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비앙] 보리수 나무

보리수 나무

사관생도 2학년이 되고서는 (당연한 거였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원래도 빡빡하던 이론 강의뿐만 아니라 강도 높은 실습도 꽤 늘어나, 반은 내 의지, 나머지 반은 타의로 나름 부지런히 살았다.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해 다함께 생도선서를 하기위해 연병장에 처음 섰던 작년 봄이 엊그제 같건만,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봄바람은 어느새 흩어져버리고 이미 6월의 초여름이 되었다. 뭉게구름이 새하얗게 뜨고. 바다가 투명한 청록으로 빛나고, 활공하는 바닷새들이 슬슬 부지런해지는 계절.

오늘은 토요일. 점심을 후다닥 해치운 후 외박계를 작성했다. 싸인란으로 호기롭게 이름을 갈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집으로 갈 건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칼리치아가의 대저택은 재미없고 지루하며 한숨이나 푹푹 나오는 곳. 오늘은 항구 근처에서 야시장이 크게 열리는지라, 이것저것 구경이나 하다가 밤이 되면 혼술이나 하러 갈 요량이었다. 잠은 뭐, 아무 여관에서나 자면 그만이고. 친한 동기들과 시끄럽게 먹고 마시는 걸 좋아했지만 가끔은 혼자 노는 것도 좋았다. 자주 가는 호프집 몇몇을 헤아려보며 생활관 로비의 긴 소파로 축 늘어졌다.

혼자 부어라 마셔라 할 호프집 후보 두 곳을 두고 이리저리 재보던 중이었다. 멀건 뒤통수를 토독, 경쾌하게 두들기는 손끝이 있었다. 씨발, 누가 남의 소중한 머리를! 무지막지하게 살벌한 표정으로 뒤를 홱 돌아보곤, 손가락의 주인공을 알아보는 순한 그저 헤헤 웃었다. 사관학교의 활동복이 아닌 가벼운 평상복 차림의 비앙카였다. 새하얀 셔츠의 소매는 단정히 걷어져 있었다.

“혼자 뭐 하나, 리카르도.”

“어, 비앙카. 어디 가?”

“집에 좀 다녀온다.”

메디치의 대저택을 떠올린 순간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6월이지. 그렇다면 내가 또 한 번 가줘야지? 뭐 딱히 특별한 건 아니고, 메디치의 대저택 내에 조성된 야외 정원. 어릴 적에는 우리 집인 양 자주 드나들곤 했었는데, 머리가 제법 굵어지고 나선 어찌어찌 하다 보니 발글이 뜸해지게 되었다. 작년은 아예 들리지도 못했으니 올해는 꼭 가봐야하지 싶었다.

“그럼 나도 데려가!”

“재워줄 방 없다.”

“아니, 그게 아니라. 6월이잖아?”

“……아아. 그거.”

“보리수나무 열매!”

메디치가의 야외정원에는 보리수나무가 유독 많았다. 비앙카의 말로는 선대의 어느 분께서 그 열매를 매우 좋아하셨단다. 그래서 정원의 한 부분을 보리수나무로 빽빽하게 채우셨다고. 나 역시 성함 모를 그 메디치의 어느 분처럼 보리수 열매를 굉장히 좋아했다.

“나 따라가도 돼? 응?”

“…뭐, 좋을 대로.”

“그럼 좀만 기다려? 나 옷만 빨리 갈아입고 올게!”

비앙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남자 생활관의 중앙계단을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어쩐지 매우 신이 났다.

-

정말이지, 참으로 오랜만에 찾은 메디치의 대저택이었다. 우리 집도 한 크기 하지만, 역시가 좀 더 오래된 이 곳은 뭐랄까, 훨씬 웅장하고 깊이가 있다고 해야 할까. 오는 길에 주류상점에 들려 제법 비싼 술을 한 병 샀다. 남의 집 정원의 나무 열매를 신나게 따먹을 것에 대한 대가랄까. 그런 거 안 사가도 된다. 양장의 두꺼운 책을 고쳐 안으며, 술을 고르는 나에게 한 마디 하는 비앙카에게 신소리처럼 대꾸했다.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되니까?

굉장히 오랜만에 뵙는 거라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메디치가의 어른들께서는 며칠간 여행을 가셨다고 했다. 하긴, 계절이 계절이니 만큼. 사온 술을 사용인에게 맡겨두곤 비앙카와 함께 야외 정원으로 향했다. 보리수나무가 우거진 곳은 비앙카와 내가 어릴 적부터 시간을 많이 보내던 장소였다. 특히 이 무렵이면 내 집인 듯 자주 드나들어, 거짓말 조금 보태면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잔뜩 신이 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나와는 달리, 비앙카는 어딘지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나랑 둘이만 있으면 눈에 띄게 말도 많아지고 제법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기도 하는 앤데. 슬쩍 돌아본 얼굴은 자기만의 세계에 한참 빠져들어간 듯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올라가는 입매는 굳이 제 기분을 티내지 않겠다는 뜻. 아무리 봐도 좋은 기분은 아니다. 나는 비앙카의 속을 제법 읽어내는 편이다, 꼬치꼬치 캐물어봤자, 스스로가 동하지 않으면 죽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성질머리를 잘 알아서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뭐, 자기가 필요하면 말해주던지 말던지 하겠지.

부리수나무밭에 도착하자마자 워후! 신난 소리를 질렀다. 진초록의 잎사귀 사이사이로 주렁주렁 달린 보리수 열매들은 어느때보다도 붉고 탐스러웠다.

“와, 올해 엄청 많이 열렸는데? 이 정도면 역대 최고다!”

“호들갑은. …그런가? 난 잘 모르겠다.”

“비앙카, 나 열매 따먹어도 되나?”

“언젠 네가 내 허락 받고 먹었나. 맘껏 먹어라.”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대꾸. 나무나 열매 같은 건 관심이 없다는 듯 들고 있던 책이나 펼치는 비앙카. 줄지어있는 나무들을 따라 느릿느릿 걸어가며 책을 본다. 일기고 있는 줄을 따라 선을 긋듯 움직여가는 손끝은 언제나처럼 단정하다. 아까 전 슬쩍 훔쳐보니 무슨 뭐시기 철학 개론, 그런 지루하고 따분한 거였는데. 쉬는 날에 본다는 게 철학책이라니, 정말 비앙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걸어가며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비앙카의 오른편에 서서 발을 맞추었다. 누가 봐도 여자치곤 큰 키에 다리도 긴 편인 비앙카는, 하지만 걸음은 상당히 느린 편이었다. 그런 느릿한 속도를 맞춰가며 새빨간 보리수 열매들의 반사광을 감상하다, 문득 손이 닿는 줄기 하나를 훅 훑어내렸다. 아주 잘 익어 말랑말랑한 열매가 우수수 딸려 난왔다. 입안에 서너 알을 가볍게 털어넣었다. 올해는 유독 과육이 부드럽고 새콤달콤한 맛이 배로 좋았다. 혀의 안쪽으로 느껴지는, 살짝 떫은 맛 조차 상쾌하게 여겨졌다.

고개를 돌려 길쭉한 씨를 퉤, 뱉으니 비앙카가 잔소리 비슷한 걸 한다.

“남의 집 정원 아무데나 아무거 막 뱉지 마라.”

“저거는 다 거름 되는 건데?”

어깨를 으쓱하곤, 손을 강하게 스치듯 하여 열매를 다시 훑어냈다. 손바닥으로 들은 날것의 알알에서 반짝반짝 윤이 났다. 고심해서 고르고 골라 제일 크고 잘 익은 한 알을 비앙카의 꾹 다물린 입가로 가져다 댔다.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입술은 착하게도 반 이상 열렸다. 빨간 알을 입안으로 슬금 넣어주자, 한참을 우물거리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얼굴. 턱 아래로 활짝 편 손을 잽싸게 갖다 바쳤다. 나를 요-렇게 보던 비앙카는, 이내 내밀어진 손바닥으로 씨를 뱉어냈다. 어디다 버릴까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지만 쓰레기통 같은 게 있을 리가. 저 멀리 나무밑둥으로 휙 던져버렸다. 읽던 책을 딱 덮으며 비앙카가 눈썹을 잔뜩 찡그린다.

“남의 집 정원 아무데다 아무거 막 버리지 말럤다.”

“아니, 저건 다 거름 되는 거라니까? 좋은 거라고.”

“…말이나 못 하면. 적당히 먹고 갈 때 좀 싸가. 사용인에게 말해놓을 테니?”

“뭐 대단한 거라고 그런 걸 시켜. 그냥 내가 따가면 되지.”

“네가 다 거덜낼까봐 그런다.”

“하하. 농담도. 비앙카, 같이 딸래? 열매.”

“…난 좀 피곤한데.”

“와- 비앙카, 너무 변했어 진짜. 어릴 적엔 같이 잘 어울려놀더니. 말도 예쁘게 했고. 맨날 방긋방긋 웃고 그랬었는데. 이거 이거, 너무 변해버린 거 아니야 자기? 이제 나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거야?”

“그 따위 말 좀 하지 마라. 징그러워 죽겠다.”

“그렇게 말 좀 하지 말어, 섭섭해 죽겠어. 그래도 사랑해 비앙카!”

기어이 들고있던 책으로 줘패는 시늉이 날아왔다. 으핫, 으하핫! 잘못했습니다,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비앙카 아가씨! 한참 과장된 몸짓으로 살벌한 책 모서리를 피하면서도 계속 까불다가 결국 등짝으로 한 대 얻어맞았다. 하도 매운 손이어서 한참이나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문득 질문이 날아들었다.

“근데 넌 왜 그렇게 보리수 열매에 집착하는 거냐.”

“그냥? 뭐, 맛있잖아. 새콤달콤.”

“내 입에는 너무 신데. 끝맛은 떫기만 하고.”

“그게 매력인 건데?”

“그리고… 좀, 식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좀 괴상해.”

“식감? 그게 어떻게 왜?”

뜬금없는 말에 물음표를 하니, 비앙카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가 살금 기울어진다. 화장기가 없는, 하지만 말랑말랑해보이는 입술 위로 내려앉는, 길다락 두 번째 손가락.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 나오는 포즈.

“뭐가 그렇게 심각해?”

고개를 과장되게 갸우뚱하며 입술에 얹은 손가락의 모양을 따라하자 날이 바짝 선 눈매가 돌아왔다. 또 한 대 얻어맞을 거 같아서 냉큼 자세를 바로 했다.

“…뭔가 묘하게 괴상하단 말이지.”

“그러니까 어떻게 괴상한데?”

“…껍질은 얇은데 오돌토돌하고. 미끄러운 거 같으면서도 끈적이고. 혀에 닿는 과육은 말랑하지만 씨는 살짝 거칠고. 거의 혀끝으로 발라먹어야 하는 데 입안에서 혀 굴리는 기분도 이상하고. 안 그래보이는데 은근히 과즙 많아서 느낌도 별로고…”

“…….”

…어째 묘사가 좀.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거 같지만, 이건 마치 꼭… 키스하는 느낌을 읊는 거 같잖아. 간질간질한 느낌을 참을 수가 없어서 괜한 뺨이나 박박 긁었다. 오래된 버릇을 따라 제 금빛 머리칼을 손끝으로 툭툭 건들던 비앙카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도 모르게 눈을 슬쩍 피했다. 그런 날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비앙카는 언제나처럼 한참이나 낮은 목소리다.

“여튼 그런 게 있다. 시간도 늦었는데 저녁이나 먹고 가.”

갑자기 호프집에 비앙카를 끌고 갈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굳이 대보라면, 아무래도 혼자보단 둘이 재미있을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근래 들어 비앙카는 항상 바빠서, 전처럼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웠다. 그럼 메디치의 저택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호프집으로 가볼까. 평소엔 엔간하면 술을 삼가는 비앙카를 어떻게 끌어내볼까, 별로 좋지ㅐ도 않은 머리를 굴려가며 저택 본관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문득 멈춰 선 비앙카가 입을 열었다. 제 옆의 내가 아닌, 아주 저 멀리 정면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그리고, 앞으로 내 수발은 그만 들어.”

“응? 수발? 무슨 수발? 내가? 뭘?”

“모르는 척하지 말아라, 이 똥괭이 자식.”

“아 자기, 진짜 너무한데? 똥괭이 자식이라니. 근데 갑자기 왜?”

“나중에 너 연애하게 될 때, 내가 본의 아니게 네 연애 사업 방해할까봐 그런다.”

고개를 갸웃했다. 연애? 연애 사업? 비앙카 네가 왜 내 영애 사업을 방해하는데?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다가, 빨리 안 오면 굶겨서 내쫓는다-! 외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후다닥 뛰었다.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뭐, 쉽게 생각하면서.

-

언제부터였을까. 보폭도 넓고 걸음도 빠른 내가, 보기와는 달리 은근히 걷는 게 늘어지는 그 애와 속도를 맞추어 느릿해진 시점은. 이유는 뭐였을까. 비앙카와 나, 우리는 그저 가까운 소꿉친구였을 뿐인데. 오랫동안 함꼐 교육을 받아왔을 뿐인데. 지금은 같은 사관학교를 다니는 중일 뿐인데. 사실 그 모 든 것들이 하나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만.

‘비앙카를 좋아한다’는 감정이야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멍청이가 아니다. 그저 겁쟁이일 뿐.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손도 잡아 깍지껴보고 싶고, 품에 가득 껴안아 보고도 싶고, 입… 입도 한 번 맞추어보고 싶고. 그리고… 어쨌거나 그게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영 모르는 건 언제쯤이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 발화점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비앙카와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엇갈린듯했다. 조숙했던 비앙카는 십 대의 초반에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 시기를 지내어 보낸 듯했고, 반대로 철이 살짝 늦게 들은 나는 십대의 끝자락에 와장창 들이닥친 소용돌이에 휘말려 한참이나 괴로운 상태를 오랫동안 품었더랬다.

알고 있었다. 남들보다 이른 사춘기의 중간에, 비앙카는 나를 좋아했었다는 걸. 바다의 투명한 청록을 닮은 두 눈은 언제 어디서나 어떻게는‘나 로 마무리지어졌으니까. 시의 나는 그런 쪽으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비앙카는 기민하고 똑똑해서 티를 내거나 하진 않았지만, 오다가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 원망 비슷한 것이 잔뜩 담긴 두 눈동자.

비앙카는 사춘기의 끝과 함께 나에 대한 감정도 말끔하게 마무리 지은 듯했다. 그리고 내 질풍노도의 시기는 정말 우습게도, 철없던 나의 시선을 그 애에게 고정시켜 버렸고. 그리서 더 이상 나에 대한 미련이 없는 듯한 비앙카를 내내 봐야 했고.

그래도 나는 비앙카가 좋았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좋았다. 할… 아니, 통령님의 관저에서 함께 받던 교육이 끝나면, 가끔은 피곤해 죽겠다는 비앙카의 손목을 붙들어 방파제 위를 걷곤 했다. 속깊은 대화 같은 게 오가거나 한 건 아니었다. 숨겨둔 마음으로 쉬이 내보일 수도 없었다. 그런 날이면 비앙카는 방파제에 걸터앉아 종아리를 작게 흔들었다. 그러며 저 먼 수평선이나 말없이 바라보곤 했다. 나는 그 멀건 뒷모습을 호위병처럼 지키며 바닷새들의 동선이나 눈은로 좇았다.

발간 노을이 그 애의 뺨에 천천히 스며들고, 옅게 박힌 주근깨가 저녁그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게 될 때가 오면, 그제야 비앙카는 내내 뒤를 지켜서있던 나에게 손을 내밀어왔다. 키에 비해 작은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순간을 나는 매우 좋아헀다.

고백해볼 생각도 헀었지만… 다 옛날 이야기다. 지금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청승떠는 기사 노릇 하자는 건 아니고, 딱히 할 수 있는 건 그저 곁을 지켜서있는 것뿐이서어. 누가 봐도 괜찮은 남자가 비앙카에게 대시라도 한다면 나는 순순히 물러날 용의가 있다.

그 애에 대한 감정을 언젠간 지울 수 있을 거라 스스로 위로도 했다. 하지만 키가 훌쩍 크고 정수리가 단단히 여물어버린 지금도 그러질 못하고 있는 내가 불쌍하긴 하다. 게다가 골격마저 단단해진 이제는, 오래된 감정에 더하여 무서운 충동까지 얹혀 나는 너무나도 괴로운 것이다.

바로 지금 같을 때가 그렇다.

“비앙카, 너 진짜 괜찮아?”

“으… 하나 더, 더 시켜….”

“아니, 더 마시자는 게 아니었는데. 이봐요, 아가씨, 정신 좀 차려봐 응?”

“…어지럽다… 뒤지겠네…”

웅얼거리며 벽에 옆머리를 쿵! 박는 비앙카는 거하게 취해버렸다. 암만 꼬득여봐도 안 넘어올 거라 생각해서, 비앙카 술이나 한 잔 할래? 지나가득 넌지시 던져보기만 헀는데, 어떤 일로 선선히 끄덕이는 고개가 있었다. 오늘 내내 가라앉아 있었던 표정 때문이었을까, 그 쉬운 수락은. 어딘지 모르게 복잡하던 눈빛. 그랬던 비앙카는, 술집에 착석하자마자 전에 없이 술을 퍼대기 시작했다.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천천히 달리라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손을 설설 들며 여기 한 병 더어요- 꼬인 혀를 굴리는 걸, 번쩍 들린 팔을 잡아내려주곤 후다닥 일어섰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아, 한 병만, 딱 한 병만, 더어-”

“한 병만은 무슨! 웃기지 말고 빨리 일어나, 데려다줄게.”

“으응, 싫은데…”

“으응은 무슨 으응이야? 가자. 집에 가자. 일어나. 빨리!”

메디치의 어른들께서 집을 비우고 계신 것이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이 자유와 방종의 꼬라지를 보셨다간 나는 둘째치고 비앙카는… 앞뒤 분간도 제대로 못 하고 비틀거리는 애를 옆구리에 척 꿰곤 계산을 했다. 잔돈을 세던 주인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투를 하신다.

“거, 아가씨가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녀? 총각은 괜찮아?”

“아 옙, 저는 좀 졸리기만 하네요.”

“잘 데려다줘. 어디 업어갈 생각 말고.”

“아니!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버럭 외치곤 술집을 나오자 애매하게 쌀쌀한 공기가 훅 덥쳐왔다. 옆구리로 꿰어진, 축 늘어진 몸을 재차 추스르며 느릿느릿 걸었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멍한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반쯤 벌어진 틈새가 시야를 가득 채워왔다. 아니지, 아니야! 리카르도 이 미친놈! 불경한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라! 억세게 도리질 치곤 어깨를 부축하던 팔을 뺐다. 쭈그러 앉은 내 어깨위로, 작고 흰 손이 푹 얹히는 게 느껴졌다.

“야, 비앙카 너 안 되겠다. 업혀.”

“너, 나, 못 업어- 으으… 속 안 좋아… 토할 거 같다…”

“등에 토해도 되니까 잔말 말고 업혀.”

“싫은데… 나 되게 무겁다아, 이 자식아-”

“아오, 좀, 말 좀 들어라!”

벌떡 일어나 잔뜩 무서운 표정을 해 보이니, 그렇게 애처로운 나를 반만 뜬 눈으로 요-렇게 쳐다보던 비앙카가 쌔액 웃는다.

“하나도, 하나도 안 무섭다, 이 바보 멍청아.”

젠장, 누구더러 바보 멍청이라는 거야? 이걸 확 버리고 갈 수도 없고. 갈수록 밤바람이 덥게 느껴졌다.

한참 엎히네 마네 실랑이를 한 후에야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애를 반 억지로 업을 수 있었다.

“…뭐야. 별로 무겁지도 않네.”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중얼거리니, 술 냄새가 잔뜩 묻은 웃음소리가 낮게 깔린다. 귓가가, 어깨가,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무방비하게 부비적거리는 뺨. 역시나 간지럽다.

가로등의 노오란 불빛들이 한밤의 길을 고요히 열어내고 있었다. 자꾸만 밑으로 떨어지려는 비앙카를 재차 추켜올리며 메디치가의 저택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술 안 좋아하잖아?”

“…알 바 아니야…”

“오늘 무슨 일 있었지? 계속 표정 별로던데.”

“모올라, …신경 쓰지 마…”

섭섭함이 들락 말락.

“…야, 너, 너는, 리카르도…? 야. 야, 이 자식아-”

“응?”

“왜 잘, 잘 해줘? 나한테…”

그건… 내가 너를 좋아해서 그래.

“…잘해주지 마…”

“……..”

“너무 잘해주지 마…”

“…왜?”

“너무… 익숙해지기 싫…”

흐려진 말꼬리. 나는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

메디치가의 문지기는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고개를 꾸벅하곤 안으로 재빨리 들었다. 집까지는 무사히 데려오긴 했는데, 너무 늦은 밤이라 비앙카의 방까지 안내를 해줄만한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어서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는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기억해낸다 해도, 그 사이에 방이 바뀌었을수도 있고. 등에 업힌 비앙카는 잠이 들었는지 축 처져있었다.

생각해보니 일단 깨우는 게 우선인듯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안 될 거 같았다. 술부터 깨게 하자. 그럼 어떻게라도 되지 않을까? 어쨌거나 최대한 사람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생각나는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보리수나무밭.

보리수나무가 한참 우거진 곳에 도달해서야 비앙카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철퍽 앉다 말고 옆으로 넘어가려는 걸 재빨리 붙들어 잡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술에 절은 머리가 흔들흔들. 상체가 앞뒤로 요동치는 애 옆에 붙어 앉아 고개를 기대게 했다. 으으, 목, 목말라… 갈라져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물 같은 게 있을 리가.

“아 맞다. 그게 있었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손으로 딸려 나오는 건 보리수 열매 한 봉지. 메디치의 사용인이 챙겨준 것이었다. 보리수 열매는 갈증과 숙취 해소에 좋다고 했다. 달이거나 청을 만들어 마셔야 효과가 있는 거겠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니까.

손끝으로 뒤적여보곤 유독 큰 한 알을 집었다.

“비앙카. 이거라도 먹어.”

“으응… 그게 뭔데…?”

“보리수 열매.”

“나, 나 그거 싫어…”

“이거 목마른 거랑 숙취 해소에 좋대.”

“아니, 안 해애…”

말끝과 함께 비앙카가 뒤로 확 넘어간다. 자빠져 바닥에 박기 직전인 뒤통수를 받쳐냈다. 휴, 내가 안도의 숨을 내쉬거나 말거나 정신 못 차리는 애는 고개나 푹 숙인다. 채도가 낮은 금발이 우수수 떨어져 흔들흔들. 6월의 밤은 제법 쌀쌀하다. 춥겠다 싶어서 어깨를 감싸주려다, 말았다. 그러면 안될 거 같았다. 못할 짓을 하는 거 같았다.

“으으… 리카르도…”

한참 숙여져 있던 이마가 슬슬 들린다.

“정신 좀 들어?”

“…아니. 어. 아니… 모르겠다… 몰라…”

정신이 든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여전히 혀는 꼬여있었다. 한참 흩어지는 말꼬리를 하며 비앙카가 나를 느릿하게 돌아본다. 화장기가 없는 눈꺼풀은 반이 감겨 있었다. 밤바람을 더 맞아야 조금은 깨겠구나. 시간도 많은데 기다리지 뭐. 근데 얘 감기라도 걸리면 어쩐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쭉한 보리수 열매를 반틈 물었는데,

“…숙……소…”

“?”

“…숙취, 해소…”

띄엄띄엄 발음을 흐트리는가 싶더니, 취기에 늘어져 있던 오른손이 천천히 들렸다.

다가온다. 나를 향해 다가온다. 바짝 다가온 오른손이 나의 뺨 위로 얹혔다. 반만 드러난 눈동자 역시 다가온다. 아주 천천히 다가온다. 그래서, 숨이 얽힐 정도로 아주 가까워진 거리. 대번에 굳어버린 나를 응시하는 청록의 눈. 술에 절어 무거워진 눈꺼풀이 느릿느릿, 깜박깜박. 머리칼을 닮아 약간 빛이 바랜 속눈썹은 길다. 화장기가 없어도 매우 길다.

“나, 술…”

“…….”

“…깨야 되는데…”

선이 단정한 턱이 느릿느릿 들리는가 싶더니, 마주하던 입술의 끝이 내가 달고 있던 보리수 열매를 물어왔다. 날 것의 살갗이 가볍게 닿아왔다. 풍겨오는 술 향이 달큰했다. 그래서 어지러웠다. 꽉 쥔 주먹이 조금 떨렸다.

“…술이… 안 깬다… 안 깨… 젠장…”

내 목덜미를 바짝 감아오는 팔이 있었다. 그렇게 비앙카는, 무너지듯 안겨오며 밀어올리듯 입을 맞추어왔다. 눈조차 깜박이지 못했다. 길다란 속눈썹이 조금 떨고 있었다. 그 끝이 닿은 부분이 병처럼 간지러웠다. 깊어지는 입술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부드러웠다. 아예 매달려오는 몸을 안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느라 주먹만 바보 천치처럼 공중을 헤메었다.

물려있던 보리수 열매는 정신을 못 차리는 비앙카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턱을 둔하게 우물댄 비앙카는 씨를 퉤엣, 내뱉곤, 몸도 마음도 무방비상태인 내 가슴팍으로 이마를 푹 박아왔다.

“나, 추워…”

“어… 어, 어, 추워?”

“그래, 춥다. 너무 춥다…”

여태 겁먹고 덜덜거리던 팔이 용기를 낼 시간이었다. 내 품안에서 구겨진 몸을 조심조심 감싸 안았다. 뭐라뭐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잘 들리지 않아 무슨 말을 하고픈 건진 잘 모르겠다.

한참 혼잣말하던 이마가 들렸다. 취기에 쩔어 멍한 얼굴. 느릿느릿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청록의 눈동자. 자꾸만 입술을 달싹이는데, 여전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답답해졌다. 그런 날 보며 배시시, 풀어지는 웃음을 하는 비앙카. 거의 못 보다시피 하는 표정. 그래서 더더욱 예쁘고 사랑스러운 나의 비앙카.

한참이나 고민하던 걸 겨우 물어보았다.

“비앙카. 키스… 해도 돼?”

그러자 멍하니 열리는 눈꺼풀. 나를 바라본다. 풀린 눈.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나를 본다. 이건 대체 허락인 건지, 거부인 건지. 도통 읽어낼 수가 없는 눈빛.

아, 나도 이젠 진짜 못 참겠다. 눈을 질끈 감곤 입을 맞추었다. 달았다. 미칠 것처럼 달았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괜찮았다. 그래서, 그냥, 살짝 맞부딪히기만 하려고 했는데, 진심으로 그랬는데, 그런 나를 보채듯 따스한 숨이 슬쩍 넘어왔다. 살며시 벌어진 틈. 술의 잔향이 내 입술로 부비어져왔다.

오랫동안 좋아해 온 첫사랑과 나누는 술김의 입맞춤이라. 왠지 슬퍼졌다. 이유 모를 오기에 혀를 가만 밀어 넣었다. 곧 엉켜버린 말랑함은 6월 밤의 애매한 추위 때문일까, 덜덜덜 떨고 있었다. 팔에 힘을 주어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혀가 자꾸만 엉기고 엉긴다. 보리수 열매의 맛이 났다.

나는 첫 키스가 아니다. 비앙카는 잘 모르겠다, 처음인지 아닌지. 처음일까? 내가 알기론 만나던 남자는 없었는데. 그래도 모른다. 알게 모르게 비밀이 많은 애니까,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비앙카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쉬운 입술을 떼어냈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애한테 못 할 짓 하는 거 같아서. 이런다고 비앙카가 나를 좋아할 것도 아닌데. 문득 낮에 들은 말이 생각났다. 연애 사업 어쩌고 하는. 네가 내 연애 사업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네 연애 사업을 방해할 거 같은데.

“진짜 사람 미치게 하네.”

“…….”

“너, 나한테 왜 그래, 진짜. 내가 뭐 잘못했어?”

“…으응….”

“그래. 널 좋아하는 내가 유죄지. 내가 뭘 어째.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지.”

아예 무릎을 내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털썩 쓰러진 애의 어깨나 도닥여줬다. 작게 뒤척이자 흩어지는 금발로 달빛이 흘러내렸다. 귀밑머리를 다정히 쓸어주곤, 조금 용기를 내어 뺨으로 입을 맞추었다. 좋은 향기가 났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쓸데없이 맑은 검정이었다. 심장이 너무나도 두근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강한 빛에 눈을 떴다. 멀건 시야로 들어온 건 어색한 천장. 주변을 툭툭 더듬어 보니 침대 위인 거 같았다. 잠에서 덜 깬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프고 머리는 깨질 거 같았다. 이상하게도 웃옷을 홀랑 벗은 채였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억지로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는데,

“…으응…”

뒤에서부터 허리를 안아오는 힘이 느껴졌다. 식겁해서 내려다보니 내 허리를 꼭 감싼 건 길고 마른 팔. 어쩐지 많이 본 듯한, 상당히 익숙한 느낌.

설마.

설마.

설마?

팔을 풀어내며 옆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나처럼 상체를 벗은 채 엎어져 있는 건 다름 아닌 비앙카.

“…아……?”

수백 수천 수만가지 감정이 섞인 바보 같은 소리를 흘리니, 슬금 떠지는 눈꺼풀. 헉. 자는 줄 알았는데.

“…더 자. 많이 피곤해 보이더만.”

“…어…”

“왜.”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줄래?”

“……기억 안 나나.”

“…….”

“진짜 안 나나.”

“안 나는데… 요…”

“그럼 더 자. 잠 깨면 생각나게 해줄테니. 나 너무 뻐근하다…”

“…….”

“처음엔 원래 다 이런가… 어쨌거나 좀 더 자…”

흩어지는 말꼬리와 함께 벗은 허리를 다시 감싸오는 팔. 그것도 모자라 아예 딱 달라붙어온다. 어깨 어디쯤으로 따뜻한 숨이 닿아왔다. 짧은 금발이 등을 간지럽혀왔다. 눈만 깜박이다가, 쪽 소리 나게 등 어딘가로 입을 맞추어주는 입술에, 나도 모르게 손을 더듬더듬 겹쳐 잡았다.

“…네가 다 책임진다고 했다, 리카르도.”

“…….”

“알아서 해라…”

“…….”

금세 다시 잠들었는지 색색, 고른 숨소리가 났다. 이게 지금 꿈인가? 잡은 손에 힘을 주니 얕은 잠투정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생각했다. 꿈이구나. 좋은 꿈이네. 되게 기분 좋은 꿈이네. 이런 꿈이라면 영영 깨지 않아도 좋겠지…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창문이 열려있는 모양이었다. 아침 새 소리가 유독 상쾌하게 들렸다.

fin.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