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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전문 샘플] Timeline of Love

장르 미공개 드림 - 로맨틱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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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작업물 샘플:

인물: 2인(기본)+1인(추가)

작업 기간: 2주(기본)

글자 수: 10,897자(10,500자 신청)

신청 타입: A. 플롯


Timeline of Love

w. 목화 

 

중학교 1학년, 그 애를 처음 보았다.

반짝이는 무대 위에서 아이들의 격한 환호성과 박수 소리를 한 몸에 받던 밴드부 보컬. 반질거리는 검은색 일렉 기타를 메고 스탠딩 마이크에다 시원한 고음을 내지르는 여자애. 강당에 설치된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전신을 울리는 음악 소리가 터져 나왔고, 정신없는 색색의 조명 사이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개구지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 같기도 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열렬한 환호와 떼창에도 D의 귀에는 오직 스피커를 통해 시원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만 선명하게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다들 즐거운 축제 즐기길 바랄게요!”

밴드부 공연이 끝나고, 열기가 가시지 않은 무대에서 머리 위로 두 팔을 마구 휘저으며 웃는 여자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옆옆 반 애였던 것 같은데. 복도를 오가며 가끔 본 건지, 얼굴이 묘하게 눈에 익었다.

“보컬 누구지? 노래 잘 하네.”

“Y이? 1학년일 걸.”

“Y 찢었다!”

무대 앞을 꽉 채운 학생들 틈바구니에 있으니 자연스레 주변 학생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D는 기타를 정리하며 무대 한쪽으로 들어가는 밴드부 보컬, 아니, Y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노래 잘하네.”

감상이라 해봤자, 그땐 기껏해야 그게 전부였는데.

 

 

-

“여기 자리 있어?”

그렇게 물으며 이미 한 손으로는 책상 의자를 빼는 중인 Y을, D가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오늘이 첫 개시일 빳빳한 새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은 어색했지만, 제 기억이 맞다면 아마 지금 제 앞에 있는 애는 중학교 1학년 때, 축제 무대에서 보았던 그 밴드부 보컬 ‘Y’이 맞을 테니까. 고등학교를 같은 곳으로 왔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D가 어물쩍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부터 지각할 순 없다며, 이른 아침부터 저와 제 형제를 깨우던 아빠 덕분에 텅 빈 교실에 1등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차지한 교실 맨 뒷자리 창가였는데, 교실에 아이들이 점점 들어찰 때까지 내내 비어있던 제 옆자리에 앉는 게 다름 아닌 Y이라니.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D가 책상 아래 놓아두었던 축구공을 발로 빙글빙글 굴리며 Y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이름은 D야. 잘 부탁한다.”

“아, 나는 Y이야! 나도 잘 부탁해.”

‘이미 알고 있지만.’

방긋 웃는 얼굴이 해맑았다. 어깨 위에서 흔들리는 짧은 곱슬머리가 새카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중학교 때 보았던 무대 위 Y의 모습이 떠올랐다. 반짝이는 검은 일렉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던 모습은 잊으려 해야 잊히지도 않을 정도로, D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중학교 1학년 때 축제가 끝난 후로도 가끔 Y의 반 앞을 지나다니며 교실 안쪽을 흘끔댔으나 꼬박꼬박 부 활동을 가는 건지 Y을 쉽게 만날 수는 없었다. 가끔 마주친다고 해도 Y의 주변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북적이는 것도 D가 섣불리 말을 걸지 못했던 이유였고.

‘그 뒤로 중학교 내내 같은 반이 못 돼서 그냥 잊고 살았는데…….’

D가 흘끔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막상 마주하고 보니 어떤 얼굴로,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어 자꾸만 소극적으로 굴게 되었다. 다른 반에 있을 제 쌍둥이 형제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면, 보나 마나 박장대소를 하며 저를 놀렸겠지. D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벚꽃이 피려면 아직 먼 계절이라, 제 의자 뒤에는 노란색 숏패딩이 걸려 있었다. 방금 제 옆자리에 앉던 Y도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있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역시 꽤나 삭막했다. 이른 아침이라 이제 막 해가 뜬 하늘은 옅은 햇빛을 받아 건물과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었고,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뻗은 나뭇가지는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한 상태였으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겨울방학이 끝나 괴로운 마음과 새 학교에서 맞는 새학기가 기대되어 설레는 마음이 공존했는데. Y과 재회하자마자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이놈들아, 선생님 왔다~. 자, 다들 자리에 앉고!”

앞문을 요란스레 열고 들어온 선생님이 두꺼운 출석부로 교탁을 탁탁 내리쳤다. 교실 곳곳에 삼삼오오 몰려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각자 자리로 흩어졌다. 야, 이따 점심때 축구 할 거지? D의 앞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아이가 D에게 속닥였다.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라 자주 어울렸던 친구였다. 모르는 얼굴들이 가득한 교실에서, Y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D가 유일하게 아는 얼굴이었다.

“당연하지, 야, 지금은 앞에 보고.”

D가 몸을 낮춰 앞자리 친구를 향해 키득거렸다. 고등학교에 올라갔으니 이제 정신 차리고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아빠의 말은 이미 옛날 옛적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지 오래였다.

“자, 칠판에 쓴 선생님 이름이랑 전화번호! 지금 각자 폰에 저장해둬라. 선생님은 체육 선생님이고, 올 한 해 동안 너네의 담임 선생님을 맡았어요.”

꽤 호쾌한 말투의 선생님이었다. D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교탁 앞에 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선생님은 남색 츄리닝에 갈색 누빔조끼를 입고 있었다. 표정 변화가 적은 얼굴로, 몇 번이고 말해 본 적 있는 것처럼 준비해온 멘트를 줄줄 읊고 있는 모습이 퍽 따분해보이기도 했다. 하기사 읊고 있는 내용이 그렇긴 했다. 조례와 종례는 어떻게 할 건지, 오늘은 곧 교실에 있는 TV로 개학식을 진행할 테니 그때까지 자리에 얌전히 앉아서 자습을 해야 한다는 등의 안내 같은 거. 딱 봐도 지루한 시간이 되겠구나, 싶은 생각에 D가 책상에 턱을 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넌 선생님 번호 저장 안 해?”

“어? 아……. 귀찮은데, 네가 보내주면 안 되냐?”

문득 옆에서 자그만 목소리로 물어오는 Y에, D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제 입으로 그 말을 내뱉고 딱 5초 만에 D는 제가 방금 내뱉은 말이 소위 말하는 ‘번따’의 멘트처럼 들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헉, 짧은 숨을 들이켰다. 미친, 나 지금 되게 저질스럽지 않았나? D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럼 네 번호 먼저 찍어줘. 선생님 연락처 보내줄게.”

다행히 제 멘트를 그저 별생각 없이 받아들인 건지, Y은 아무렇지 않게 D의 책상 위로 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키패드 화면이 켜진 휴대전화가 제 앞에 들이 밀어지자, D는 태연해 보이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느리게 Y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Y의 손에 있을 땐 그저 평범한 크기로 보였던 휴대전화가, 제 손에 들어오니 그렇게 작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얘는 폰 케이스도 검은색이네. D가 톡톡, 가볍게 화면을 눌러 제 번호를 입력하며 Y의 매끈한 휴대전화 뒷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너 방금 나한테 번호 따 가는 사람 같았어. 되게 웃긴다.”

17살, 고등학교에 등교한 첫날, D는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콱 죽고 싶었다. 미친.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네, 쟤. 어릴 때부터 워낙 오래 알고 지낸 탓에 가끔은 친누나 같기도 한 소꿉친구를 두어서, 웬만하면 낯설고 어색하다는 이유로 여자애들한테 바보짓 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었는데. 그 근거 없는 자신감도 오늘부로 끝인 모양이었다.

S는 여자애들 앞에서 당황하는 일도 잘 없던데. 걘 여자애들한테 뭐 어떻게 했더라? 제 번호를 끝까지 입력한 Y의 휴대전화를 Y의 책상 위로 도로 밀며, D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S는 너랑 생긴 게 다른 거고, 멍청아! 제게 촌철살인을 마다하지 않던 소꿉친구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듯했지만, 깔끔히 무시하기로 했다.

“선생님 연락처 초코초코톡으로 보냈는데, 갔어?”

“어? 어어, 왔다. 땡큐.”

화끈거리는 두 귀를 만지작거리며, D가 제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프로필 사진이 초코초코톡 채팅방 목록에 떠 있었다. D는 자연스레 Y의 프로필을 친구 추가하고, Y이 보내준 담임 선생님의 연락처를 휴대전화 전화번호부에 저장했다. 그리고 무심코 다시 초코초코톡으로 접속한 D의 눈에 손톱만 하게 떠 있는 Y의 프로필 사진이 들어왔다. 사진 속 번쩍이는 보라색 빛이 시선을 잡아끌어, D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와, 공연하는 사진이야?”

“어? 아, 그 사진.”

응, 사실 나, 중학교 때 밴드부 보컬 했었거든. D의 휴대전화 화면에 가득 뜬 사진을 확인하고, Y이 멋쩍은 듯 웃으며 속삭였다. 이미 그 사실도 알고 있지만, D는 그 사실을 Y에게 말하진 않았다. 괜히 Y의 말을 자르고 아는 체를 하는 꼴이 날까 걱정이 되었던 것도 있고, 아까 그렇게 초면인 척 통성명과 인사를 했는데 왜 모른 척 했냐며 Y이 제게 묻기라도 하면 무어라 답을 해야 좋을지 생각해둔 게 없어서였다.

“너 중학교 어디 나왔어?”

“대도 중학교. 너는?”

“나도 대도 중학교! 어쩐지, 복도에서 몇 번 본 것 같아서. 나 몰라?”

“어어……, 글쎄, 난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거짓말이었다. 아, D, 이렇게 차곡차곡 업보 쌓아서 뭐 어쩌자는 건데. D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나마 전한 진실은 제가 음악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거였다. 음악이야 S가 자주 듣지. 저는 그냥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의 신곡이 나왔다고 I가 흥얼거리는 걸 옆에서 귀동냥하거나, 심심할 때 음악 차트에 있는 곡을 랜덤 재생시켜 놓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우리 반은 지금부터 나눠주는 거 뒤로 넘기고, 바로 작성하면 됩니다.”

맨 뒷자리에서 상체를 책상에 바짝 붙이고 수다를 떠느라 선생님이 여태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들은 게 없는데, 앞자리로부터 팔락거리며 넘겨지는 종잇장 소리에 D와 Y이 동시에 당황한 얼굴을 했다. 뭐? 뭘 작성하라고?

“하나는 본인 비상 연락처! 본인 폰 번호랑, 부모님 번호,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집 주소 적는 거다. 꼭 하다가 지 이름 빼먹고 번호만 달랑 적어 내는 놈들이 있는데 정신 차리고 적어라, 알겠냐?”

네에. ‘이름’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며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고 강조하는 선생님의 농담 섞인 어조에 교실 여기저기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D와 Y은 각자 가방을 열어 황급히 필통을 꺼냈고, 그러는 동안에도 선생님은 쉬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두 번째 거는, 진로 희망 조사서인데 이건 지금 적지 말고! 부모님과 상의 하고 적어라! 거기! 니 맘대로 적는 너! 지금 적는 거 아니라고요. 아시겠어요?”

어우. 진로 희망 조사서라는 말을 듣자마자 D가 얼굴을 와그작 찌푸렸다. 타이밍 좋게, 비상 연락처를 적는 종이와 진로 희망 조사서가 함께 맨 뒷줄로 넘어왔다. Y과 제 책상 위로 종이 4장을 나누며 D가 신경질적으로 샤프를 달각였다. 진로 조사서를 집에 들고 갔을 때, 아빠와 제 형제로부터 들을 말이 안 봐도 비디오라. 벌써부터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었다.

“왜?”

“나중에 커서 뭐하지, 싶어서.”

“좋아하는 거 없어? 축구라든가.”

아까 앞자리 애랑 말하는 걸 들은 건가? D가 눈썹을 들썩였다. 뭐, 축구를 좋아하긴 하는데. 치킨 좋아한다고 치킨집 사장하고 싶진 않은 그런 거라. Y이 D의 두루뭉술한 설명을 알아들은 건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비상 연락망에 제 이름과 번호를 끄적이는 Y의 옆모습을 D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는 뭐 하고 싶은데?”

“나?”

“그리고 마지막 장! 이거는 오늘 종례 때 걷을 거니까 오늘 하루 천천히 생각해보고 적으면 된다!”

Y이 D의 질문에 답하려 입을 막 떼었을 때, 담임 선생님이 교탁 앞에서 종이 한 장을 팔락이며 내지른 외침에 두 사람 모두 일제히 교실 앞쪽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선생님의 손에 들린 건 하얀색 A4 용지였고, 그 안에는 반듯한 네모 칸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 위에 굵은 글씨로 쓰인 짧은 문구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침 앞자리에서 D와 Y을 향해 A4용지 두 장을 전달해주어서, D와 Y은 냉큼 종이를 받아들고 그 내용을 확인했다. 「희망 동아리 조사서」. 종이 상단에 적힌 문구는 그랬다.

“……난, 밴드부 적어야지.”

샤프를 고쳐잡는 Y의 얼굴이 자신만만했다.

 

 

-

시간은 버거울 정도로 빠르게 흘렀다. 아무래도 3월 모의고사 이후로 그렇게 된 것 같다고, D는 생각했다. 처음 응시해본 모의고사와 처음 받아보는 성적에 D를 된통 혼낸 W은, 더는 안 되겠다며 D를 N가 다니는 수학 학원에 등록해버렸다.

‘그 학원은 N니까 다니는 거라고…….’

빡세기로 유명한 학원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끔찍하리만큼 많은 양의 숙제를 받아온 D가 묵직한 책가방의 무게를 느끼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둑해진 길거리에 하나둘 가로등이 켜지는 중이었다. 가로수로 선 벚나무의 나뭇가지에는 작은 꽃봉오리들이 맺혀 있었다. 곧 봄인데. 나는 학교에서 썩고, 학원에서까지 썩는 비운의 K-고딩 신세구나. D의 양 눈썹이 끝을 모르고 늘어졌다.

‘Y은 수업 끝나고 맨날 밴드부 가는 것 같던데.’

D가 운동화 코로 길가에 있던 돌멩이를 툭, 걷어차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새학기가 막 시작되었을 때보다야 Y과 좀 더 친해진 편이었지만, 여전히 Y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학교 수업이 끝나고는 언제나 후다닥 교실을 벗어났다. 하교라도 같이 하면 좋을 텐데. 아이들의 자리 배치에 큰 관심이 없던 담임 선생님 덕분에, 아이들은 첫날 등교해서 앉았던 자리 그대로 수업을 듣게 되었다. D와 Y은 3월이 끝나가는 지금까지 여전히 짝궁이었고, D 역시 그 사실에 퍽 만족하는 중이었으나 정작 Y이 수업만 끝나면 어디론가 자꾸 사라져 버리니까. 기껏 같은 학교, 같은 반, 심지어 짝꿍까지 되었는데 아쉬운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까지 혼자 가는 거네, 나…….’

오늘은 하필, Q도 점검을 해야 한다며 저를 데리러 오지 못했다. N는 아직도 학원에, S는 오늘 L 박사님이랑 어디 간다고 했던가. I도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바빴다. 이렇게 혼자 터덜터덜 하교하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래, 좀 외롭기도 하다. 인정. D가 입을 닷 발 내민 채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저 앞 사거리에서 이는 소란을 알아챈 것도 그때였다.

“또봇 P, 실드!”

……또봇? 사거리 쪽에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에 D가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제가 잘못 들었나? 제 귀를 의심하기도 전에,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사거리를 죄 감쌀 정도로 환한 빛이 번쩍였다.

D가 냉큼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엑스나 제트, 디도 아니고 P? 처음 듣는데. 내가 모르는 또봇이 있다고? 아빠가 새로 만드신 건가? 사거리까지 뛰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쳤다.

“역시 Y이네요, 옳은 판단이었네요.”

“뭘, 네가 잘한 덕이지. P, 가서 전복된 자동차 먼저 도와줘.”

“역시, 좋은 생각인 것 같네요.”

사거리 한가운데를 성큼성큼 가로지르는 것은, 로봇이었다. 그것도, 타이어 바퀴를 달고 얼굴에 알파벳 F가 그려진, 연노란색 또봇. 처음 보는 또봇의 모습에 D의 두 눈이 반짝였다. 헐, 멋진데?

“P, 네 왼쪽에 있는 전봇대도 세워야 할 것 같아.”

“역시, 주시하고 있었다네요.”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또봇을 멍하니 구경하던 D가 황급히 주변을 D번거렸다. 저 P라는 또봇이 멋지긴 하지만, 또봇은 아빠랑 L 박사님이 만드신 거라고. 두 분이 만드셨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저 P라는 또봇은 이 주변 어디엔가 있을 파일럿과 대화하고 있었다. 그 파일럿을 찾기 전엔 이대로 집에 못 간다. D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보다, 좀 전에 쟤, 파일럿 부를 때 ‘Y’이라고 하지 않았나?’

D가 한발 늦게 얼굴을 찌푸렸다. 3중 추돌 사고가 난 사거리에는 몰려든 구경꾼들이 꽤 많았기에, 그 틈에서 또봇의 파일럿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찾기란 꽤 어려울 것 같았다.

“……찾았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찾는 건, 이 D 님에게 누워서 떡 먹기지. D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길 건너편에, 검은 곱슬 단발머리를 한 여자애의, 아니, Y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Y, 역시 경찰이 온 것 같네요.”

“아, 응. 위험해 보이는 건 다 치웠으니까 우리도 슬슬 가자.”

또봇 P, 비클 모드! 거리 복판에 있던 커다란 로봇이 잽싸게 그곳을 벗어나 골목길로 진입했다. 거대한 로봇 형태의 몸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연노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역시 오늘도 수고했네요, Y.”

“너도. 빨리 집에 가서 쉬―,”

“Y!”

지프차 뒷좌석 문이 열리고, Y이 그 안으로 막 올라타려던 순간이었다. Y은 제 손목을 강하게 붙잡는 힘에 이끌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제 손목을 붙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사람은, 다름 아닌 제 짝꿍이었다. 이마가 드러난 짧은 앞머리에 커다란 갈색 눈, 항상 입고 다니는 노란색 바람막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너 뭐야?”

“뭐, 뭐가?”

“너 또봇 파일, 으읍!”

D의 입에서 튀어나온 ‘또봇’이라는 단어에, Y이 황급히 제 손으로 D의 입을 틀어막았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아, 세상에. 다 봤구나. Y이 제 등 뒤를 흘끔거렸다. P야 알아서 또봇이 아닌 척, 얌전히 있겠지만, 제 앞의 이 애가 과연 잘 속아 넘어갈지가 문제였다. 평소에도 장난기와 호기심이 많아서 한 번 꽂히면 그냥 지나치는 게 잘 안 되는 애인데. Y의 사고회로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푸하! 야, 그렇다고 냅다 입을 막는 게 어딨냐? 에퉤퉤.”

“아니, 네가 먼저…….”

“맞지? 또봇 파일럿.”

재차 그렇게 묻는 D는 어딘가 묘하게 들떠 보였다. Y이 입술 안쪽 살을 짓씹었다. 완전한 확신을 가진 말투다, 저건. 잡아뗀다고 잡아 떼 지는 게 아니라. 다시금 P를 곁눈질로 돌아보아도 차체를 으쓱일 뿐, 별다른 도움을 주진 않았다. 그래, 물론 이 상황에서 P가 입을 열어봤자 D의 호기심만 더 자극할 거 뻔하긴 한데.

“내가 또봇 파일럿이라고 어떻게 확신해?”

“딱 보면 모르냐? 여기서 얼굴도 안 가리고 이러고 있는데.”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Y의 손목을 놓아주고 제 양손은 바지 주머니에 푹 찔러넣은 채 상체를 뒤로 빼는 D의 모습은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었다.

“학교 끝나면 맨날 쏜살같이 사라지길래 부활동 하는 줄 알았는데. 매번 이러고 있었구만.”

“밴드 활동도 성실하게 하거든! D 너야말로 학원 가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땡땡이치고 있었구나.”

“야, 나 지금 학원에서 4시간 동안 문제만 풀다 나왔어!”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는 두 아이를 두고, P는 잠자코 Y이 이 자리를 벗어날 타이밍만 기다렸다. D라면, 학교 교문 근처에서 Y과 함께 있는 걸 멀리서 보거나 Y의 입을 통해 들은 게 다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앳되고 개구진 이미지의 소년이었다.

“아, 됐어. 그래. 나 또봇 파일럿인데, 왜?”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딱 보면 알지.”

“넌 또봇 파일럿도 아닌데 뭘 딱 보면 안다는 거야?”

합. Y의 날카로운 질문에 D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또봇 파일럿이라 해도 저 또봇이 어디서 왔는지, Y이 어떻게 또봇 파일럿인지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같은 또봇 파일럿이란 말만 듣고 섣불리 정체를 밝혔다간, W에게 3월 모의고사에서 처참한 점수를 받았을 때보다 배는 더 혼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D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 그러니까.

“패, 팬! 팬이라서! 내가 사실 또봇의 엄청난 팬이거든!”

“……팬?”

“어어, 맞아. 특히 Q를 좋아하는데, 나 팬카페에 가입도 돼 있어.”

“언제 적 또봇 팬카페야?”

“야, 무시하냐?”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Y이 눈을 가늘게 뜨고 D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누가 봐도 수상하다는 의미를 담은 눈빛에, D는 Y이 알지 못하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넘어가라, 제발.

“……너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된다?”

“아, 당연하지.”

“진짜로?”

“그렇다니까.”

제가 의심을 거두었다는 판단이 든 건지, D는 활짝 웃으며 위아래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더 이상 붙잡고 추궁하기도 어려워졌다. 내가 이래 봬도 입은 꽤 무거워.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기껏 놓았던 마음도 다시 덜덜 떨며 들어올려야 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한 번 믿어봐야지. Y이 애써 웃어 보였다.

“……집 가, 여기 사고 현장이라 위험하니까.”

“알았어, 너도 조심히 가고. 또봇 P랬나? Y 잘 데리고 들어가라~.”

D는 P의 답변을 듣지도 않고, 냉큼 뒤돌아 제가 온 길을 되짚어 걸었다. 그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Y이 P에 올라탄 후 슬쩍 창밖을 내다보면 D는 그새 사거리에서 벗어난 건지, 더는 육안으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역시, Y이 말하던 D를 오늘 처음 보는 거네요.”

내내 침묵을 지키던 P가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뒷좌석 시트에 몸을 기댄 Y에게 안전 벨트를 매준 P가 천천히 출발했다. D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해서 바라보던 Y의 시야 역시 함께 움직였다.

“어때, 잘생겼지?”

“역시, Y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랑 고민을 늘어놓을 때부터 예상은 했네요.”

“왜? 별로야?”

“역시, 전 Y과 언제나 한마음 한뜻이네요.”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D의 앞에서 진땀을 뻘뻘 흘리며 투닥대던 게 언제냐는 듯, Y은 신이 나서 몸을 들썩였다. 걔가, 축구를 진짜 잘하거든. 저번 주 체육 시간에 걔가 골 넣던 걸 너도 봤어야 하는 건데! Y이 봇물 터지듯 주절주절 D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잔뜩 흥분한 Y의 작은 두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Y의 집으로 향하는 익숙한 도로를 달리며, P는 Y과 함께 웃고 떠들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중학교 1학년. 새로운 학교와 새로운 친구에 대한 설렘과 긴장을 한아름 안고 입학했던 제 어린 파트너는 입학식 첫날, 하교 후 저를 보자마자 이렇게 외쳤었다.

‘나, 좋아하는 애가 생긴 것 같아!’

역시 첫사랑이라는 건 낭만적이네요. 몇 년 전, 앳되었던 Y을 떠올리며 P가 작게 웃었다. 자동차 뒷좌석에서 두 주먹을 꼭 쥐고 재잘재잘 쉼 없이 D에 대한 말을 늘어놓는 Y의 감정에 반응해, P의 마인드코어도 함께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첫눈에 반하면, 이렇게나 좋아하게 되는 건가 봐.”

수줍은 듯 중얼거리는 제 파일럿을 두고, P는 그저 말없이 웃길 택했다. 너를 보던 그 애 역시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어, 라는 말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해도 괜찮겠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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