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칼리 (래디에센트 크로니클)

거미줄에 엉킨 나비

칼리엔 제베라 x 리시안 시나레타

空の上の無慈悲な神々にはどんな叫びも届きはしない

하늘 위의 무자비한 신들에게는 어떤 절규도 닿지 않아

Lacrimosa……

Kalafina :: Lacrimosa

++ 선고 ++

“칼리엔 제베라. 너의 목숨을 거두러 왔다.”

죄였을까. 죄라고 단정 지어지기엔 충분히 억울했을 만도 했다. 칠흑 같은 사제복을 입은 은발의 사내 -얼핏 보기에는 여인 같았지만- 역시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의 앞에 선 사람의 죄목은 무엇이었을까.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던 것? 일말의 경계심 없이 반짝이던 멸망의 파편을 주워든 것? 아니면 그저, 단순하게 운이 없었던 것?

과정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미 판결은 내려져 있었다. 칼리엔 제베라는 균형에 균열을 가져올 존재, 신의 눈에 살아있어서는 안 되는 죄인이었다. 사내, 리시안은 그 판결을 실행할 집행인이자 사신이었다.

안타까움을 느꼈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 흔한 동정심조차도 없었다. 그런 사소한 감정은 리시안에게 주어진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리시안은 그저 무심한 얼굴로 칼리엔을 바라볼 뿐이었다.

칼리엔은 얼어붙은 나비마냥 움직이지 않았다. 두려움에 떠는 기색은 아니었다. 슬픔에, 절망에 잠긴 것도 아니고, 리시안의 수려한 아름다움에 홀린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잠깐 생각에 빠진 듯, 칼리엔은 그의 외모만큼이나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지는 침묵 아래 리시안은 기다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다리에 매인 검의 손잡이를 스쳐 지나갔다. 언제라도 뽑아들 수 있게, 생명을 앗아갈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사형선고를 받은 이가 이내 시린 하늘색 눈을 깜박이고,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대변하듯, 칼리엔의 눈동자에 주황빛이 일렁였다. 새벽의 결정이 그의 푸른 머리카락 위로 쏟아져 내렸다.

“미안. 네게 생명을 넘겨주기엔, 나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완곡한 거절이었다.

++ 상처 ++

쫓고, 쫓기고. 은발의 집행인과 청발의 사형수는 살벌한 추적을 이어갔다. 마치 아이들의 술래잡기와도 같았지만, 놀이라고 하기엔 서로 걸린 조건이 너무 무거웠다.

칼리엔은 잡히는 순간 죽은 목숨이었다. 리시안의 인상으로 보건대 그가 자신을 봐줄 리는 없었다.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짧았지만, 칼리엔은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틀린 적이 없다 자부할 수 있었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달리 없었다.

리시안은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가 자라온 신전에서 그의 실력은 단언컨대 최고였고, 혼돈의 파편을 회수하는 시커(Seeker) 사이에서도 그를 능가하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리시안은 그에게 지시를 내리는 신관을, 더 나아가서는 신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조차 없었다.

조건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우위는 리시안이 잡고 있었다. 그러나 리시안이 끈질긴 만큼 칼리엔은 그를 교묘히 피해 다니는 재주가 있었다. 반나절이라면 끝날 거라는 리시안의 예상과 달리, 그들의 기묘한 대치는 하루 지나 하루 이어졌다.

칼리엔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 지 이틀째. 그들의 거리는 다시 좁혀졌다. 다시 말을 붙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리시안은 그에게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칼리엔은 아니었다. 여전한,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칼리엔이 물어왔다.

“그런데, 네 이름. 난 아직 모르는데. 이런 상황에서 공평을 따지기도 웃기지만, 넌 내 이름 알고 있잖아?”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이 아닌 건 둘째치고, 알고 싶어서 알게 된 것도 아니라고, 리시안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손에 죽게 될 운명인데, 굳이 사형자의 이름을 알아봤자 뭐하겠는가?

그러니, 굳이 자신이 그에게 대답해 준 이유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었겠지.

“…리시안 시나레타. 엘로하임 신전의 사제. 그리고 세계를 조율하는 균형의 데이스, 리브라 님의 대리자다.”

그리고 너의 목숨을 앗아갈 사신이자, 네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을 사람이다. 불친절하고 살벌하기까지 한 대답이었지만, 칼리엔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듯,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또다시 하루, 이틀. 칼리엔이나 리시안이나,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술래잡기를 이어갔지만, 어느 쪽도 진전은 없었다.

어느 쪽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융통성이 없고 감정이 무딘 만큼, 리시안은 똑똑했다. 칼리엔이 계속 도망 다닐지언정,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장소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리시안이 알아채기까지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그는 왜 이곳에 집착하는 걸까. 마을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가끔 지나가는 여행객 말고는 사람도 거의 없는 이곳을. 아, 근처에 작은 마을이 딱 하나 있긴 했다. 얼마 전,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사실 그리 궁금하지는 않았다. 신과 그를 섬기는 신전이 지목한 제거 대상의 사정까지 고려해보기에는 리시안은 말을 완전히 떼기 전부터 신전에 의해 철저하게 교육받아온 사람이었다.

모든 것은 신의, 데이스의 의지에 따라. 균형의 의지에 따라.

그 외의 모든 것은 불필요했다.

사흘, 그리고 나흘째. 거미가 조금씩 거미줄을 치듯, 리시안이 짠 함정에 칼리엔이 걸려들었다.

그러나 거미줄은 나비를 완벽하게 붙들지 못했다.

칼리엔이 반격을 가해올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리시안의 실책이 맞았다. 그러나 매번 공격의 의지 없이 도망만 가던 칼리엔이었던지라, 이번에도 다르지 않으리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솔레유 제국이 망하고, 초능력을 유지하던 황제가 사망하고도 1년이 지난 지금, 그의 초능력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뼛속까지 얼려버릴 듯한 얼음이 눈앞에 서리고, 파고들었다.

“……아.”

누가 흘린 신음이었을까.

방심했다, 자책해봤자 이미 늦었다. 리시안의 왼쪽 눈 아래로 흐르는 피는 허리까지 늘어진 은발을 붉게 적셨다. 추격이 시작된 후로 그가 보이는 첫 표정의 변화였다. 인상을 찡그리며 하나 남은 사파이어색의 눈동자를 올려, 칼리엔을 포착했다.

칼리엔 역시, 사형선고를 받은 당시에도 짓지 않은 당황 서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엉킨 거미줄에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그에게 그만한 상처를 입히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푸른 눈 안에 갇힌 주황색이 격하게 요동쳤으나, 그 혼돈 중 후회는 보이지 않았다.

나비가 처음으로 우위에 선 채, 거미가 나비의 발밑에 놓였을 때. 칼리엔은 망설였다. 리시안은 나중에 회상했다, 그때도 참으로 멍청한 사람이었다고. 사형집행인에게 자비를 보이는 사형수가 어디 있나? 만약 상황이 반대였다면, 리시안은 망설임 없이 칼리엔의 목을 쳤으리라 확신했다.

칼리엔은 뒤돌아서 조용히 사라졌다. 리시안은 뒤쫓지 않았다.

++ 십자가 ++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는 게 맞았으리라. 칼리엔은 씁쓸한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하다가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새빨갛게 번지던 피를 보는 순간, 그의 머리도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리시안은 사라져 있었다. 한쪽 눈에서 피를 흘리던 그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왜인지 그가 죽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알량한 자기 위로라기보단, 동물적인 감각에 의한 추측이었다. 찾아온 태풍의 눈의 고요함은 해방이 아닌, 짧은 휴식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새빨갛게 물든 보석 같은 눈동자. 마찬가지로 붉게 물든 자신의 손.

그때와 너무도 유사한 상황, 너무도 닮은 색이어서. 다시 마주하는 게 두려웠지만,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어서. 칼리엔은 애써 눈을 다시 현실로 돌렸다.

그의 죄책감, 그의 후회. 그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

리시안을 공격했을 때처럼, 손 위로 얼음의 결정을 만들어내 그것을 거울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열심히 보기라도 하면 얼음에 선명하게 비치는 일렁이는 주황색의 빛이 자신의 눈동자에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칼리엔은 주황색이 싫었다. 자신의 눈에 영구적으로 물든 이 주황색이. 자신이 그날, 아무런 의심 없이, 바보같이, 숲 속에서 발견한 보석이 띠고 있던 주황색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못 본 척,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지나쳤을 텐데. 아니, 그 숲 속으로 가지도 않았을 텐데. 설령 주워들었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 재앙을 들고 루리가 기다리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늦은 법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른 사람은 그 누구보다 소중했던 그의 동생이었다.

차라리 자신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자신이 대신 죽고, 동생이, 베루리아가 살아만 있었다면….

‘칼리엔!’

아직도 눈만 감으면 동생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것이 환청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칼리엔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 원망스럽기만 한 주황색 보석을 목걸이로 세공해 베루리아에게 건네줄 때, 타박을 주면서도 얼마나 환하게 웃었던가.

‘곧 다가오는 건 칼리엔 생일인데, 반대로 내 선물을 가져오면 어떡해!’

‘선물을 뭐, 생일에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루리, 마음에 들어?’

‘그럼 당연하지! 색이 정말 예쁘다. 고마워!’

그때 감사의 말이 아닌, 욕설이라도 들었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했을까.

루리의 존재가 칼리엔에게 가지는 의미는,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었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자신을 아무런 편견 없이 온전히 그대로 받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배척받았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칼리엔은 어렸을 때부터 눈치가 비상했다. 자신을 향하던 어색한 미소, 머뭇거리던 말들. 가끔, 뒷담이 들리기도 했다. 칼리엔은 귀를 막고, 눈을 돌렸다.

그렇게 겉돌던 그의 곁에 항상 있어 준 것은 루리뿐이었다. 부모님도, 친구도 아닌, 여동생뿐이었다.

칼리엔. ‘딸’, ‘아가씨’, ‘언니’도 아닌. 자신과는 조금 맞지 않던 그런 호칭보다는, 그가 가장 편해 하는 이름으로 불러준 루리. 세상 그 무엇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루리.

그런 동생에게 자신이 가져다준 것이 파멸뿐이라는 현실이, 칼리엔은 못내 비참했다. 그 보석이, 혼돈의 파편이 동생을 잡아 삼키던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폭주해 마을을 폐허로 불태우고 있는 루리를 향해 손을 뻗어, 불길한 빛을 내고 있던 목걸이를 잡아챘을 때, 목걸이가 끊어지며 보석이 제 손에 닿았을 때. 보석이 빛으로 부서져 제 안에 이상한 힘이 깃드는 것을 느꼈을 때. 실이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무너지는 동생을 안아 들었을 때. 루리의 숨이 멈춘 것을 확인했을 때.

칼리엔의 세상도 무너져 내렸다.

왜 아직도 삶에 집착하는 걸까?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행복했을 정도로, 비참하고 절망스러운데. 내가 이제 너에게 속죄할 방법은, 그 무엇도 없는데.

그날부터 수십, 수백 번도 더 물어온 질문이었다. 수십, 수백 번도 답한 질문이었다.

‘이번 칼리엔의 생일에 특별한 걸 준비해 놨으니까, 꼭 집에 와야 해! 알겠지? 늦으면 안 돼!’

이제는 의미 없는 약속이라 할지라도. 너와의 마지막 약속이었으니까, 꼭 지키고 싶었다.

그래, 그때까지 살자. 우리가 약속했던 박명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이 눈에 담자.

그다음은, 은발의 사신에게 맡겨도 괜찮으리라.

++ 계약 ++

고대하던 날이 밝아왔다. 제아무리 끈질기던 집착을 선보이던 리시안이었어도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지 그 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덕분에 칼리엔은 일시적인 평화일지라도, 조용한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그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고, 칼리엔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생각했다. 자꾸만 후회가 들고, 절망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지금 와서 그래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고 이성적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고작 인간이었기에, 너덜너덜해질 만큼 곱씹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칼리엔은 눈을 깜빡이고 방금 깨어난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떴다. 멍하니 있을 때야 몰랐지만, 지금 의식하고 보니 순수한 백색이 주변에 가득 피어있었다. 겨울인데 꽃이 피다니, 이상할 만도 했지만 그 이상한 힘이 깃든 이후로 수시로 주변에 이상 현상이 일어나곤 했다. 멀쩡하던 물건이 부서진다거나, 타오르던 불이 갑자기 얼어버린다거나.

그래도 이런 건, 나쁘지 않네. 이 꽃 이름이 뭐였더라…. 생긴 것은 마치 데이지 비슷하게 생긴 꽃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거베라(Gerbera). 거베라 꽃.”

한참 후에야 기억났다는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맞아, 거베라. 이것도 루리가 알려줬었지. 우리의 성과 비슷하다면서, 예쁘지 않냐고 물었었지. 그래, 네 말대로 예쁘네. 비록 네 웃음만큼은 아니었을지라도.

아침이 낮이 되고, 낮이 저녁에 자리를 넘겨주고, 저녁이 밤으로 물들어가기까지, 시야를 가득 메운 꽃은 변함이 없었다. 변해가는 하늘의 색만 아니었다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착각을 할 만도 했다.

칼리엔은 회중시계를 하나 꺼내, 작은 딸각 소리와 함께 열어보았다. 유리에 살짝 금이 가고 초침이 더 움직이지 않는 시계는 망가진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칼리엔은 시간이 아닌 무언가를 찾듯,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시계를 선물로 준 이의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듯.

가까스로 눈을 떼 공허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거의 자정일까, 하늘은 이미 어두운 남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으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느낌이었다. 무언가 크게 바뀐 것은 없었지만, 왠지 조금 후련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칼리엔은 기다렸다. 그가 올 것이라, 깊은 곳 어딘가에서 확신하고 있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거베라 꽃의 색을 닮은 하얀 은발이 휘날렸다. 리시안은 칼리엔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소리 없이, 거의 들리지도 않는 발걸음으로 사신은 다가왔다. 귀를 기울여야 간신히 들리는 것은 길게 늘어진 사제의 로브에 꽃이 스치는 소음뿐이었다.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었다. 이미 칼리엔이 도망가지 않으리라 알고 있다는 듯.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리시안은 멈춰 섰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였지만, 리시안이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칼리엔을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칼리엔은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지만, 그 외에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어진 침묵은 고요하고도 고독했다.

“해야 한다던 일은 이제 끝인가?”

마침내 물어본, 간단한 질문이었다. 칼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수려한, 여전히 뒤틀린, 여전히 씁쓸한 웃음이었다. 주황색이 일렁이는 눈이, 붕대를 감지 않은 보석 같은 파란색 눈에 와 닿았다.

“그 눈은 미안해. 이게 나한테도 정말 중요한 거였던지라, 사정을 봐줄 처지는 아니었거든.”

답은 없었다. 어깨를 작게 으쓱이는 것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인지,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했다는 건지 몰랐지만, 적어도 그의 눈에 담긴 것이 원망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왜?”

오히려 궁금증이었다고 하는 게 가까웠으리라. 그러나 차가운 만큼 말이 짧았던 리시안이었던지라, 칼리엔은 그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도망 다녔냐고 묻는 것일까. 아니면 왜 미안해하는 것이냐고 묻는 것일까.

“왜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지?”

칼리엔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챈 리시안이 반복해서 물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칼리엔의 손에 소중하게 들린 망가진 회중시계로 향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집착하고, 정작 본인의 생명에는 그다지 미련 없어 보이니. 그런 모순이 또 있을까 싶어서.”

알고 있었구나. 칼리엔은 쓰게 웃었다. 내가 불러온 재앙을 알고 있었구나. 하긴, 모르는 게 더 이상할 만도 했다.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이유를 모른다면 그것도 웃긴 상황이었겠지. 회복하는 동안 리시안이 머리를 굴려 애써 끼워 맞춘 퍼즐이었다는 것은 몰랐다. 칼리엔은 제 생각의 흐름에 묘한 웃음을 짓고 있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리시안의 눈을 마주쳤다.

아,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건가. 칼리엔은 잠시 고민했다. 마음속으론 답을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그걸 말로 옮기자니 적절한 단어를 찾기가 이상하게 어려웠다.

“내가 온전히 존재하는 이유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그 아이였으니까.”

고민 끝에 부드럽게 나온 답이었다. 썩 만족하진 못했지만, 애초에 사람의 감정을 짧은 단어 몇 개에 담기엔 사람의 언어는 아직 너무나도 부족했다. 리시안 역시 만족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 특유의 무표정은 한치 변함없었지만.

“존재하는 데에 굳이 이유가 필요한가?”

리시안은 팔짱을 꼈다. 마치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는 듯,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조금은 알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생소한 감정이었다.

‘감정은 필요 없다. 궁금해하지 마라. 오로지 네 임무에만 집중해라. 나머지는 전부 불필요한 것이니.’

신관의 높낮이 없는 차가운 목소리가 과거에서 메아리쳤다.

리시안은 여태까지 충실히 그 말에 따랐었다. 애초에 다른 방식의 삶은 알지 못했다. 굳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자면, 신의 명령을 완수하는 것이 전부였다. 칼리엔은 처음으로 그늘 없이, 환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리시안은 다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긍정의 의미였는지, 부정의 의미였는지는 몰랐지만 칼리엔은 상관하지 않았다. 사뿐히 일어서, 나비가 빛으로 날아들듯이, 칼리엔은 리시안에게 다가왔다. 한걸음, 두 걸음.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로. 제아무리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해도 들릴 정도로.

“이제 됐어.”

짧은 속삭임이었지만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제 미련은 없어. 더 이상을 견디기엔 내 손에 묻은 죽음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우니, 그만 끝내줘. 이 기묘한 인연도 여기까지. 그만 안녕을 고하자.

리시안은 그를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 답하지 않았다. 처음 선고를 내렸을 때처럼, 검을 꺼내 칼리엔의 목에 들이대지도 않았다.

칼리엔은 천천히, 자신에게 내밀어진 하얀색을 바라보았다. 창백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하얗고, 거미의 다리를 연상케 하는 가늘고 긴 손가락. 한평생 검을 잡아 온 사람답게 굳은살이 배긴 것이 보인 건, 그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칼리엔에게 내민 것 때문이리라.

“증명해 봐.”

간결한 문장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묵직했다. 칼리엔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무엇을? 소리 없는 물음이었다.

“내게 직접 보여줘 봐. 네가 말하는 그 존재의 의미라는 것.”

1초, 2초. 칼리엔이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마침내 그 뜻을 머리로 받아들인 칼리엔은 쫓길 때도 보이지 않은 사나운 눈빛으로 리시안을 쏘아보았다. 그를 꿰뚫어버릴 듯한 원망 가득한 눈초리에도 리시안은 꿈쩍하지 않았다. 칼리엔은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갑자기 사람을 죽이는 게 무서워지기라도 했어? 아니면 널 귀찮게 한 만큼 내 고통의 시간이라도 늘려보겠다는 뜻이야?”

“죽이지 않겠다고는, 말한 적 없다만.”

그럼 무슨 뜻인데? 가시 돋친 말에도 리시안은 개의치 않았다.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칼리엔의 눈가로 가져가, 스치기 전에 멈추었다. 검지의 끝은, 지금도 일정하지 않게 요동치는 주황색을 가리키고 있었다. 눈을 통해 비치는, 칼리엔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혼돈의 증거였다.

“때가 되면, 네 안에 있는 그 혼돈의 파편은 내가 회수해 가겠다. 네 목숨과 같이.”

칼리엔이 뭐라 반박하기 전에 리시안은 말을 이었다.

“그때까지는 내가 그 혼돈을 최대한 억눌러 주겠다 약속하지. 그 대가로 너는 그 존재의 의미라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면 된다.”

칼리엔은 웃었다. 상황이 유쾌한 것도,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신으로 다가와 사형선고를 내렸던 자가, 지금 와서 살려주겠다며 손을 내미는 아이러니라니. 그것도 대가까지 걸어가며,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에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했다. 무슨 염치로 자신이 이제 와서 살고 싶다 하겠는가.

하지만… 살고 싶었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죽고 싶었지만, 동시에 살고 싶었다. 극히 인간적인 본능이 아니었을까. 애초에 미련이 남았다 하더라도, 단순히 약속 하나 지키겠다고 발악하는 것뿐이었다면, 그리 애써서 도망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리시안의 눈을 앗아가지 않고, 얌전히 목숨을 내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칼리엔은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 리시안의 눈을 쳐다보았다.

내가 너를 믿어도 될까. 네 말대로, 이 혼돈을 감시하고, 때가 되면 이 힘과 함께 내 목숨을 거두어가리라, 믿어도 될까. 내게 언젠가 안식을 주리라 믿어도 될까.

이 손을 내가 잡아도, 괜찮은 걸까.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끝이 서늘한 손끝에 맞닿았다.

선견지명이 있었다면 이 뒤틀린 인연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끊어냈을까. 신을 향한 반항이라 할지라도, 거의 성스럽기까지 한 계약이 맺어지기 전에 뒤돌아설 수 있었을까.

자정이 다가오는 12월 25일. 거미와 나비는 서로의 실에 얽혀들었다.

++ 뒤틀림 ++

그들의 시간은 그 후로 흐르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기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리시안이 알려주었기에 머리로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혼돈의 각성자는 보통 파편을 흡수하면서부터 외관이 그대로 고정된다고. 수십 년이 흘러도 전혀 변하지 않는 사례가 있었다고. 칼리엔의 힘을 안정시키면서 자신 또한 비슷한 영향을 받게 될 거라고, 특유의 무감각한 목소리로 설명했었다.

칼리엔이나, 리시안이나, 그 점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유가 어쨌든, 둘 다 돌아갈 곳이나, 돌아가고 싶은 곳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개인의 시간은 멈추었을지라도, 그들의 상황은 계약이 맺어진 이후 급격히 바뀌었다.

칼리엔은 눈을 굴려 리시안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때와 한치 다름없는 무표정이었다. 저 견고한 얼음에 금이 가는 날이 올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굳이 따지자면…. 칼리엔은 적절한 단어를 찾으려 머리를 굴렸다. 그래, 가면 같았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칼리엔과 다름없는 수배자 신세가 되었음에도 리시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한때는 최고의 시커, 충실한 사제로 불렸었지만 이제 그에게 따라붙는 꼬리표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신을 배신한 자. 파문된 사제. 균형의 반역자.

리시안은 그에 대해 아무 불만도 표하지 않았다. 자신이 포기한 것에 대해 전혀 아쉬움을 내비치지 않았다. 진짜 괜찮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저 내색하지 않는 것인지, 칼리엔은 굳이 알려 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었든, 오롯이 리시안의 선택이었고, 돌이키기엔 늦었으니까.

하지만 좋든 싫든, 칼리엔은 리시안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 수밖에 없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보다 곁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칼리엔의 빠른 눈치까지 계산에 더해지면, 모르는 척 있는 것이 더 힘들었을 수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무표정한 차가운 얼굴을 가면이라 표현했지만, 리시안은 굳이 자신에 대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말이 없어 본인의 입으로 밝히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과 짧은 대답만으로도 칼리엔은 많은 정보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

칼리엔이 내린 결론은, 리시안은 백지와도 비슷한 사람이었다. 검은색 잉크를 잘못 엎질러 얼룩이 지고, 종이가 울었더라도, 아직 많은 부분은 백지로 남아있었다.

리시안에게 호불호라는 것은 생소한 개념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물어도 모른다, 싫어하는 것을 물어도 모른다. 그가 싫거나 귀찮아서 모른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저 23년 동안,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던 거겠지.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싫어한다고 단정 지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의 변화는 미미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감정이 없는 인형이 아닐까, 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런 그를 보고 있자면, 그가 신전에서 어떻게 자라왔을지가 눈에 선했다.

보기 싫다고, 알기 싫다고 해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리시안이 칼리엔에게 요구했던 역할은 어찌 보면 별것 아니었다. 단순하게 보자면 리시안의 옆에서 생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다였다. 하루하루 먹을 음식을 정하고, 입을 옷을 고르고, 책을 보거나, 그들을 쫓는 시커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돌아다닌다거나. 그들이 수배자라는 사실만 빼면, 지극히 소소한 일상이었다.

칼리엔은 그것이 못내 힘들었다.

마치 세상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 보면, 더는 진짜로 평범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 또한 떠올리게 되었으니까. 루리를 잊고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져, 죄악감조차 들기도 했으니까.

그런 칼리엔이 벌인 소소한 심술이었을까. 더 이상 사제복을 입고 다닐 수 없는 리시안의 옷을 골라줄 때, 일부러 루리의 취향이었던 화려한, 프릴과 레이스가 가득한 옷을 골라준 것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잘 어울린다며 리시안에게 떠안긴 것까진 좋았지만, 정작 리시안 본인은 개의치 않아 해서 조금 허탈했었다. 진짜로 어울렸다는 점에서 칼리엔은 심술부리는 것을 포기했다.

저 성격만 아니었다면 꽤 잘 먹힐 얼굴이었을 것 같은데. 칼리엔은 다시 리시안을 곁눈질했다. 칼리엔이 골라준 옷을 순순히 입고 다니는 리시안은 얼핏 봐서 성별을 구분하기 힘든 미인이었다. 하기야, 자신도 외모만으로 성별을 구분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으니 그 점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지만.

그의 성격에 대해 투덜거리긴 했지만, 완전히 나쁘다고 하기엔 미묘했다. 냉정하고, 차갑고, 사회에 온전히 녹아들기엔 미숙한 점도 많았지만,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칼리엔은 자신의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정확하다 자부할 수 있었다.

리시안이 고개를 돌려 칼리엔을 빤히 응시했다. 이제 칼리엔은 어느 정도 그의 무표정에서 하고 싶은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저 눈빛은…. 욕을 하든지 칭찬을 하든지 하나만 하라는 눈빛인데. 내가 소리 내서 말했던가. 칼리엔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떠리, 사실인데.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든지?”

“불만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하다만. 모든 사람이 언젠가 자신을 죽일 이를 악하지 않다 하지는 않을 테고, 네가 생각보다 뒤틀린 미친놈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것 같군.”

가령 이렇게. 성격이 좋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칼리엔은 눈을 휘며 웃었다. 제 눈 하나를 앗아간 사람 옆에서 무언가를 배우겠다고 붙어있는 사람도 결코 제정신은 아니라고 한마디 쏘아붙일까, 고민했다.

말이 많지 않다뿐이지, 리시안은 결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었고, 그나마 칼리엔과 다니며 말이 조금 늘었다는 것은 그가 생각보다 입이 험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같이 다니는 사람이 칼리엔 밖에 없다는 것은, 그 희생양은 오롯이 칼리엔 뿐이라는 뜻이었다.

“뭘 새삼. 너도, 나도, 이 상황도. 이미 모든 것이 뒤틀려있는데.”

마주 욕을 하진 않았지만, 순순히 물러날 만큼 칼리엔 또한 만만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이 이상 말싸움하긴 귀찮았는지, 리시안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 아닌 싸움은 십중팔구 이런 식으로 끝났다.

그래, 이 정도가 딱 좋지. 칼리엔은 새로 태어난 침묵 속에서 생각했다.

손에서 벗어날 정도로 멀지는 않으면서, 언제든 놓아버릴 수 있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자. 너무 가까워지지 않게. 미운 정일지라도, 정을 붙이지 않게.

그래, 그랬어야 했는데.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변화 또한 늘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칼리엔이 더 눈을 돌려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칼리엔은 여전히 깊은 밤의 악몽에 시달렸다. 왜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지 물어본다면, 아직 확실하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리시안과 같이 있는 이상, 살아가는 흉내라도 내야 했으니까. 빈말일지라도, 이제는 괜찮다고 거짓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낫지 못할 상처라도, 주변에 딱지가 앉듯, 완전히 아물지는 않을지라도. 금이 간 미소 뒤에 숨을지라도, 뒤틀린 웃음을 선보일지라도. 칼리엔은 일상을 이어갈 수 있었다.

리시안은 여전히 감정이 무뎠고, 타고난 성격이 냉담하고, 성정이 가차 없었다. 그러나 늘어난 것은 칼리엔의 감정파악 실력뿐만이 아니었다. 미미했지만,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보단 확실히, 리시안의 표현은 늘어갔다. 아직 ‘존재의 의미’라는 거창한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만, 말은 그렇게 할지라도 칼리엔은 그게 그렇게 거창한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가랑비에 젖어 들어가듯, 조금씩 리시안은 ‘존재’하고 있었다. ‘살아가고’ 있었다.

이리 가까워져도 되었을까. 언젠간 나는 목숨을 내놓고, 너는 목숨을 거두어야 하는 입장인데. 이리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져도 괜찮을까.

내가 나를 아는 만큼, 너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네 생각, 네 신념, 네 감정,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만큼 너도 나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너는 여전히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내 목숨을 거둬갈 수 있을까.

손을 내밀면 닿을 정도로, 아무리 작게 불러도 돌아볼 정도로. 그렇게 가까운 거리가 되면.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어도, 괜찮았을까. 칼리엔은 알지 못했다.

“이쯤 하면 괜찮지 않을까. 슬슬 네가 한 약속을 이행해도.”

어느 날, 툭 던진 말이었다. 거의 앞뒤 없는 말이었지만, 리시안은 머리가 좋았고, 칼리엔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아들었다.

“굳이 그 약속을 당장 이행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너는 지금 지극히 자신을 통제할 수 있지 않나.”

그냥 무시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주제가 주제인 만큼, 평소보다 길게 대꾸한 리시안이었다. 칼리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언제까지 이 같잖은 연극을 이어갈 생각이야? 난 내가 알려줄 수 있는 모든 걸 알려줬다고 생각하는데. 이 이상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지쳤다. 한순간의 폭발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차곡차곡 쌓이듯, 눈덩이가 조금씩 불어나듯, 칼리엔은 지쳐가고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칼리엔이 이어가고 있던 것은 일상 같은 연극이었다. 결코 다시 일상이 될 수 없는, 비극이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끝에 서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추락하는 것이 두려워 계속 나아가는 것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차라리 한순간, 추락하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그런 소원을 빌게 될 만큼. 칼리엔은 미치도록 절박했다.

절규를 토해내는 칼리엔을, 리시안은 안대에 숨겨지지 않은 눈 하나로 가만히 응시했다. 무심하게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가느다란 손을 뻗어 탁상에 놓인 유리잔을 집어 들어 고민하듯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청아한 소리가 적막만 남은 방에 울려 퍼질 무렵, 리시안은 입을 열었다.

“연극이 아니면 되지 않나?”

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라 칼리엔은 거절이나 다름없는 그의 답에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리시안은 칼리엔의 황당해 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 그대로 말을 이었다.

“연극이 아니라, 그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라고 말하는 건데. 그것조차 싫다고 하는 건가? 화를 내고 싶으면 내고. 울고 싶으면 울고. 굳이 그 뒤틀린 웃음을 유지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아직도 감정이라는 것을 일절 내비치지 않는 사람에게 저런 말을 듣게 되다니, 내가 인생 헛살았나 보다. 칼리엔은 실소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라…. 그냥 나를 여기서 죽여주는 게,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하면?”

“내가 싫다고 하면?”

칼리엔은 어이가 없었다. 리시안은 진지해 보였다. 하긴, 리시안은 매사에 진지하고 진중했다. 내가 살면서 그가 웃거나 우는 것을 볼 수 있으려나 몰라, 그런 실없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리시안이 지금까지 저렇게 확실하게 무언가를 싫다고 한 적이, 있었던가? 칼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우리의 관계의 전부잖아? 그 약속이 없다면, 이 모든 것에, 여태 해온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글쎄. 아예 의미가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 선명해서.”

말이 짧은 것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무엇이? 보석 같은 푸른색 눈이 칼리엔을 바라보았지만, 리시안은 답하지 않았다.

칼리엔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항복의 의미였다. 임무를 제외하곤 그렇다 할 의지도 보이지 않은 주제에, 왜 여전히 끈질기고 왜 고집은 이렇게 센 걸까.

리시안은 미동 없이 늘어진 칼리엔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약속, 잊은 적 없다. 그게 무슨 위로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지. 칼리엔은 화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해 그저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이번에는 네가 이겼다고 하자. 칼리엔은 허탈한 숨을 뱉었다. 언제가 될지는 불명확하지만, 그때 네가 했던 약속을 이행하리라 믿고, 아직은 네 손에 내 삶도 맡겨두마.

칼리엔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 그가 지금 살아가는 이유는 리시안과 맺은 계약밖에 없었다. 둘, 리시안은 그 계약을 위해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의 삶을 송두리째 버렸다. 셋, 그 계약을 이행하며, 그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가까워졌다.

언젠가는 놓아야 할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리시안이 칼리엔의 목숨을 거둬야 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놓아야 하지만, 과연 온전히 놓아버릴 수 있을까. 칼리엔은 눈을 감았다. 차라리 네가 아무것도 몰랐을 그때, 나를 죽였으면. 그게 낫지 않았을까.

돌아가기엔 늦었다. 이 잔혹한 거미줄에 걸려든 순간부터 필연적인 결과를 향해 엉켜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나비였든, 거미였든. 칼리엔이었든, 리시안이었든.

언젠가는 놓아야 하지만, 온전히 놓을 수 없는. 그런 잔혹한 우연에서 시작된 뒤틀린 이끌림이었다.

++ 의미 ++

얼어붙은 겨울의 박명, 얼어붙은 시간. 우리의 23살은 그날, 그렇게 끝난 동시에, 다시 가느다랗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오직 너에게만 나의 숨을 맡길게. 때가 오면 내 최후를 네가 거둘 수 있도록.

너의 눈은 내가 감겨주리라 약속하지. 그때까지 네 목숨은, 내가 지켜봐.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기꺼이 그 거미줄에 엉켜주리라. 거미줄에 묶인 것은 나비뿐만 아닌, 거미도 마찬가지였으니.

푸른 나비는 거미에게 속삭였다. 그럼 오늘도, 우리 같이 춤을 출까요?

Let us waltz, entangled in the web of fate,’til one of us breathes the last breath.

Kallien Jerbera & Lisian Sinaleta

a Gerbera for your Lisianthus


Written 1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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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로그의 그림은 @Roromiya_nya님의 트레틀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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