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킨스 씨의 정원 (2)
맥스는 아주 오랜만에, 행복했다.
그해 겨울 어느 날은 날씨가 무척 추웠고, 전날 싸라기 같은 눈이 잔뜩 왔다가 한번 녹은 탓에 길이 심하게 얼어 있었다. 자연히 손님이 찾지도 않는 잡화점을 여는 둥 마는 둥 지키다가 해가 지고서야 그날의 첫 끼니를 때웠다.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잠깐 거실을 서성이다가, 주택 뒤편에 얼마 안 되는 잡동사니를 쌓아 둔 창고로 들어가 오랜만에 기타를 꺼내 왔다.
그의 기타는 로렌스 저택에서 연주했던 것과는 다르게 손에 무척 익은 물건이었다. 소리나 나는 게 용한 물건이라 모양새는 특별히 아름답지도 정교하지도 않았다. 몇 년을 방치한 탓에 줄이 엉망으로 늘어났지만 끊어지거나 수리가 필요한 부분은 없었다. 각각의 현이 내야 하는 알맞은 소리를 찾으려 현을 퉁기며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그는 기타 소리를 듣고 수줍게 웃던 아이의 표정을 생각했다. 기타가 만들어내는 소리와 울림통의 진동에 집중하느라 발개진 볼을. 검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연약하고 부드러운 잔머리를. 그는 그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손으로는 습관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소리내어 노래하지는 않았지만, 노랫말을 생각했다.
연주가 끝나기 전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맥스는 불온한 내용이 담긴 책을 읽다가 들킨 소년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제야 주변의 것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긴 집이군. 또는 얼마 전부터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건물 안이거나. 이제 알겠군. 지금은 1919년 겨울이고, 돌아다니기엔 좀 늦었어. 하지만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렸지. 물론 그리 세게 두드린 건 아니야. 따지자면 걱정할 필요 없는 사람이겠지. 대단히, 정중한 노크였으니까.
그는 소리 내어 바깥의 누군가에게 묻는 대신 기타를 소파에 기대어 내려놓았다. 그가 일어서는데, 그때 마침 바깥의 누군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정확히 세 번, 불안한 듯 느리고 정중하게.
맥스는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차가운 겨울 공기가 쏟아져 들어오고, 발개진 코끝과 뺨을 한 여자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반사적으로 뱉었다. 애비. 그 이름을 뱉는 동시에, 그는 차가운 겨울 냄새를 풍기는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눌러야 했다. 애비게일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송이를 녹이는 햇볕처럼 둥근 뺨과 눈으로 웃어 보였다. 맥스!
그는 그제야 새벽에 떨리는 손으로 쓴 편지에 생각이 닿았다. 그는 그 편지를 아침에 다시 읽었을 때 부쳐도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특별히 거슬리는 단어도 없었고, 사랑 고백에 준하는 애틋한 말도 쓰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데, 정말 그랬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는 대신 맥스는 옆으로 몸을 비켰다. 명백히 안으로 들어오라는 몸짓이었고, 애비게일은 그에 응했다.
훈기가 도는 집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그는 새벽부터 쓴 편지의 마지막 장을 떠올렸다. 편지를 보내기 직전 빼 버린 그 장에는 다소 충동적인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추신. 당신이 원한다면 여기 살면서 홉킨스라는 이름을 써도 좋소.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편지로 하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그 편지를 쓴 이유를, 그것도 새벽에 기억도 나지 않는 꿈을 꾼 뒤에 써 내려간 이유를 너무 잘 알았다. 편지의 마지막 장은 그 이유를 노골적으로 담고 있었다. 새벽의 충동은 부끄러웠다. 그는 집에 오는 길에 편지의 마지막 장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고, 돌아와서 난롯불에 구긴 종이를 태웠다.
맥스는 성 베사의 자매들에게 그랬듯 그녀에게 1층의 편한 방을 내주었다. 애비게일이 짐을 푸는 동안 그는 뜨거운 차 두 잔과 쿠키를 준비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추워졌고, 그에 비해 훈기 도는 집 안에서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말이 많이 오가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근황을 나누는 데 한참 걸렸다. 애비게일은 여전히 자동차나 기차를 타는 걸 어려워해 도보로 여행했다고 웃으며 말했고, 맥스는 괜한 고생을 시킨 것 같다면서 쩔쩔맸다. 두 사람이 비밀을 담은 각별한 편지를 주고받은 뒤로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는 언제나 그녀 앞에서 조심스러워지곤 했다.
찻주전자가 비자 두 사람은 조용히 일어섰다. 그때까지도 웃음을 거두지 않던 애비게일이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했다. 감사해요, 맥스.
맥스는 그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멋쩍은 듯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손에는 찻잔 두 개와 주전자를 든 채, 반쯤은 속삭이듯이. 그럴 거 없소. 당신 집처럼 생각해도 돼. 그 말은 문자 그대로 진심이었다.
애비게일 페탱 부인은 그의 집에 나흘을 머물렀다. 맥스는 그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아 잡화점을 오전에만 열었다. 오후에는 집에 돌아가서 그녀와 서재에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을 읽었다. 1914년의 레이크힐즈. 1919년 겨울의 삶. 성 베사 보육원의 공통된 지인들. 그들은 식탁에 함께 앉아 식사했고, 해가 일찍 진 밤에는 다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의 방으로 자러 갔다.
그녀와 함께 보내는 나흘은 빠짐없이 소중하고 기뻤고, 그래서 맥스는 그녀가 떠나던 닷새째 아침에 그만 용기를 내고 말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앞으로도 여기 살면서…… 사람들에게 당신을 애비게일 홉킨스라고 설명해도 좋소.
짐을 챙겨 현관 앞에 선 애비게일에게 그렇게 말한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손을 들어 목을 문질렀다. 귀가 뜨거워지는 와중에 그가 흘긋 본 애비게일의 표정은 기뻐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는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다가,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덧붙였다. 우리가 뭐가 되든.
직후 그는 후회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물었다. 뭐가 된다는 거야, 이 얼간아?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아? 어릴 때 돈 좀 대줬다고 네가 뭐라도 되어야 한다는 거야?
신발이 닳도록 먼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맥스는 정작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함께 살 것을 제안한 ‘진짜’ 이유를. 그가 새벽에 갑작스럽게 편지를 쓴 이유를. 그를 지난 나흘 동안 빠짐없이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을. 그걸 언젠가는 말하게 될 테지만,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미루고 싶었던 탓이었다.
애비게일은 그 주가 다 가기 전에 돌아왔다. 그녀는 결의에 찬 채로 커다란 짐을 들고 첫 방문처럼 문을 두드려 왔다. 맥스는 그녀의 결정을 존중했다. 물론 애비게일이 자신을 가족으로 선택해 주어서 기뻤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많지 않았다. 그녀가 홉킨스 양으로 살아 보기로 결정한 이상, 그는 애비게일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그렇게 소개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준칙은 누가 만들어서 그의 머리에 넣어 준 것이 아닌데도, 맥스의 머릿속에 오래전부터 박혀 있었던 것처럼 그를 조종했다.
물론 마을에서는 소문이 돌았다. 홉킨스 씨와 함께 사는 그 젊은 여자가 자기를 홉킨스 양이라고 소개하던데 그 여자가 홉킨스 씨의 연인인지 정부인지 친척인지 친남매인지 수양딸인지 일찍 낳은 친딸인지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홉킨스 씨의 정체에 대해서도 소문이 돌았다. 사실은 그간 전쟁에 나간 게 아니라 미국에 둔 애를 만나러 갔다더라. 잡화점은 취미로 하는 거고, 매달 적자를 보고 있다더라. 사실은 미국에 엄청난 자산이 있는 자산가라더라.
하지만 홉킨스 씨와 홉킨스 양은 그런 소문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마을 사람들을 대했다. 그러자 그런 소문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비밀에 싸인 두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들의 관심사는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런던 교외의 그 작은 마을에서 꽤 평온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았다. 두 사람의 동거를 반대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는 편지로 교류하는 몇몇 이들에게 가볍게 의심을 담아 지탄받았을 뿐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생활은 지극히 평화롭고 충분했다. 맥스는 아주 오랜만에, 행복했다.
그때부터 줄곧 두 사람을 괴롭히는 감정은 아마도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애비게일과 살게 된 이후로 맥스는 종종 혼자 침대에 누워 자기 행동을 성찰했다. 그때마다 가장 무거운 바위처럼 그를 짓누르는 생각은 ‘옳지 않다는 감각’이었다. 이런 건 옳지 않아. 그는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늘 그렇게 생각했다. 옳지 않아, 맥스. 옳은 것이 무엇인지 거울 속의 자신에게 질문해 보기도 했지만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증기 기관으로 되어 있기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맥스는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즈음 그는 애비게일을 향한 마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찾아 헤매온 것을 주고 싶었다. 가족을 원한다면 아버지가 되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연인을 필요로 한다면 그렇게 굴어 주고 싶었다. 성이 필요하다면 성을, 번듯한 가족을 원한다면 거기에 함께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사람들이 흔히 그런 감정을 어떻게 부르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잡화점의 문을 잠그고 꽁꽁 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문을 열며 그를 반겨 주는 애비게일을 볼 때마다 ‘그 단어’를 떠올렸다. 소유격의, 짧고 간단한, 그들이 이미 주고받은 적 있는 단어를.
애비게일의 결혼식 증인을 서 주었던 일, 그녀가 2개월 만에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되었다는 사실, 열두 살의 나이 차는 그를 늘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맥스 홉킨스는 분별없이 충동만으로 움직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용기를 내야 할 때와 아닐 때를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았다. 그것이 좋은 덕목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맥스가 알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애비게일 역시 양상은 달라도 결론적으로는 비슷한 고민을 침대 안에 가두어 놓고 매일 밤 자기 전에 들춰 본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감정이 시간에 바래갈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고뇌와 자책은 그즈음 각자의 방문을 닫으면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왔고, 그들은 밤에 찾아오는 손님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평화로웠다. 1920년, 앵초가 한껏 피는 초여름, 문제의 스미스 양이 마을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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