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lexity is the best
눈을 떴을 땐 병실이었다.
무언가의 비유 같은 것이 아니다. 나에게 '나'라는 의식이 탄생했었을 때, 나는 이미 허여멀건 인테리어의 병실에 갇혀 있었다. 똑똑 떨어지는 팩 속의 액체, 얼굴 절반을 가리는 커다란 마스크, 몸 이곳저곳에 붙은 유연한 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작은 두 눈을 끔뻑대며 주위를 살피는 일뿐이라, 당연하게도, 무척이나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이따금 간호사가 상태를 체크하러 오는 것을 제외하면 외부 환경의 변화 역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잠을 잤다. 계속 계속, 계속 잠을 자도 졸려서, 솔직히 다행이라고 여겼다. 침대에 누운 내 시야에선 창문이 아주 조금 보였으니까.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면 창 너머의 색이 변해있었다. 그게 얼마 없는 나의 재미였다.
가끔 간호사 이외의 인물이 병실에 발을 들였다. 나에게 무척이나 친한 척을 했다. 볼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누구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환경에 변화가 생긴 것만으로 나는 상당한 재미를 느껴서, 저 사람들이 자주 왔으면 하고 바랐다. 그들이 나의 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꽤 나중의 일이다.
물론, 이따금 병실에 들어오는 여자가 간호사라는 사람이라는 것도, 이곳이 병원이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의 나에게는 일차적인 상황 판단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꼭 본능적인 욕구에만 충실한 하등 동물처럼. 아니...... 인간의 아기라는 건 그 자체로 하등 동물에 속할까? 역시 그렇지? 밥을 안 주면 엄청나게 울어대. 강아지처럼......
전반적인 상황 파악은 일곱 살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나는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려서 병원에 갇혀 있다. 그래도 지금은 전보단 나아져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숟가락으로 밥을 먹을 수도 있고 화장실에 갈 수도 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다른 친구들처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해주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린 아이란 본래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간다고 믿는다. 그러니 하등 동물인 것이겠지만. 그러니 손을 잡고 사회로 이끄는 것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병원에 갇혀 제대로 된 세상을 접해보지 못한 나에겐 세간의 상식이 절망적으로 부족하여, 모든 사람은 어린 시절을 병원에서 보내는 것이라 굳게 믿었다. 내가 어린이 병동에 있었다는 사실 또한 그 믿음을 강화시켰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다고......
내가 특이한 경우인 거라고.
억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조그만 테레비 화면 너머로 보였던 그 넓은 세상을, 다른 친구들은 마음껏 뛰놀고 있다니 부러워서 엉엉 울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문득 동생을 떠올렸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작고 작은 내 동생. 엄마 품에 안겨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귀여운 동생. 그 애는 다른 병동에 있던 게 아니었구나. 엄마 아빠랑 같이 밖에 있던 거구나.
그럼 좋을지도 몰라.
간호사 언니에게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간호사 언니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병원에 더 오래 있어야 한다고 대답해 주었다. 어린 나이에도 석연치 않은 답변이었다. 그 즈음하여 나는 혼자서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화장실을 왔다갔다 하며 자주 마주쳤던 옆 병실의 아이와 얼굴을 트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뽀얀 얼굴에 짧은 머리카락. 아마도 남자아이. 그래서 나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병이 안 나으면 어떻게 돼?"
간호사 언니에게 던진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질문이었다. 남자아이는 홍채가 큰 눈을 몇 번 껌뻑이다가 입을 열었다.
"하늘나라 간다구 했어, 엄마가."
"하늘나라?"
"응."
"하늘나라가 뭐야?"
"구름 위 나라."
"우와, 재밌겠다!"
"근데, 거기까지 가려면 엄청 아플거래. 그러니깐 엄마가 빨리 나으라구 했다?"
"엄청 아파?"
"응. 날아가야 되니깐 아프다구."
"새는 훨훨 날잖아."
"걔네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런가~?"
"그리구, 하늘나라는 혼자만 가니깐 엄마아빠도 못 본대."
"으아!"
"엄마아빠가 엄청 슬플거래. 응, 나도 슬플 거야."
"그건 싫어!"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대화를 나눴다. 병동의 일상은 판에 박힌 것처럼 일정하고 밍밍해서, 대화의 소잿거리는 작은 테레비의 만화영화 뿐이 없었다. 로비에 있는 뚱뚱하고 귀여운 테레비. 검사가 없으면 늘 테레비 앞에서 만화를 봤다. 남자아이도 함께였다. 우리는 반짝이는 헬멧을 쓴 정의의 용사 장난감을 갖고 싶다고 헤헤 웃기도 하다가. 번쩍이는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의 왕관을 만져보고 싶다고 칭얼대다가. 시간이 되면 각자의 병실로 돌아갔다. 간호사 언니의 크고 따뜻한 손을 잡은 채.
그리고 남자아이는 죽었다. 하늘이 무서울 정도로 새파랗던 날이었다. 맑고 청명하고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아서, 나는 그 아이를 염려했다. 그렇게 아파하면서 하늘로 날아갔는데 발을 디딜 폭신한 구름이 없다면 낭패가 아니겠는가. 빨리 구름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창가에 서서 두 손을 맞잡았다. 만화영화의 공주님이 하늘나라의 신님께 기도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공주님의 기도를 들은 신님은 사다리를 내려주었지만, 내 기도를 들은 신은 구름도 하나 보내주지 않았다. 어린 아이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가 보았다. 그게 서글퍼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간호사 언니는 '민수도 이제 아프지 않을 거야' 라며 나를 연신 달랬다. 나는 민수가 하늘나라에 못 가면 어쩌냐고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아니야,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야' 였기에, 나는 계속 울었다.
그날은 밤까지 구름이 보이지 않았다. 그게 너무나 괘씸했다. 하느님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장난감을 사러 가자고 했던 민수는 이제 없지만 나는 퇴원을 하게 되었다. 몇 년 간의 입원 생활로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집에서 상태를 보며 통원해도 된다고도 했다. 처음으로 타 본 자동차는 꼭 변신 로봇의 조종석 같아서, 나는 또 울었다. 떼를 썼다. 그 길로 장난감을 사러 갔다. 민수가 좋아하던 슈퍼 히어로의 장난감을 샀다. 그걸 꼭 안고 집으로 갔다. 그날은 차창 너머로 구름이 보였다. 있는 힘껏 올려다 봤지만 민수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나라는 혼자만 가니깐 엄청 슬플 거야.
혼자만 간다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이젠 무섭지 않다. 민수가 먼저 갔으니까, 언제든 가도 민수가 기다리고 있겠지. 엄마아빠는 못 가겠지만 장난감은 들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민수는 죽기 전 날까지 웃으면서 만화영화를 봤는걸. 나도 이렇게 하하호호 웃다가 내일이면 하늘나라에 갈 수도 있는 거야.
그러니깐, 이젠 죽는 게 무섭지 않아. 오히려 기대된다.
나는 다소 이른 나이에 달관의 경지에 올랐다......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과거의 나를 대조군으로 삼았던 결과인 모양으로, 평범한 이들의 생활 궤도에는 영 안착하지 못했다. 틈만 나면 제멋대로 발작해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던한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심한 운동은 금물. 심장에 좋은 음식 위주로 섭취. 약은 꼬박꼬박 챙겨 먹기.
초등학교에 입학한 여덟 살의 나는 담임의 특별한 짐덩이였다. 그래서 눈치를 보다가, 스트레스를 받다가, 발작했다. 그런 일을 수어 번 반복한 후 결국 자퇴서를 제출했다. 홈 스쿨링이라는 사도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부모님은 상냥하셔서, 이런저런 지원을 질리지도 않고 해 주었다. 네가 살아있기만 해도 축복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이며.
책상 가장자리에 낡은 장난감을 세워두고 공부를 했다. 깨끗하게 빛나던 빨간 도색은 이제 군데군데가 벗겨졌다. 너무 많이 만져댔는지도 모른다. 내 방을 들락날락하던 동생도 그것을 좋아했다. 갖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이건 언니 거니까 못 준다고 했고, 끌어안고 몇 번을 쪽쪽댔다. 그러면 동생은 또 좋아선 꺄르륵꺄르륵. 언니가 병원이 아니라 집에 있으니까 너무 좋아. 응, 나도 좋아, 유선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학습지를 풀고, 밥을 먹고, 동생과 놀고, 만화영화를 보고, 잠을 자고. 그런 평범한 일상이지만 병동에서의 하루하루와는 차원이 다르게 즐거웠다. 행복했다. 세상은 넓고 즐거운 일은 엄청나게 많다. 이렇게 인생을 즐기다가 죽으면 하늘나라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다니. 삶이란 멋진 거구나. 축복인 거구나. 그렇다면 한껏 즐겨줘야지.
공부는 나름 재밌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까지 따냈다. 그 즈음 컴퓨터에 관심이 생겨 도서관에서 관련 책을 빌려 공부하곤 했다. 밖에 나가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가진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잡한 프로그래밍은 분명 재밌어 보였지만 취향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재능이 없음을 느꼈다. 그 후 눈에 띈 분야가 3d 모델링. 지렁이 같은 코드 몇 줄로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 것보단 이쪽이 더 직관적이고 좋았다.
대학은 가지 않기로 했다. 집과 가까운 대학에 갈만한 성적은 되지 않았고, 저 멀리 지방의 대학으로 가려니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검진을 하기 어려워진다. 그리하여 또 다시 다른 길을 모색했다. 집 근처의 컴퓨터 학원을 등록하고, 국가가 지원해주는 학습 프로그램을 찾아보고. 어찌어찌 살아갈 길을 찾다 보니 어른이 되었다.
솔직히 놀랐다. 스무 살까지 살아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스무 살이 되던 해의 1월 1일을 기억한다. 그 때까지도 낡은 장난감은 내 책상 위에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동생은 더 이상 장난감을 탐내지 않게 되었다. 그저 언니, 스무 살 축하해, 하며, 와락 안겨왔다. 코끝이 찡해서 훌쩍댔다. 동생의 목덜미에선 샴푸 향기가 났다.
그 해, 따스하던 오 월에, 동생은 남자아이를 집에 데리고 왔다.
맑고 또랑또랑한 두 눈이 인상적인 아이였다. 나보다 한 살이 어리고, 동생보다 두 살이 많던 그 아이. 정갈하게 차려입은 교복이 보송하니 깨끗했다.
"유선이보다 두 살 연상이면, 고삼이구나?"
셋이 앉아 간식을 먹었다. 부모님은 아직 직장에 계시는 오후라, 한가로이 공부를 하던 내가 그 아이를 대접했다. 동생도 옆에서 거들었다.
"네, 맞아요."
"고삼이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핫, 하루 정도야 괜찮아요."
아이는 멋쩍게 웃었다.
이름은 강은율. 동생과 같은 선도부. 물론 3학년이니 실상 하는 일은 별로 없다고 했다. 그래도 가끔 아침에 얼굴을 비춰 친목 정도는 다지는데(순전한 재미 본위의 행동이었다) 새로 들어온 1학년들에게 인사하다가 동생과 친해졌다고.
"어떻게 친해졌어?"
"아, 제가 어렸을 때 이 근처에 살았었거든요. 그 때 유선이랑 친했었는데, 옆 동네로 이사가는 바람에 잠깐 헤어졌다가......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어, 진짜? 우와."
"언니는 모르겠구나?"
"응. 어렸을 땐 집에 콕 박혀있었으니깐."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보니 동생이 '은율이 오빠'라는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십 년 가까이 되는 한참 전의 일이라 잊고 있었다.
하여간에 두 사람은 즐거워보였다. 중간에 간식으로 내온 쿠키를 다 먹어서, 찬장에서 쿠키 상자를 꺼내 리필까지 해 주었다.
은율은 한 시간 정도를 떠들다가 갔다. 대화의 주도권은 대부분이 동생에게 있었다. 고등학교 생활은 어떻게 하면 좋은지. 선도를 하다가 말을 안 듣는 녀석이 있으면 찍어놔도 되는지. 급식을 거르고 학교 매점에서 점심을 때워도 되는지. 후배가 선배에게 할 법한 질문을 이것저것 던져댔다. 은율은 상냥하게 대답해 주었는데, 그 시선이 이따금 나를 향하는 것을, 나는 눈치채고야 말았다.
은율이 야자를 째고 놀러오는 일이 많아졌다. 동생은 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저녁 늦게야 귀가했다. 가끔은 부모님보다도 늦게 돌아왔다. 은율은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꾸준히 무언가를 사든 채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물론, 문을 열어주었다.
"유선이가 너를 좋아하는 건 알지?"
그 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에 카스테라 박스를 들고 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책상 위에 두었다. 무의식적으로 따라온 그 애의 시선이 잠시 낡은 장난감에 멈추기에, 나는 풋 웃어 보이다가.
"보통 어린애를 좋아하지 않나?"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유선이 귀엽지 않니?"
"귀여운 스타일은 아니지 않나요?"
"그럼?"
"어, 음, 매섭달까."
"훗, 그래서 싫어?"
"아뇨, 아뇨, 싫다는 게 아니라."
"내가 더 취향이라는 걸까?"
대답은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떨군다. 나는 뭘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카스테라 박스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포근하고 맛있어 보이는 노오란 카스테라. 동봉된 빵칼로 부드럽게 한 조각을 잘라선 건네었다. 오물대는 모습이 귀엽긴 했다.
"고삼인데 연애 같은 걸 하면, 공부에 방해되지 않아?"
"어차피 이젠 문제만 돌려야 하는 시기라구요."
"좀 있으면 월드컵도 할 텐데. 이중으로 방해받겠네."
"이, 이중."
"그래, 이중."
나는 연애랄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지. 집 밖으로 멀리 나갈 수도 없는 몸인데,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교우를 이어갈 수 있겠어. 그런 와중에 굴러들어온 귀여운 남자아이를.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동생 친구 이상의 호감은 없었다. 아니, 얼굴이 좀 생겼으니 약간의 가점은 있었을지도. 하지만 사랑이라는 애매모호한 높은 허들을 넘을 법한 감정은 단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궁금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친교를 쌓다가 도달해버리는 최종의 목적지가. 그에 수반되는 일시적인 감정이. 딸려오는 변태적인 행위가.
그래서 고삼짜리 애를 만났다. 나와 다르게 혈기왕성해서 좋았다. 월드컵이 시작된 이후로는 늘상 그 이야기를 했다. 나도 스포츠를 아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어서, 적당히 맞춰 주었다.
빈 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언제나 간식거리를 사 왔다. 몇 번의 만남 후에는 내가 사기도 했고, 가끔은 동생을 끼고 셋이서 얘기를 하기도 하고. 두 사람은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였다. 설마 눈앞의 잘생긴 선배와 언니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겠지.
나로서는 사귄다는 자각이 없었지만.
첫 관계는 한 달이 지나서야 했다. 붉은 악마의 열풍이 불었던 월드컵 준결승을 앞뒀던 때였다.
너도 처음이고 나도 처음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하자. 내가 말했다. 그 애는 멍하니 내 나신을 바라보다가, 바지를 내리지도 않고 손을 뻗었다. 허여멀건 가슴에 손을 대어선 느리게 쓰다듬었다. 이내 허리로 미끄러뜨린 손은 아래로, 아래로 향해서, 골반을 쥐었는데, 아무래도 그 표정이 기묘했다.
경이와 부러움이 섞인 얼굴.
그 애는 끝끝내 바지를 내리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뭐, 처음이니까 어색해서 그랬으려나.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관계를 하고, 월드컵 결승 진출을 실패하고, 세 번째, 네 번째 관계까지 이르러도, 그 아이는 바지를 벗지 않았다. 오로지 손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이상하게도 내 몸을 끈덕지게 시야에 담으려 드는 게 어딘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왜 그건 안 쓰는 거야? 부전, 이라도 되나?"
다섯 번째 관계가 되어서야 나는 물었다. 은율은 대답을 않고, 다만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채 누운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래서야 여자랑 하는 거 같잖아."
모르는 척 물었다.
은율은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그걸 쓰기 싫어?"
나는 상반신을 들었다. 여전히 나신이었다.
등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슴을 밀착한다.
그 애는 제 얼굴을 감싸쥐었다.
"여자가 되고 싶어?"
가느다란 오열이 손틈으로 새어나왔다.
"내 몸이 부럽니?"
어깨에 턱을 대고 물었다.
"네......"
"여자가 되고 싶은데, 여자가 좋아?"
"네......"
"복잡해서 재밌다."
"재밌어요?"
"단순한 것보단 좋아."
"저, 저는 재미없어요. 진지해요."
"왜? 너도 수술 받으면 되잖아. 하리수처럼."
"남 일이라고 막 말하지 마세요."
"남 일이라니? 나도 계속 수술을 받았는데. 그래서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건데."
은율은 잠시 입을 다문다.
"수술로만 목숨을 연장할 수 있다면, 너와 내가 어떻게 다르니?"
"사회적 시선이 같을 거라고 봐요?"
"나는 계속 은율이라고 부를 텐데......"
"치, 친구들이 좋아해 줄 리 없잖아요. 친구 뿐만이 아니라, 부모님도."
"그건 어려운 일이네."
"내가 언니라고 불러도 좋아해 줄 거예요?"
나는 널 좋아하지 않는데? 라는 대답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억지로 삼켰다.
"지금까지 이것도 안 썼으면서, 달라질 게 있니?"
수능 D-100을 기념해 우리는 헤어졌다. 커밍아웃 이후로 관계가 없던 것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던 걸까. 어쩌면 성기를 사용하지 못하니 폐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나는,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적당한 정도의 쾌감은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렇게까지 자책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어쨌거나 그 애와의 인간관계는 즐거웠으니까.
시간이 흐르고, 나무가 나뭇잎을 우수수 떨어뜨리고, 매서운 한파가 들이닥칠 때 쯤 그 아이는 수능을 치뤘다. 동생은 선배에게 응원의 초콜릿을 한아름 선물했다며 의기양양해 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가는데, 선배는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라 묻기에, 나는 그저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이변은 졸업식 이후에 일어났다.
그 애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선배가, 문자로 그동안 고마웠다고, 그러곤 없어졌어. 집에도 가 봤는데 부모님도 모른다고 하시고, 어떡해? 선배 어디 이상한 일에 휘말린 거 아냐? 언닌 뭐 알고 있는 거 없어?"
내심 짐작가는 곳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게 끝난 후에 알리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너는, 윤곽이 뚜렷한 화장품 광고 모델을 보고 징그럽다고 하지 않았니.
한동안 그 애를 잊고 살았다. 나도 나름의 살아갈 길을 모색하고 있어 무척이나 바빴으니까. 일 년이 지나서야 그 애에게서 문자가 왔고, 나는 잘 된 일이라며 답장을 보냈고, 선배를 찾아다니던 동생과도 연락이 닿아서, 두 사람은 만난 모양이었다.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징그러운 새끼, 라고 중얼거리던 동생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이후의 삶은 가끔씩 얼굴을 비추는 병마를 제외하면 평안했다.
공부머리가 있던 동생은 어렵지 않게 유명 대학의 법대에 합격했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는가 싶더니 금세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법조인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 지나치게 명확했다.
나는 스물 후반이 되어서야 독립했다. 무리한 운동만 피하면 발작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주치의의 소견을, 그제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혀 밑에 두고 녹여먹는 니트로를 바리바리 싸 들곤 본가에서 멀지 않은 도시로 이사했다. 처음으로 맛보는 고독은 의외로 상쾌한 면이 있었다.
거기서 모 게임의 프로젝트 뒷풀이에 참석했다.
메일로만 대화를 주고 받던 상대를 만났다.
이상할 정도로 손이 빠르고, 또 정밀한 그 사람......
"스키를 좋아해?"
"아니."
"근데 왜 닉네임이 눈사태야?"
"내가 제일 잘 하던 거라."
"눈사태를 잘 했어?"
"그럼.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
"따라오던 사람을 전부 죽인 거야?"
"푸하, 죽여? 그렇지. 죽이긴 했지."
"뭐야, 잔인한 사람이었네?"
"원래 바둑은 잔인해야 해. 목숨값이 전부 같거든."
"어머, 바둑 얘기였어? 바둑도 뒀었어?"
"예전에 조금."
"지금은?"
"심심하면 가끔."
"나한테도 알려줄 수 있어?"
"어디부터 알려줘야 할지 막막하긴 한데, 그럴까?"
"알려주는 거지?"
"원하신다면."
바둑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놀이였다. 같이 사는 동안 계속 바둑을 뒀고, 그가 떠난 이후에도 집 근처 기원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대국을 했다.
기원을 다니며 내기바둑이라는 걸 알았다.
별안간 나타난 그가 고수 여럿의 지갑을 털어갔다는 사실 역시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곁에 두고 싶었다.
단순한 사람보단 복잡한 사람이 좋으니까.
복잡한 사람이 재미있으니까.
"세상은 어려운 것 같아. 바둑은 기본적으로 부여된 능력도 목숨값도 같으니 '패'에 한해서는 고민할 게 없는데, 사람은 왜 이리 천차만별인 걸까?"
"천차만별이 아니면 재미가 없는걸."
"모두가 같은 바둑이 무한한 양의 수를 가지는데도?"
"모두가 천차만별이면 무한 곱하기 천차만별이잖아. 그럼 더 재밌지 않아?"
"내 뇌용량을 벗어나서 지겹다고 느껴."
"후훗......"
"흠, 왜 웃는 거야?"
"재밌으니까."
"나참, 어디가?"
"비밀이야."
"또 뇌용량을 벗어나는군......"
"후후훗......"
그래서 나는 궁리한다.
당장 내일 죽어도 후회되지 않을 삶을 살기 위해 궁리한다.
이 재미있는 남자를 어떻게 단수치면 좋을까.
재료를 어떻게 모으면 좋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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