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도입부
월드 트리거. 망각
잊어버린 게 있다. 그 사실만은 분명하건만 무엇을 잊어버렸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매사에 항상 조바심이 드는 까닭이다. 기억해 내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강박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그를 압박하는 것은 실상 아무것도 없다. 자신은 대체 무엇을 잊어버린 것일까?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몇 해 전 이 도시에 큰 난리가 있었던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도 여럿 죽어 나간, 희생자가 나온 사고였고 정황상 -사고로 정리되었다는 기억도 있다. 왜 사실이 아닌 정황으로 정리되었냐면 아무도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지만 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모두가. 요컨대 상실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찾아왔다는 뜻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기억을 잃었고, ‘기억할 능력’을 잃었다. 왜일까? 알 수 없었다. 짐작 가는 원인이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지역의 문제일까 싶어 타 지역에서 지내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여쭤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무언가를 전해 들은’ 또는 ‘무언가를 TV로 본’ 기억은 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보다 말이지. 언제 집으로 돌아올 거니? ---. 아. 그러고 보면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도 이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몇 해 전부터 이곳에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고 있었고, 고등학교도 이곳에서 마친 참이었다.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친인척이라곤 한 명도 살지 않은 도시에서. 혈혈단신이란 뜻인데, 왜? 왜 자신은 여기에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것은 한둘이 아니다. 이상한 것들투성이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이런 이상 속에서도 일상이 계속되고 있다는 그 점이다. 모두가 분명치 않은 기억을 끌어안고 말도 안 되는 상실을 견지하며, 그럼에도 ‘전이 어떠했는지도 모른 채’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꿈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도 그러려니 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처럼. 그럼 꿈을 꾸고 있는 건 그뿐인 걸까? 재미난 것은 그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모두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게 가능한 걸까? 온 세상이 모두 잠들어 꿈을 꾼다는 것이? 같은 꿈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영리한 자라면 무언가를 깨달을지도 몰랐다. 모순을, 새삼 깨달을 것도 없이 그저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의 진실을 알아챌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아니, 이제 청년이라 불려 마땅한 그는 다만 생각한다. 제게는 어떠한 단서도 떠오르는 것이 없고 의지도 없다고. 그 점을 보면 그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자가 저는 아닐 듯하다고. 소설로 치면 주인공이 아니다. 그럼 조력자라도 되어야 하겠으나 어떻게 조력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니 막막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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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별 하나를 떠받칠 수 있는 것이 마더 트리거였다. 트리거와 하나가 되는, 아프토크라톨에서 부르는 용어를 빌리자면 ‘신’에 해당하는 이가 없는 이 세계, 이 역시 그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호칭하자면 이 세계, 미덴이 소유한 마더 트리거는 그만한 출력을 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거짓은 없었다. 트리거에 관해 어느 정도 아는 자라면 한 사람이 자신을 쏟아부어 만드는 블랙 트리거의 말도 안 되는 능력에 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시야가 닿는 곳에 참격을 전파하거나 이를 유예하기도 하며, 죽어가는 이에게서 죽음을 빼앗고 의식을 분리하여 새로운 육체를 조성하기도 하는 그 힘을.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능력이 그러하다면 그러한 생명이 무수히 존재하는 별의 트리거의 힘으로는 어떤 ‘기적’이 가능해질까. 모조리 쏟아부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별을 유지하는 데 쓰는 힘의 십분의 일, 또는 백분의 일을 빌리면 이런 일도 가능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망각
모두가 트리온 또는 트리거, 네이버, 네이버후드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잊고 떠올리는 것 또한 ‘허용되지 않는’ 세상. 기억해 내려 하면 다시금 기억에 변조가 일어나도록, 그것이 ‘현 상태’로 입력되어 유지되는 모순의 세상. 트리온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이를 가능케 하는 마더 트리거의 존재 역시 유추해 낼 수 없다. 다만 모든 기억은 연쇄로 이어지기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사소한 기억부터 하나하나 정보를 지워내야만 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마치 치즈같이 구멍이 숭숭 뚫린 세상이 탄생했다. 무르지만 끊임없이 덧대기에 유지되는 유리된 세상이 마치 처음과같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이 알 수 없는 명령을 실행 중인 마더 트리거에 누군가 접근해 명령을 중지하고 기능을 정지하는 수밖에 없건만, 누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누가 ‘주인공’이 될 수 있겠는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등장하는 것이 곧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러한 세상에, 이러한 세상이 되기 전에 떠났던, 원정선이 귀환한다.
1년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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