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칼리 (래디에센트 크로니클)

죄인의 이름으로

리시안 시나레타

White Lisianthus - E3 (music commission)

하루종일 질척하게 눈이 내렸다. 그리 신기한 현상은 아니었다. 엘로하임 대신전이 있는 리베르 키리오스 섬은 온후한 기후의 히스토리아 섬보다도 훨씬 북쪽에 위치해, 날씨는 일 년 내내 혹독했다.

신전의 교리는 그것을 축복이라 여겼다. 시련과 고난은 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는 종들에게 숨 쉬듯 당연한 이치였다. 우리는 어리석은 종이요, 오직 질서를 향한 불신 없는 믿음만이 혼란 속에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러니 침묵으로 기도하라. 오롯이 신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정화하라. 신에게 버림받은 이들에겐 죽음보다 더한 고통밖에 없으리이다.

뒤돌아보지 말라. 신의 축복을 등에 업고 전진하라. 혼돈을 잠재우는 시커여, 우리가 항상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나니.

우리 역시 어리석은 죄인이요. 신이시여,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보호하소서.

우리는 기꺼이 더러운 피를 묻히는 당신의 손이 되고, 악을 처단할 검이 될 것을 맹세하리이다.

* * *

신관의 집무실이 모여있는 팔리아 신전은 대신관이 머무르는 리브레 신전만큼은 아니었을지라도, 고압적이고 웅장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고요한 복도에 가끔 보이는 사람들은 발소리를 줄이고, 숨소리마저 죽여, 널찍한 건물 반대편에서 펜촉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은 착각을 자아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경건한 일터가 아닌, 싸늘하게 식은 시체의 영안실이라 해도 위화감이 없었을 터였다.

어둑한 복도를 가로지르는 청년의 걸음 역시 적막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는 검은 신발은 마찰음 한 번 내지 않았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시커의 검은 사제복 역시 바닥에 쓸리는 일 없었다. 청년이 조심스레 품에 안고 있는 양피지 뭉치만 이따금 옷깃에 스쳐 바스락거리는 옅은 소음만 내었다.

그 숨 막히는 정적에 위압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청년은 그 익숙함에 안도했다. 청년이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온기 한점 없는 무취의 서늘함이 그의 코끝을 반겨주었다.

…쿵, 쿵.

청년의 걸음이 멈췄다. 의아한 시선이 갑작스러운 소음의 원인을 찾아 헤맸다. 신관의 일터인 이곳에서 침묵은 암묵적인 규율이었다. 엘로하임 대신전 지역에 동물을 들이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청년은 맹수의 습격에 대한 두려움을 접어두고 미약한 짜증과 분노만 입매에 담았다. 감히 그 신성한 약속에 균열을 내는 불청객이 누구인지, 청년은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졌다. 이 소음이 자신보다 낮은 사제의 만행이었다면, 청년은 상위 계급의 시커로서 그를 훈계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쿵, 쿵.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가던 방향을 틀어 청년은 팔리아 신전의 외부 뜰로 향했다. 칙칙한 재색 하늘의 빛이 높은 기둥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동시에 얼굴에 닿는 공기가 빠르게 식어갔다. 청년은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눈을 살풋 찡그리며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소음의 원인을 찾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제, 나르시케 아인비스. 무엇을 하고 있나?”

차갑게 호명하는 목소리에 방금까지 대리석 기둥을 걷어차고 있던 남자가 돌아보았다. 얇은 안경알 뒤에 숨겨지지 못한 분노 섞인 붉은 눈으로 청년을 빤히 응시하다, 이내 나르시케는 짧게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곱슬거리는 금발이 그의 불경스러운 표정을 빠르게 숨겨주었다.

청년은 말없이 익숙하게 나르시케의 인사를 받았다. 자신보다 어린 이 사제는 올해 시커 시험에 낙제해 회색의 하위 사제복을 벗지 못했다. 청년의 눈길이 인사를 마친 나르시케의 뚱한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팔리아 신전에 볼일이 있다면 민폐 끼치지 말고 신속히 해결하고 돌아가도록. 신관님이 머무르는 신성한 곳에서 무슨 이유로 행패를 부리느냐.”

“…죄송합니다.”

따로 말을 덧붙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나르시케가 신전에 별다른 용무가 없다는 사실을 청년은 빠르게 추리해냈다.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 굳이 찾아와 성질을 부리고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청년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시커 리시안 시나레타가 임무에서 돌아온 모양이군.”

나르시케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 표정 자체로 모든 상황을 알 수 있었기에 청년은 굳이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르시케 아인비스가 리시안 시나레타에게 품은 악감정은, 대신전 내부에 속해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었다. 감정에 휘둘려 불화를 일으키는 나르시케를 좋게 보는 이는 없었지만, 그 치기 어린 감정에 피해를 보는 것은 리시안 시나레타 한 사람뿐이었기에, 굳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하려 하지는 않았다.

철없는 감정이라 치부해도, 청년은 솔직히 나르시케 아인비스를 어느 정도 동정했다. 열혈 신자인 부모의 손에 이끌려 반강제로 신전에 들여보내진 나르시케는 뒷배 하나 없는 고아였던 리시안을 기대와 달리 단 한 번도 뛰어넘어 본 적이 없었다. 당시 나르시케가 존경했던 시커 아드리엘 시나레타가 리시안을 직접 교육하기로 했을 때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던 악연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청년은 나르시케의 그런 점이 이곳에서 보기 드문 인간다운 면모라고 생각했다. 새빨간 분노와 깊은 곳에서부터 끓는 용암 같은 질투. 한심하다 여길지라도 차라리 그가 리시안 시나레타 보다 대하기는 편했다.

리시안 시나레타는 그런 나르시케와 상극이었다. 나르시케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 같은 성정이었다면, 리시안은 하얗게 얼어붙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였다. 그 보석 같은 다채로운 푸른색의 눈에서 기이할 정도로 무심한 시선을 받아 본 이들은 누구나 리시안을 조금씩 꺼렸다. 그런 이유로 리시안 시나레타가 명백한 피해자였어도, 그를 나서서 보호해주는 이는 없었다. 청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청년은 이 이상의 꾸지람 없이 눈을 감고 지나가기를 택했다. 이만 가거라. 불복종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어투에 나르시케는 노려보는 시선을 신전에 잠시 두었다가 순순히 돌아섰다.

* * *

이미 신전에서 나르시케 아인비스를 마주했던 터라, 청년은 신관의 집무실 앞에서 리시안 시나레타를 조우했을 때 놀라지 않았다.

리시안 시나레타는 나르시케 아인비스가 그리했듯이, 청년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둘 다 같은 시커의 지위였지만, 청년은 리시안보다 시커의 경력이 몇 년은 많았기에, 그 누구도 예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아드리엘 신관님에게 보고할 일이 있더냐.”

“예. 신관님께서 제가 직접 찾아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신관님께서 직접 부르셨다면 먼저 들어가거라.”

양보라고 하기도 무색했다. 청년의 보고는 급한 용무가 아니었고, 청년이 나르시케와 대치하고 있던 사이 리시안이 한발 먼저 신관의 집무실을 찾았으니 순서가 뒤로 밀려도 큰 불만은 없었다. 리시안 시나레타는 사양하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작게 끄덕이고 작게 문을 두드린 후, 리시안은 집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길게 휘날리는 은발 뒤로 문이 굳게 닫혔다.

청년은 문에서 한 발짝 떨어져 조용히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차가운 벽에 기대는 일 없이, 곧게 서서 눈을 감고 침묵에 몸을 맡겼다.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예민한 귀에 신관 아드리엘 상티모니아의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무를 마치자마자 휴식도 없이 찾아오라고 한 것은 미안하다. 네 첫 임무였던 만큼 직접 보고를 받는 쪽이 나으리란 판단을 내려서.”

“상관없습니다. 혹시 전령새를 통해 보낸 서면 보고에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마주 들리는 것은 리시안 시나레타의 건조한 음성이었다. 청년은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옮겨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신관 아드리엘이나 리시안 시나레타나, 청년이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에 있음을 모를 리는 없었다. 들어서 곤란한 이야기였다면 진즉 청년에게 축객령을 내렸을 터이니, 청년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기를 택했다.

“아니, 보고서에 문제는 없었다. 큰 의미를 두지 말고 간단한 규정이라고 생각하거라. 혼돈의 파편을 처음 접한 이들은 질서의 가호 아래 있더라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니까.”

리시안 시나레타는 그 말에 납득했는지, 방안에서 들리는 답은 없었다. 청년 역시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된 대화가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라 판단해 한시름 놓았다.

먼 과거, 세계를 멸하려던 혼돈의 데이스가 봉인된 이후, 그 힘의 잔재가 혼돈의 파편이 되어 세계 곳곳에 흩어졌다는 역사는 신도 시절부터 받아온 교육의 일부였다. 주황색 보석의 형태를 띤 파편은 접촉하는 생명체와 동화하고, 섭리를 비틀어 이성을 파괴해, 혼돈의 힘을 퍼트림으로써 세계를 다시 멸망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이 신전이 존재했고, 시커(Seeker)가 존재했다. 재앙의 씨앗이 온전히 싹틔우기 전에 회수하고, 꽃을 피우기 시작한 각성자를 제거하기 위해. 혼돈의 힘에 대항하여, 질서의 검을 휘두르기 위해.

그러나 시커 역시 생명을 품은 인간이었기에, 회수하는 파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현역으로 활동 중인 시커는 예외 없이 주기적으로 담당 신관과 면담을 가장한 검사를 받아야 했다. 혹시라도 혼돈의 힘에 홀리지 않았나 감시하기 위해, 차가운 이성이 아직 견고한지 확인하기 위해. 경력과 실력에 상관없이, 시커에게 노출된 위험은 동일했다.

하지만 리시안 시나레타에게 이 과정이 필요한지, 청년은 솔직히 의문이 들었다. 그가 특출난 인재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신전의 명령에 누구보다 충직하게 따랐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인형의 눈을 어찌 생명 있다 하리요. 살아있지 않는 것에 어찌 죽음의 위협을 부여할 수 있었을까. 살아가는 이유가 없는 이에게 혼돈의 유혹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신관 아드리엘 상티모니아, 당시 시커 아드리엘 시나레타가 리시안을 길바닥에서 데려왔을 때, 불만을 표하던 이들과 달리 청년은 아이가 범상치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강도 높다고 소문난 시커의 시험을, 리시안은 첫 응시에 통과했다. 아드리엘 시나레타가 고아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고 직접 교육을 맡은 것에 대한 뒷말이 쑥 들어갔었다. 그만큼, 리시안은 완벽하게 시커가 되기 위해 태어난 아이 같았다.

그러나 사람이란 본디 완벽할 수 없는 존재였고, 완벽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불완전했기에 죄인이었고, 동시에 인간이었다. 리시안 시나레타를 보고 있으면 그는 사람의 탈을 쓴 다른 존재 같았기에, 본능적인 거부감마저 들었다.

누군가는 그를 괴물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그를 신의 현신인 양 경외했다. 청년은 그가 어느 쪽이었는지 아직 판단하지 못했다. 인간답지 않은 리시안 시나레타를 청년은 꺼렸지만, 그를 싫어하느냐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니었기에.

“…그래, 그럼 되었다. 다만 언제나 주의하도록. 감정은 필요 없다. 궁금해하지 마라. 오로지 네 임무에만 집중해라. 나머지는 전부 불필요한 것이니.”

아드리엘 상티모니아의 조용한 경고이자 조언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갔을 때처럼 고요한 인형 같은 얼굴을 한 리시안 시나레타가 걸어 나왔다. 아직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청년을 발견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말 한마디 없이 리시안 시나레타는 복도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청년의 시선이 그가 사라진 곳에 잠시 머물렀다.

그에겐 필요 없으리라 생각했어도, 청년은 습관적으로 시커의 기도문을 그를 위해 읊었다.

그러하니, 리시안 시나레타. 네가 가는 길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기를.

* * *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신관 아드리엘의 집무실 풍경은 바뀌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건조했고, 여전히 삭막했다. 신관의 금빛 로브가 화려한 인상을 줄 만도 했으나, 이 방 안에서는 그 찬란한 색채마저 빛을 잃는 미묘한 착각이 들었다.

청년은 문득 몇 년 전, 비슷한 시기에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과 마찬가지로 아드리엘 상티모니아의 회분홍색 눈동자는 냉정하게 청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청년은 고개 숙여 침묵으로 예를 올렸다. 이곳을 찾게 된 이유가 무거웠던지라, 섣불리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리시안 시나레타가 사라졌다.

그런 소문이 처음 들려왔을 때, 청년은 믿지 않았다. 차라리 리시안 시나레타가 임무 중 사망했다는 소식이 더 신빙성 있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시커라 해도 불시의 사고는 일어날 수 있었고, 스스로 검을 자처하는 이들에게 장수를 바라는 것은 사치였다. 리시안 시나레타 또한 그런 이유로 순교했다면, 청년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의지로 신전을 저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은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그 무엇을 신전의 명령보다 우선시한 적이 없었으니까.

“대신관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이다.”

청년은 고개를 들었다. 아드리엘의 얼굴에 자리한 무표정엔 어떠한 변동도 없었다. 파리한 입술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담담하고 메말랐다.

“신전의 배신자, 리시안 시나레타를 추적하라. 그가 보호하는 혼돈의 각성자를 찾는 즉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제거하거라. 리시안 시나레타 역시, 반항한다면 즉결처분할 권한을 내린다.”

복종의 뜻으로, 청년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리깐 눈이 혼란을 숨겨주기를 바랐다. 긴장에 목소리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청년은 몇 번 마른침을 삼킨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명을 받듭니다. 균형의 데이스, 리브라 님의 이름에 신성한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하거나, 그의 검으로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어질 축복의 말을 기다렸으나, 아드리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청년이 고개를 다시 들어도 될까 고민하던 차에, 아드리엘의 조용한 음성이 청년의 귓가에 와닿았다. 기다리던 축복은 아니었다.

“네가 그를 어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를 베는 것에 망설이지 마라. 너보다 경험은 적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일말의 정, 한 줌의 망설임을 허락한다면, 죽어 돌아오는 것은 네가 될 터이니.”

청년의 놀란 눈이 아드리엘 상티모니아를 바라보았다. 아드리엘의 검은 머리칼이 창백하고 견고한 얼굴 옆으로 흘러내렸다. 자신의 성을 물려받은, 손수 키운 제자를 단칼에 내칠 수 있는 이성에 청년은 탄복했다. 문득 청년은 리시안 시나레타가 아드리엘 상티모니아의 그런 점을 배우고 닮아, 그리 냉정하게 신전을 떠날 수 있었나, 불경스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아드리엘 상티모니아의 말에 틀린 점 하나 없었다. 리시안 시나레타는 이미 신전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었으며, 그 누구보다 뛰어난 시커라 불리고 있었다. 홀로 그와 맞서게 된다면,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시커가 이 신전에 한 명 없었다. 청년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임무가 되리라는 사실을. 아드리엘 상티모니아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뒤돌아보지 말라. 신의 축복을 등에 업고 전진하라. 혼돈을 잠재우는 시커여, 우리가 항상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나니.”

서늘한 축복의 기도가 때 이른 진혼곡으로 들려왔다. 청년은 저울의 성호를 긋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린 후 방을 나섰다. 청년의 뒤로 문이 굳게 닫혔다. 이제 그가 돌아갈 길은 없다는 것을 암시라도 하듯이.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이제 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서 도망친다는 것 자체가 평생 한 믿음만을 가지고 살아온 청년에게는 어불성설이었다. 그 끝이 이 죄인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나는 그 영광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나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궁금해졌다. 리시안 시나레타를 다시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물어보지는 못할 테지만, 청년은 알고 싶어졌다.

무엇을 위해 그가 정해진 신전의 길에서 벗어났는지. 무엇을 위해 스스로 더럽혀진 죄인의 이름을 이어가기로 각오했는지.

그가 무엇을 위해, 처음으로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했는지.


Written 20-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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