해도 두 가지의 푸른색이 섞여 있긴 하지!

정말 어렴풋이 상상만 했었는데, 이런 곳이 세상에 있긴 하구나. 우리 마을하고 너무 달라서 마치 허구의 세계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걸 보고 다시 결심했어. 성인이 되면 나도 꼭 칼리엔처럼 마을을 나갈 거야! 엄마 아빠는 날 뜯어말리겠지만, 난 그래도 역시 칼리엔의 동생인걸. 같은 반항기와 모험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반쯤은 농담인 거 알지? 떠나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지만.

엽서 뒤에 메레디스 항구도시라고 쓰여 있더라. 어렵사리 대륙의 지도를 구해서 보니까 이 마을보다 한참 남쪽에 있는 곳이더라. 어쩐지 파란색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따듯한 느낌이 들었어. 전통이 엄청 오래된 도시지? 솔레유 제국이 솔레유 왕국이던 시절부터 같은 이름의 도시로 쭉 있었잖아. 이래 봬도 나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다고!

혹시 배는 타봤어? 어떤 기분이었어? 물에 빠질까 봐 무섭진 않았으려나? 그러고 보니 칼리엔, 마을을 나가서 수영을 배운 적이 있던가? 너무 질문만 퍼부어서 답장하기 귀찮아지는 건 아닌가 몰라. 이것도 고르고 고른 질문인데! 하지만 질문할 사람이 칼리엔 밖에 없잖아? 마을 사람 아무나 잡고 그런 걸 물어봤다간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고 일이나 하라고 할걸.

초능력은 아직 쓸 수 있다니 다행이네! 혹시 쓸 때 몸에 무리가 오거나 하는 건 아니지? 내가 아는 초능력자는 칼리엔 뿐이니까 잘 알지를 못해서. 이럴 줄 알았으면 다니엘이 있었을 때 물어볼 걸 그랬어. 건강이 최고야, 특히 칼리엔처럼 몸 쓰는 직업군은 말이야! 그러니까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면 의사 꼭 찾아가고! 이 마을과 달리 거긴 제대로 된 의사가 있을 거 아냐!

좀 전까지만 해도 아직 나무에 낙엽이 달려있었는데, 이제는 마른 가지만 남았네. 곧 저 위로 하얀 눈이 쌓이겠지? 솔직히 말해 눈은 좀 지겹지만, 곧 칼리엔이 올 때가 된 것 같아서 동시에 기뻐지네. 올해 한 번도 못 왔으니까! 의뢰가 엄청 바쁘게 들어온 건 알지만! 그리고 이렇게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좋은데, 그래도 칼리엔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은걸.

그러니까! 12월 24일! 이번 칼리엔의 생일에 특별한 걸 준비해 놨으니까, 꼭 집에 와야 해! 알겠지? 늦으면 안 돼!

칼리엔과 재회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베루리아

* * *

누구보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칼리엔에게,

이 편지는 보내지 않을 생각이야. 이걸 지금 길드에 보낸다면 칼리엔하고 틀림없이 길이 엇갈릴 테니까!

일찍 보내려고 했는데, 눈이 나보다 부지런할 줄은 몰랐어. 편지 봉투를 봉하고 다음 날 아침 딱 눈을 떴더니 이게 웬걸! 눈이 발목까지 쌓여있더라. 지금도 계속 내리고 있어. 집 앞길 치우느라 팔이 빠질 것 같아. 요점은 그래서 우편 마차가 예상보다 늦게 도착해서, 이 편지는 그냥 들고 있기로 했어. 칼리엔 올해엔 일찍 온다고 했으니까, 이제 일주일 정도 있으면 칼리엔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편지는 다시 떠나기 전에 직접 전해줄게.

꽃은 없을지라도 내 텃밭은 보여주고 싶었는데, 눈이 쌓여서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가기 시작했어. 얼음 토끼 만들어주기로 한 약속, 잊지 않았지? 꽃 대신 텃밭에 토끼 한 쌍을 올려주고 가줘! 그리고 그 토끼가 녹고 꽃이 필 무렵 다시 돌아오는 거야. 칼리엔이 보내준 씨앗에서 어떤 꽃이 피는지 볼 수 있을 테니까.

가끔 생각해. 나도 칼리엔처럼 초능력자로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능력을 가졌을까? 솔직히 더 어렸을 땐 칼리엔이 많이 부러웠고, 시기하기도 했어. 우리 같은 평민은 초능력자로 태어나는 일이 엄청 드무니까, 칼리엔만 혼자 특별한 사람 같았거든.

그래도 부러웠던 만큼, 나는 칼리엔이 자랑스러웠어. 지금도, 칼리엔은 엄마나, 아빠나, 마을 이장님이나, 다른 누구의 참견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잖아. 그런 용감한 사람의 동생이라는 게, 나는 엄청 자랑스러워. 그건 칼리엔이 지금의 용병 일을 그만둔다 해도 변하지 않을 마음이야. 그러니 칼리엔도 칼리엔 있는 그대로 변하지 않고 쭉, 자신의 길을 갔으면 좋겠어.

오는 4월, 나도 이제 성인이 돼. 그날이 오면, 나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이곳을 떠날 거야. 저 넓은 세상으로 나갈 생각에 가슴이 뛰긴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걸 시도하는 건 역시 조금 무서워서.

그러니까, 나 칼리엔하고 같이 가도 될까?

새로운 세상에 익숙해질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내가 어리광부릴 수 있게 해줘. 동생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칼리엔이 편지에 써서 보내준 그 모든 곳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때, 칼리엔하고 같이 있고 싶어.

메레디스 항구도시도, 남쪽의 바다도, 대륙 바깥에 있는 먼 섬나라까지도. 그곳에서 피는 모든 꽃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날을, 나는 늘 고대해왔거든.

미리 생일 축하해, 칼리엔. 항상 행복하기를 소원하고 있어.

칼리엔을 사랑하는 동생,

베루리아

.

.

.

누구에게도 보내지 못하는, 수신인 없는 이 독백을 편지라 불러도 괜찮을까. 어디에도 전할 수 없는 이 마음을, 이렇게라도 내보이는 것이 죄가 될까.

어쩌면 편지보다 고해라고 명명해야 할듯싶지만, 용서를 감히 바랄 수 없는 나에게 고해할 자격조차 없는 것 아닐까.

많이 아팠을까, 루리야. 정말 미안해. 그 어떤 말도 면죄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내가 이제 너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사죄밖에 없으니, 미안하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더라도 이해해줘.

…너는 항상 내 유일한 이해자였어. 오직 네가 있어서 그 답답한 마을에서 벗어날 수 없던 날들을 견딜 수 있었어. 네가 없었더라면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뛰쳐나가, 더욱 혹독한 시기를 거쳤을 수도 있겠지. 마을 밖의 세상도 그리 녹록지 않았으니까.

네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만으로, 그 마을로 매년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어. 그 어떤 말이 들려와도 못 들은 척, 네 손을 잡고 눈이 수북이 쌓인 들판을 거닐 수 있었어. …앞으로 평생 그 마을에서 눈치 보며 살아야 한다 하더라도, 루리, 그 보잘것없는 약속만으로 네가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조차 기쁘게 감내할 텐데.

전부 쓸데없는 가정이지. 어떤 뛰어난 초능력자를 데려온다 하더라도, 시간을 되돌리거나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끊지 못하는 이 생을 이어가는 동안, 그런 잔인하고 달콤한 망상조차 할 수 없다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즉시 스스로 목이라도 조를 것 같아.

…그는 왜 나를 살렸을까.

나를 죽이러 왔다면서, 리시안 시나레타는 왜 나를 살렸을까? 살아갈 이유를 잃은 나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말이 얼마나 모순적으로 들리던지.

그러는 나도, 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너와의 약속을 지킨 후에, 나에게 남은 미련은 없었을 텐데. 그런데 지금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지금 나조차도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리시안 시나레타는 과연 이런 나를 통해 무엇을 얻으리라 기대하고 있는 걸까.

지금 내가 후회를 하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깊게 생각해보려고 할수록 더욱 알 수 없어져. 잠깐이라도 뒤돌아보면 끝없는 암흑만이 펼쳐져 있어,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울에 빠져들어 숨을 쉴 수가 없어, 부러 평소엔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해. 잊을 수 없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고, 계속 앞만 보고 있으려 노력해.

그런 나를 너마저도 이기적이라 비난할까, 루리야.

외줄 타기에 대해서 아니? 밧줄 하나를 길게 허공에 매달아, 곡예사가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는 거야. 보는 사람 위태롭게 흔들리기도 하고, 부러 여유로운 미소도 지어주며, 그 어떤 속임수 없이, 오직 밧줄 하나에 모든 것을 지탱하며.

나는 지금 그 밧줄 위에 있어. 뒤로 돌아갈 수도 없고, 한 발만 잘못 내디디면 추락만이 있을 뿐이야. 가만 서 있지도 못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지만.

끝이 보이질 않아, 어디까지 계속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 끝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지를 못해, 비명을 지르고 싶어져.

루리야, 나는 절대로 용감하지 않아. 다만 절실했을 뿐이야. 그 누구보다도 무서웠을 뿐이야.

하지만 네 생일이 다가올수록, 하찮은 자기연민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겠단 생각이 들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어. 도망쳐서 닿는 곳에 구원은 없겠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돌팔매질밖에 없더라도, 나는 내 죄를 마주해야만 하겠지.

나를 맞이한 공허한 침묵이, 들어온 그 어떤 비난보다 두렵고 아프더라.

그날 이후로, 내 초능력이 약화하던 것이 멈췄어. 이제는 오히려 더 강해진 느낌도 들더라. 힘이 들쑥날쑥해서 제어하는 게 전보다 어려워지긴 했지만, 노력해서 얼음 토끼 한 쌍을 만들어뒀어. 전보다 덜 예쁘게 만들어진 건 미안해. 아마도 네 텃밭이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곳에 뒀어. 네가 있는 곳에서도 보인다면 좋겠다.

…차마 울지 못하겠다. 차마 보고 싶다는 말을 못 하겠다. 눈물 한 방울을 떨구고, 짧은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내 안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아. 무너지고 난 이후 다시 일어설 자신이 없어, 꾸역꾸역 걸어갈 뿐이야. 네가 가고 싶어 했던 도시로, 바다로, 바다 너머 그 어떤 곳까지. 세상에 꽃이 피는 그 모든 곳으로.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지금 어디에 있든지,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해, 베루리아. 네가 내 동생이어서, 정말 고마워.

루리야. 4월이 시드는 이곳에, 아직 네가 심은 꽃의 잔향이 남아있어. 이 편지에 담아, 네가 있는 곳으로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 네가 있는 곳에도, 꽃이 피고 있을까?


Written 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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