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 미상
칼리엔 제베라 x 리시안 시나레타
칼리엔 제베라는 이따금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곤 했다. 편지 맨 위에 적는 수신인은 매번 달랐다. 용병 친구인 에르바나일 때도 있었으며, 죽은 동생인 베루리아일 때도 있었고, 아예 여백으로 둘 때도 있었다. 편지를 쓰는 방식마저 그때그때 달랐다. 어떤 때는 한 자 한 자 감정을 담아 꾹꾹 눌러쓰고, 어떤 때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비문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글자를 휘갈기고. 공통점은 딱 하나였다. 다 쓰고 나면 미련 없이 편지를 불태워버린다는 것.
“보내지도 않을 편지는 대체 왜 쓰는 것이지?”
리시안 시나레타는 칼리엔이 일곱 번째 편지를 불태웠을 때 질문했다. 성냥으로 불붙인 편지를 재떨이 위로 흔들던 칼리엔이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리시안을 쳐다보았다.
“보내지 않을 거니까 쓰는 거지.”
이젠 무표정도 무표정 나름이라, 저 무표정은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담은 표정이라고 해석한 칼리엔이 한숨을 쉬었다. 끄트머리만 남은 편지를 재떨이에 두고 손에서 재를 털어내며 칼리엔이 간결하게 설명했다.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어도 본질은 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얘기가 마음에 침잠하기 전에 이렇게라도 분출시키는 거야.”
“일기라면 굳이 수신인을 적을 필요도 없지 않나?”
“가끔 나 자신이 마주 보고 싶지 않을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고 생각하면 쉬워질 때도 있거든.”
리시안은 몇 분간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나온 말에 칼리엔은 벌떡 일어서서 손뼉을 칠뻔했다.
“이른바 상담과 비슷한 원리군.”
“바로 그거야!”
하루하루 리시안에게 인간의 마음을 심어주려 들인 눈물겨운 노력이 허사가 아니었다는 감격에 칼리엔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만개한 미소를 멀뚱히 응시하던 리시안이 새로이 질문을 던졌다.
“상담이란 보통 문제의 해결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던가?”
“그럴 수도 있지.”
칼리엔의 긍정에 리시안이 악의 없는 표정으로 비수를 꽂았다.
“그래서 편지인지 일기인지를 써서 해결되는 것이 있나?”
“넌 꼭 사람 마음을 후벼파야 만족하겠니?”
찰나 머물렀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칼리엔은 또다시 얼굴을 왈칵 찡그렸다.
*
얼마 전의 그 짧은 대화가 현재 리시안이 여관방에 앉아 빈 종이를 앞에 두고 펜을 쥔 이유였다. 칼리엔이 홀로 저녁 거리를 구하러 나간 지 10분가량 지난 차였다. 평소라면 리시안도 동행했겠지만, 이 작은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최근에 엘로하임 신전에서 파견된 시커가 목격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칼리엔은 리시안에게 여관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급하게 여관부터 잡아 들어오느라 식량을 사지 못한 게 화근이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관에 단체 손님이 다녀가 음식이 떨어져 저녁이 제공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동하느라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저녁까지 굶을 순 없어 칼리엔이 내놓은 타협안이었다.
리시안과 칼리엔은 둘 다 시커들의 표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리시안의 얼굴을 더 잘 알고 있고, 시선을 끄는 것 역시 리시안이다. 내가 망토를 뒤집어쓰고 나갔다 오면 별일 없을 거다. 칼리엔의 논리가 썩 틀리진 않았기에 리시안은 그가 나가는 걸 막지 않았다. 설령 그가 이 틈을 타 도망간다고 하더라도 따라잡으면 그만이었다. 추격은 어차피 리시안의 주특기 아니었던가.
리시안을 난감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유시간이었다. 신전에 있던 시절에도 개인 시간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으나, 리시안은 그마저도 수련 시간으로 쓰곤 했었다. 또래 사제들은 물론이요, 빡빡하기로 소문난 신관들마저 엄청난 독기라며 혀를 내둘렀었다. 하지만 리시안으로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어려웠다. 바로 지금처럼.
칼리엔이 몇 번이고 당부했으니 밖으로 나갈 순 없었다. 여관에 큰 방이 남아있지 않았던 터라 수련할 만큼 넓지도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리시안의 눈에 칼리엔이 두고 간 짐가방이 들어왔다. 열린 가방 틈새로 끄트머리가 약간 구겨진 종이가 빼꼼 튀어나와 있었다.
보내지 않을 편지.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리시안의 손이 종이와 펜을 가방에서 빼 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서야 칼리엔이 하던 편지 쓰기를 따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별일 없으면 그가 돌아오기까지 길어야 30분 남짓일 터.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행동 양상을 탐구하기에 적격이었다.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백지를 멀뚱히 응시하던 리시안은 생애 편지라는 걸 한 번도 써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편지는 어떻게 쓰는 거지? 그 전에 누구에게 써야 하는 거지? 리시안은 자신의 협소한 인간관계를 돌아보는데 5분 넘게 소비하고서야 간신히 첫 줄을 쓸 수 있었다.
아드리엘 상티모니아 신관님에게.
리시안이 교류라는 걸 해본 이들 중 제일 무난한 선택지였다. 같이 다니는 칼리엔에게 편지를 쓸 이유는 없었고, 신전 동료였던 나르시케 아인비스는 인연보단 악연이었다. 그러나 상사이자 스승이었던 아드리엘 상티모니아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으면 리시안은 긍정의 답을 하기 난처했다.
칼리엔은 대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아서 매번 편지를 쓰고 태우고를 반복하는지. 미세하게 미간을 찡그렸던 리시안이 다시 펜 끝을 종이에 댔다.
지금 저는 무역도시 타비페에 있습니다. 이 도시에서 근래 시커가 한 명 목격되었다고 하는데, 저희를 쫓는 시커는 아닌 듯싶습니다. 원래 이맘때쯤에 새롭게 발탁된 시커가 첫 솔로 임무를 받고 나왔으니까요. 대륙으로 건너오려면 배를 필수로 타야 하니 항구도시에서 동선이 겹친 건 그저 우연이고 불운이었으리라 추측합니다. 높은 확률로 그 시커는 지금쯤 다음 목적지로 떠났겠지요. 그래도 경계해서 나쁠 것 없으니, 동행인에겐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종이는 아직 반이나 비어 있었다. 어쩐지 종이를 낭비하는 기분이 들어 리시안은 남은 공간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했다.
다음 행선지는 동행인이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리엔타나 올리엔스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니 이 계절에 프로밴스로 가는 남행을 택하지는 않겠지요.
정말 쉽지 않았다. 리시안은 칼리엔이 편지를 쓰던 모습을 회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떤 이야기를 쓰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걸 그랬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펜 끝이 종이에 닿지 않게끔 띄워놓던 리시안이 멈칫했다.
마음, 속마음.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관한 이야기. 방향은 찾은 것 같았지만 감정의 표출에 익숙하지 않은 리시안에게 적확한 단어를 찾아 적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리시안은 칼리엔이 나간 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계산했다. 아마 10분이 지나기 전에는 돌아올 터. 그전까지 자신에게 부여한 과제를 끝마치겠다는 다짐을 담아 펜을 종이에 눌렀다.
살아간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배우기 위해 현재 동행인과의 계약을 맺었습니다만, 이 계약이 언제 끝날지는 요원해 보입니다. 신전의 가르침보다 배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규칙이 확고하게 잡혀있는 게 아니니까요. 정해진 틀이 없는 상태에서 정답을 찾아내기란 눈 속에서 바늘 찾기 같습니다. 동행인은 정답이라는 게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매번 저에겐 틀렸다고 지적합니다. 모순이지요.
어쩌면 이 수신 미상으로 남을 편지도 틀리게 썼다고 뭐라 할지 모르겠군요. 어차피 보내지는 않을 편지니, 결과는 따로 적지 않겠습니다.
끝맺는 데 형식적인 안부 인사는 필요 없었다. 펜을 내려놓자마자 여관 복도 끝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예민한 청각에 잡혔다. 리시안은 가만히 앉아 익숙한 얼굴이 문 뒤에서 드러나기를 기다렸다.
“나 왔어.”
굳이 반겨줄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에 리시안은 그저 고개만 돌려 한 팔에 빵과 과일을 담은 종이봉투를 든 칼리엔을 응시했다. 잔뜩 긴장했던 게 허무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늘어놓던 칼리엔이 리시안의 침묵에 입을 다물고 눈썹을 모았다. 왜, 넌 뭔 일 있었어? 리시안은 말없이 방금 완성한 편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비어있는 한 손으로 편지를 받은 칼리엔이 뒤늦게 물었다.
“이게 뭐야?”
*
“…이건 그냥 보고서잖아.”
“네 편지도 감성적인 일상생활의 보고서나 다름없지 않았나?”
리시안의 작업물을 다 읽어본 칼리엔의 짤막한 감상에 리시안이 대꾸했다. 보낼 수도 없는 편지를 어떤 마음으로 쓰는지도 모르고 무심한 말만 내뱉는 리시안에게 짜증이 울컥 솟았지만, 칼리엔은 애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시장에서 사 온 싱싱하고 상큼한 사과가 도움이 됐다. 사과를 아삭아삭 베어먹으며 칼리엔이 툭 질문했다.
“그래서? 써보니까 어땠어?”
이러나저러나 칼리엔만 졸졸 따라다니며 질문만 던져대던 리시안이 자발적으로 행한 ‘생산적이지 않은’ 일이 아니던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심리가 응당 궁금할 만도 했다. 미약한 기대를 품고 칼리엔이 저를 바라보자, 리시안이 편지를 올려둔 테이블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나온 감상은 그 표정만큼이나 무미건조했다.
“창의적인 시간 낭비로더군. 누구에게도 내용이 닿지도 않을 편지를 써서 무엇 하나.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지만, 이만큼 비효율적인 행동은 처음 해본 것 같다.”
악의라곤 전혀 없는 솔직한 말이라는 걸 칼리엔은 머리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창의적인 시간 낭비를 종종 하는 사람이 지금 네 눈앞에 있다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별개였다. 편지를 냅다 구겨버리려는 충동을 참으며 칼리엔이 사과를 한입 더 베어 물었다. 과육의 달콤함이 뾰족해지려는 어투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렸다.
“시키지도 않은 걸 왜 멋대로 따라 하고선 나한테 투덜대는 건데?”
리시안이 칼리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칼리엔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리시안은 한 단어를 꺼냈다. 성냥. 칼리엔이 허탈하게 웃으며 짐가방에서 성냥갑을 꺼내 그에게 던져주었다.
“비효율적인 걸 알게 됐어도 어쨌든 끝까지는 따라 해보겠다, 이거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이런 면만 보면 참 좋은 학생이긴 했다. 다 먹고 심지만 남은 사과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칼리엔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보이지는 않아도 종이가 타들어 가는 향이 코끝에 스쳤다.
“한 가지 더 이유가 있긴 한데.”
뭘? 편지를 태우는데? 칼리엔이 고개만 들고 리시안을 쳐다보았다. 그새 편지를 다 태우고 손에 묻은 재를 털던 리시안이 칼리엔과 시선을 마주했다.
“현재 우리 위치와 행보가 적힌 종이를 그대로 둘 수 없진 않은가? 추적의 단서가 될 만한 건 깔끔히 파기해야지.”
정말 끝까지 리시안다웠다. 칼리엔이 헛웃음을 지으며 도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Written 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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