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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람자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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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바람은 싸늘했다.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부두. 각진 테트라포드만이 이따금 날개를 쉬러 내려오는 갈매기들을 맞이하고 있다. 근처 가게 주인의 말로는, 장소는 좋지만 수류가 세서 물고기가 도저히 잡히지 않는다던가. 그 때문에 기껏 사람 없는 부두를 찾은 낚시꾼들도 발길을 돌린단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지만 역시 낚시꾼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말라붙은 떡밥 부스러기라든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테트라포드 위에서 생을 마감한 피라미라든가. 있는 것이라곤 짠 내를 머금은 바닷바람뿐.

조심조심 방파제 위로 발을 옮긴다. 몇 걸음까지는 나름 촘촘하게 배열되어 있어 안전하게 전진할 수 있다. 지난 이 년간의 방문으로 익힌 경험이다.

'이 앞까지 가지 않으면 술이 테트라포드만 적신단 말이지...'

한 손에 초록색 소주병을, 다른 한 손에 마른 오징어를 들곤 천천히 다리를 움직인다. 사발이의 모서리를 밟고, 또 밟고. 오늘은 밑창이 우둘투둘한 운동화를 신고 왔다. 쉽게 미끄러지진 않을 테다.

제 밑에서 검푸른 바닷물이 출렁였다. 콘크리트에 다닥다닥 붙은 따개비들을 한 대 후리곤 사르르 부서지는 파도. 이런 거로는 겁먹지 않는다.

마지막 테트라포드에 도달했다. 바로 앞에서 넘실대는 시퍼런 심해를 내려다보며, 어떻게 몸을 기대앉아야 수평을 잘 이룰 수 있을지 생각한다. 근처에 거꾸로 선 모양의 사발이가 있기에, 세 다리가 만나는 움푹한 부분에 엉덩이를 대고 앉기로 한다.

가랑이 사이에 테트라포드의 가지를 두고 앉는다. 무게중심이 제법 안정해졌다.

옆구리에 마른 오징어를 끼곤 소주병을 개봉한다. 무슨 색 뚜껑을 사는 게 좋을까 고민도 해 보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노인네한테 독한 술은 좀 아니지 않나. 꽁다리가 딸려 붙은 초록색 뚜껑을 코트 주머니에 넣는다. 지퍼백에 담긴 소주잔을 꺼내 든다.

갈매기가 날아들었다. 제 옆의 테트라포드에 짧은 다리를 내려두곤 앉는다. 이쪽을 기이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다. 여긴 사람이 안 오는데, 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소주잔을 술로 채울 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파랑. 바람도 아주 거센 편은 아니니까, 물질하기엔 제격인 날씨가 아닐까. 연이 없는 어부들의 생활상을 머릿속에 그리다가, 부산까지 내려온 김에 회라도 한 접시 먹고 갈까 생각하다가, 잔에 가득 담긴 소주를 바다에 크게 흩뿌렸다.

"올해 이사하려고."

마른 오징어의 다리를 하나 뜯어냈다.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아직도 날개를 펴지 않은 갈매기의 시선을 느낀다. 별수 없이 그쪽으로 던져주었다.

짜서 도로 뱉지 않을까 걱정했건만 잘도 씹어 먹는다. 그는 다른 다리를 뜯어 질겅댄다.

"별 건 아니고, 아는 동생이 그러더라고. 사람도 없고 놀 것도 없지만 고속도로가 잘 돼 있어서 서울까진 금방 가는 동네가 있다데."

텅 빈 잔을 다시 채운다. 이번에는 제 입으로 가져다 댄다.

"나야 사람 덜 만나면 좋은 직종이기도 하니까. 거기에서 좀 살아보려고......"

한없이 인공적이라 싼 티가 나는 단맛. 아무래도 맥주에 말지 않으면 맛이 덜 나는 녀석이다. 후두를 타고 올라오는 알콜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오징어의 몸통을 찢어 오물대어 본다.

"어떻게 꿈에도 한 번 안 나타나냐."

사람이 뼛가루가 되면 겨우 작은 항아리 정도의 크기가 되는군. 그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깨달았던 세상의 진리. 

아버지는 그가 성인이 되기 이전 일찍이 귀적에 드셨다. 그때는 하도 정신이 없어서 항아리에 담긴 게 아버지인 줄도 몰랐지만. 나중에서야 선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그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던 그였다. 이후 호기심에 뚜껑을 열어보기도 하였으나, 그 새하얀 가루가 아버지의 유골이라는 자각은 상당히 옅었을 수밖에.

사고로 한순간에 떠난 아버지와 다르게 어머니는 천천히 죽어갔다. 흔해빠진 간암이었다. 발견이 너무 늦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진통을 위한 약간의 항암과 호스피스 치료뿐. 어떤 치료를 받아도 2년 안에는 세상을 떠나실 거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헛된 돈을 쓰지 말라고 하셨으나, 또 아들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부모의 목숨을 포기할 순 없는 것이라서. 삿된 곳까지 쏘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허가되지 않은 약물이라도 구해보려 했다. 돌아오는 답변은 그런 게 있으면 일찍이 연구소에 거금 주고 넘겼지, 등신아. 뿐이 없었지만.

결국 그는 길다면 긴 마음의 준비를 했다. 현실 직시에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정작 당사자인 어머니는 크게 동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점이, 그에게 최소한의 안도를 선물했다.

도화야, 엄마는 산속 과수원에서 자라서 항상 바다를 가 보고 싶었다.

꽃 피는 4월이면 복사나무의 복사꽃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는데, 그걸 뿌리치고서라도 맑게 펼쳐진 바다를 너무 보고 싶더라.

그럼 내 이름을 바다로 짓지 그랬어.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시한부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거스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일 년 반 만에 어머니는 죽었다. 다소 이른 작별이었다.

평탄한 전자음이 길게 이어지고, 의사가 사망선고를 내리고, 어머니는 그저 잠이 드신 것만 같은데도, 아, 역시 준비와 실전은 다른 거구나, 이렇게까지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걸 보면. 여태껏 죽은 사람은 질리도록 봤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내 일이 되니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구나. 그런 반성을 하릴없이 했다.

"아, 백바다는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지?"

갈매기는 대답이 없다. 두 개째의 오징어 다리를 잘근잘근 씹고만 있다. 어느새 친구를 부른 건지 뭔지, 서너 마리가 그 주위에 옹기종기 몰려 앉았다.

도화는 별수 없이 오징어 몸통을 북북 찢어 갈매기들이 앉은 테트라포드에 던져본다. 공중에서 휙 낚아채어선 잘도 냠냠댄다.

"날씨 좋~다."

텅 빈 소주병을 뒤집는다.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는다. 알뜰하게도 마셨나 보다.

소주 한 병은 일곱 잔 반. 도화가 맛본 분량은 고작 두 잔. 이 정도면 음주운전 단속에도 안 걸려.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랐는지 갈매기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금세 도망쳐 버렸다. 간식 준 인간을 배웅도 않다니 배은망덕한 조류들이다.

왔던 길을 거슬러 부두로 향했다. 마신 것 같지도 않은 알코올은 발목을 잡지 않았다.

"좀 있으면 아빠 제산 건 알지?"

"가야 돼? 나 없어도 누나가 알아서 잘했잖아."

전파 너머에서 들려오는 한숨.

"남우야, 올해부턴 좀 오자. 조카 얼굴도 볼 겸......"

"누나 프로필 사진으로 봤어."

"귀엽지?"

"뭐 그냥저냥......"

"야!"

"아, 나 클라이언트 미팅 있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수신 종료 화면이 반짝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 그는 카페 테이블에 스마트폰을 엎어 놓는다.

해운대 소재의 프랜차이즈 카페. 주중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꽤 있다. 분명 이 근처에서 열린 한국 최대의 게임 행사 때문이리라. 컨벤션 센터 앞에서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던 사람들을 떠올려낸다. 어딘가 눈에 익은 게임 캐릭터를 코스프레한 것 같았지만, 나무가 일러스트를 담당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카페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스타벅스입니다, 하는 직원의 반사적인 인사말을 제외하면, 그에게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전무했다. 상대는 나무의 얼굴을 모른다. 하지만 나무는 그의 얼굴을 알고 있다.

나무는 살짝 손을 들어 상대에게 사인을 보내어 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시선이 맞았다. 눈웃음을 치며 다가오는 무채색 코트 차림의 남자.

"팬 분들은 잘 만나고 오셨어요?"

"아, 설마 그렇게 일찍 들킬 줄은 몰랐네요. 요즘 애들 눈썰미가 너무 좋아~"

백도화는 그리 말하며 맞은편 의자를 꺼내 앉았다.

도화가 나무를 고용한 건 불과 일 년 전의 일이다. 그때에는 유선상으로 계약서를 주고받았는데, 슬슬 계약을 갱신할 때가 되어 연락을 하니 나무가 하는 말이.

"혹시 이번 지스타 오세요?"

부산에서 매년 개최하는 게임 행사에 참가하냐는 것이었다. 도화는 물론 매해 참관했지만 시청자들에겐 알리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팬 사인회가 열리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그걸 방송에서 썰로 푼 건 작년이 처음이었다. '형...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해?' 라는 채팅이 올라왔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니 아마 이번 지스타에선 다들 눈을 부라리고 있겠지.

"엇, 갑니다. 그런데 그건 왜..."

"아, 제가 해운대에 살고 있어서요. 그럼 그때 벡스코 근처에서 뵐까요?"

"아, 그럴까요?"

"지스타가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였죠? 언제 오세요?"

"첫날이요. 수요일이 휴방이라 그때 가야 몸이 편하겠더라고요, 하핫."

그렇게, 저녁 즈음에 근처 카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도화는 평소와 다르게 분장 하나 하지 않은 채 벡스코를 쏘다녔다. 십 분 만에 제 뒤를 따라붙는 발걸음을 느꼈고, 십 오 분 만에 아는 체를 하는 시청자를 만났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껴안긴 건 이십삼 분 만의 일이었다.

"아 형! 실물이 더 잘생겼어요!"

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미소를 짓게 되지 않나.

"조명만 바꾸면 완전 남캠 같겠다!"

라는 말을 면전에서 하면 실례잖아.

"오빠!! 총겜 시연!! 해 주세요!!"

도화는 잠시 제가 오빠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나이인가 반추했다.

아무튼 주위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스트리머 백도화는 세상 사람들 앞에 직접 나타나는 걸 무척 꺼리는 설정이니까. 이런 이벤트는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고 생각하겠지. 실상 방송 시작 이후로 현실에서 팬을 만나는 건 처음이기도 하고.

세 시간 정도 게임 행사를 구경했다. 종일 게임을 하는 직업이라 한들, 갓 나올 게임을 구경하는 게 질릴 리 없지.

그래, 게임은 순수하게 재밌는 매체다. 주인공의 앞에 펼쳐진 대서사시를 일인칭으로 체험할 수 있으니까. 가만히 앉아서 감상해야 하는 영화나 책보다 재미있을 수밖에. 

그래서 도화는 일을 마치면 티브이보단 게임기를 켰다. 생활비를 아껴서 산 중고 게임팩을 가동했다. 게임의 모든 과제를 클리어하기 전에는 다른 게임팩을 사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룰이었고, 도화 자신은 그 룰을 준수하는 것에서 나름의 즐거움을 느꼈다.

동영상 업로드 사이트가 유행할 즈음 자신이 플레이했던 게임의 공략 영상을 보았다. 함정이 즐비한 구간을 낑낑대며 클리어하는 영상들이 참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 정도 난이도의 컨트롤 게임을 꽤 어려워하는구나, 라고 생각했고, 도화는 그 게임의 스피드런 영상을 업로드했다. 컴퓨터가 플레이한 게 아니냐는 댓글이 백 개 정도 달렸다. 해명이라도 할 겸 라이브 방송을 켰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똑같은 스피드런을 했다. 채팅창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평생 얻어 본 관심 중 최대량이었다.

'아마 그걸 계기로 게임 방송을 하게 됐지? ......지금 다시 해 보라고 하면 영 자신은 없는데.'

솔직히 나이를 먹으니 피지컬이 하루하루 떨어져 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게이머 중에선 나름 상위권에 속한다고 자부하지만. 이 나이를 먹고도 피지컬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다름 아닌 부업의 특수성에 있었으므로, 도화는 어쩐지 멜랑꼴리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대규모 인원의 FPS 게임 시연을 마치곤 정말 돌아가기로 했다. 하필 또 1등을 해서 이목이 쏠렸으나. 토크 한 번만 해 달라고 달라붙는 사람들에게서 무사히 도망쳤다. 아까 그 사람, 셀카봉을 들고 있었으니 인터넷 방송인이었겠지. 그는 다른 스트리머와 합방조차 해 본 적이 없다.

하여간, 

그리하여 올해의 지스타 관람이 끝이 났다. 슬슬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급하게 발길을 옮긴 도화였다.

남자치고는 키가 작군. 토트백에서 파일을 꺼내 드는 도화를 보며 나무는 생각한다. 목을 조금 덮는, 단발에 가까운 헤어스타일은 아무래도 그 나이대에 흔하진 않을 것이었다. 방송 흥행을 위해 부러 기른 걸지도 모르겠다. 인터넷 방송은 개성이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니까.

적당한 내용의 계약서에 사인을 적어넣는다. 사실상 만나서 할 일이라곤 이것뿐이다.

"이번에도 1년으로 하실 건가요?"

"어휴, 다들 섬네일 칭찬을 엄청 하거든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무는 처음으로 그와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잠시 떠올려 본다. 

일관된 섬네일을 등록하고 싶은데, 다른 스트리머처럼 대표 이미지도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는 요지의 상담 글이었다.

게임 스트리머 판에서, 서른 후반이라는 나이는 꽤 많은 축에 속한다. 나이가 들어 신체가 둔해지면서 피지컬이 상대적으로 저하된다는 이유도 있지만, 요즈음 인기 있는 모에체 섬네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도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인터넷 방송이라는 건 결국 팬을 얼마나 모으냐의 싸움이니까. 기호화된 캐릭터가 있으면 팬들에게 어필하기 쉬워져. 아마추어 그림쟁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좋아하는 우상에게 피드백을 받으려고 그 캐릭터를 마구마구 그린단 말이야. 포폴용도 아니고 단순한 열정으로. 완전 열정페이지. 그걸 보고 다른 팬들은 덕심이 막 차오르고. 게다가 개중에 잘 그린 그림은 또 무단으로 퍼 날라져서 홍보 효과도 얻을 수 있고......

이것은 나무가 다른 일러스트레이터와 나누었던 이야기.

'그럼 타 스트리머 분들처럼 귀여운 캐릭터를 만드실 생각은 없으신 건가요?'

라고, 나무는 처음으로 되물었다. 답장은 하루가 지나서야 왔다. 휴방일이 겹쳤던 탓이었을까.

'이 나이 먹고 귀여운 캐릭터를 내거는 건 좀 안 어울리지 않을까요? 하하하.'

'과하지 않은 데포르메는 어떠실까요?'

그러니까, 적당히 나이 있는 사람이라고 인식될 만한 수준의 간단한 데포르메. 어차피 스트리머의 캐릭터란 팬덤에게 유의미한 이미지적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데에 의의가 있지 않나.

고양이 귀 헤드폰을 쓴 덥수룩한 머리의 남자. 괜찮은 정도의 투시를 곁들여서. 구상은 삼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십 분 만에 초안 샘플을 그려 전송했다. 도화는 삼 분 만에 긍정적인 대답을 보내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일 년 치 계약을 했다. 시험 삼아 올려본 섬네일이 어지간히 평가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외주 경력이 좀 있는 나무의 단가는 결코 싼 편이 아니지만, 백도화라는 스트리머는 요 몇 년간 꾸준한 상승세였으니까. 이런 투자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르겠다.

계약서는 일 년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설마 백도화라는 이름이 정말로 본명일 줄은. 일 년 전에도 했던 감탄을 다시금 속으로 읊조려 본다. 혹시 복숭아꽃이라는 뜻의 도화일까......

"앗."

별안간 들려온 외마디 비명. 계약서에 사인을 하던 나무는 시선을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본다. 시야에 들어온 건, 도화가 제 쪽으로 왼손을 쭉 뻗고 있는 모습.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제 옆을 살핀다. 커피가 반쯤 남은 유리잔을 꽉 쥔 상대방의 손. 나이대에 걸맞은 주름이 조화롭게 새겨진 피부.

"앗하하, 떨어질 뻔했네."

아무래도 사인에 열중하느라 팔로 커피잔을 밀어낸 걸 알아채지 못했던 듯했다. 나무는 약간 머쓱한 표정을 해선 잔을 건네받는다.

"아, 역시 게임을 잘하시니까... 반사신경이 좋으신가 봐요."

"하하하, 그러려나?"

"왼손잡이세요?"

"양손잡이요. 살다 보니깐 두 손을 다 쓰는 게 편하더라고."

"흐음, 그건 동감입니다."

백도화는 양손잡이.

쓸모없는 정보를 파악하고 기억하려 드는 건 참 이상한 버릇이다. 나무는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인생살이에 별 쓸모도 없는 잡다한 정보를 열심히 기억하려 애썼다. 학교 가는 길에 붙어있던 전단지의 내용. 선생님 휴대전화에 달린 장식의 모양. 어긋난 보도블록의 개수. 이름도 모르는 선배의 안경테 색깔. 여태 머릿속에 저장된 쓰레기 파일들은 도저히 삭제되지 않는다.

양손잡이......

의식적으로 떠올리면 결국 잊지 못하게 된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무는 부러 떠올리게 된다. 반짝반짝한 유리 조각을 둥지에 모아두는 까마귀처럼.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더미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상대는 오른손으로 커피를 마셨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특이한 것 없는 메뉴 선정.

새끼손가락에 베인 흉터가 있었다. 크기는 검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 아물지 않은 것을 보아 꽤 최근에 난 상처다. 작지 않은 상처니 반창고를 붙이는 편이 나을 텐데. 붙이지 못할 사정이라도 있었던 걸까.

"반창고 드릴까요?"

"옛? 아, 아하."

도화는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무는 가방을 뒤져 반창고를 건넨다.

"주머니에 쓰레기를 넣고 다니는 바람에... 아, 고마워요."

"쓰레기요?"

"소주병 뚜껑. 밖에서 소주를 딸 일이 있어서......"

능숙한 손길로 반창고의 포장을 벗겨낸다. 끈적이는 면이 달라붙지 않도록 만반의 주의를 기울인다. 이윽고 얇은 새끼손가락을 한 바퀴 빙 두른 반창고.

"아아, 날카롭죠. 소주병 뚜껑은."

"으음─ 버리려고 했는데 하도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네요."

"여기 쓰레기통에 버리시죠? 또 베일 수도 있으니까."

"나가면서 버려야겠어요."

성묘라도 다녀온 건가.

보통 가게에서 마신 소주의 뚜껑을 주머니에 보관하진 않을 테니까. 그 외에 밖에서 술병을 개봉할 만한 사유는, 일단은 성묘뿐이 떠오르지 않는 그였다.

꽤나 바쁜 휴방일을 보내신 모양이군......

계약은 삼십 분도 안 되어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어서, 오늘 저녁은 무엇으로 때울까 고민하다가.

"저녁이라도 같이하실래요?"

라고 도화에게 물었다. 작은 키의 스트리머는 코트를 여미며 대답을 고른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지금 출발해도 아홉 시는 되어야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네요."

"아, 그럼 나중에 또 뵙죠."

"내년에도 이 근처에서 뵐까요?"

"흐음, 실은 이사 생각을 하고 있어서요... 내년까지 부산에 있게 된다면야, 기꺼이."

아마 그렇지는 못 하리라. 적어도 내년 늦봄까지는 강원도로 거처를 옮기겠지.

나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화는 반창고를 두른 새끼손가락을 까딱이다가.

"하하, 그래요?"

하며 사람 좋게 싱글대는 것이다.

"뭐, 그럼 그때 가서 상의해 봐요. 잘 들어가세요."

백도화는 양손잡이. 평생 잊히지 않을 더미 파일이 하나 늘고 말았다.

나무는 의식적으로 미소를 만들어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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