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된인격은돌이킬수없습니다
네 아니오 네 선택
좆됐다.
쵸노 로쿠베는 생각했다.
진짜 좆됐다.
로쿠베의 인생이 어디서부터 좆됐는가는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니다. 천부인권의 시대엔 자발적 인간실격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도 마음 고쳐먹으면 사람 구실 하면서 살 수 있을거라 응원해줘야 한다고는 하지만-근데 이것도 걔 옆에 사람이 있어야 해주지-로쿠베의 인생은 하나부터 열까지 꼬여먹은 것밖에 없다. 재기 가능성이 없다니 인생 헛살았다. 따라서 걔의 구질구질한 인생을 나열하는 건 너저분한 시도가 된다. 창작물 속 행복은 다 거기서 거기라 되려 창작된 불행들은 다채롭다는데 현실에서는 불행이야말로 거기서 거기라 서술할 가치도 없어서다. 지면 낭비. 텍스트 하나를 온라인에 남기는 데에 필요한 냉각수의 양을 구하시오. 대충 로쿠베의 인스턴트 자아 어쩌고 번이 손을 든다. 아까운데 넘어가죠? 인스턴트 자아 저쩌고 번이 발언한다. 다수결로 정할까요? 로쿠베의 개처많은 자잘한 자아들이 민주적으로 다수결 처리를 한다. 본인격보다는 신중해서 참 다행이었다. 그들 만장일치로 로쿠베를 서술하기 포기한다. 그러므로 로쿠베란 인간을 알아보려면 차라리 걔가 만들어낸 안티테제 쵸쵸를 살펴보는 게 낫다. 그린 듯한 정상가정 화목한 가족 적당한 인간관계 어쩌고저쩌고….(다시 한 번 말하지만 창작물 속 행복은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런 것들을 네거티브한 방향으로 반전하면 로쿠베가 된다.
로쿠베가 발언한다:“저라고 이렇게 살고 싶었겠어요?”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도 로쿠베는 노력은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 꼬였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의 인생이었다. 일반 사람들 인생을 실로 비유한다면 로쿠베의 인생은 시커먼 면이 된다. 꼬이고 꼬인 실은 점점 표면적을 넓혀가며 어떤 면직물같은 게 되어가는데, 로쿠베는 이제와서는 가위질 한 번으로 싹둑 끊어버릴 수도 없는 인생 경로 위에 놓여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따지는 건 유의미한가? 로쿠베의 최초의 열등감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당장 본인도 기억을 못 하고 있는데 소용이 있을까? 더듬더듬 기억을 되짚는다. 뭐였을까? 엄마의 손을 잡고 유치원 밖을 나가던 여자애였을까, 아니면 형의 등에 업혀있는 남자애였을까, 더운 날 아이스크립을 반반 나눠먹는 사이좋은 친구였을까,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새 란도셀이었을까, 사랑스럽다는 듯 뺨을 부비며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순간들이었을까.
로쿠베가 항의한다:“그 중 하나라도 제 것이었으면 저도 이렇게는 안 됐어요.”
주도권이 없어 버려진 인격들이 다수결로 의견을 모은다:“상관관계는 있을 것 같네요.”
인격 다수의 배려로 로쿠베는 자신의 인생을 서술할 권리를 얻는다.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헛소리와 앞뒤맥락을 상실한 이야기, 예를 들자면 부모님 이혼하신 뒤 재혼을 하셨는데 어머니를 따라갔다고 말했으면서 친아버지 아래에서 자랐다는 들킬 게 뻔한 거짓말이 이어진다.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보기에 좋은 이야기들이나 듣기에 불쌍한 사연같은 것들로 자기를 치장하려고 들면 저렇게 된다.
로쿠베가 변명한다:“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어요.”
인격들이 생략, 아무튼 걔네도 로쿠베라서 로쿠베 편이다. 거짓말을 할 거면 그래도 좀 설득력이 있고, 개연성이 있고, 스스로 설정 붕괴는 안 내도록 해야 했는데 로쿠베는 그럴 정도로 영리하진 못했다. 사실 정말 영리한 사람은 거짓말을 안 한다. 거짓말 없이 적당한 과장이나 센스로 자기를 치장할 줄 아는 사람들은 들킬 게 뻔한 짓은 안 한다. 로쿠베는 했다. 당연하지만 로쿠베는 사람을 끌어내는 힘 같은 게 없으니까. 타고나기를 사람을 이끌어내는 사람들은 로쿠베가 더는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하는-진짜 로쿠베의 사연같은 걸 가지고도 동정과 호감을 얻을 수 있다. 불쌍해, 그래도 좋아해, 만만하게 보는 게 아냐, 장하다, 기특해. 로쿠베는 센스 부족으로 멸시의 대상이 됐다. 거짓말도 더럽게 못 쳐서 허언증 환자라는 비난(당연하지만 순화된 표현이다. 혐오발언을 굳이 리얼리티를 위해 작성할 필요가?)과 불신을 얻었다. 좆됨의 시작. 시발 중간도 아니라고요? 로쿠베가 경악한다. 지 팔자 평생 지가 꼬아먹었으면서 얘는 변화가 없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자아 번호개꽉낌 번이 본인격을 동정한다. 로쿠베는 자기 자신에게라도 동정받아서 기쁘다고 생각했다가, 지 찌꺼기한테 동정받았다는 게 열받아서 해당 인격을 삭제한다. 휴지통으로 이동, 삭제, 정말 삭제하시겠습니까, 삭제된 인격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확인.
로쿠베는 변함이 없다:“그래도 난 노력했다고요.”
찌꺼기 로쿠베들은 기꺼이 본인격에게 동조한다. 삭제되기 싫어서였을 수도 있는데 로쿠베는 신경도 안 쓸거다. 본인격의 횡포에 들고 일어나기엔 찌꺼기들도 본체가 로쿠베라 그런지 좀 허접했다. 로쿠베 인생이 시작부터 꼬여있었는지(뭐 괜찮은 가정이었다면 저딴 인간까진 안 됐겠지만) 쟤의 열등감과 허언증 때문에 화끈하게 망한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아무튼 쟤의 자아형성에 중요했던 어린 시절은 처참했다. 학교 생활? 친구? 또래와의 교류? 어른들의 보호? 상상하기 어렵다. 특출난 것 없는 주제에 꼬이기만 디비지게 꼬인 로쿠베가 공부 때려치지 않는 건 집념이고 걔 최후의 생존본능이다. 불쌍해서 포장도 해주자면 최후의 자기애였다. 나 나를 사랑하고 싶어. 사랑할 수 있는 나를 가지고 싶어. 집중 안 되는 환경에서 뭐라도 해보겠다고 판 게 심리상담인 시점에서 얘가 제대로 된 사람 되긴 글렀다는 게 유감이다. 심리상담이라는 게 멘탈 안 좋은 사람은 시작도 시도도 하지 마세요 라인업 세우면 탑 파이브 안에는 들어가는 건데 걘 그거 알면서 골랐다. 그래도 해낼 수 있다는 근자감이었는지 그래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었는지 아니면 그냥…성적 맞췄는지….(가능성이 있어서 유감….)
공부는 했다. 성적도 나왔다. 자격증도 있다. 근데 알다시피 정신병자들도 상담사 잘못 만나면 더 큰일이 나고 그러지 않던가. 차라리 로쿠베는 합법적으로 남들 팍팍 갈굴 수 있는 입시 강사를 해야 했는데 이상의 자신을 잘못 설정해서 전공을 잘못 골랐다. 파리 휭휭 날리고 자기한테 왔던 환자들이 더 심해져서 폐쇄병동 입원하고 보호자가 울고불고 난리치고 평점 1점 남기는 거 보면서 로쿠베는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당연히 시작부터. 그렇다면 시작이 어디지? 모른다. 로쿠베의 허언증은 걔가 자기 어느 고등학교 나왔는지도 헷갈리게 만들었다. 너 고향이 어디야? 소리 나와도 하는 말이 항상 달랐다. 대답할 때의 억양도 달랐다. 어휘가 달라졌고 말씨가 달라졌다. 남을 속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건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게 되어갈 때쯤,
로쿠베는 기어코 인정한다:“나 못 하겠어! 더는 못 해! 나 나를 사랑할 수 없어!”
부스러기같은 로쿠베들이 박수를 치며 옛날 옛적부터 만들어지고 있던 쵸쵸를 꺼내온다. 진공포장된 예쁜 나방. 로쿠베가 키우던 가장 오래 산 벌레. 봄에 태어났고, 가족과 사이가 좋아 독립하진 않고 가족과 함께 살면서 상담소에서는 출퇴근. 키우는 강아지 이름은 밍키.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다는 설정. 로쿠베는 이상적인 자기 자신과 최악의 자신의 연결고리를 남긴다. 어릴 때는 지금과 많이 다른 성격이었다.
로쿠베는 평생동안 거짓말을 해왔다. 자기 자신도 속이지 못하는 단어들이 섞여서, 문장이 된다고, 남을 속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매력이 없고 센스가 없고 대단히 영리하지도 못한 거짓말쟁이. 그래도 나이를 먹으면서 센스는 배울 수 있었다. 남을 속이고 싶을 땐 그래도 계획이라는 걸 마련할 것. 자기 자신까지도 속일 수 있도록 만들 것. 다행스럽게도 로쿠베는 타고나길 망상꾼이었다.(이거 욕하는 거 아냐? 그러면 당연히 욕이지.) 눈을 감고도 자기가 원하는-사랑할 수 있는 이상적인 나를 상상할 수 있다. 타고나길 조금 우울하게 태어나버린 어린 쵸쵸는 자길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준 부모님의 사랑과 친구들의 관심과 강아지 밍키의 온도로 씩씩한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었어요. 로쿠베에게 주어진 건 죽은 나방 시체뿐이었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스스로도 속일 수 있는 거짓말을 완성하는 마지막 재료:단서를 제거한다.
이때의 단서라는 건 본인격이다. 본인격은 주인격 자리를 거부하고 있다. 로쿠베는 쵸쵸가 주인격이 되고 본인격이 되길 바란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나로 남아줘. 자기애를 담아 기도한다. 그걸 위해선 로쿠베는 주인격에서 내려와야 하고, 본인격 자리도 포기해야 한다. 자발적으로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주인격이 된 쵸쵸는 스스로가 본인격이자 유일무이한 ‘나’라고 생각해버린 탓에 로쿠베같은 하타치 자아의 존재를 몰랐다. 로쿠베는 자기가 지운 꽉끼는 넘버링의 자아처럼 삭제되지도 못하고서 뇌 귀퉁이에서 쵸쵸의 인생을 구경한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사랑받는 나. 로쿠베가 가지고 싶어했던 날들. 로쿠베가 가질 수 없는 날들.
완벽한 ‘나’를 위협하는 불쾌한 일들을.
쓰레기통에서 삭제되지 못한 로쿠베는 썩어도 본인격이다. 걔는 스스로 그 밖으로 나온다. 스위치. 로쿠베가 사랑하는 쵸쵸라면 하지 못했을 일들. 로쿠베가 기꺼이 쵸쵸는 기억하지 못하도록 ‘설정’한 잠깐의 시간.
쵸쵸가 다시 눈을 뜬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로쿠베는 만족한다. 쵸쵸는 정말이지, 로쿠베가 바라온 완벽한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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