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다짐

7학년 시험 로그

시험이란, 지금까지 배워온 것을 총망라하여 학습의 정도와 성실함을 가늠하게 해주는 지표다. 1학년 때부터 매일매일 쉬지 않고 공부하고, 의화관 기숙사에서 펼쳐지는 보충수업도 빼놓지 않고 들었던 이한에게 객관식부터 서술형까지의 문제가 적힌 시험지는 늘 풀던 문제의 난이도가 조금 올라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를 물으며 옆구리를 찌르면 비명처럼 대답이 터져나올 수준이니 이번 시험도 꽤 무난하게 풀 수 있겠거니 하고 이한은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 논술형 문제에서는 가볍게 날아다니던 펜을 멈추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애의 정신에도 자애를 베풀지 않을 선택이 내포되어 있는지 논하시오

⌈지식의 가치는 실제적 효용가치에 따라 가늠되는지 논하시오⌋

⌈사람을 존경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지 논하시오⌋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 것인지 이에 대해 논하시오⌋

⌈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지 이에 대해 논하시오⌋

5문항 모두 상대의 신념과 생각을 가늠해볼 수 있는 문제. 사람의 속내를 가늠해보며 살아온 세월이 있는 이한에게는 참으로 익숙한 시선의 문제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거울만 들여다 본다면 이 시험의 문제와 비슷한 시선이 그곳에 있지 않았나.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펜 끝으로 시험지를 툭툭 두들긴다. 늘어가는 검은 점들의 갯수만큼 생각이 복잡해져간다. 흘끔, 시선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넉넉한 시간이지만, 문제의 답을 도출하고 적어 제출하기 위해서는 극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각 기숙사의 정신에 깊게 관여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쉽게 답을 내놓기 어려운 질문. 그렇지만 잘만한다면, 할 수 있다면 단 한마디의 답으로 일축하는 것도 가능한 질문이다. 손 안에서 펜이 원을 그리며 핑그르르 돌아간다. 적을 답은 정해져있고, 이한은 늘 그랬듯 답을 적을 것이며, 그 답이 정답인지 아닌지는 이한이 가늠할 것이 아니었다. 손을 떠나면 끝나는 일에 미련을 두는 것은 이한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답을 확정짓고 적을지 말지 생각하는 동안의 고민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빙빙 돌아가던 펜을 바르게 쥐고 천천히 답을 적어나간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과 차별을 두는 성질의 것이다. 모두에게 평등히 사랑을 베푸는 박애라면 모르겠으나, 자애란 만민에 평등한 성질이 아니므로 자애를 베풀지 않을 선택은 당연히 내포되어 있다.⌋

⌈실제적 효용가치라는 단어 자체가 시대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지식이란 가진 자의 실천으로부터 나오므로 가늠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모름지기 도구의 쓸모를 정하는 것은 쥐고 있는 사람의 생각과 경험이므로.⌋

⌈사람을 존경하고 존중하는 것에서 열정을 배제할 수는 없다. 상대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는 항목에 열정 또한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경과 존중에서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배제될 수 있고, 배제 될 수 없는 사안이다.⌋

⌈사회에서의 정의란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를 뜻한다. 사회에서의 자유의 정의는 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이다. 사회 시스템과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용납되는 것이다. 사회적 시스템 안에 있는 것이 자유라고 한다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정의라는 뜻이다. 고로, 정의의 요구는 자유의 요구와 구별될 수 있으나 자유의 요구는 정의의 요구와 구별될 수 없을 때도 있다. 자유라는 것이 정의 안에 속해있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권리의 수호와 이익의 옹호는 같은 뜻일 수 없다. 권리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없거나 손상되면 안되는 필수적 요소에 가깝고, 이익은 없으면 곤란하지만 손상된다고 하여 당장 큰일이 나지는 않는 부수적 요소에 가깝기 때문이다.⌋

답은 제대로 적었는지, 문장에 어색하거나 틀리게 쓴 곳은 없는지 확인한다. 시계를 보니 답을 제출하기까지 아직까지 남은 시간이 있었다. 잠깐 바깥의 하늘을 바라본다. 날씨는 괜찮은지, 도서관까지 가려면 여기서 창문을 여는게 나은지 자잘하기 짝이 없는 작은 고민 사이에 어두운 잡념이 스친다.

‘이렇게 공부하는 의미가 있어? 니가 뭘해도 사람들이 인정해주기나 할 거 같냐고.‘

‘아직도 귀신의 그릇이라고 불리는 주제에...’

듣기 싫은 목소리, 선명하게 스치는 문장에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가 갑자기 튀어나오다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해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문질렀다. 도움을 청했을 때 무시하고 지나쳐버린 멍청이의 말 따위를 깊게 담아두어 뭘 하겠는가? 이한의 머리로는 잘 알고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물리적으로 떨어질래야 떨어지기 힘들어 서로를 상처입히기 쉬운 사이인 형제와 이한 사이에는 더욱. 저딴 말이 대체 뭐라고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혀있는건지. 불쾌하기 짝이 없었고, 생각을 전환할 것이 필요했다. 수련이라도 하러 갈까, 마음을 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답을 제출하고 밖으로 나갔다.

생각을 비워내는데 움직이는 것만큼 좋은게 없어서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동하는 발걸음은 가볍게, 비워낼 마음은 무겁게 가져가며 수련장으로 향했다.

강해질 것이다. 꼭 강해져서 나를 깎아내리는 형제의 모든 말을 나의 힘으로 부정할 것이다.

이 작은 다짐 하나가 그날 이한이 할 수 있었던 생각의 마지막이었다.


공미포 1979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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