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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의 스테레오타입 요건은 다음과 같다. 머리가 좋고, 많은 걸 귀찮아하며, 남들이 굳이 저런 걸 좋아하냐 싶은 걸 좋아하고, 관심 분야에 대해서만 말이 많으며, 사람을 대하는 데에 서투르다. 레너드는 너드고 머리가 좋고 귀차니스트인데다 코믹스와 테이블 알피지를 좋아했다. TRPG가 사람을 필요로 하는 콘텐츠임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최소한의 사회-사교성 유지의 동기가 되므로.
아무튼 그런 관심분야적인 사유로 레너드는 21세기의 넓어진 히어로 스펙트럼 속에서도 ‘정도’의 히어로가 무엇인지는 알았다.
“선배는 가끔 오래 살기 힘들어 보여요.”
“엉?”
페퍼의 멜팅 치즈 어쩌고 샌드위치의 소스가 뚝뚝 떨어진다. 파트너의 맥락을 폴짝 뛰어버린 발언에 대한 페퍼의 당혹감 표현으로는 손색이 없으나 축축해진 종이 포장과 빵 사이로 흐물흐물 빠져나가는 베이컨의 모양새를 본다면 불만족스러운 점심시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레너드는 “선배, 채식하시기엔 이미 늦었는데요.” 라고 말을 해주는 것으로 페퍼의 돈 내고 추가한 베이컨이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지는 걸 막아줬다.
페퍼는 베이컨을 우물거리면서 묻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레니?”
레너드는 페퍼의 얼굴에 묻은 할라피뇨 치즈 소스를 냅킨으로 북북 닦으면서 대답한다. “말 그대로인데요.”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인데 레너드는 초장부터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진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페퍼는 레너드의 말을 오해하거나 곡해하지 않는다. 성격 반대인 인간들이 파트너로 잘 일하려면 소통 측면에서는 결이 맞아야 하는데 둘은 이런 부분은 잘 맞았다. 말에 악의는 없는 인간과, 굳이 맥락을 추론해가면서 사서 걱정하지 않는 인간.
“우리 일 위험한 건 하루 이틀 일 아니지 않아?”
“그걸 고려하더라도요.” 잠깐의 공백. 레너드는 커피를 쪽 빨아마신다. 페퍼는 그 사이에 두 번째 샌드위치의 종이포장을 뜯는다.
“선배에게 사명이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사레가 들린 소리. 페퍼는 아주 조금쯤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레너드가 묻는다. 진심으로 의문스러운 목소리라서-레너드로서는 아주아주 드물게도-페퍼는 상처받았다. 생채기 수준으로는.
“있었어요?”
“그건 아니긴 한데.”
“그럼 됐잖아요.”
“아니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페퍼는 항의를 시도한다. 내용물이 없는 대화라 하더라도 감정을 고려해줄 것에 대한 호소였는데 지면 할당의 가치가 없어 적당히 넘기기로 했다. 어수선한 대화가 이어지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레너드의 개인적 판단: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사명감 때문에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은 오래 못 버틴다고 봐요.”
페퍼의 반박:
“보통은 사명감 때문에 버틴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논리라면 일단 저는 퇴사했죠.”
“레니 나 버리고 갈 거야?”
“집세 내야해서 퇴사는 안 해요.”
빌딩 지하 100층에 위치한 기현상 대책 전문기관에 근무하는 비밀 요원이라도 뉴옥의 집세는 감당하기 어렵다. 일전의 기현상으로 두 사람의 집이 사이좋게 폭파당한 뒤로는 더더욱 그렇다. 땅도 비싸 집도 비싸 물가도 비싸. 생명수당과 비밀유지비용 두둑하게 챙겨주는 뉴옥 신화생물 관리국은 금전적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직장이다. 생명수당이 언급되는 시점에서부터 ‘좋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테지만, 적어도, 집이 폭파됐지만 노숙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직장이다. 대부분의 시민은 모르고 지나갈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는 건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알아야 대비라도 할 수 있는 것도 맞으니까.
페퍼의 참견:”안다고 막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던데.”
레너드의 반박:”피해 규모 축소를 의미하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그들이 죽어라 굴러도 열릴 싱크홀(이라고 신문에는 나오는)은 열리고 무너질 건물은 무너진다. 가스 폭발이나 원인 불명의 테러나 화재 같은 것의 탈을 쓸 뿐이다. 수습하는 과정에도 낭만은 없다. 이 과정은 페퍼보다도 레너드의 영역이다. 바닥을 보이는 플라스틱 테이크아웃 컵에서는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이는 레너드가 한동안 추가근무 수당에 야간수당까지 알차게 받아왔다는 뜻인 동시 그 직전의 원인이 되는 사건에서는 페퍼의 이번 달 보너스의 자릿수가 달라졌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 대화가 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몸부림이라는 것을 추측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사명이 없다는 건 의무감을 덜 느끼는 거라고 보는데, 그래야 이런 일 오래 하면서 정신이 안 망가질 것 같거든요.”
“그거 레니랑 나 아냐?”
둘에게 사명은 없다. 사명감은 좀 더 무겁다고, 레너드는 생각한다. 의무감이나 책임감이나 이런 걸 해내야만 한다던가 하는 감정을 자신이나 ‘선배’가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일에 불성실한 것이 아니라, 효율적으로 하는 거다. 막을 수 없는 일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는 건 센스의 영역이다. 레너드는 자신이 있다. 페퍼도 비슷하다. 끔찍한 일이 생기기 않도록 막아내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종 차원의 생존본능이지 사명이 아니다.
레너드는 페퍼가 그런 걸 느끼기에는 단순하고 멍청한 사람이라 좋다.그런 복잡하고 성가신 걸 가진 사람들은 어느 순간 별것도 아닌 걸로 진심으로 상처받는다. 레너드는 자기가 정을 주고야 말 사람이라면 좀 더 단단한 게 좋았다. 상처받더라도 금방 떨쳐버릴 수 있는 물컹물컹한 성질을 가진 쪽이 함께하기엔 나았다.
그래도 지적할 부분은 있었다. 레너드는 반박한다. 반박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덤덤한 음성이었다.
“선배랑 저는 좀 다르죠.”
“달라?”
“달라요.”
레너드는 그래도 페퍼가 통상 범주의 히어로라고 생각한다. 21세기 다양해진 스펙트럼 속의 히어로 말고, 그보다는 좀 더 보편적인 쪽. 백업 요원인 레너드는 페퍼보다 상황을 멀리서 본다. 페퍼보다는 객관성을 확보하기에 쉽다는 거다. 퍼센트라는 게 가능성의 수치화라고 한다면 레너드는 생환 가능성 팔십일 땐 페퍼에게 들어가라고 하고 오십일 땐 들어가볼 것을 권유하지만 그 이하일 땐 굳이 추천하지 않는다. 때로는 생환 가능성이 낮은 일에 사람을 밀어 넣어 휘말린 피해자 구출이나 원인 제거 등을 꾀하는 것보다 피해 최소화와 2차 피해 방지에 힘쓰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페퍼는 다르다. “가능해?” 라고 물어본다. 레너드는 “가능은 하겠죠.”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페퍼는 “다녀올게!”를 답으로 남긴다. 레너드가 “다녀오셨나요.”라고 말하기까진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페퍼에게 사명은 없고 의무감에 진득하게 녹아내린 뇌도 없는데도 그랬다. 멍청하고 친절하고 매사 발랄한 인간. 좀 옛날 히어로상. 그냥 그래야 하니까, 할 수 있으니까 뛰어드는 부류의 인간.
레너드는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싶지 않은 쪽일 수도 있다.
“선배랑 저는 달라요.” 레너드는 한 번 더 말한다. 페퍼는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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