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난측
리리 이데아 x 아노렐 킨
변화난측(變化難測). 변화가 많아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리리 이데아의 삶에 있어 거대한 변화의 시작점은 죽음을 맞이해서 UP, 마술사의 세계에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두 번째 삶의 기회, 새롭게 주어진 힘, 그리고 제게 베풀어질 리 없다고 생각했던 제안까지.
어머니와 둘이 함께 사는 꼬마 아이. 어린 나이에 불쌍하게 죽은 소녀. 마술사의 조수가 된 운 좋은 참가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변화가 리리를 휩쓸었었다. 그렇기에 변화난측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그 단어를 설명하기엔 제가 살아온 삶이 적격이라고 리리는 생각했었다.
적어도, 제 삶보다 그 단어에 어울리는, 그야말로 단어의 의인화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인물이 리리의 눈앞에 나타나기까지는.
“안녕~ 오랜만이지?”
정정하자면 리리의 뒤에서 번개처럼 나타나기까지는. 기척을 느끼기도 전에 훅 다가와서 깜짝 놀란 리리가 반사적으로 토끼 인형을 묵직하게 휘둘렀다.
“어이쿠.”
물론 그런다고 순순히 맞아줄 위인이었다면 변화난측이란 단어를 그에게 가져다 붙이지도 않았을 터다. 한 발짝 훌쩍 물러서 매서운 공격을 가볍게 피한 아노렐이 리리를 향해 씩 웃었다. 뾰족한 이빨이 입술 틈새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인사가 좀 과격하다-?”
“당신이 여기엔 무슨 일이에요?”
톡 쏘아지듯 나온 어투는 놀란 탓도 있지만, 애초에 아노렐 킨은 반가운 얼굴이 아니었다. 사실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눠본 건 아니었지만, 첫인상이 워낙 안 좋은 의미로 강했었다.
“아~ 귀찮고 긴 설명은 됐구요. 그러니까 대충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싸-악 쓸어버리면 되는 거지?”
안하무인. 후안무치. 성실함이란 눈곱조차 찾아볼 수 없는 제멋대로의 뻔뻔한 소년. 그러나 대놓고 그 앞에서 쓴소리를 입에 담기엔 재능이 그의 오만함을 받쳐주는 능력자. 그런 여러 이유로 마술사 없이 나온 첫 솔로 페이스리스 제거 임무에서 리리가 맞닥뜨리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맞다, 리리. 그치? 맞지?”
리리에겐 불행하게도 아노렐은 질문에 답할 생각 없이 제 할 말만 밀어붙였다. 오른손에 든 묵직한 토끼 인형의 팔을 꾹 쥐고 리리가 잘근거리던 입술을 뗐다.
“맞아요. 그래서 여기엔 어쩐 일이냐고요.”
“달리 뭐 하러 왔겠어? 페이스리스 없애러 왔지.”
아노렐이 주먹 쥔 손에서 엄지만 빼고 제 뒤 어딘가를 가리켰다. 멀리서 건물이 무너지는 것 같은 파괴적인 울림이 들려왔다. 어이쿠, 일단 저긴 아니고, 누군진 몰라도 치우는 방법도 요란하다. 너스레를 떠는 아노렐에게 리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 옆 구역에 배정받은 조수는 당신이 아니었는데요.”
합동 임무는 마술사나 조수에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커다란 무리의 페이스리스, 또는 파프니르 출현 같이 한 팀의 마술사와 조수가 감당하기 어려운 임무라고 판단되면 여러 팀이 힘을 합치곤 했다. 그런 임무를 여럿 받으며 리리 역시 아노렐을 비롯한 다른 조수들과 안면을 익히게 되었고.
이번에 리리가 배정된 임무도 사정은 비슷했다. 출몰한 페이스리스의 힘은 고만고만했지만, 수가 적지 않았고 에리어가 다른 에리어 셋을 합친 만큼 넓었다. 그렇다고 마술사 여럿을 보내기엔 전력 낭비여서 고려 끝에 어느 정도 제 앞가림할 정도로 성장한 조수들에게 구역을 하나씩 배정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해 리리는 앞서 지원했고, 리리의 마술사인 카이멜 시레노바도 리리가 감당 못 할 임무라 생각하지 않았는지 선선히 보내주었다.
실제로 까다로운 임무는 아니었다. 늘 옆에서 지시를 내리던 마술사가 없어 어깨에 긴장이 두 배로 들어가긴 했지만, 리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제게 주어진 구역의 페이스리스를 제거해 냈다. 딱 마무리하고 보니 저 인간이 뒤에 성큼 다가와 있었고.
“정리에 들어가기 전에 저와 근접한 구역의 조수들과는 인사를 나눴어요. 그게 당신이었으면 그때 만났겠죠.”
리리가 재차 대답을 재촉하자 아노렐이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헝클어진 밝은 노란색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그가 대충 뒤를 다시 손짓했다.
“옆 구역 말고. 저어기~ 옆의 옆의 옆 구역에 있었는데,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길래 와 봤지.”
옆도 아니고 옆의 옆의 옆. 이러면 마주치지 않을 만도 했다. 납득하던 리리가 도로 미간을 모았다. 다소 무뚝뚝한 어조에 힐난이 들어갔다.
“임무는 다 마치고 온 거예요?”
“당연하지, 날 뭐로 보고?”
다행히 리리에겐 이성과 자제력이 있어서 솔직한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다만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노렐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생눈으로 그곳의 상황이 어떤지 보일 리 없었다.
그러나 아노렐이 임무를 버려두고 구역을 벗어났다면 총괄하는 마술사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터. 리리 안의 아노렐의 첫인상이 어떠했던 그가 거짓말했을 확률이 높진 않았다. 리리가 한 발짝 물러섰다.
페이스리스 제거가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구역을 꼼꼼히 뒤져 페이스리스를 소탕하는 덴 기본적으로 시간이 걸렸다. 리리도 방금 마지막 놈을 정리한 차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리리의 구역으로 이동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아노렐은 리리보다 한참 전에 임무를 마친 게 분명했다.
그가 저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리리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딱히 억울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어찌 되었든 조수로서 경험도 많고, 아티팩트의 힘에 익숙해질 시간도 많았을 테지. 그건 차근히 따라잡으면 되는 일이었다. 리리의 마음속에 걸리적거리는 돌부리는 다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구경 좀 할까 해서 왔는데, 늦게 와서 볼 것도 없네. 진짜 시시한 하루다.”
“당신은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하나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돌아서는 아노렐을 뜬금없는 질문이 붙들었다. 아노렐이 고개만 돌려 삐딱하게 리리를 쳐다보았다. 그의 목을 타고 자리 잡은 조수의 인시그니아가 일그러져 보였다.
“그거야 당연하지-?”
진정 쓸데없는 질문에 억지로 대꾸해 주는 성의 없는 어투에도 리리는 굴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알고 싶을 뿐이었다.
아노렐 킨이 리리 이데아보다 강한 것은 객관적으로 분명한 사실이다. 리리도 그를 부정하지 않았다. 리리가 의구심을 품은 대상은 아노렐이 내보이는 힘의 형태였다.
그 주인을 닮아 안하무인, 제멋대로, 통제가 가능할까 싶은 예측불가능한 날카로운 힘. 얼핏 보기에 중심도 없고, 무게도 없고, 안정감도 없다. 리리가 알던 굳건한 나무 같은 강함과는 사뭇 결이 달랐다.
강해지렴, 리리.
어머니의 말은 하나의 유품으로 남아 리리의 머릿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강함. 리리가 한결같이 닿고 싶어 하는 건 동기 조수도, 제 담당 마술사도 아닌 그 높디높은 정점이었다.
“강하다는 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리리 이데아는 아노렐 킨에게 물었다. 자신과 그토록 다른, 너무 변화난측하여 절대 이해하지 못할 불가해한 이에게.
“강한 거? 뭐… 그냥 페이스리스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싹~ 쓸어버릴 수 있다는 거 아냐?”
비장하게 물었지만, 돌아온 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답이어서 리리의 맥이 탁 풀렸다. 당신에게 물어본 내가 바보지. 중얼거린 말이 들렸는지 아노렐이 입을 삐죽이고 돌아섰다. 탁한 붉은색 눈동자에 심술궂음이 서려 있었다.
“그럼, 리리 조수는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는데?”
질문이 리리에게 돌아왔다. 리리의 밝은 녹색 눈이 잠시 땅을 향했다가 아노렐을 마주 보았다.
“무너지지 않는 거요.”
“그게 그거잖아.”
이번엔 아노렐이 김샜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리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늘에 내려앉는 노을을 닮은 주황색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당신이 말하는, 그런 중심도 뿌리도 없는 제멋대로인 힘은 여차하면 무너지기 마련이에요.”
리리가 추구하는 힘은 강인한 나무와 닮았다. 땅에 뿌리를 내려 튼튼하게 서 있는, 어떤 비바람을 맞아도 견고하게 버티는 나무. 언제 어디서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날벼락 같은 힘이 아닌.
그런 리리에게 벼락같은 말이 떨어졌다.
“반대 아냐? 뿌리 따위가 왜 필요해? 그런 거추장스러운 게 없으면 무너질 것도 없다는 거잖아? 오히려 목 뻣뻣하게 세우다가 똑-! 부러지는 수가 있다구?”
“너무 딱딱해. 그렇게 긴장하고 있다간 볼 수 있는 것도 놓치고, 하지 않아도 될 실수를 하게 되지. 그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고.”
리리의 눈이 흔들린 까닭은 아노렐의 과격한 언사가 아니었다. 그 위로 카이멜 시레노바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기 때문이었다. 전혀 닮은 점 없는 두 사람이지만, 감히 붉은 마술사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조수에게서 비슷한 말이 나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 방식이 틀린 건가요?”
아노렐의 시선에서 카이멜 시레노바의 엄한 눈빛이 비쳐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입은 멋대로 제 마술사에게 물었던 질문을 앞에 선 소년에게 꺼내고 있었다.
“네 스타일을 완전히 바꿔야 하느냐는 거면, 아니. 각자에게 맞는 방식이 있고, 장점을 봉인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아노렐의 어이없다는 듯한 역질문이 순간의 혼란을 유리처럼 깨뜨렸다. 차가운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리리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그럼 그렇지, 내가 이 사람에게 무슨 질문을 하고 있던 거람. 창피한 기분에 귀 끝에 열이 몰렸다. 리리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게요, 제가 정신이 잠깐 나갔었나 봐요.”
“근데 뭐, 틀리고 말고 할 게 있나-? 맞으면 그대로 쭉 패버리면 되는 거고, 맞지 않으면 좀 다르게 패버리면 되는 거지. 뭘 고민까지 하고 있어?”
“생각 없이 뛰어들라는 것도 아니고, 두려움을 느끼면 안 된다는 말도 아니다. 그저 상황에 맞춰 변화할 수 있는 유연성은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새겨들을게요.”
당신의 방식이 전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노렐의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걸 보니 이번에도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거야 리리 조수 마음대로~ 아노렐이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순간 하늘에서 빛이 터졌다. 인위적인 푸른색 불꽃이 머리 위를 눈부시게 수놓자 아노렐과 리리가 머리를 젖혀 올려다보았다.
“그새 다들 임무가 끝났나 보네. 오래도 걸렸다~”
“각 구역에 있던 페이스리스의 수를 생각하면 그렇게 오래 걸린 건—”
갑자기 주변이 허전해진 느낌에 리리가 말을 멈추고 아노렐이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는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경고 없이 왔던 것처럼 간다는 인사도 없이 사라지다니. 유일하게 이런 면에선 변함없다며 리리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변화난측이 따로 없네.”
멀리서 통신용 아티팩트를 사용한 마술사의 집합 명령이 들려왔다. 어느덧 고요해진 제 구역을 등지고 리리가 발을 내디뎠다. 첫발엔 망설임이 다소 섞였지만, 두 발짝 세 발짝 나아갈수록 굳세고 견고한 걸음이 되어갔다.
*
변화난측. 변화가 많아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변화를 강제로 막을 수 없다는 걸 리리 이데아는 안다. 그렇기에 리리는 자신의 방식대로 더욱 굳건한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그 어떤 삶의 굴곡에도, 그 어떤 사람에게도, 그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한 뿌리를.
강해지렴, 리리.
소녀가 바라보는 정점을 향해 자라는 나무의 뿌리가 땅 깊숙이 내린다.
Written 2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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