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의 불씨

2062년, 17살의 8월.

! Trigger Warning : 따돌림, 폭력, 가족 간의 불화 !

고향이란 무엇인가. 태어나고 자란 곳, 대부분의 사람이 유년을 보내는 장소. 혹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간직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장소다.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것이 고향이라는 것이라고, 어릴 적부터 이한은 온갖 책에서 그렇게 배웠다. 그렇다면 자신의 고향은 어디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는 의미로 한정한다면 바닷내음 짙게 풍기는, 산을 쏘다니며 자란 곳이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 속에서부터 그리워하는 곳이라는 의미로는 청운관이 차라리 더 고향 같았다.

이한에게 있어 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란 사람에게 마음붙일 자리 하나 존재하지 않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청산할 수 없었던 과거가 마음붙일 공간을 지옥과도 같이 만들었다. 이한이 청산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를 꺼림칙하게 여긴 이들이 기회도 주지 않고 그저 괴롭히기만 했기에 사과도 하지 못하고, 용서도 받지 못한 채 흘러가게 됐을 뿐. 아마 올해도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늘 가던 아지트 정도이리라.

차 뒷좌석 창문에 기대어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쐬며 시선은 창문 밖의 싱그러운 풍경에 둔 채 상념에 잠겨있던 이한을 깨운 것은 애정어린 목소리였다.

“아가, 김밥 좀 물래?”

긴 회색 머리를 흰 비녀로 쪽지어 올리고 부드럽게 미소 짓는 옅은 노란색의 눈동자가 뒷자리의 이한에게 닿으면 그 속에 숨김없이 깊게 드러난 애정이 드러난다. 그것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한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만 생각하기도 턱없이 짧은 생이건만, 우울감은 이따금 이한의 발목을 잡아채고는 했다.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과 마음이란 것은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고, 어떤 마음은 다른 마음으로 상쇄되기도 했으니까. 바로 지금과 같이.

“두 개만 먹을래. 나중에 밥 물 거다이가.”

“어야. 모지라면 말해래이.”

“알았어.”

어차피 늘 그랬듯 사람을 마주치지는 않을테니, 우울한 생각은 저 멀리 치워버리자고 결론내고 받아든 김밥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깻잎 맛이 먼저 느껴지는 걸 보니 참치 김밥인가. 거리에 들리는 흉흉한 소문들과 다르게 참 평온한 일상이라고 생각하며 김밥을 삼켰다.

“엄마. 아는 잘 지내나.”

“아 누구?”

“내 물어볼 사람이 갸 말고 누가 있는데.”

“함 물어봤다. 하연이 잘 지낸다.”

이한은 그거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잠깐 고민하는 듯이 낮은 침음성을 흘리다가 재차 물었다.

“집엔 별 일 읎고?”

아주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1초도 채 되지 않을 듯한 정적 속에서 이한은 이변을 느꼈다. 입을 떼어 다시 물으려던 그 순간에 이번엔 운전석 쪽에서 굵직한 남성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일도 읎다.”

이한은 생각했다. 대답이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집에 이변이 있다고 실토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게 좋은 일이라면 왜 엄마는 뒷목을 긁적이고, 왜 아빠는 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땀을 닦고 있는가? 혹시 서프라이즈라도 있나? 그럼 차라리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집에 가게 되면 알게 될 일, 무엇하러 굳이 묻는단 말인가?

“없음 말구~”

순간의 긴장감도 그것 때문이려니, 하고 넘기며 이한은 알아채지 못한 척 남은 김밥을 입안에 털어넣고 씹으며 좌석에 늘어졌다. 어릴 적엔 제법 컸던 차가 이젠 비좁기만 했다. 조금 있으면 천장에 머리가 닿겠군. 실없는 생각으로 생각의 물꼬를 트며 산 속의 아지트는 잘 있을지 생각했다. 뒷산 한 구석에 만들어놓아 길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들어가기도 어려운 곳이라 걱정은 없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동생에게도 결국 알려주지 않은 장소가 아니던가. 길에 잡초 많겠지…. 하고싶은 말은 김밥과 함께 목구멍으로 밀어넣고 이한은 눈을 감았다. 실없는 것보다 더 쓸데없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와 다시 우울에 잠길 거 같았다. 잠이라도 청해야 우울의 파도에 쓸려가지 않을터였다.

—그리고 이한이 잠에서 깼을 때 제일 먼저 한 생각은, ‘그냥 꼬치꼬치 캐물어볼 걸 그랬다‘ 였다.

“어머이, 아부지. 지금 내한테 할 말 읎나.”

뭘 던졌는지 깨지고 금이 간 창문에, 그나마 성한 곳도 날계란에 엉망이였다. 담벼락에는 락카로 뿌렸는지 빨갛고 검은 페인트로 쓰인 글자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있었다. 독한 페인트 향이 채 가시지 않은 걸 보니 신나게 날뛰다 차소리가 들리니 도망친 모양이라고 이한은 생각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조용히 움직여 어디선가 커다란 페인트통에 든 신나를 꺼내와 페인트를 닦아내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화가 치솟았다. 그래서 화를 낼 사람이 당신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한은 묵묵히 페인트를 닦아내는 아버지의 손목을 낚아채며 소리를 질렀다.

“닦는 거 보니께 이게 한 두번이 아인갑제? 들었으믄 대답을 해라. 할 말 없냐고!”

“…괘안타. 니 신경쓸 일도 아이고.”

이한은 고개를 돌려 이버지가 닦아내고 있던 글자를 보았다. ‘악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꺼져라’, ‘여기서 나가라’. 단 세문장이지만 누구를 가리켜 말하는 문장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아니, 모른다면 그건 이한의 눈이 옹이구멍이거나, 지금 여기 서있는 사람이 유이한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아버지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지며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허탈하고, 허망했다. 발 딛은 공간이 무너지며 바닥없는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가, 설명해줄테니까는 일단 진정—”

어머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한은 아버지를 두고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검은 야구 모자를 하나 덜렁 쓰고 어머니를 지나쳐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어머니가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잘 들리지는 않았다. 머리 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어떻게든 해야했다. 의심가는 놈은 얼마든지 있었다. 시내에 나가면 누군가는 이 일을 안주 삼아 신나게 떠들 것이고 그러면 범인을 잡아 족칠 수 있을 것이었다.

분노를 품고 뛰쳐나간 이한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보였다. 재빨리 뒤따라나온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그 사나운 기세 하나만으로 아홉시 뉴스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뒤에서 아버지에게 덜컥 끌어안긴 이한은 자리에 멈춘채 씩씩대며 입을 열었다. 부글거리는 열기가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나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아부지, 이거 놔라.”

“못 놓는다. 놔주믄 니 뭐할낀데.”

“놔라, 고마! 뭐할지 다 알면서 지금 사람 약올리나!?”

“알지!! 딸내미가 사고칠 거 알면서 안 막는 아부지가 세상천지 오데있는데?! 가마있어라!”

이한은 발버둥쳤다. 무엇보다 안전하고 안심해야할 공간이 비열한 것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것을 보며 충격먹을 제 가족들을 상상하며 낄낄거렸을 자들을 생각하면 가슴부터 목까지 답답해졌다. 놔라, 놓으라고! 노호성을 지르며 한참을 버둥거리다 끝내 제풀에 지켜 축 늘어졌다.

“다했나.”

이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버지의 손길이 다정하게 등을 두드리면 제방이 허물어진듯 눈물이 났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리없이 울었다. 가자며 손을 잡아 끄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는 어머니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누가 봐도 한바탕 운 것 같은 얼굴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때리고, 아버지는 억울하다며 소리치는 걸 보고 있자면 평소의 집과 다름이 없었다.

이한은 아버지가 급하게 집어던진 것 같은 천쪼가리를 집어들었다. 신나가 묻어 독한 냄새가 나는 것을 벽에 대고 슬슬 문질러 닦아냈다. 번뇌를 닦아낸다고 생각하며 닦아내니 얼마안가 아버지가 장갑 끼고 하라며 장갑을 끼워주고는 다른 천을 가져와 같이 페인트를 닦아냈다.

“다 싸웠어요?”

“싸우기는 무슨. 고마 오해풀고 다 화해했다.”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말 없이 페인트를 닦아내고 깨진 유리 조각을 치워냈다. 깨진 창문에는 대충 시트지를 붙였다. 다음에 유리를 갈아줄 기사님을 부르기로 했다. 낮에 시작한 작업은 해가 슬슬 기울어갈 때쯤에나 끝이 났다. 뒷마무리는 자기들이 하겠다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갔다. 코를 찌르는 신나의 냄새가 손끝에 남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남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참고 넘어가야 하는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독한 향을 오래 맡아서인지 머리가 띵해 생각이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습관적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래, 넘어가는게 맞겠지. 조용히 살고 싶으니까. 그리 마무리 지어지던 이한의 생각은 집에 돌아온 동생을 보고 엎어졌다.

“니… 꼬라지가 이게 뭐고.”

“….”

“유하연. 누가 니 때리나.”

“….”

분명 개학식 때만 해도 멀쩡했던 동생은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다시 만나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맞았는지 붉게 부푼 볼과 터진 입술, 멍든 팔다리와 채 털어내지 못한 여기저기 발자국이 찍힌 옷. 이한은 분노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역시 그냥 나가서 찾아다 다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괴롭히는 건 저 하나면 됐지 도대체 이 죄없는 애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런 꼴을 당해야한단 말인가?

“언니야아….”

기어코 터진 동생의 울음에 이한은 심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상대를 어떻게 해야 처벌할 수 있는지 생각나질 않았다. 우는 동생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리 많이 배우면 뭐하나,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데. 아끼는 동생이 다쳐와도 할 수 있는 게 정말, 하나도 없어서 이한은 그저 동생을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당하고는 살 수가 없다. 그렇게 나가기를 원한다는데 차라리 떠나는 것이 맞겠다 싶었다. 가족들을 모두 모아 회의를 했다. 형제를 제외한 모두가 이사를 가는 것에 동의했다. 이놈은 인생에 도움되는게 없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부모님은 다른 지역의 집을 알아보았고, 우리는 짐을 쌌다. 지금보다는 조금 작지만 괜찮은 아파트로 이사가기로 했다. 형제는 궁시렁거리면서도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연은 등교거부를 하겠다 선언했다. 부모님이 조금 걱정하긴 했지만, 어차피 이사도 가고 전학도 갈 거, 계속 학교에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이 하연의 의견이었다. 전학에 필요한 서류를 떼러 갈 때만 보호자 동반 하에 같이 가기로 했다.

이한은 이사를 가기 전에 고철들을 짊어지고 몰래 밤중에 산에 올랐다. 아지트에 꾸며놓은 수련물품들을 죄 부숴놓기 위해서였다. 원래라면 그대로 둘 생각이었으나, 제 가족들에게 손을 댄 자들 중 하나가 이곳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니 역겨워졌기 때문이다.낮에 다니는 산과 밤에 다니는 산은 느낌부터가 다르다. 괜히 밤중에 숲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사건 사고나 괴담이 많은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눈에 익은 길을 따라 아지트에 도착했다.

체술 수련을 위해 조성해놓았던 물품들을 바라보고, 손 때 묻은 것들을 만지며 추억들을 회상하고는 도술을 이용해 고철을 도끼로 바꾸었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부수어나갔다. 도끼질 한 번에 울분과, 풀지 못한 분노와 좋아하는 곳을 제 손으로 부수고 있다는 슬픔이 거칠게 표현되었다. 땀과 함께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좋았던 시절의 추억인지 알지 못한 채로 이한은 들고 있던 도끼만을 그곳에 남겨두고 떠났다.

그리고 대망의 이사날이 밝았다. 이사짐센터에서 용달차와 함께 사람이 왔다. 이한과 형제는 사람들을 따라 짐을 나르고 옮겼다. 가전제품까지 모두 실은 용달차가 이사짐 박스들과 함께 이사할 곳으로 이동했다. 가족들은 따로 차를 타고 이동하겠다고 했기에 용달차를 따라 출발했다. 이한은 조수석 뒤에, 동생은 가운데에, 형제는 운전석 뒤에 앉았다. 운전대는 아버지가 잡았고 어머니는 익숙하게 조수석에 탔다. 동생이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야 차는 용달차를 따라 출발했다.

사람은 바다가 있는 곳에서 살아야한다는 아버지의 의견과 경상도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어머니의 의견을 따라 이사할 곳은 울산으로 정해졌다. 어머니는 두 사람 다 마침 직장에서 울산으로 발령 명령이 내려와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잘되었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한은 이 지옥같은 이동 시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제와 눈 돌리면 바로 마주볼 수 있는 좁은 공간에 계속 같이 있어야 한다니 이한에게는 그만큼 거지같은 일이 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형제도 같다고 생각했다. 서로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대는 견원지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이한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관심가지지 않으면 상대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지 않은가. 이한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인간의 악의를 간과하고 있었다.

“야, 니 때문에 이게 다 뭔 일이고? 거지같게…”

이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을 찌푸렸다. 웃지 않으면 꽤 매서운 눈매가 인상을 쓰니 험상궂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형제에게 좋은 표정을 지어줄 이유가 없기도 했다.

“딴 사람은 몰라도 니한테 그딴 소리 듣고 싶지 않다. 싸물어라.”

“이게 어딜 오빠한테…!”

형제가 같잖은 권위를 내세우며 손을 휘둘렀다. 가소롭기 짝이 없는 공격이지만 굳이 피할 이유가 없어 손목을 붙들어 손아귀에 힘을 주어 잡은 손목을 비틀었다. 고통에 몸을 비트는 형제에게 슬 몸을 일으켜 나직하게 경고했다. 곧 천장에 닿을 듯한 키와 수련으로 불어난 몸집으로 내려다보는 위압감에 형제는 낭패라는 표정을 하며 굳어있었다.

“오빠같은 소리하고 처자빠짓네. 니가 오빠 노릇을 한 적이 있기는 하나? 양심을 갖다팔아먹었으면 가만히 찌그러져 있어라. 칵 직이삘까보다….”

“아가, 앉아라. 성한이 니도 싸우지 말고!”

어머니가 날카롭게 외치며 싸움을 중재한다. 이한은 형제의 손목을 던지듯 놓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앉아 창 밖을 바라봤다. 제가 무시하던 사람에게 한 방 먹은 형제는 씨근덕거리며 이한을 노려봤다. 둘 사이에 낀 동생만 고역이었다. 주제파악을 못하는 형제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성질머리로 경찰이 되겠다니 잘도 되긋다. 니 그 꼬라지로는 절대 경찰 못된다. 저따구로 구니까 악귀 새끼 소리 듣는기다.”

“…”

하필이면 이한에게 역린인 이야기를 꺼내면서 비열하게 웃는 형제, 성한의 얼굴을 본 동생, 하연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겠구나 생각하며 언니인 이한의 눈치를 보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연은 자신의 언니가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철천지원수를 보는 시선으로 성한을 바라보며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었다. 이한의 기세에 둘을 말리려던 어머니와 운전하는 아버지도 긴장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웃는 건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한 성한 뿐이었다. 불편한 침묵 끝에 지금까지의 모든 분노와 증오를 압축한 것 같은 목소리로 서슬퍼렇게 입을 열었다.

“유성한이 니, 이사 끝나고 보자.”

하연은 조금 놀랐다. 이한이 늘 형제인 성한을 가리켜 이거, 저거라고 하는 것만 보았지 이름을 부르는 것을 처음 들었을 뿐더러, 하필 이름을 부른 상황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라는 게 더욱 놀라웠으나 곧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 공포에 떨었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상대를 확실하게 인식한다는 것. 지금 이한은 성한을 확실하게 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왜? 지금 여서 안하고. 쫄았나?”

눈치는 개나 준 제 큰오빠가 깐죽거리는 걸 들으며 하연은 성한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주둥이라도 닥치면 좀 조용해질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가 고속도로라는 건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지? 내가 니 상대로 아무것도 못할 거 같냐, 이 의료 폐기물보다도 못한 쓰레기야? 여기서 강제로 문 열어서 니 떨굴 수 있는건 나야. 아스팔트에 갈리고 싶거든 계속 그리 깐죽거려라.”

하연은 이한이 저렇게 폭언을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순간 처음 알았다. 하연의 앞에서는 좋은 언니로 있으려 되도록이면 좋은 말만 했었기 때문이다. 하연은 성한이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그의 목젖에 냅다 손날을 날렸다. 힘조절 없이 날아온 공격에 성한은 목을 부여잡고 컥컥거렸다. 처음 남을 공격해본 것이라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던 하연은 당황했으나 정신을 차렸다.

“오빠야는 입 좀 다물고 있어라! 언니야한테 잘한 거 한 개도 없으면서 뭐가 잘났다고 훈계질이고! 내가 다 챙피해죽겠다!”

“커흑, 컥… 너, 이새….”

성한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엔 이한의 손날이 성한의 뒷목에 작렬했다. 힘조절은 했으나 성한이 기절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절하라고 친 것이라 기절하지 않았으면 한 번 더 쳤을 것이었다.

“위험하고로 사람 목젖을 치면 어쩌니. 조심해야지.”

하연은 그제야 제가 아는 언니로 돌아온 이한을 보며 냅다 끌어안았다. 바보멍청이 같은 오빠놈 따위 알 게 뭐람! 그저 이한에게 어리광 부리다가 겨우 입을 뗐다.

“그치만 둘이 싸울까봐 무서웠단 말이야….”

“으응, 그거는 언니야가 미안타.”

“언니야가 뭐하러 사과하는데! 사과는 점마가 해야한다!”

“그건 그렇지. 그래도 니가 나설 필요까지는 없었다. 위험하다이가.”

하연은 도와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혼부터 내는 이한을 불만가득한 얼굴로 보다가 입을 뿌 내밀며 불퉁하게 말했다.

“칫이다 칫.”

“후후, 그랬어요 우리 하연 어린이~?”

이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하연에게 장난을 치며 북북 쓰다듬었다. 거친 손길을 받으면서도 하연은 웃었고, 앞좌석에 타고 있던 부모님도 조금은 평온한 눈길로 둘을 바라보았다. 기절해버린 성한을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성한이 먼저 도를 넘은데다 기절해버렸기에 무어라 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성한은 그날 이사가 끝나도록 일어나지 않았고, 성한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라 모든 것이 끝나있었는데다, 동생들에게 맞은 것이 쪽팔려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성한이 방에 틀어박혔다고 한들 그의 말은 이미 이한의 가슴 깊은 곳을 찔렀다. 이한은 밖에 나다니기는 했으나 수련을 위해서 운동을 하고 돌아오거나 친구를 만나러 나갈뿐, 방에 반쯤 박혀있었다. 상념에 깊이 잠겨 이사온지 5일이 지나도록 누군가를 만나기는 커녕 가족 외의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조금 우울감에 젖어있던 이한은 결심했다. 저 빌어처먹을 작자의 콧대를 아주 확실하게 짓눌러주어야겠다고. 그러려면 부정한 자신의 꿈을 확실하게 이루어야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해야했다. 자신은 꿈을 이루기엔 아직도 한참 모자랐으니까. 더 공부하고, 더 수련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한은 방 밖으로 나섰다. 다시 수련할 때 쓸 물품들을 만들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 이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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