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약
동그란 선을 따라 기록된 짧은 유언
Ⅰ
저주는 단숨에 사람을 덮는다. 어느 쪽에서 터져나온 폐단의 고름인지. 혹 시시비비 두어 해명해야 하는 건인지 분간을 하기도 전에 끝나버린 이야기를 아는가. 저주는 한 생의 근본까지도 뒤틀어 바꾼다. 먹어치우거나 불살라버리더라도 뼛조각이나 바닥에 후두둑 떨군 침자국. 하다못해 잿더미나 향 정돈 남기 마련인데 저주는 그럴 가능성을 종결한다. 으레 고통을 가장 치욕스러운 장으로 만들어 감히 관짝 밖으로 이름조차 나돌지 못하게 하거나. 인간이라고 분류된 종에게 기능상의 하자를 주어 제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하거나. 방법이야 다양하겠다마는. 이 이야기는 시작된 적도 없는 감정과 토로에 대한 건이다.
미카엘 랭던은 공방에서 일 하며 생계를 유지해갔다. 스승이 기사이고 뭐고를 다 떠나 아이가 칼을 잡기엔 일렀던 시절. 두터운 손으로 검을 드는 것 보단 돌이나 보석을 갈아 형태를 가공하는 것이 한참 즐거운 시기를 보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검을 잡아 수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으나, 보다 적막을 유지하며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서는 꼭 공방이나 구석에 틀어박혀 작고 오밀조밀한 것을 구현해야만 했다. 여섯 살 아이의 버릇 여든까지 간다지. 붉은 오소리는 손으로 마스터피스를 빚어낸 대장장이었으면서 그 부가적이고 시답잖다고 치부되는 손버릇을 이어가야만 생을 즐겁다 여기는 인간이었다. 그걸 보고 자란 아이가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어쩌면 이치에 맞겠지. 반지도 그의 연장선이었다. 앞뒤의 상황적인 맥락만 없었더라면 영락없이 시대의 풍파를 맞아 고백하는 연인의 처지라도 쟁취했을 터이나, 이 글의 가장 첫 문장처럼. 저주는 단숨에 사람을 덮어버리기에. 애샬 힐을 막아 단편적이고 부질없는 발악이라도 하겠단 마음을 담아 동그란 것을 건넸다. 언어는 단촐하면서도 길다. 지지부진한 맥락에서의 문장들이 어설프다고 느껴질 정도로 호흡이 길어졌다. 그는 기어코 반지 한 쪽을 상대에게 건넸다. 제 의무를 다 한 것 마냥 이후의 처분에 대해선 묻지 않고 제 손가락. 검을 쥐는 평상시엔 목걸이로 걸어 옷 안쪽에 숨기고 다녔다. 약속과 맹세. 왕 앞에서 내건 기어스와는 다른 맥락의 금기를 지니며 살아가는 기분은 어떻냐고? 그럭저럭 버틸만해서...
Ⅱ
절멸의 해 기수에서 살아남은 고작 다섯의 기사들은 몸 어딘가에 새까만 흉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인근 기수나 몇몇 속사정을 아는 자들만 그것이 저주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모두가 그것을 저주라고 생각했다. 명확하게 사연을 아는 것이 앞선 자들에만 한했을 뿐이다.) 낙인 효과의 연장선으로 저주에 닿지 않고자 발악하던 이들은 이윽고 함께 하는 것 조차 거부하게 됐다. 갓 성인도 안 된 병아리들이 짹짹거리지 않고 묵묵히 있는 게 그렇게나 싫었던 걸까. 당대의 기사들에게서 들어볼 수 있는 의견은 몇 없다. 절멸의 해 당시 일어났던 사건에서 살아남은 고참 기사들의 절반 이상은 실종이 됐다. 상부는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제대로 된 조사를 시작했다. 남은 다섯 명의 인원 모두가 일관된 진술과 단 하나의 동일한 태도를 보였다. 전원 기사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적갈색 불곰 또한 -그래, '노란 고양이' 동어 반복이란 생각은 그만하고.- 사건의 생존자였다. 안온한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다 내쫓겨 마주한 큰 도시는 그에게 있어 타국. 불모지와 다를 바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은 한정되어 있음에도 그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 무릇 기사라는 것은 혼자서도 고결해야 하기에. 가장 온전하고 알맞은 형태를 취해야 하기에. 그러면서도 의무를 다 하듯 타인을 위해 온 몸 바쳐야 하기에. 이 기가 찬 행보를 돕는 것은 그의 목 위에 걸린 기어스도 비중을 3할은 차지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선 타인이 있어야 한다. 군중 틈에서 전투를 하는 마니악한 변태가 아닌 한에야 환영하는 의견일리가. 각개전투가 우선시되는 기사들 사이에서 협업이란 희망할 수 없으니 대부분. 사실상 모든 임무와 해결해야 하는 건이 한 사람 분의 결과물을 요구한다. (보통 이 단계에서 견디지 못한 자들은 죽은 채로 발견된다. 기사의 숙명이란. 색깔이 쉬이 바뀌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로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어거지로 타 기사와 협업한다. 혹은 천명에 순응하여 천으로 눈가를 가린 채로 모두의 앞에 나서는 짓거릴 진행한다... 불곰은 제 스승의 기어스를 복기하며 시간을 견뎠다.
마스터피스 :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는 아주 직관적인 이름은 적색이란 이름을 이어둔 자들의 기어스와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비록 표본이 저 자신과 제 스승 뿐이라 하더라도.) 놓지 않으면 이기고, 놓아버리면 그대로 몸 분질러져 죽어버리리라. 기사는 혼자서도 강해야 한다. 그러나 스승님. 혼자서면 결코 공포를 이길 수 없는 자가 기사가 되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는 숨이 끊겼다 싶을 즈음의 처참한 시체를 목도하긴 커녕 터져나가듯 몸이 부풀었다가- 묵음과 함께 '존재함'이 사라지는 장면을 밤잠마다 컬렉션 모음집으로 꺼내보았다. 의지와 다른 행동이었으니 그가 폭력적이고 기괴한 장면에 흥분하는 사람이라는 오해는 우선적으로 종결하겠다. 하여간 그랬다. 겨우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은 기사들은 기사 취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인간은 쇠가 아닌지라 달구고 망치질 한다고 해서 단단해질 수 없다. 고로 포기하거나 선택지에서 제외해야 하는 건들이 존재하게 된다. 그는 인간성 중 한 구석을 도려냈다. 견뎌야만 하는 구석을 인정하거나. 보호함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제거라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것이 제 속성에 안 맞는 일이라 하더라도.
Ⅲ
긴 말을 잘라내어 요점만 말하자면 이러하다. : 적갈색 불곰은 타인을 방관하게 됐다. 목숨에 위협을 주는 행위가 아닌 이상 적당한 거리를 둔 채로 관찰했다. 죽기 직전 어떤 신호를 보내거나 개인의 생리적 욕구가 아슬해지는 선 까지도 시간을 죽였다. 상에서 폭력이나 끔찍한 광경을 목도해도 반다나 아래의 눈은 머리카락에 찔리거나 쓸어오는 바람에 따가워하지도 않은 채로 앞을 담았다. 풍경이라도 되듯 길게 회상을 씹어먹으며 기억을 구체화해 머리 한 켠에 정리해두었다. 고통의 이해는 스승의 죽음을 향한 비명으로 이어진다. 고통에 대한 납득은 유품이라곤 별 같잖지도 않은 무기로 남아버린 주인 빈 무덤 앞에서 널부러져 숨도 못 쉬며 우는 동작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이해하길 포기했다. 단편적인 상황의 맥락만 급히 주워담으며 뜨거운 감자로만 삶 연명하는 소작농 마냥 급급하게 굴었다. 기구하거나 눈꼴시려운 이야기의 주제나 술김에 뱉는 이야깃거리의 주인공으로 전락하는 꼬락서니는 싫다. 부인 또한 이를 싫어했으리라.
깜빡. 기억의 시작부터 끝까지 어거지로 붙잡고 있다가 겨우 떨군 검이 바닥에 묵직하게 떨어짐과 몸 또한 균형을 잃어 지면에 닿는다. 사나흘 후 눈을 떠 들은 소식은 이랬다. 다섯 날의 시간 조각 동안 꼬박 기사 한 명이 성문 앞에서 버티고 선 탓에 마을이 산산조각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사는 기절 후 치료소로 이동되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리더니, 무기와 함께 장소에서 도망쳤다. 당연하지. 그는 무기만 꼴랑 남아 상황 아무것도 모를 필부들이 멋대로 유품을 다룰 생각을 머리 안에서 망상으로 돌려볼까- 어렴풋이 떠올리기만 해도 토가 올라왔다. 숲과 숲 사이의 별 볼일 없는 마을의 주민인 것 마냥 둔갑해 만들어둔 오두막에서 숨을 색색 가다듬는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껏 덮었다 내리며 자각하는 건 또 이러하다. : 적갈색 불곰은 자신 조차 방관하게 됐다. 이렇게 끔찍한 문장을 조성할 의향은 없었는데. 세상 살이가 어디 마음대로 흘러가겠냐마는 이 방향은 더욱 최악 아니던가. 덧대어진 흉이 검게 변하지 않는 걸 확인한 후 천을 덧대어 몸을 가린다. 창문조차 짙은 색 유리와 틀. 그리고 커튼으로 가려진 곳이라 하더라도 불안한 마음은 쉬이 감출 수 없다. 눈 감으면 불안에 헐떡여 심장 소리 주체하질 못하는 박동이 귓가에 그대로 때려 박히는데 어쩔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인 형태의 도피 뿐이다.
성곽을 지켜낸 자가 적갈색 불곰이란 이름의 기사라는 사실은 몇 달 뒤 아름아름 퍼져 하나의 문장으로 자리잡게 됐다. 절멸의 해에서 살아남은 모든 자가 강인함을 얻는 저주를 받았다는 허구가 저속한 자들의 입담을 타고 파도처럼 한때 넘실거리기도 했다.
Ⅳ
곰은 생존자 다섯 중에서도 유난히 과묵했다. 기사명 그대로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무례에도 고개를 숙였다. 상명하복과 위계질서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와 그 족속들 사이에서만 호흡할 수 있는 종 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당대의 가장 강하다 못해 모두를 주먹으로 분질러 질서를 만든 기사와는 결이 달랐다. 고개를 수그리는 것 만이 생의 유지였다. 였다고 대다수가 생각했다. 적갈색 불곰은 목격자라곤 자신을 제외한 한 사람 밖에 없는 숲 속에서 기사의 목을 발로 짓눌렀다. 모욕을 뱉은 자의 사지에 저주를 걸 순 없으니 가장 단순하게 처리라는 방법을 택한 사람 마냥 단칼에 베어낸 그는 피 달라붙은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표범. 잠깐 줄 게 있어."
박자 어긋나게 다가오는 기사에게 무해한 낯을 보인다. 대검을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두고선 빛 받아 반짝이는 구석이 있는 반지 한 쌍을 꺼넨다. 저 먼저 손을 내밀며 때를 기다린다.
"이리 와봐. ... 손가락을 잠깐 내밀어봐. 네가 안 쓰는 손에 잘 맞게 가공해봤는데 크기가 맞을 지 모르겠다."
아. 손을 준다. 상황에 따른 단편적인 생각만 하며 동작을 이어간다. 손가락 사이에 반지를 밀어 넣는다. 혈액이 묻어 떨어지는 것엔 어떤 문제도 없다는 듯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 틈을 문지른다. 다섯 중 둘이 흉을 드러내고 다녔다. 안 드러낸 셋 중 둘 또한 적나라한 문장을 들으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대부분의 생존 수단과 생존 방법이 명확한 태도를 취하는 것과 직결되어서였다. 그러나 적갈색 불곰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제 발이 저린 것들은 언젠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들쑥날쑥 거리며 가장 만만한 것 쫓아 올테니 덫 놓은 채로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인간 사냥과 동물 사냥은 의미와 맥락이 일치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죽기 전에 손가락이라도 잘라서 남겨줘. 이게 있었음을 알고 널 알 수 있도록. 무기가 떨어져 있으면 그거야 말로 끝이라는 걸 알지만 흔적이라도... 아니다. 이게 할 말이 아니지. 나보다 늦게 죽든 일찍 죽든 그건 중요치 않아. 반지랑 함께 끝나주라. 오팔은 검정 속에서도 잘 반짝거리니까 찰나의 순간이라 하더라도 내가 이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같은 기사를 살해한 적갈색 불곰은 희미하게 웃는다. 어쩌면 조금 슬프다는 듯한 낯으로. (자신이 내려친 기사에 대한 건은 당연하게도 아니다.) 기사들의 실종 수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친 것이 본인이라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보다 중한 것은 자신이 상대의 죽음을 알 수 있느냐 없느냐. 등에 이고 갈 시체가 남느냐 아니냐. 이 저주를 풀 방법은 있느냐 없느냐. 혹은,
"내가 죽으면 그 반지를 묻어버려. 그 정도의 값이야. 가볍지... 널 귀찮게 하는 것도 여기까지라고 생각해도 좋아."
자신의 죽음을 새로운 저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라던가. 그 반대의 저주를 걸어도 환영이긴 하겠다마는 표범은 스스로의 언어를 쉽게 꺾지 않는 성질을 지녔으니- 구태여 속을 긁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는 반지를 전해준 후 시체를 처리하긴 커녕 검을 챙겨 몸을 돌려 제 길로 향했다. 피가 말라붙게 되는 가죽 옷은 움직일 때 불편함을 주고 동작에 제한을 주기에 빨리 처리해야만 했다.
Ⅹ
미카엘 랭던은 아무것도 모르던 때를 꿈에서 꿀 때면 몸을 덮은 통증이 심해졌다. 안온한 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서로 다투고 실력을 확인해도 문제 없던 시절. 바보같이 칼을 맞대고 뒤엉켜도 대강 피 내지만 말라는 허술한 걸 규칙 삼아 날뛰던 때. 죽음을 목격함과 죽음을 저지름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고 토로하던 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어둑한 방 안에서 짧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이 이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덧붙임은 없었다. 불필요한 짓을 저지르지 말라는 규범은 진즉에 어겼다. 타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념은 깨부수었고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야 한단 마음은 기어스를 하사 받음과 동시에 땅 속에 묻어버렸다. 사과는 혀 끝에 닿지도 않았다. 모두가 살아가기 위해선 비굴해지는 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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