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의 무대

방랑기담

리비에르 시라 x 아노렐 킨

제 담당 마술사의 에리어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갓 조수로 발탁된 아노렐 킨은 큰 감명을 표하지 않았다.

“이야~ 들어가 보면 시체 몇 구 굴러다니고 있을 것 같은데?”

어두침침하고 삭막한 하늘. 폐쇄되어 몇 년째 방치된 것 같은 음침한 분위기의 콘크리트 병원 건물 두 동. 건물 사이를 잇는 구름다리에 이끼조차 자라지 못하는 UP(상위차원)의 특성상 야생의 생기나마 불어넣을 들짐승 한 마리 없었다. 이곳에 살아 숨 쉬는 생물이라곤 하늘색 반투명 망토를 두른 푸른 머리칼의 마술사 하나와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밝은 금발의 소년뿐.

하지만 시체는 생명체가 아니지. 그에 마술사 리비에르 시라는 곰곰 고민하다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조수님이 한번 잘 찾아봐. 찾는다면 그 김에 좀 치워주면 좋고.”

다른 마술사였다면 조수가 마땅히 보여야 할 존경은커녕 비웃음이 웬 말이냐고 화냈을 법했지만, 리비에르는 진심으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노렐도 시비 거는 재미가 없었는지 더는 찔러보지 않았다. 대신 탁한 붉은 눈동자가 건물의 위아래와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훑어내렸다. 원하는 걸 찾지 못했는지 그가 흥미가 떨어진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이게 정말 마술사님의 구역이야?”

“맞아.”

“재미없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나 봐?”

“유령 병원에 재밌을 구석이 어딨어?”

아노렐이 코웃음 치며 몸에 흙먼지가 묻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드러누웠다. 조수가 되면 재미있을 일이 잔뜩 있을 거라 생각해서 환생의 기회도 저버리고 마술사를 따라왔는데 아직까진 실망이라며 투덜대는 아노렐을 리비에르는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굴러다니는 것도 싫증이 났는지 아노렐이 몸을 일으켰다. 안광 없는 두 눈이 우뚝 서 있는 리비에르를 향했다.

“에리어엔 담당 마술사 본인이 직접 뭘 넣을지를 정한다며?”

그렇지. 리비에르가 수긍하자 아노렐이 다시 삭막한 병원 건물과 휑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년이 미간을 찡그리자 눈가에 새겨진 문신들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설마 마술사님, 이게 마음에 들어서 이렇게 만든 거야?”

취향 참 희한하네. 아노렐의 독설에도 리비에르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어조의 부정이 끝이었다.

“그럴 리가.”

소년의 머리가 옆으로 갸웃 기울어졌다. 호의도 적의도 없지만 묘하게 날카롭게 파고드는 눈빛이 불편하지 않았을 리 없으나, 리비에르는 제 조수를 마주 보지 않았다. 마술사의 시린 하늘색 시선은 텅 비어있을 병원을 향해 있었다. 그가 사색에 잠길 시간을 줄 정도로 아노렐은 참을성 있지 않았다.

“그럼 바꾸면 되잖아. 한 번 정하면 못 바꾸는 거야?”

“이대로 있어야 할 이유가 있거든.”

마술사의 흰 장갑을 낀 손이 머리에 쓴 검은 모자에 닿았다. 그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변함없었으나, 모자를 벗어 챙에 달린 푸른 종이 장미꽃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엔 누가 봐도 말 못 할 사연이 담겨 있었다. 리비에르가 아노렐에게 가벼이 물었다.

“이유가 궁금해?”

“전혀.”

단호한 대답에 리비에르가 피식 웃었다. 그럴 것 같았지. 마술사는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이지 않았고, 조수도 캐묻지 않았다. 아노렐은 지루하단 눈을 감추지 못하고 툴툴댈 뿐이었다.

“인간들 다 뻔하지 뭐. 생전에 살던 곳을 재현했다거나. 집 같은 느낌이 들게끔 한 거 아니겠어?”

시시하게. 리비에르의 시선이 드디어 아노렐을 마주했다. 눈꼬리가 처진 두 눈은 웃는 인상이었지만, 눈빛에는 인간답지 않은 거리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에리어를 꾸미는 마술사도 있을 테지만, 그래봤자 허상이야. 우리는 이곳 어디에도 집을 지을 수 없어. 잠시 머무르는 장소에 불과할 뿐이니까. 우린 다 그런 존재야.”

무슨 말이 그렇게 복잡하담. 아노렐이 멀뚱히 리비에르를 쳐다보고 리비에르는 빙긋 미소 지었다. 마술사의 손가락이 병원 건물을 향했다.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에리어를 파악해 둘 겸 빠르게 둘러보고 와. 5분이면 충분하겠지?”

아노렐이 벌떡 일어났다. 입꼬리를 찢을 듯 씩 웃는 모습이 흡사 작은 맹수 같았다.

“날 뭐로 보고. 3분이면 뒤집어쓰고도 남지.”

그래도 너무 대충 둘러보진 말고—. 리비에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노렐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멀리서 우당탕 물건들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리비에르의 얼굴에 곤란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중에 저거 다 본인이 치워야 할 텐데. 손에 든 모자를 머리 위에 쓰고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안 가 소년의 형상이 거센 폭풍과 함께 다시 리비에르의 앞에 나타났다. 숨도 몰아쉬지 않고 아노렐이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3분, 안 지났지?”

“재보진 않았지만, 지나진 않았겠지. 그럼 가볼까?”

“벌써?”

리비에르는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반짝이는 투명한 망토가 등 뒤에서 펄럭이자 아노렐이 잽싸게 따라붙었다. 마술사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그랬지? 우린 본질이 방랑하는 자들이라고.”

마술사란 죽음과 생명 사이를 걷는 존재. 죽음을 겪었으나 온전히 죽지도 못하고, 다시 살 수 있었으나 생명을 택하지 않은 자들이다. 어느 한쪽에 정착하지 않아 어느 시간과 공간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 틈새를 떠도는 이들. 이는 마술사의 자취를 따라 걷고, 언젠가 그 자리에 오르게 될 조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어디에 머무를 수 있다는 착각은 헛된 꿈일 뿐이다. 리비에르는 아노렐에게 이런 말을 구태여 하지 않았다. 어차피 소년에게 와닿는 조언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서 감상은?”

대신 짧고 가벼운 질문을 남겼다. 뭐가, 마술사님의 에리어? 아노렐의 반문에 리비에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이 눈을 깜빡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예상했던 대로 시시하더라. 시체 한 구도 없던데.”

정말 있기를 기대했던 거냐고 리비에르가 키득키득 웃었다. 다음엔 조수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모형이라도 가져다 놔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리비에르는 미래의 시련을 치를 참가자들이 기겁하게 될 불행을 모른 체 했다. 다른 에리어로 넘어가기 위한 포털을 열려고 이동 아티팩트를 만지작거리는 리비에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아노렐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도 언젠간 내 에리어를 받게 되겠지?”

“마술사로 무사히 승급한다면 그렇겠지.”

포털이 생성되며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여전히 탁한 소년의 붉은색 눈동자가 빛을 받아 기묘한 생기를 띠었다. 아노렐의 눈이 가느다랗게 접혔다.

“그땐 마술사님보다 훨씬 재미있게 내 에리어를 꾸밀 테니까 기대하라구.”

“초대해 주겠다는 건가? 영광인데?”

에리어는 마술사의 깊은 내면이자 본질을 닮기 마련이다. 마술사가 된 아노렐 킨의 에리어는 과연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잠시 상상해 보려 했으나 소년 속에 잠재된 혼돈은 어떤 예측도 허가하지 않아 리비에르는 곧 그만두었다. 단 하나만 확신할 뿐이었다. 그의 에리어가 시련의 장소로 배정될 운 없는 참가자들을 잡아먹는 악명높은 곳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리비에르가 웃으며 빛 속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부터 실력을 잘 키워둬야겠지? 참가자들이 다 정리하지 못한 에리어의 페이스리스 소탕 임무가 들어왔어. 조수님의 실력 발휘 한번 구경해볼까?”

아노렐이 활짝 따라 웃으며 포털 속으로 뛰어들었다.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며 포털이 닫히기 시작했다.

“이제야 좀 재밌어지네.”

에리어와 에리어 사이. 이름 없는 장소를 떠나 또 다른 이름 없는 장소로 가는 길 없는 길. 그 어느 시간과 공간에도 속하지 못하는 틈새에서 마술사와 조수는 그들이 떠나온 에리어를 돌아보지 않았다.


Written 24-08-14

3685자 (2796)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