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칼리 (래디에센트 크로니클)

피에 아직 물들지 아니한

칼리엔 제베라 x 리시안 시나레타

“더워……….”

칼리엔이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여름 폭염에 달아오른 볼에 닿는 나무의 감촉이 시원하니, 열기가 조금 가시는가 싶기도 겨우 몇 분. 사람의 체온에 의해 데워진 테이블은 오래 위안이 되지 못했다.

칼리엔은 앓는 소리를 내며 양손을 나무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린 한기가 뻗어 나와 얇은 얼음 장막이 유리처럼 테이블을 얇게 뒤덮었다. 잠시 감았던 눈을 깜빡이자 주홍색의 일렁임이 하늘색 눈동자에 파도처럼 격하게 요동쳤다. 반대로 칼리엔의 표정은 사막을 헤매다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한결 편안해졌다.

“…세간에서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걸 보통 재능 낭비라고 부른다지.”

무감각하게 던져진 한 마디에 칼리엔은 눈만 굴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리시안을 쳐다보았다. 평소처럼 손목까지 내려오는 프릴셔츠에다 발목까지 덮는 바지, 답답하지도 않은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도 묶지 않고 그대로 목과 어깨 위로 흘러내리게 두는 그 모습에, 칼리엔은 설핏 짜증이 솟구쳤다.

아, 진짜. 보기만 해도 더워죽겠네.

칼리엔의 중얼거림에 리시안의 얇은 눈썹이 약간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칼리엔이 알 게 뭐던가. 30도가 넘어가는 폭염에, 설상가상 며칠 동안 진득하게 내린 비까지 습도를 더해 칼리엔은 더위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우리 다음 행선지는 동해 섬으로 잡자. 라크리모스 제도에 일 년의 반 이상이 겨울인 섬이 있다며. 꼭 거기 아니더라도 동해 섬들은 기술이 발달해서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내는 기계도 있다고 하더라… 설마하니 신전의 시커도 거기까지 우릴 쫓아오지는 않을 거 아냐….”

아니, 동해 섬이 아니라 동해 섬 바다의 밑바닥이라도 쫓아올걸. 리시안이 답하려 입을 열었으나 칼리엔은 기막힌 촉으로 리시안을 째려보아 그의 입을 닫게 했다. 뭔진 몰라도 초치는 발언은 듣고 싶지 않다. 그 입 다물라. 그런 눈빛을 보내는 칼리엔을 리시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다 다른 말을 꺼냈다.

“네가 조금 더 시원한 옷으로 갈아입으면 해결되는 일 아닌가?”

왜 고생을 사서 하는 거지.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그 의미가 명확했다. 칼리엔은 엷은 얼음막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빈말로도 시원해 보인다고 할 수 없는 옷이 눈에 들어오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햇빛을 반사하는 흰색 셔츠라고는 하지만 팔꿈치까지 소매가 내려오는 데다가 목과 소매 끝단에 리시안 못지않게 프릴이 잔뜩 달려있어 도리어 소재가 두껍게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치마인지 바지인지 헷갈리게 하는 디자인의 하의는 너풀너풀해 통풍이 잘될 것으로 보였지만, 천이 겉보기보다 두꺼워 오히려 끈적하게 다리에 달라붙었다. 리시안의 말에 반박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청발의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묶어 목선이 드러나, 조금 덜 답답해 보였을까.

“…아 몰라. 루리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했단 말이야. 옷 같이 맞춰 입고 나들이라도 갈 땐 나하고 트윈룩이라면서 엄청 들떠 했다고.”

칼리엔이 꺼낸 죽은 동생의 얘기에, 대화를 받아주는 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단번에 어색한 침묵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칼리엔의 대화상대를 담당하고 있는 리시안이 누구였던가. 피도 눈물도 함부로 흘리지 않도록 교육받아온 시커 중에서도 한때 최고라 칭해진 이가 아니었던가. 어떤 잣대로 보든, 보편적인 ‘평범함’과 상당한 괴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리시안이 잠시 고민하다가 내린 감상은 짤막했다.

“비합리적이군.”

“시끄러워.”

마침 저 목 부근의 프릴이 손아귀에 쏙 들어오기 좋게 생겨먹었겠다, 한 번 멱살 잡고 털어봐? 반쯤 몸을 일으켜 고민하던 칼리엔은 자신의 너그러운 성격을 살려 이번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절대로 너무 덥고 기력이 없어서 몸을 일으키기조차 귀찮아서는 아니었다고, 그렇게 자신을 세뇌했다.

움직이면 나만 열 받고 덥지, 아마 이 상태론 저놈한테 별 타격도 가지 않을 거란 계산까지 끝마쳤다. 싸울 기력으로 얼음이나 더 만들고 말지. 칼리엔은 다시 테이블 위로 늘어지며 물었다.

“근데 넌 진짜 덥지도 않아? 뭘 그렇게 꽁꽁 싸매 입고 있어?”

“딱히 더위를 타는 편은 아니니까. 추위나 더위나,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다.”

문득 칼리엔은 리시안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치렁치렁, 발목까지 오는 사제복은 사신이라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온통 검은색이었다. 그를 만난 시기가 우연찮게 겨울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여름에 만났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그 사신 같은 옷을 입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둘을 추적하던 시커들을 몇 번이고 봤었다. 여기도 검은색, 저기도 검은색, 리시안의 과거 모습과 상당히 흡사했다. 그렇게 사시사철 사신 같은 검은색의 사제복만 입고 다녔다면 익숙해져야만 했을 것이었다. 더위 먹어 죽기 싫었으면 말이다.

“납득했어. 그런데 이런 질문하는 것도 웃기지만, 대체 왜 그쪽 사제복은 전부 검은색이야? 다른 색 옷을 금지하는 규정이라도 있어?”

“일단 둘 다 아니다만.”

신전의 단합력을 기르기 위해서라든가,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라든가, 제멋대로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이던 칼리엔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아니야?

“일단 사제 계급 전부가 검은색 사제복을 입는 건 아니다. 검은색 사제복은 사제 중에서도 시커로 활동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복장이지.”

시커 (Seeker). 신전에서 신의 임무를 받고 나와 혼돈의 파편을 회수하고, 혼돈의 힘을 흡수한 이들을 제거하는, 일명 신의 대리자라 불리는 사냥꾼. 사제 중에서도 특출난 이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계급이었고, 보다 높은 신관의 직은 높은 확률로 시커로 활동했었던 사제들에게 주어졌다. 그만큼 신도들에겐 경외의 대상이었고, 적에겐 공포와 꺼림의 대상이었다.

그 자리를 제 발로 차고 나온 저놈은 미친놈 중에서도 최고로 미친놈이지. 그 미친놈과 기꺼이 계약을 맺은 당사자인 칼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정해서, 시커의 복장이 검은색인 것도 별 이유가 없고?”

“이유야 있긴 있다만.”

칼리엔의 눈썹이 위로 휘었다. 이유가 있긴 한 거였어? 궁금한 표정으로 칼리엔은 리시안의 대답을 말없이 재촉했다.

“검은색은 피가 묻어도 크게 티가 안 나니까.”

“…내가 말을 말자.”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저 냉혈한 성격 때문에라도 저놈은 더위는 절대로 타지 않을 듯싶었다. 칼리엔은 눈을 부릅뜨고 리시안을 빤히 노려보았다. 이걸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칼리엔은 우선 먼저 떠오른 문제점부터 짚어주기로 했다.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 전부 피가 묻으면 상당히 티가 날 테니 알아서 잘 처신해. 지금 너나, 나나, 제대로 된 일자리 잡기가 어려워서 수중에 있는 돈이 얼마 없거든? 새 옷 몇 벌 사고 나면 우린 굶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전부 검은색 옷으로 입혀버릴 걸 그랬나. 칼리엔이 과거 자신의 충동적인 사치를 살짝 후회하는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리시안의 평온한 무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피 묻은 옷을 입고 다닌다 해도 난 크게 상관없다. 겉으로 티가 안날뿐이지, 어차피 사제복을 입고 다녔을 때도 피 묻는 거에 신경 쓰지 않았고. 옷이야 냉 보온 기능만 해결해준다면, 피에 젖었건 아니건 별문제가 되진 않으니까.”

“이게 미쳤나.”

칼리엔이 정색했다. 안 그래도 사람들의 관심을 피하며 의식주를 해결하기 힘들어 환장하겠는데, 피칠갑을한 리시안을 옆에 끼고 다녀야 한다면 일상의 어려움이 얼마나 늘어나겠는가. 절대로 사절이다. 칼리엔의 시선이 한층 뜨거워지자 리시안은 뒤늦게 덧붙였다.

“노력해보지.”

피가 묻는 것을 걱정해야 할 만큼 시커와의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리시안은 굳이 칼리엔에게 상기시켜주지 않았다. 추적을 경계하는 거야 숨 쉬는 것처럼 일상이었지만, 매일 전투를 치러야 했다면 리시안의 옷을 걱정해야 하기 이전에 신전의 시커가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리시안은 한번 얼굴을 마주한 시커를 절대로 살려 보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한동안 칼리엔이 걱정하는 옷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리시안은 화려한 프릴이 달린 자신의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본인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입가에 미세한 움직임이 일었다.

비록 일시적일지라 하더라도, 피에 아직 물들지 아니한 자신의 소매가 나쁘지는 않다고, 리시안은 그리 생각했다.


Written 20-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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