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칼리 (래디에센트 크로니클)

나날이 평화를 위하여

칼리엔 제베라 x 리시안 시나레타

세상 사는 것, 참 힘들다.

새삼스레 깨달은 사실은 아니었지만, 오늘 같은 날엔 한층 더 깊이 마음속 새겨두게 되는 만물의 진리이자 세상의 이치였다.

목구멍에서부터 끓어 올라오는 비명인지 한숨인지를 삼키며 칼리엔은 방금 확보한 나이프를 꽉 쥐었다. 손마디가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래.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죽든지, 저 새x를 죽이든지 해야겠다.

나날이,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 * *

사락.

인간의 청각으로 거의 들리지도 않을 기척이었지만,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칼리엔에겐 한여름의 천둥소리도 그만큼 크게 들리지 못했을 것이리라.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기다리던 칼리엔은 리시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칼리엔의 입술이 참 화사하고도 예쁜 미소를 그렸다. 하늘색과 주황색이 어우러진 눈에선 불길이 일고 있었다.

“할 말 있으니까 앉아봐.”

리시안은 눈을 깜빡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상당한 협박조의 불친절한 말에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주눅들만도 했지만,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벽안은 미약한 의문만 담고 있었다.

리시안은 칼리엔이 시키는 대로 소파 맞은편에 얌전히 앉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이 찰랑이며 그의 가는 손가락을 스쳤다. 칼리엔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가다, 이내 리시안의 허벅지에 달린 단검 벨트에 머물렀다.

단검… 그래……

으드득. 자칫 표정 관리가 안될 뻔해 칼리엔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참자, 참자. 나는 문명인이니 일단 대화를 시도해보자. 리시안도 일단 인간의 모습을 띠고 있으니 전혀 말이 안 통하는 상대는 아닐 것이다. 칼리엔은 파도치는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리시안을 가늘게 노려보며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를 소파 사이에 있는 탁자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날카롭게 잘 벼려진 칼날이 싱그러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나이프군.”

짤막한 감상에 칼리엔은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것 같아?’라 반문할 뻔했다. 그러나 오랜 경험으로 인해 리시안에겐 돌려 비꼬는 말보다 직설적인 화법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치고 있었기 때문에, 칼리엔은 두 번째 참았다.

나는 성인이다… 나는 문명인이다… 나는 능히 참을 수 있다……

“그래, 나이프지. 아주, 놀라울 정도로, 날이 시퍼렇게 선 나이프지. 그런데 내가 오늘 이걸 어디서 찾았을까?”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리시안의 답은 빨랐다.

“침대맡에 둔 나이프 아닌가.”

저 기억력과 머리 회전만큼 리시안이 눈치의 속도도 키워줬으면 좋겠다고, 칼리엔은 아주 간절히 희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베개 밑에 숨겨둔 나이프겠지. 자, 여기서 질문. 나이프가, 대체, 왜, 베개, 밑에, 있을까?”

한 음절, 한 음절. 칼리엔은 끊어 말하며 심호흡을 했다. 야만적인 수단에 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한치 변함없이 차분한 리시안의 얼굴이 도리어 분노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아, 진짜. 내가 원래 이렇게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리시안과 같이 다니게 되면서부터 부쩍 불을 뿜는 날이 많아진 칼리엔이었다. 내가 용이냐, 내가 용이냐고. 저놈은 입 다물고 가만히만 있어 주면 얼굴도 예쁘겠다, 머리도 좋겠다, 그나마 봐줄 만할 텐데. 신이시여, 어째서 저놈에게서 상식을 뺏고 외모에 모든 노력을 몰빵하셨습니까.

열을 식히려 손부채질을 시작한 칼리엔을 리시안이 빤히 응시했다. 도저히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무표정에 칼리엔이 다시 다소 과격하게 묻기 전, 리시안이 입을 열었다.

“나이프가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 단검으로 바꿔줄까?”

한 번은 참았다. 두 번째도 넘겼다. 내 사전에 세 번째란 없다.

칼리엔은 벌떡 일어서서 리시안의 멱살을 잡았다. 칼리엔의 무릎이 탁자에 부딪히며, 나이프가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순수한 힘으로는 리시안에게 밀리지 않는 칼리엔이었기에, 리시안도 얼떨결에 반쯤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베개 밑에 칼 놓지 말라고 말 흐쓸튼데…”

이러다 이빨 상하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말이 길어질수록 턱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진짜 제 명에 못 살고 죽지. 아니, 내 경우엔 저놈 때문에 제 명에 못 죽고 살아가는 건가? 어쨌든 이번 요점은 그게 아니니 넘어가고.

“일단 이거나 놓고 말하지 그래.”

리시안의 표정은 이런 상황에도 얄미울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것이 마치 자신이 응당 누려야 할 마음의 평화를 뺏어간 것만 같아, 칼리엔의 분노는 더욱 뜨겁게 치솟았다.

“내가 지금 널 놓게 생겼어? 나이프가 마음에 안 들면 뭐? 단검? 단거어어엄?? 어떤 미친놈이 베개 밑에 날붙이를 숨겨두고 자?! 신종 자살법이야?? 잘 자고 있다가 한 번 뒤척이면 목이 그대로 슥삭? 날 죽여주겠다는 약속을 이런 방식으로 지키려고???”

안 뒤척이면 되는 것 아닌가. 리시안은 칼리엔이 이성을 완전히 잃기 전에 마지막 눈치를 발휘해 입을 닥쳤다. 일단 이 자세가 불편하기도 했고, 칼리엔이 저러다가 뭔가를 부술 것 같은 기세였기에, 리시안은 답지 않게 조금 긴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쫓기는 상태고, 밤이라고 해서 추적자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잠에 들 때도 긴장을 놓지 않고, 무기는 늘 손에 닿는 곳에 있어야-”

“진짜로 긴장할만한 이유를 만들어 줘?”

문제는 칼리엔이 대화든 변명이든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칼리엔은 칼리엔대로 짜증 내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베개를 치워 뭐가 있는지 먼저 확인해서 망정이었지, 무턱대고 손부터 들이밀었다간 높은 확률로 피를 봤을 것이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리시안과 같이 생활한다는 뜻은 인간 무기와 같이 생활한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늘 가지고 다니는 단검 두 자루는 기본이요. 소파 쿠션 밑에는 접이식 나이프. 책상 밑에는 마비약을 바른 바늘 네댓 개. 여차하면 거울을 깨서 유리 조각을 알차게 써먹을 생각인지 거울 뒤에 망치도 있었으며. 이제는 베개 밑의 나이프가 양날의 단검으로 진화하게 생겼다.

신이시여, 제가 뭘 그리 잘못했기에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려주십니까.

“…이해를 못 하겠다는 건 아닌데. 그런데 좀 과하다는 생각 안 들어? 너 단검 하나 가지고 추적자 셋을 불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내가 봤거든? 무슨 백병전이라도 기대하는 거야?”

칼리엔은 깊은 한숨을 쉬며 리시안의 멱살을 놓고 팔짱을 꼈다.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것이 슬슬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것 같았다. 진정하자 칼리엔, 화내면 나만 손해다. 저 가증스러운 놈의 얼굴을 보라. 어찌 저리 평안할 수 있을까.

“자, 놓았으니까. 설명해 봐. 그만둘 생각이 아니면 날 이해라도 시켜보라고.”

리시안은 침묵했다. 행동의 정당성이야, 설명하라면 설명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전에서 시커로 교육받아온 리시안은 펜을 잡기도 전에 칼을 쥐는 것부터 배웠고, 그것을 휘두르는 것에 망설임을 지우는 법부터 익혔다. 자신과 비슷하게 교육받은 이들이 천지인 곳이 신전이었고, 그 신전에서 정예로 발탁된 자들이 그들을 쫓고 있었다. 그들에게 상식을 기대할 수도, 인간성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건 자신뿐, 자신이 쥐고 있는 날붙이 하나뿐이었다.

칼리엔이야, 전까지는 일반인으로 살았으니 그 입장을 온전히 이해 못할 만도 했다. 그렇기에 구구절절 말하기엔 너무 길었고, 칼리엔을 굳이 납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때문에 리시안은 나름의 모범답안으로 상황을 종결하기로 했다.

“…아무튼 그렇게 됐다.”

……이 새x가.

칼리엔은 결국 다시 리시안의 멱살을 잡았다.


Written 20-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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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로그의 그림은 @zjaltus9753님의 트레틀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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