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의 무대

이상기후

카이멜 시레노바 x 리비에르 시라 (6주년 로그)

눈이 내리는 여름 바다를 기억한다.

UP의 수많은 에리어 중에서도 조금 특별하게 기억에 남은 곳이었다. 시련을 진행하고, 페이스리스 제거 임무를 맡으며 온갖 에리어를 스쳐 지나갔어도 그 잔상이 오래 눈앞에 아른거리는 일은 여태 없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청아하게 맑은 푸른색 하늘, 반짝이는 옥색의 물결, 발밑에 하얗게 바스러지는 모래밭, 후덥지근하게 느껴지는 바닷바람, 차갑게 피부에 내려앉는 싸라기눈은 어제 일처럼 선명히 떠오른다.

너는 기억하고 있을까. 그 이상기후 속에서 우리가 보낸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바다색과 확연히 대비되는 붉은 머리카락이 또 다른 바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손짓으로 그러한 불바다를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이니 썩 틀린 말은 아니던가. 손끝에 맴돌던 냉기를 거두며 리비에르 시라가 빙그레 웃고 고개 숙여 인사에 보답했다.

“오랜만이네, 저스티스 카이멜. 아마 너와 같은 이유로 여길 찾지 않았을까?”

사전협의 없이 마술사 둘이 한 에리어에서 마주치는 일이 드물기는 하나 아예 없진 않았다. 에리어는 많고, 페이스리스는 그보다 많으며, 일감을 할당하는 담당자는 언제나 바빴으니 임무지가 겹치면 마술사끼리 적당히 합의하곤 했다. 카이멜 시레노바 역시 그럴 심산인 듯 주변을 훑으며 물어왔다.

“자네 조수는 두고 온 건가?”

“멀리 있진 않아. 여기 페이스리스가 약한 편이어서 경험 쌓으라고 떨어뜨려 보냈지. 그러는 네 조수는?”

“다음 시련에 내가 시험관으로 배정되어 그 준비에 한창이라. 자네 말대로 이곳 페이스리스는 조수 없이도 정리 가능한 수준이라 데리고 오진 않았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늘 한쪽에서 벼락이 번쩍 일었다. 바닷바람의 축축한 공기에 일순 전하가 스며들어 둘의 시선이 바닷가에서 떨어진 민가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 민가나 다름없었지만,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UP에선 그 형태만 띠고 있어도 편의를 위해 민가라 불리곤 했다.

차라리 생명체가 없는 게 다행이지, 요란하게도 정리하네. 밝은 금발의 소년이 열심히 빛의 속도로 이동하며 잘못 걸려든 페이스리스를 썰고 다닐 모습이 눈앞에 훤했다. 혼자 보내긴 했으나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유심히 신경을 기울이던 리비에르의 눈매가 접혔다.

“굳이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될 것 같군.”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나온 말에 리비에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많이 바쁜가 봐?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카이멜이 어깨를 으쓱였다.

“해야 할 일은 늘 있으니까. 그러면 여기는 맡기고 가겠네.”

“잠시만.”

이동형 아티팩트를 꺼내 떠나려던 카이멜이 움직임을 멈추고 리비에르를 돌아보았다. 선명한 금안에 의문이 서려 있었다.

“뭐 필요한 거라도?”

“시간이 촉박한 것만 아니면 나 좀 도와주고 갈래?”

리비에르가 가리킨 곳엔 카이멜이 오기까지 차곡차곡 모양을 잡아가던 얼음덩어리가 있었다. 카이멜의 눈이 가늘어졌다. 맨 밑부분은 둥그런 기둥, 그 위로 세모꼴의 형태, 자잘하게 갈라지는 가지들, 수십 개의 뾰족한 바늘 끝. 색도 없고 가슴께까지밖에 오지 않는 자그마한 크기였지만 저 얼음조각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무인가?”

제법 섬세하게 조각된 얼음 침엽수였다. 리비에르가 손뼉을 쳤다. 그의 얼굴엔 해맑은 웃음이 걸려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 꾸미는 거 도와줘.”

카이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엔 말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하게 담겨있었다. 리비에르가 숱하게 받아와 익숙한 반응이기도 했다.

이 사람, 정신 멀쩡한 거 맞나?

“…굳이 내 손이 필요하진 않을 것 같다만.”

끈질기게 저를 응시하는 리비에르의 시린 하늘색 시선이 결국 카이멜에게서 못마땅한 답을 끌어냈다. 리비에르가 허리를 숙여 모래밭에서 부드러운 크림색의 조개껍데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조개를 얼음 나무에 가져다 대자 얇은 얼음 막이 코팅처럼 위를 덮으며 트리 장식처럼 고정되었다. 가볍게 손을 털어내며 리비에르가 조개를 가리켰다.

“장식할 거 몇 개만 찾아와 줘. 보답으로 신기한 거 보여줄게.”

어디 가서 이런 구경은 못 할 거라며 장담하는 리비에르가 썩 믿음이 가지는 않았으나, 엄격하다고 소문난 카이멜조차 조금 호기심이 피어났다. 이 괴짜가 신기하다고 칭할만한 것이 대체 무엇일까. 고민하는 낌새를 눈치챘는지 리비에르는 빠르게 설득에 들어갔다. 많이도 아니고 몇 개만, 적당히 모양 예쁜 걸로 골라서.

“진짜 불가능하다면… 어쩔 수 없고.”

호기심, 또는 도전적으로 들리는 말. 어느 이유로 넘어왔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눈썹을 모으고 바닥을 눈으로 훑는 카이멜의 모습에 리비에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무릎을 굽히고 같이 조개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리비에르의 예측대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카이멜은 하얗고 예쁜 조개껍데기 다섯 개를 리비에르의 펼쳐진 손바닥 위로 떨궈주었다. 역시 부탁하길 잘했다고 웃으며 조개껍데기를 나무에 고정하는 모습을 카이멜이 팔짱을 끼고 바라보았다.

“시간 낭비는 아니었으면 하는데. 얼마나 오래 걸릴 예정인가?”

“이것만 다 달고 바로 보여줄 거야.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 눈이라도 감아볼래?”

가벼운 농담조에 카이멜은 말없이 헛소리 말라는 눈빛으로 대꾸했다. 리비에르는 개의치 않고 마지막 조개껍데기를 고정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지팡이를 꺼냈다. 화려한 얼음꽃이 장식된 지팡이의 끝이 얼음 나무를 지목했다. 카이멜의 시선도 그 끝으로 옮겨갔다.

얼음 나무에 붉은 불이 피어올랐다. 숙련된 포커페이스를 지닌 카이멜의 눈에도 놀라움이 순간 들어찼다.

‘수(水) 속성 마술사가 불을?’

살아있는 무희처럼 춤추는 불길 아래 반짝이는 얼음 나무를 보고서야 카이멜은 마술의 내막을 눈치챘다. 뜨거운 불길에 당연히 녹아내려야 할 나무가 멀쩡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법처럼 불타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크리스마스트리. 기묘한 광경을 앞에 두고 카이멜이 툭 내뱉었다.

“환영이로군. 예상치 못한 조합이긴 하나 특별할 것까지 있나, 저스티스 시라?”

“한 걸음 뒤에서 주변을 봐봐.”

리비에르의 시선은 진작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타는 얼음 크리스마스트리 뒤로 청명한 여름 바다와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이 생경한 경관을 자아냈다. 단순히 마술을 곁들인 현실의 모방이라고 하기엔 다소 비현실적이었고, 동화라고 하기엔 텅 빈 바닷가가 너무 쓸쓸했다. 어떤 명확한 단어로 정의하지 못할 광경에 카이멜은 묘한 눈길로 리비에르의 웃는 얼굴을 곁눈질했다.

“정말 이상하군.”

“마치 있을 수 없는 현상만 모아놓은 곳 같지? 불가능이 가능케 되는 꿈속의 공간.”

“그건 우리를 포함한 이야기인가?”

한 번 죽음을 겪은 존재. 죽음과 생명의 모호한 경계를 걸으며 시련의 참가자들을 인도하고 평가하는, 시간에서 벗어난 이들. 마술사 둘은 고요히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반달처럼 눈꼬리를 휜 리비에르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얼음과 불. 가벼움과 진중함. 섞이려야 섞일 수 없는 두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당장 다른 마술사 아무나 붙잡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도 믿어주는 이는 없을 터였다. 5초 이상이나 말을 나누긴 했냐며 비웃음이나 산다면 모를까. 카이멜의 시선이 다시 불타는 크리스마스트리로 향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고. 정작 환영뿐이라 실제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나.”

“가능성을 실제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하나의 변화일 수도 있으니까.”

손으로 모자에 달린 파란 종이 장미를 만지작거리는 리비에르에게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긍정도, 반박도.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리비에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타오르던 불길이 사라지고 흠집 하나 없는 얼음 나무만이 남았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 어때, 낭비는 아니었지?”

카이멜이 뒤돌아섰다. 불길을 닮은 붉은 머리카락 아래 반투명한 검은색 망토가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변함없이 딱딱했지만 날카롭지는 않았다.

“나쁘지 않은 구경이긴 했네. 이곳의 이상기후처럼.”

별다른 인사 없이 이동 아티팩트를 꺼내든 카이멜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리비에르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하늘로 눈을 돌렸다. 어느덧 저 멀리 번쩍거리던 구름이 잠잠해져 있었다. 아노렐이 페이스리스 정리를 끝내고 돌아오고 있다는 뜻이겠지. 예상대로 몇 분 지나지 않아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끝냈어, 마술사님~! 깔끔하게 전부 싹싹 지져놨지. 어라, 이건 웬 나무래?”

리비에르는 답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었다.

*

그 여름 바다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다. 이 풍경을 과거의 잔상과 겹쳐볼 수 있는 이가 또 남아있으려나, 나는 멍하니 고민한다.

시간에 바랜 추억들, 시간이 강제로 앗아간 기억들. 그 사이에서 나는 흐려지는 파편을 쥐고 표류한다. 그러다 눈에 밟히는 것이 있어 고개를 든다.

하얗고 예쁜 조개껍데기. 세월에 녹아 사라진 얼음 나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지만 조개껍데기 하나가 남아 과거의 시간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에 나는 확신한다. 언젠가 네가 이곳을 다시 찾게 된다면, 너 역시 이 흔적으로 인해 떠올릴 수 있으리라. 수년 전 이상기후 속에서 우리가 보낸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Written 2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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