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촛불 아래에서
칼리엔 제베라 x 리시안 시나레타
어느 12월, 리시안 시나레타는 칼리엔 제베라에게 물었다.
“촛불에 소원을 비는 행위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와 비슷한 의미인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리시안과 함께한 시간이 늘어난 만큼 칼리엔은 이제 놀라지 않았다.
질문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종이가 리시안의 손에 들려있었다. 칼리엔이 저벅저벅 다가가 그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들었다. 보석 같은 새파란 시선이 저에게로 옮겨온 걸 깔끔하게 무시하며 칼리엔이 내용을 훑었다.
한 고급 빵집의 전단지였다. 앙증맞은 한정판매 케이크에 초가 꽂혀있는 그림이었다. 제아무리 생크림과 겨울에 보기 힘든 과일이 듬뿍 올라갔다지만, 3솔라라는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는 광고를 보고 칼리엔이 미간을 좁혔다. 초에 불을 붙여 소원을 빌어보라는 문구까지 읽고 나서 칼리엔은 종이를 도로 리시안에게 건넸다.
“이건 또 어디서 얻었어? 혹시 디저트에 관심 있었니?”
“그냥 주길래 받아온 것뿐이다만.”
정보값 없는 답변 이후 심문과도 같은 질답을 통해 칼리엔이 정보를 조각조각 모으는 덴 시간이 조금 걸렸다. 여관으로 오는 길에 지나친 빵집에서 직원이 리시안을 불러다가 전단지를 쥐여준 모양이었다. 사줄 것처럼 보였나? 아니면 그저 저 얼굴을 보고 말 한번 걸어보고 싶었나?
어찌 됐든 칼리엔 입장에선 하등 쓸모없는 종이 한 장이 생겼을 뿐이었다. 필요한 음식만 사기도 재정이 빠듯한데 케이크라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칼리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누가 전단지를 나눠준다고 해서 다 받아올 필요 없어. 다음부터는 거절하는 법을….”
“촛불에 소원을 빌면 어느 신에게 그 염원이 닿는 거지?”
리시안이 칼리엔의 말을 잘라먹었다. 이 또한 리시안과 함께하며 생각보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칼리엔은 화를 참고 심호흡했다. 곱지 않게 나가는 말투는 바늘처럼 뾰족했다.
“그건 나도 모르지. 어쩌면 신에게 비는 게 아닐 수도 있고. 일종의 미신이나 돈 있는 사람들의 유행이야.”
“신에게 올리는 기도가 아니라면 소원을 빈다는 행위 자체가 헛된 것 아닌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다면 시간 낭비나 다름없지 않나.”
참으로 리시안다운 의문이어서 칼리엔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저 목각 같은 인간에게 어떻게 사람은 늘 이성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할까. 하룻밤 만에 이루어낼 수 있는 기적이 아닌 게 분명했다. 피곤했던 칼리엔은 그 책임에서 빠르게 도망치기 위해 건성으로 축약본을 내놓았다.
“신이 소원을 이루어주길 기대하는 게 아니라, 소원으로 빌 만큼 내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리시안이 납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칼리엔은 다시 찾아온 침묵에 만족했다. 고요한 행복은 짧았다.
“그래서 너는 촛불에 소원을 빌어본 적 있나?”
칼리엔은 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탁자에 올려둔 촛불이 그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초가 꺼지지 않게끔 칼리엔이 한 손으로 벽을 세워 불꽃을 보호했다.
그의 눈에는 보이진 않았지만, 리시안이 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적막한 방이 알렸다. 낮은 답은 한참 뒤에 나왔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이도 저도 아닌 대답에 리시안의 시선이 더욱 따가워졌다. 칼리엔이 초를 담은 등을 들고 돌아보았다. 어둑한 밤, 촛불의 그림자가 덤덤한 얼굴 위로 일렁였다.
“우리 마을엔 케이크를 굽는 빵집도 없었고, 쉽게 상하는 케이크를 다른 마을에서 들여와 주는 상인도 없었지. 케이크든 빵이든 초를 꽂는다는 생각도 당연히 못 해봤고.”
초는 그 자체로 귀한 물건이었다. 케이크에 장식용 초를 꽂는 건 돈이 썩어나는 귀족이나 할 법한 발상이었지만, 제국 수도에는 그런 유행이 돌고 있다더라는 소문이 간간이 들려왔다. 바깥세상을 늘 궁금해하던 동생이 마을을 방문한 손님에게서 얘기를 들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거 알아, 칼리엔? 솔라리스에선 누가 생일을 맞으면 폭신폭신한 케이크에 작은 초를 꽂는대. 초에 불을 붙이고 훅 불어 끄면서 소원을 빈다고 하더라. 신기하지 않아?”
하여간 호기심은 많아서 오는 손님마다 귀찮게 이것저것 묻는다고 베루리아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지만, 칼리엔은 그날의 대화를 잊지 않았다. 용병이 되어 마을을 떠난 첫해, 칼리엔은 베루리아의 생일에 맞춰서 손바닥만 한 케이크를 들고 돌아왔다.
대체 어떻게 크림이 녹지 않게 가져온 거냐고 눈을 반짝이는 베루리아를 보자, 이른 봄 날씨에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초능력을 남발해 케이크를 모셔 온 칼리엔은 그간의 모든 고생을 잊었다. 그때 본 베루리아의 환한 웃음은 여전히 기억 속에 선명했다.
“딱 한 번, 케이크에 초까지 사 와서 동생에게 선물로 준 적이 있었지. 불을 붙이고 무슨 소원을 빌 거냐고 물어봤는데, 그건 말해주면 안 된다더라. 소원은 소리 내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던가.”
“소원을 들릴 수 있게 말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지?”
그러게. 칼리엔이 생각 없이 맞장구쳤다. 하늘색과 주황색이 뒤섞인 눈은 그리운 과거의 시간을 유영하고 있었다. 칼리엔이 촛불을 입술 가까이 가져왔다. 단어 하나가 입술을 떠날 때마다 작은 바람이 되어 깜박거리는 불꽃을 흔들었다.
“정작 난 그 애의 소원이 뭔지 듣지도 못했는데, 내 소원은 뭐냐면서 물어보더라. 생일 당사자도 아니고, 촛불을 불어 끌 것도 아니니 나한테 해당하는 사항은 아니라면서.”
어느 4월, 베루리아 제베라는 칼리엔 제베라에게 물었다.
“촛불에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칼리엔은 무엇을 빌 거야?”
“그래서 무슨 소원을 빌었지?”
과거에 스스럼없이 고백했던 소원은 이제 벗어나지 못하는 족쇄가 되어 주황빛으로 일렁였다. 칼리엔은 리시안을 쳐다보지 않았다.
“너와 나, 둘 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칼리엔 제베라에겐 소원이 있었다. 후회로 변질된 소망이 쓰라린 미소에 머물렀다.
“그때 말하지 말 걸 그랬나? 루리처럼 비밀로 했으면 이루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수백 번 머릿속으로 반복한 ‘만약’이라는 잔인한 가정이 칼리엔의 눈 속에서 무겁게 휘몰아쳤다. 닳지 않은 불꽃이 잠시 사그라들었다가 다시 화르르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단순한 미신이라고 치부한 건 너 자신 아니었던가?”
리시안의 냉정한 질문이 위로처럼 들리는 건 짙은 감정 속에 파묻혀 일어난 착각일 터였다. 칼리엔이 생각을 떨쳐내듯 머리를 흔들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피식 웃었다.
“웬일로 맞는 말을 하네. 하여간, 그렇게 궁금하면 다음에 초 하나 사서 직접 불어서 꺼보던지. 그러고 보니 넌 생일이 언제인진 알고 있어?”
리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칼리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길에서 주워졌다고 했으니 당연한가. 용병 중에도 그런 사람 많았거든. 그럼 발견된 날은? 그날을 생일로 삼는 사람도 있었는데.”
“물어보지 않았다. 겨울에 신전에 들어갔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래도 기억하는 계절을 바탕으로 추려보면… 잠깐만. 너희 신전이 있는 그 섬, 일 년 내내 겨울 아니야?”
“그렇지.”
하여간 리시안이 내뱉는 말은 하나같이 정보값이 더럽게 없었다. 피로가 다시 훅 몰려와 칼리엔이 숨을 길게 내쉬며 등을 들고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녹으며 점차 짧아지는 초가 늦어가는 시간을 알렸다.
“네가 초를 불든지 말든지 그건 상관없는데, 소원 하나쯤은 고민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숙제라고 생각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는지 리시안은 칼리엔이 복도로 나가 문을 닫을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방문을 등지고 선 칼리엔이 손에 든 촛불을 응시했다.
촛불에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칼리엔은 무엇을 빌 거야?
새로이 소원을 빈다면, 무엇을 빌어야 할까. 주황색 혼돈이 불길처럼 하늘색 눈동자 안에서 요동쳤다. 칼리엔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내년에는 네가 부디 나를 놓아주기를. 내게 작은 욕심이 허용된다면, 모두 언젠가 맞이할 안식이라는 면죄가 나에게도 주어지기를.
소박한 소원에 목소리는 없었다. 아직 꺼지지 않은 촛불이 심장박동을 따라 위태롭게 흔들렸다.
Written 23-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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