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불명
헨리즈 멘토즈 아카데미 시절
헨리 펜넬은 스스로가 운이 나쁜 사람 중에서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런 인생을 살아왔다. 문제 인식이 빨라서 큰일이 생기기 전에 대처할 줄은 알았지만, 천성이 무디고 온오프가 수동으로도 가능하여 고민에 매몰되지 않았다.(이게 잘 되지 않으면 빨간약을 먹은 국제노동자당을 창설하고 싶어하는 운동권의 선구자가 되거나 사회부적응자가 된다는 점에서 그는 참으로 사회에 잘 스며들었다고 볼 수 있다.) 남들에게 호의를 사기 쉬운 겉껍데기를 타고났는데, 참 다행스럽게도 여자애로 태어나지는 않아서 실보다는 득을 많이 봤다. 무엇을 하든 그럭저럭 잘 해낼 수 있었고, 누구와도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었으며, 대단히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불행하지도 않았다. 낫-배드와 낫-굿. 헨리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그렇지만 아카데미 생활은 가끔 힘들었다. 첫째, 장학재단이 제일 잘 되어있는 곳답게 빈부의 편차가 너무 컸다. 헨리는 스스로가 가난이나 부모의 부재나 불안정한 생활환경 등을 원인으로 하는 ‘제 잘못이 아닌’ 수치심에 대해서 둔감하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만큼 둔하지는 않았다. 둘째, 일과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하는 건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셋째, 요령만으로는 안 되는 일들이 점점 생기고 있었다. 넷째, 근육이 안 붙었다.(사소하군! 헨리는 적당히 웃어넘기기로 했다.)
블레어 록웰과 대인훈련 과제의 파트너로 만난 건 그런 사소한 불만이 쌓이고 있을 때쯤의 일이었다. 걔랑 친했다는 건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남남이었다. 그래도 헨리는 바쁜 애 치고는 평판이 좋았고, 블레어는 고등부부터 들어온 애 치고는 평판이 좋았다. 게다가 같은 반이었으니 서로의 존재를 인식 정도는 했다. 친하지는 않고,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블레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헨리는 보이는 것보다 남들과 어울리는 걸 별로 안 좋아했다. 블레어는 절친한 사람이 있는 부류인가?) 그래도 좋은 애라는 정도로. 헨리는 블레어에게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이에 대해서는 헨리가 블레어에게 물어본 적이 없으니 한동안은 진상불명이다.
“휴식.”
“벌써?”
“무리~.”
헨리는 바닥에 냅다 드러누워 버린다. 이건 오랜 습관이다. 적당히 무해한 낯짝과 최선을 다해 관리해도 부피감이 늘지 않는 육신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하기도 하는 편법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농땡이를 부리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말 힘들어보이는 사람에게는 쉬어갈 틈을 주려고 한다.(가끔 안 그런 곳도 있다. 고등부 들어온 뒤에 시작했던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는 끔찍했다. 뉴밀리온에서 전기세 아끼느라 선풍기도 안 틀어주는 회사는 망하는 게 낫다.) 블레어는 ‘좋은’ 사람이니, 이 훈련 연습 약속이 끝난 뒤 바로 아르바이트 두 탕 뛰러 가야하는 동급생에게 마냥 박하지는 않으리란 게 헨리의 판단이었다.
판단 그대로, 블레어는 별수 없다는 듯 웃는다. 그 애는 엎어져있는 헨리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고, ‘방금 전보다는 나았다’며 격려도 해주고, 이온음료도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베-풀-었-다보다 나은 표현이 있을 거 같긴 했는데, 헨리는 피곤하면 본격적으로 예민하고 비관적이고 매사에 네거티브해지는 인간이라 어휘력이 영 부족한 상태였다.
“많이 힘들어?”
“어제 기숙사 벽 타고 들어갔어.” 교칙을 개운하게 무시했다는 뜻이다. 블레어는 눈가를 찡그린다.
“위험한 일이야?”
“야간 아르바이트인데.”
“그러니까.”
“위험한 건 안 해. 계약서가 조금 문제긴 해.”
“떼어먹힌 적 있어?”
“몇 번~.”
보다는 자주. 헨리는 ‘유머’와 ‘블랙조크’와 ‘사회고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보려고 노력한다. 별로 안 친한 동급생에겐 ‘블랙조크’까지가 허용선이다. 너무 많은 정보, 는 과하다. 뉴밀리온은 대단히 치안이 좋은 곳은 아니다. 앞뒤를 구분하지 않고 치안이 괜찮은 곳은 블루 노스 정도다. 하지만 이런 것까지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일단, 지금은 좀 네거티브하니까. 이런 개인적인 수치심이나 열등감같은 걸 표현하기에 블레어는 헨리가 보기에도 좋은 애였다.
“지금 하는 곳은 괜찮아?”
“전에 낮에 하던 곳인데 야간 아르바이트생이 무통보로 도망쳐서 땜빵 해주는거라 괜찮아. 유통기한 지난 거 가져가게도 해주고.”
“그건 원래 가져갈 수 있는 거 아냐?”
“돈 내라는 사장도 있어.”
“불법일텐데.” 헨리는 깔깔 웃는다.
“미성년자 야간 아르바이트도 불법 아냐?”
“일단 교칙엔 위반이지.”
“비밀로 해줄래?” 블레어도 따라 웃는다. 헨리는 그게 저 애 나름의 처세-또는 배려-라고 느낀다.
“하는 거 보고?”
“와, 협박.”
“협박일 리가.”
없지. 헨리도 안다. 블레어는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부류다. 그런 사람들을, 헨리는 꽤 좋아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필연적으로 몹시 조심스러워서, 굳이 타인을 자극하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깊어지기는 어렵지만, 멀어지지도 않고, 사교행위를 하기에도 적합했다. 싫어하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인간은 늘 좋아했다….
“체력이 안 좋구나.”
“네가 좋은 거 아냐?”
헨리는 흐물흐물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녁에도 맨정신으로 움직이려면 체력 배분은 잘 해놓는 게 좋다. 그래도 자기 전엔 씻고 옷이 더러워졌으면 세탁실에 돌리고 침대에서 자고 싶지 피곤해서 씻지도 못한 채로 기숙사 침대를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반쯤 핑계다. 헨리는 그냥 체력이 영…안 좋았다. 타고난 신체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헨리는 부루퉁한 얼굴로 블레어를 툭툭 친다.
“치사해. 내가 때려봤자 흔들리지도 않잖아.”
“체격 차이가 있으니까.”
블레어는 순순히 몸을 낮춘다.
“넌 빠르니까, 차라리 머리나 목을 노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연습 중에 건드리기엔 좀 위협적인데.”
헨리는 블레어를 꼿꼿하게 세운다. 무성의하게 몸을 콕콕 찌르자 블레어가 간지럼을 타듯 몸을 움츠린다.
“이런 데 건드리는 건 그대로 할 수는 있을 거 같아.”
“거기도 급소잖아.”
“목보다는 안전할 것 같아.”
“할 수는 있고?”
육탄전으로 싸운다면 헨리는 블레어를 못 이긴다. 초반에 속도로 밀어붙인다해도 유의미한 데미지를 주기 힘들다. 모의 훈련에서 급소를 노리는 것도 영 못해먹을 짓이고, 시도한다 해도 막힐 게 뻔했다. 게다가 얼마 안 지나 헨리가 체력 이슈로 나가떨어져 있을 테니 블레어는 견디기만 해도 판정승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헨리는 요령이 좋다. 요령이 좋고 안목도 있어서, 블레어가 딱 어느 정도의 인간인지도 알았다. 걔의 큰 체격이나 좋은 체력같은 게 부러운 만큼, 걔의 이점이 딱 그 정도라는 것도 알아버리는 거다. 중상위권. 장기적으로는 중위권. 기복 있음. 체력 분배에 약함. 주변 사람을 배려하려고 하는 기질이 있어서 페이스를 휘말릴 가능성이 있음.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의 그런 약점에 대한 인지가 있음.
“그래도 봐달라고는 안 할거잖아.”
그거야 너도 대단하지는 않으니까. 헨리는 이걸 말하지 않을 정도로는 블레어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블레어도 그걸 알았을지도 모르고. 굳이 이런 것들을 말할 사이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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