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꾼
남자의 짐은 고작 중형 캐리어 하나였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검은 천 캐리어는 바퀴 네 개가 달린 사륜구동인데, 노쇠를 견디지 못하고 바퀴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한 쪽으로 무게가 쏠려 기운 것이 불안정해 보인다. 슬슬 새 것을 살 때가 된 모양이었다.
부산에 일 년 반이나 있었으면서 짐이 그거 밖에 안 돼? 하고 물으면 남자는 미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려선, 최대한 꽉꽉 쑤셔 담았지. 가장 큰 짐은 안 가져왔어. 차에 실어만 둘 거야. 그런 대답을 했다. 피곤을 머금은 눈가가 피로하게 깜빡였다. 고속도로 주행 여섯 시간의 대장정을 막 마치고 왔으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밥은 먹고 왔어. 미안한데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은 눈을 좀 붙일 수 있을까......"
"침대에 가서 자. 옷은 갈아입고."
남자는 힘없이 끄덕이더니 곧 캐리어를 끌고 침실 안으로 사라졌다. 닫힌 문 너머로 버스럭대며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작게 들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쥐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었다. 손님은 네다섯 시가 되어서야 눈을 뜰 테다. 집주인은 가볍게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남자와의 첫만남은 십 년 전이었다. 두 사람은 모바일 게임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 남자는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고 그녀는 3D 모델링을 맡았다. 남자가 캐릭터 원화를 넘기면, 그 캐릭터를 3D로 만들어내는 것이 주 일과였다. 솔직히 꽤 독특한 디자인이 많았다. 여타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미지의 세밀한 융합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디자인을 오롯이 살리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그에게 메일을 쓰기로 했다. 본명을 밝히지 않은 채 닉네임과 메일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닉네임은 Avalanched, 메일은 닉네임 뒤에 골뱅이와 사이트 주소가 붙었다. 설상 스포츠라도 좋아하는 건가. 그런 호기심도 들었지만 대뜸 물어서야 서로 곤란한 일이었다.
아무튼 메일을 써 보냈다. 전체적인 디자인을 해하지 않고 조금 심플하게 고치는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다. 남자는 답장 메일의 텀이 길다면 긴 편이었다. 만 하루가 지나서야 답장이 왔고, 첨부파일에는 간소화된 디자인이 그득히 들어있었다. 놀랐다. 반사적으로 간략한 감사의 메일을 적어 보냈다. 작업 속도가 빠르시네요. 이렇게까지 무리하실 필요는 없는데...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하루 정도가 지나서야 답장이 왔다. 괜찮습니다. 빠른 속도가 제 얼마 없는 장점이라서요. 혹시 또 컨펌하실 것 있음 보내주세요. 대충 그런 요지의 메일이었다. 안 그래도 남은 과제는 많았다. 게임 런칭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남은 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그와 메일을 자주 주고 받게 되었다.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게 된 건 프로젝트 마감 후 뒷풀이에서였다. 그저 그런 호텔의 작은 홀 하나를 빌린 왁자지껄한 회식이었다. 모두가 가슴께에 작은 명찰을 달고 있었다. 동종업계 사람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이미 면식이 있는 사람도 몇 있었다. 이번 게임은 분명히 흥할 거야. 아는 사람 하나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불그레한 얼굴로 웃었다. 희미한 술냄새가 났다.
그녀는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는 걸 즐기는 인종이 아니었다. 뒷풀이는 선택이었다. 사정이 있거나 원하지 않는 사람은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었었다. 다만 그 일러스트레이터가 궁금했다. 서면 상의 아발란체는 활기찬 인물상이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는 얼굴을 들이밀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그래도 반대의 확률에 걸어보고 싶은 건 도박사의 마음인가.
눈앞의 동업자는 와인을 세 잔 째 마시고 있었다. 몇 번 정도 같은 프로젝트에서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취기가 도는지 딱히 멀쩡해 보이는 정신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나가듯 묻는다. 혹시 아발란체라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아냐고.
"어, 그 사람? 당연히 알지. 가성비가 좋은 사람으로 알음알음 유명해. 이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었잖아."
'가성비가 좋은 사람'. 웃긴 수식어가 붙었다. 이을 말을 고민하고 있자니 동업자가 다시 술냄새가 풍기는 입을 연다. 쭉 편 검지손가락으로 홀의 구석을 가리킨다.
"저기, 구석 테이블에 있는 사람...... 저 사람일걸. 오늘은 혼자 앉아있네?"
그녀는 흠칫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하얀 와이셔츠가 빛을 받아 반들반들하게 빛난다. 검은 머리칼은 정리되지 않은 듯 제멋대로 삐죽대고 있다. 그 외에는 알 수 있는 게 없다. 무심코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는다.
"음, 오늘은?"
"아발란체 씨, 이상하게 발이 넓어서...... 어디에든 인맥이 있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아는 사람이 없는가봐. 그나저나 왜 이런대. 가서 친구 먹으려고?"
"안 될 거 없지."
"그래?"
동업자는 깔깔 웃었다. 방금의 대화에서 과연 어느 부분이 웃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튼 취기가 돈 얼굴을 마악 끄덕이며 웃어댔다. 그래? 그럼 가 봐. 웃음소리가 반 정도 섞인 목소리로 재촉하기에 그녀는 탄산수가 담긴 잔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남자는 2인용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었다. 한 손에 포크를 들고 양상추와 토마토가 혼재한 샐러드 따위를 먹는 둥 마는 둥 씹어대고 있었다. 술 대신 알로에 주스가 담긴 와인잔이 언밸런스한 분위기를 만든다. 가까이서 보니 와이셔츠의 주름이 하나둘 보이는데, 어쩌면 치장에 공들일 시간이 없어 급하게 차려입고 나온 게 아닐까. 정돈된 까치집 같은 머리도 그런 거라면 설명이 된다.
"채식주의자예요?"
등 뒤에서 물었다. 남자는 잠시 그에게 묻는 질문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른 이의 대답이 없다는 걸 자각하고 나서야, 입가로 가져가던 포크를 내려두고 슬금슬금 고개를 돌린다. 사나워 보이는 눈매가 우선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드레싱이 묻은 입술을 가볍게 핥으며 가슴께의 명찰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 건 아닙니다. 회식 있는 걸 깜빡하고 밥 먹다가 나왔더니 음식이 안 넘어가네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몇 걸음을 걸어 빈 의자에 걸터앉는다.
"왜 혼자 앉아 계세요? 2인 테이블이라 일행이 있는 줄 알았네."
"혼자 왔으니 혼자 앉아 있죠. 아는 사람도 없고 터치하는 사람도 없겠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디저트 뷔페나 즐겨볼까 싶어서."
"샐러드는 따지자면 애피타이저 아닌가요?"
"저는 애피타이저로 푸딩을 먹는 사람이라."
"식습관이 독특하시네요."
"농담입니다. 입이 텁텁해서 상쾌한 걸 먹고 싶었어요."
"재밌네요."
나이는 서른 전후 정도 되었을까. 날카로운 눈매를 둥근 안경으로 중화시키고 있다. 와이셔츠에는 넥타이까지 갖춰 매었다. 정장 상의까지는 걸치지 않았지만. 머리만 좀 더 정돈한다면 멀끔한 샐러리맨 같은 인상일 테다. 아발란체는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다가 슬쩍 웃는다.
"제 수정이 일정에 도움이 되었던가 봅니다."
"그럼요. 하루만에 그 정도 양을 수정하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메일로도 말씀드렸잖아요? 제 얼마 안 되는 장점이라고."
"디자인도 충분히 장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가요? 칭찬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마주 웃으며 와인잔을 기울인다. 탄산수가 입 안을 간질였다.
"닉네임에 특별한 뜻이 있나요?"
"아발란체요? 눈사태라는 뜻이죠. 맨 뒤의 d는 중복된 닉네임이라 뜨길래 구겨 넣은 거고."
"설상 스포츠를 좋아하세요?"
"아뇨...... 몸 쓰는 거라면 젬병입니다. 할 줄 아는 건 손놀림과 두뇌 싸움 정도일까요?"
"손놀림?"
그녀가 짓궂게 웃었고, 아발란체는 치켜 올라간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몇 초 간 할 말을 고르기 위해 입을 우물대는가 싶더니, 상대가 기분 나빠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얼굴의 긴장을 풀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색칠 놀이죠. 세밀한 조작이 필요한 색칠 놀이. 반투명한 알로에 조각이 넘실대는 와인잔의 볼을 잡는다.
"이 다음에는 무슨 작업을 하실 건가요?"
"저는 아직 단가가 싸서요. 부려먹으려는 사장님들은 여기저기 많이 계십니다. 이번에는 캐릭터가 아니라 배경을 맡을 것 같네요."
"단가가 싼 것 치곤 실력이 좋던데요. 조만간 전속 계약이라도 들어오겠어요."
"축복 감사드립니다."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감사의 말로 능숙하게 받아쳤다.
이후 몇 시간인가를 더 대화했고, 두 사람 모두 미량의 알코올을 몸 안으로 흘려넣었다. 공적이라지만 메일 교류는 활발했기에 친해지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회식이 끝나고 나서야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들은 우연하게도 걸어서 30분 거리에 살았다. 서로를 만나면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여겼으므로 몇 번인가를 또 만났다. 몇 달 후에는 육체 관계를 가졌다. 할 줄 아는 건 손놀림과 두뇌 싸움 뿐이라고 했던가. 후자는 보드게임 하나로 이미 증명되었고, 전자는 여러 의미로 명확했다. 만족스러운 친구 관계였고, 만족스러운 육체 관계였다.
침대에 누워선 문득 섹스와 사랑에 연관이 있냐고 물었다. 아발란체는, 그런 건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무조건적인 연관이 있다면 섹스 파트너나 섹스리스 부부 같은 건 있을 수 없겠지. 담백한 어조로 중얼거리곤 페트병에 담긴 물을 홀짝였다. 적당히 그럴싸한 답변이었고 그녀는 그걸로 안심했다.
아발란체는 이사를 간다고 했다. 파주에는 이 년이나 살았으니 슬슬 거처를 옮겨 보려고. 일 년 정도 인천에 있을 거야. 그 후에는 천안이라도 갈까 싶네. 중간중간 뜨는 기간이 있으면 네 집에 들를게. 물론 네가 내 쪽으로 놀러와도 좋아.
갑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꾸준히 자신의 역마살을 화제에 올렸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정착한 곳이 이곳이라고 했다. 돈이 모이면 다른 도시로 이사할 거라고도 했다. 지금 이사한다는 건 당장 충분한 돈이 수중에 모였다는 거겠지. 슬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넷으로도 충분히 만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원래부터 인터넷으로 만나던 사이였으니까.
마지막 인사도 않고 아발란체는 도시를 떠났다. 그녀는 한동안 동네 친구를 잃은 가벼운 슬픔에 잠겨 있다가, 곧 업무와 새로운 인간 관계에 짓눌려 슬픔 따위는 금방 잊고 말았다.
"부산은 어땠어?"
비몽사몽한 얼굴을 가릴 생각도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은 그에게 물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안경을 쓰지 않아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로 겨우겨우 컵을 받아들어선 목을 축인다. 입새로 물방울이 한 줄기 흘러내렸고, 남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손으로 입가를 닦는다.
"바다랑...... 갈매기랑...... 돼지국밥이 맛있더라."
"갈매기가 맛있어?"
"갈매기? 갈매기는 새우깡을 잘 먹지."
"그래?"
"새우깡 한 박스를 샀어. 아침마다 해변으로 나가서 갈매기들한테 새우깡을 던져 먹였지...... 그랬더니 나중엔 내가 나가기만 해도 갈매기들이 날아오는 거야."
"민원 들어왔겠는데."
"아니...... 관광 도시라 그런 걸로는 민원 안 들어와. 근처 슈퍼들만 새우깡이 잘 팔려서 웃고 있었지."
"너도 참 웃긴 사람이야."
"그러니까 재워주는 거 아닌가?"
"돈 받고 말이지."
"철저해서 좋네...... 아, 자도자도 피곤하네. 십 년 전엔 안 이랬는데."
"낼모레 마흔이잖아. 몸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
"나도 늙긴 늙는구만......"
남자는 마른 세수를 몇 번 하고 나서야 침대 옆의 협탁을 더듬는다. 실수로 안경 알에 손을 대고 만다. 차가운 표면에 끈적한 지문이 남는 여실한 느낌에, 윽 하고 낮은 신음을 뱉으며 옷으로 대충 렌즈를 닦아낸다.
"세 달 있겠다고 했나?"
"구십 만 입금했으니 세 달이지."
"이 다음엔 어디로 갈 건데? 인천 찍고, 대전에 울산 부산까지 찍었으니...... 남은 건 대구랑 광주?"
"아니...... 동해로 갈 거야."
"동해?"
"동해시가 아니라 동해."
"동해시도 있어?"
"음."
남자는 미묘한 웃음을 머금다가, 강릉으로 갈 거야. 그리 말하곤 둥근 안경을 콧잔등에 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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