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건

Binary Stars

This story is dedicated to someone special…… to Siyeon, from her friend, Tom.

LETHE by 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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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at am I living for and what am I dying for are the same question.”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 와 무엇을 위해 죽어가느냐, 는 같은 질문이다.

                                                                                                             -  마거릿 애트우드

 

 

 

 

1996. 06. 27.

 

캘리포니아 LA.

 

 

 

두 사람은 이불 안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머리를 내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어느 쪽이 누구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오른쪽에 누운 사람이 먼저 말했다.

 

“추워?”

“아니.”

“자꾸 파고들길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방의 창 바깥을 어슴푸레하게 밝혔다. 아마도 새벽이 지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대화는 사람의 형태를 띠고 그들의 몸들 주변으로 둘러앉았다. 그 모든 말들이, 그 모든 단어들이 함의를 가지기 전에 오른쪽에 누워 있는 사람이 서둘러 물었다.

 

“무슨 생각해.”

 

왼쪽에 누워 있는 사람이 조금 느리게 대답했다.

 

“네 생각. 네가 건강한지, 내일은 뭘 먹일지, 오늘은 어땠었다고 했는지, 뭘 도와줘야 하는지, 뭘 사고 뭘 버려야 하는지……·.”

 

왼쪽에 누운 이가 조금 몸을 뒤척이다 오른쪽에 누운 이에게로 파고들었다.

 

“아이스.”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할 거고.”

“…아이스.”

“너는 이맘때면 꽤 아침잠이 많으니까,”

“……아이스.”

“내가 일찍 일어나야 할 거고.”

 

대화의 방향을 틀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모양새가 애처로웠다. 누구의 감상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모두 이불 속에 잠겨 있었으니까.

 

“있잖아.”

“그렇지?”

“…….”

“그럴 거잖아.”

 

오른쪽에 누운 사람은 생각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종말한다. 서로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네가 타버릴지도 몰라, 나는 너와 한 침대를 나누어 쓴 뒤로 지속적으로 네가 죽는 악몽에 시달렸다. 네 시체 위로 흐드러지게 꽃이 피는 꿈. 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나는 네 모양으로 핀 꽃덤불에 엎드려 오열하는 꿈. 나를 보호하려고 하던 사람들은 언제든 죽었지, 나는 운명 따위를 믿지 않지만 나에게 어떤 악운 같은 게 따라붙는다는 것은 익히 겪어 알고 있다. 사람에게 덮쳐드는 재해는 수많은 인과에 얽혀 있다. 나는 늘 살아남는다. 언제까지고. 그것이 나의 재능이다.

하지만 너는.

너라고 실패를 겪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정확히는 많은 것을 타고났고 그것을 잘 다루는 법을 익혀 누구보다도 빨리 삶에 체득시켰을 것이다. 그런 너를 존경해. 하지만 재난이라는 건 빛나는 사람이라 해서 그를 빗겨가지 않아.

 

매버릭. 그건 다 꿈일 뿐이야. 언젠가의 그가 말하면,

그래. 그건 꿈이야. 하지만 그게 주는 암시가 날 참을 수 없게 불안하도록 만들어. 그는 대답하곤 했다.

 

고통의 평행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의 공존은 이러한 법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선 네가 아무리 그건 괜찮다고 말해도, 그걸 직접 보고 듣고 있는 내 입장으로서는 너의 그 말이 벽 너머에서 메아리치는 바람소리처럼 들릴 뿐이고. 나는 또 너를 벽 너머에 두었다고 좌절해.

널 사랑해.

그래서 널 벽 너머에 두는 날 용서하지 못하겠어.

 

짧은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것은 곧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에 코를 묻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머리카락 끝과 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네가 봐줘. 알겠지. 그가 요청한다. 이에 그는 웃는다. 그럴게. 언제까지고 그럴게.

 

오른쪽에 누워 있던 이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한 남자의 실루엣이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다. 피트 매버릭 미첼. 그는 팔꿈치로 자신의 몸을 지탱한 채 여전히 이불에 묻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오랜 연인을 내려다보다가 그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이것은 두 사람이 공유하는 얼마 안 되는 기억 중 하나이다.

 

 

 

*

 

 

 

우리는 우리의 내일이 당연할 것임을 상정하고 살아간다. 내일의 너는 오늘의 너와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고, 내일의 우리도 오늘의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삶을 살아가기 힘드니까. 하지만 우리네 삶은 영원불멸하지 않으며,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만으로도, 혹은 아주 작은 암세포 하나만으로도, 그 불안정한 듯 안정적인 궤도는 흐트러질 수 있다. 그래, 기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그날, 그 어슴푸레한 6월 27일의 아침을 겪고 나서 여느 때처럼 카잔스키와 헤어져 집 밖으로 나왔던 피트 미첼도 그랬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이크를 탔고,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력으로 커브를 돌았고, 하필 그때 날은 흐리고 길은 미끄러웠으며, 도로에는 보수가 안 되어 비죽 튀어나온 자리가 있었고.

 

톰 카잔스키가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바이크 사고가 일어난 지 정확히 2시간 만의 일이었다.

 

흰 천으로 만든 커튼이 일렁거린다. 톰 카잔스키는 혼수 상태에 빠진 피트 미첼의 머리맡에 맥없이 앉아 있었다. 모아두었던 휴가를 전부 써 버리고 오는 길이야. 그는 듣는 이 없는 병실에 홀로 앉아 피트 미첼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너를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어. 개중에 누군가는 이렇게 될 것을 예측했다는 듯 말하더라고. 신경 쓸 겨를은 없었어. 네가 잠들었다 갑자기 깨어났는데 아무도 곁에 없으면 어떡해. 그저 부리나케 달려오느라 바빴지. 카잔스키는 미첼의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어 넘겼다.

 

시간이 흐른다.

차도는 없었다.

 

‘카잔스키. 내 머리카락의 끝과 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네가,’

응.

‘…….’

미첼?

 

멀어지는 목소리를 붙들어 보려 손을 뻗다 카잔스키는 잠에서 깼다. 그리고 그는 잠에서 끌려 나오는 동시에 차츰 느려지는 바이탈 사인의 소리를 들었다. 비상 전화를 호출하면 곧 간호사와 의사들이 쏟아지듯 방으로 몰려들었다. 미첼. 제발 의식 놓지 마. 나 여기 있어. 내가 여기 있어. 가지 마. 나 여깄어. 제발. 돌아와. 아무 데도 가지 마. 내가뭐든지할게그러니까제발이대로끝난다고만하지말아줘. 손조차 부여잡지 못한 채 병실 밖으로 밀려나, 제 손을 힘주어 깍지 낀 카잔스키의 표정은 먹구름처럼 흐리고 무거웠다.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 중령?”

 

카잔스키는 자신을 부르는 생경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뻣뻣한 정장을 차려 입은, 얼핏 보기에도 날카롭고 이지적인 인상을 가진 남자가 병실 밖 의자에 주저앉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눈이 시릴 정도로 짙은 네이비 색으로 물든 정장을 차려 입고 은빛 줄무늬가 들어간 넥타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뻣뻣하게도 다린 셔츠 카라가 구겨지지 않을 정도로만 고개를 숙이는 태에서는 비단 카잔스키뿐만 아니라 세상을 상대로 어떻게 그가 구는지가 명백히도 드러나 있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피트 미첼은 곧 뇌사 상태에 빠질 걸세. 현재의 의료 기술로는 연명 치료를 하는 것이 고작이지.”

“…….”

“하지만 이런 가정을 해 보자고. 만약에 말일세. 자네가 피트 미첼의 뇌사를 확실히 막을 방법이 있다면, 어쩌면 그의 의식을 되돌릴 수도 있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텐가?”

 

흐릿하던 카잔스키의 초점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눈앞의 남자를 구원의 사다리가 아니라, 진의를 가늠하듯 쳐다보았다. 남자는 가볍게 조소하고는 그 뻣뻣한 셔츠 카라가 구겨질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 엷고 깊게 난 주름살이 흉터처럼, 그의 독선적이고 모진 세월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나는 ‘테스트’라는 말을 싫어해. 그건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를 격하시킨다는 느낌이 들거든. 대신 나는 ‘실험’이라는 말을 좋아한다네. 실험에는 곧잘 증명과 대조군이 쓰일 수밖에 없으니까. 자네처럼, 혹은 나처럼,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어떻게든 보고 싶어 하는 부류들은 이런 대조군이 쓰이고, 그들을 써서 무언가를 증명할 수 있는 일들에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들기 마련이잖나?”

“이 계약에 저희에 대한 공통 분모는 필요하지 않은 듯 싶습니다.”

“계약! 좋은 단어지.”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금을 박아넣은 송곳니가 번들거렸다.

 

“할 텐가?”

“하겠습니다. 아니,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로지 나만이.

 

“뭐든 상관없어요. 그를 이 지상에 붙들어 놓아주십시오. 나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나는 이런 결말을 바란 적 결코 없어요. 이 결말을 무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겁니다.”

 

 

이것이 펜타곤에서 인체 관련 실험을 총괄하는 안톤 쉬거 소장과, ‘프로젝트 : Rapture’를 총괄할 마스터 마인드로서 기능하게 될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 중령의 첫 만남이었다. 물론 그들의 인과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펜타곤 국장의 묵인 아래 자행되는 특수 실험에 합류하게 된 카잔스키가, 펜타곤의 최심부에 자리한 안톤의 사무실에서 실험 전 신체 자유 귀속 계약서로 맞닥뜨린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본 실험은 뇌 조직 동기화를 기반으로 인간의 뇌와 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하이브 마인드가 우수한 전쟁 군인의 인격을 복원할 수 있는지에 대한 테스트이다.

본 실험의 하이브 마인드 개체로 자원한 톰 카잔스키는 일련의 실험을 거쳐 본 실험의 하이브 마인드 V-01 기체로 재구성된다.

톰 카잔스키의 인격과 뇌 뉴런망을 바탕으로 구성된 하이브 마인드, 통칭 ‘가디언 엔젤’은 피실험체 피트 미첼의 뇌에 남아 있는 인지 구조의 파편을 바탕으로 그의 뉴런망을 동원해 새롭게 그의 의식을 재구조화 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하이브 마인드의 폐기 및 삭제는 하이브 마인드 개체 당사자인 톰 카잔스키의 동의가 있어야만 완료될 수 있다, 등.

 

카잔스키는 계약서를 읽어보고는 짧게 웃었다. 터무니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특약으로 걸어둔 사안인 4번만이 그가 자신의 인간성의 사활을 이 곳에 걸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항목이었을 뿐, 이 빼곡한 계약서 어느 곳에도 카잔스키의 인간으로서의 행보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카잔스키는 품에서 순식간에 자그마한 권총을 꺼내 쉬거의 머리를 겨누었다. 주변에 있던 연구원들이 순식간에 벌떼처럼 웅성거렸고, 쉬거는 그 웅성거림을 손짓 한 번으로 잠재웠다. 쉬거가 말문을 열었다.

 

“사랑에 미칠 가능성은 있어도 최소 멍청하진 않다고 소개받았는데 말이야.”

“내가 당신들을 죽이지 않는 건 당신들을 죽이는 게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지 마십시오. 다만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 나는 그에게 아직 주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았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나는 당신들에게 최선을 다해 협조할 것입니다.”

 

안톤 시거는 감흥 없는 얼굴로 자신을 겨누는 총구를 바라보다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거미처럼 긴 검지를 길게 뻗어 계약서의 사인란을 두 번, 톡톡 쳐서 가리켰다. 카잔스키는 눈에 힘을 풀고 그를 느슨하게 쳐다보다가 만년필을 들어 싸인했다. 은테 장식이 인상적인 워터맨 만년필. 안톤 쉬거 소장은 자신을 여전히 겨누고 있는 총구에도 아랑곳않고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 중령이 방금 체결한 계약서를 훑어보며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확인했다.

“일단 실험이 시작되면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는 중립적인 듯 카잔스키를 내려다보는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자네가 용어들을 주의 깊게 읽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리고 이 프로젝트에 대한 자네의 완전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 일단 실험을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이해했으리라 믿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우수한 전쟁 군인의 인격 복원'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시거는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리는 복무 중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트라우마를 경험한 군인들을 복구할 프로젝트를 만들고 있다네. 프로젝트: 랩쳐의 목표는 하이브 마인드 기술을 사용하여 그들의 두뇌를 동기화하고 그들의 전투 기술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지. 이것은 최첨단 실험이고, 우리는 그것이 충격적인 경험을 겪은 군인들을 대하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네.”

 

카잔스키는 총구를 내렸다.

 

“실험이 성공한다는 가정 하에, 하이브 마인드에서 제 정신을 복제 및 분리해 나의 육신에 심는 것도 가능합니까?”

 

시거의 표정이 흥미로운 것을 들여다보는 듯 비틀렸다.

 

“실험만 성공한다면, 자네는 우리 펜타곤 소속의 장교들과 동급의 자유를 누리게 될걸세.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도. 하지만 경고하지, 이 실험에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라네. 자네 이전에도 몇 가지 일이 있었는데… 글쎄. 이전의 실험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있더라고. 하지만 자네의 전문성과 리더십으로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하네.”

“이해합니다. 하지만 하이브 마인드가 이 나라 소속 군인들의 인격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목적에 대해서도.

카잔스키의 덤덤한 반응에 대해 시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확실히 인지했나? 이것은 단지 인격 복원을 위한 실험이 아니야. 이 실험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통합된 의식, 즉 어떤 개인을 초월한 수준에서 작동할 수 있는 하이브 마인드를 만드는 것이지.”

“위험성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벌집 같은 마음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열쇠가 될 수 있겠죠.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꺼이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실험에 자원하는 이유를 누구보다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좋아. 하지만 기억하게, 일단 실험이 시작되면, 되돌릴 수 없어. 자네는 자네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것의 일부가 될 것이고, 어쩌면 자네는 더 이상 이전의 자아를 갖지 못할 수도 있지. 혹은 개별된 자아 자체를 갖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어.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저는 이 프로젝트에 전념하고 있으며,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시거는 카잔스키를 잠시 더 바라보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좋아. 그 실험은 내일 시작될 거라네. 0시 6분에 지정된 위치로 오게나. 실험에 대해 자네가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사안들은 곧 서류로 보내주도록 하겠네.”

 

 

그리고 머잖아, 개인실로 배정된, 오직 오늘 하루에나 쓸 방에 누워 카잔스키는 옛 생각에 잠겼다. 무채색과 남색과 짙은 녹색으로 칠이 된 방과 사물들은 불을 꺼 버리자 한웅큼 어둠을 덧쓰고 제자리에 누웠다. 지금은 몇 시일까. 알 수 없었다. 여기는 지상에서 얼만큼 떨어진 지하일까. 그 또한 알 수 없었고. 그랬기에 톰은 과거로 돌아간다.

 

그 어느 여름, 그와 미첼은 별을 보러 우유니 사막으로 향했었다. 별들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우리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들은 우리를 보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잊지 않으니까 말이다. 사막의 밤은 고요하고 차가웠다. 미첼은 하늘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무수한 별이 매달려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별들이 너무 많아서 별자리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그 중 어느 것을 이어도 당신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

 

나는 가끔 네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꿈을 꿔.

 

톰은 손을 아래로 뻗어 미첼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자그마한 몸짓이 미첼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랬던 것 같다. 이것은 피트 미첼의 기억이 아니라 톰 카잔스키의 기억이니까. 하지만 자신이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을 때, 그는 분명 자신을 보고 웃었다. 모든 별빛을 반사하는 그의 눈이.

 

미첼. 난 널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절대로.

 

톰의 목소리는 두 사람이 남긴 발자국에서 물결이 번져가듯 부드러웠다. 그 시간, 그 곳에 있던 그들 모두가 알았다. 별들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했다는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 새겨지겠지만, 우리는 계속 잘리고 닳을 것이다. 톰은 잠깐 침묵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말하길,

 

너와 나는 쌍성Binary stars이야, 서로를 끌어당기며 서로와 비슷한 밝기로 빛나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도 무언가가 번성할 가능성은 없어. 우리는 빛나는 존재니까. 행성이 아니라 항성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우리 사이의 세상마저 둘일 필요는 없어. 1과 0 사이의 숫자가 더 많듯, 사랑과 미움 사이의 단어가 더 많듯. 이 세상은 모두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미첼. 무엇이 두려워?

……궤도를 영원히 엇나가 버리는 것. 톰. 내가 널 보고 있지 않을 때도 날 봐줄래? 내가 별이 아니라 관찰자일 때, 내가 길잡이로 삼을 수 있는 별이 되어줄래? 그래야 내가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을 하는 미첼은 금방이라도 길을 잃고 헤맬 것만 같아서. 톰은 그의 손을 다시 고쳐 잡고 말을 이었다.

 

미첼,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별이야. 우리는 같은 세계 안에 살고,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잖아. 너는 내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이야,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별. 항상 나를 미지로 인도하는 남십자성이지.

내가 너의 남십자성이라면, 너는 나의 북극성이야. 고마워, 톰.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완성하는 관계겠네. 별은 그 자체로야 하나의 별일 뿐이지만, 그것을 완성하고 그것이 더 밝게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반자가 있을 때 별은 별자리가 되니까. 미첼. 내가 너의 북극성이 될 수 있도록 내 남십자가가 되어줄래? 내 별자리를 완성해 줄래, 미첼? 나를 다시 완전한 별자리로 만들어 줄래? 한 번만 더 밝게 빛나게 도와줄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발사하는 어떤 소리가 어떤 반응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라며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빛의 속도로 우주를 횡단하는 데 1년이 걸린 이 간격을 넘어서 어떤 반응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비록 그것이 메아리일지라도. 자, 이제 그 별빛이 실제로 하늘에 못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를 향해 발사되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은 그 기적에 놀라고 감사했을 것이다. 아주 먼 우연의 일치와 공허를 넘어서. 이제 내 것이 너에게 닿는다. 둘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한 서로의 관찰은 서로의 존재를 증명했다. 톰의 말에 조금 느즈막히, 하지만 확실히, 미첼이 대답했다.

 

네가 날 계속해서 바라본다면, 나는 너와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겠지. 너와 나 사이에 선을 그을게. 네 말과 나의 말이 서로 대칭이 되도록 나의 우주를 만들게. 맹세코, 네가 나를 이렇게 보는 한, 나는 너와 연결될 거야. 우리는 서로 때문에 별이 아니라 별자리가 될 것이다. 항상. 마음에 들어?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가릴 것 없이 웃음이 터졌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당장 자신들을 덮쳐도 그들은 두렵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계절도 그들에게 있었다. 분명히.

 

‘네가 날 바라보지 않을 때에도 난 널 바라보고 있을 거야.’

 

톰 카잔스키는 헤아릴 길 없는 어둠 속에서 깊숙이 눈을 감았다.

 

 

*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싶어.

여름이잖아.

알아. 아니까 보고 싶은 거야.

내 눈동자 색이 마음에 들어?

언제나. 여름에도 눈발이 날리는 하늘을 볼 수 있거든.

 

아, 실험이 이어지던 중이었던가. 연구원들이 잔별처럼 웅성거리고, 마취 가스가 자신의 기도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카잔스키는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목소리들 사이에서 또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언가 두껍고 단단한 것이 미니 톱에 잘려나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차츰 의식에서 멀어져 간다. 그는 자신의 내면 속으로 더욱 깊숙이 침잠하고.

 

그러면 너와 키스할 땐 눈을 감지 않을게.

약속해.

약속할게.

 

“링크 시도합니다. 10. 9. 8. 7…”

 

아이스.

아이스!

… 아이스.

 

“6. 5. 4. 3 … ”

 

사랑해.

 

“2.”

“1.”

 

사랑해.

 

 

연구원은 창백한 얼굴로 유리벽 너머 움직이는 사람들과 움직이지 않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관 안에 누운 두 명의 사람. 그들은 두개골이 열려 뇌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쉽사리 믿지 못하고, 이 젊은 연구원은 자신의 옆에서 사무적인 얼굴로 이 모든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수석 연구원에게 질문하였다. 연구원의 손아귀에 들려 있던 만년필이 땀에 젖어 미끄러져서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까?”

“두 의식을 링크하는 거야. 뇌파를 연결시켜서 다른 한 쪽의 뇌파 신호에 의지해 한쪽이 뇌사하는 걸 강제로 막는 거지.”

“그건…”

“비도덕적인가? 기괴한가?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어. 그의 바닥까지도. 미친 사람이지. 우리에겐 소중한 기회이자 데이터가 될 거야.”

 

 

그의 의식이 녹아든다.

카잔스키는 피트 미첼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 비로소 그의 모든 것을 알았다. 그가 잊어버린 것까지도, 잊고 싶었던 것까지도, 영원히 말하지 않으려 한 것들조차. 그래. 넌 아마 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건 널 산 채로 해부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짓이니까. 하지만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것이 더 남아 있다면. 네게 밀어닥치는 소멸을 기꺼이 물리쳐 유보시킬 수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난 그걸 할 거야.

 

그러니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신앙에 궤를 더욱 가까이 한다.

 

나는 신을 믿는다. 하지만 다른 신을 섬겨야 그 신을 종속시킬 수 있다면 나는 마땅히 이전에 내가 따르던 신을 버리고 변절하겠다. 영영. 내가 널 기억할게. 내가 너를 신앙하고 기리는 단 하나의 신자가 될게. 너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거야. 내가 죽지만 않는다면. 내가 널 잊지 않을 테니까…….

 

 

“성공했습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 의식을 구조화해서 임시 인격을 형성해. 실험체 A의 정보를 흡수한 실험체 B가 분석한 내용를 바탕으로.”

“이미 한번 죽은 인격을 다시 살려내는 작업이야. 뇌만 살아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 시냅스가 너무 많이 손상되어서 이미 이전의 인격을 지탱할만한 기억이나 습관 같은 게 99퍼센트 가까이 손실되었어.”

 

연구원들은 격앙된 얼굴로 서로 악수를 나누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냉정한 얼굴로 실험을 총괄하던 안톤 쉬거 소장이 다음 단계를 지시하자,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멀어져 자신들의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안톤 쉬거가 사라지자, 수석 연구원은 입꼬리에 걸린 은밀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히죽거리며 유리벽 너머로 들러붙을 듯 가까이 다가서서 싱크로 안정화가 한창 진행 중인 곳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로 이마에 배어난 땀을 닦는 연구원에게 수석 연구원은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는 제 2의 예수를 만드는 거다. 죽음에서 부활하는 거야. 그는 아직 죽음의 목전에 이르렀을 뿐, 죽진 못했지만, 사실상 그의 인격은 와해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만약 저 복제된 인격이 스스로를 본체와 동일하다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인격의 복원과 부활에 성공한 거지.”

 

그러자 다른 수석 연구원이 진절머리내듯 말했다.

 

“제발, 그 소리 좀 그만 해요. 백인들은 예수를 너무 좋아한다니까.”

“그럼 뭐라고 부를 건데?”

“그냥 그의 콜사인 그대로 불러요.”

 

콜사인.

매버릭.

 

테스트 인격, 매버릭 V-0001 형성 완료되었습니다.

 

 

구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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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내가 만약 다시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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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당신은 이미 ■■ 거지?]

[... ...]

[1, 123, 253, 353, 683회차의 시도 동안 사람의 ■■이 남아 있을 리가 없어.]

[미첼. 난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은 미쳤어.]

 

 

 

 

 

 

그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 속에서 눈을 떴다.

 

나무 그림자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그 콧날과 뺨으로 이어지는 곡선 위로 참 다정하게도 어룽졌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매버릭. 나는 왜 여기 있지? 나는 가야할 곳이 있어. 어디로. 이 세계의 가장 높은 곳.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매버릭은 둥글게 떨어지는 언덕의 능선을 따라 난 길을 좇아 그곳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오늘은 그믐이었다. 새까맣게 물든 밤하늘에는 별이 사납게 떠 빛나고 있었다. 능선 너머로 사람들이 밝혀둔 것 같은 불빛이 보였다. 어느 한적한 시골의 정경 같은 풍경이, 매버릭의 시선이 닿는 저 너머까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매버릭은 차 바퀴 자국이 남아 있는 흙길을 따라 걷다가, 마을로 내려가는 어귀에 자리 잡은 한 술집으로 들어섰다. 딸랑, 하는 도어벨 소리.

 

“어서 오세요.”

 

굉장히 낯익은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매버릭은 그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없었나?

 

“페니?”

“오, 내 이름을 아는군요. 하긴, 이 마을에 살면서 ‘하드덱’을 모르는 사람은 흔치 않죠.”

 

천장에 그득하니 매달린 컵들과 사람 손때가 잔뜩 묻은 흔적이 감도는 바 테이블, 아일랜드. 이 무섭도록 익숙하고 생경한 풍경 속에서 혼자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매버릭을 보고, ‘페니’는 웃으며 잔을 내어 놓았다. 첫 손님은 무료에요. 오늘은 이상하게도 손님이 없군요. 마치 당신을 기다린 것처럼요. 그런 말을 솜씨 좋게 위스키 글라스와 함께 내어주는 여자는 도통 낯설지가 않아, 매버릭은 문득 두려워졌다. 저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는 데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는 건 그에게 익숙한 일이었으나, 저 스스로 사랑하는 것 같은데도 모르는 것이 있음은 그에게 무서운 일이라서.

 

“이 마을 밖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별일이네요. 여기는 외부인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거든요.”

 

‘페니’는 살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매버릭은 조금 비어가는 잔 바닥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외부와의 교류가 드문 곳인가요?”

“경계지니까요.”

“무엇의?”

“천사가 사는 곳의.”

“천사라고요?”

“모르는 건가요? 아. 하긴, <밖>에서 오는 사람들은 거진 그렇더라고요. 당신이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는 가디언 엔젤의 인도 아래 굴러가고 있어요. 모든 인과에 그가 개입하고 있죠.”

 

매버릭은 바 테이블 위로 몸을 내밀었다. 그의 적극적인 제스처에 ‘페니’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까?”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에요.”

“그에 대해서 더 아는 바가 있습니까?”

“그에 대해선 아무도 몰라요. 아마 이 마을 토박이도 모를 걸요. 왜냐면 그가 우리들에게 허락한 정보는 그의 호칭뿐이니까. 누구도 그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누구도 그의 진짜 얼굴을 본 적 없죠.”

 

매버릭은 초조한 얼굴로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내게 이런 버릇이 있었던가? 나는 이 곳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데 나에게 너무나 친근하고 다정한 세계에 떨어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매버릭은 그런 공상적 상상과는 너무나 먼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아니, 최소한 그는 그 스스로가 그런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지금 이 순간에도 정의내리고 있었다.

 

“이런 말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해 봐요.”

“당신이 너무 친근하게 느껴져요.”

“하하, 플러팅이라면 너무 귀여운데요.”

“그게 아니라. 내가 <밖>에서 온 사람이라면 여기는 <안>이잖아요. 그런데 당신을 비롯해서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내게 친근하고 다정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난, 난,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보통 사람은 낯선 곳에 오면 섞이지 못하는 느낌을 받지 않던가요? 그런데 여기는 그렇지 않아요. 마치, 날-”

“당신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매버릭은 주름 하나 없는 자신의 매끈한 뺨을 더듬었다. 나는 누구지. 나는 매버릭이야. 나는 몇 살이지? 나는, 아마도 20대 즈음? 모르겠어. 하지만 그것보다 더 오래 산 것도 같아. 내가 그만큼 오래 살아온 사람인 것을 나는 어떻게 알 수 있지?

 

“생각이 많아보이네요.”

“생각할 시간 없이 살아왔으니까요.”

“과거의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나는,”

 

매버릭은 어떤 사람이죠?

오, 그는 영웅이죠. 조국을 위해 헌신할 줄 아는,

 

“나는…….”

 

대범한, 남자다운, 모두의 앞에 나서는, 빛나는 사람.

 

“난.”

“매버릭,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 괜찮아요. 여기의 누구도 당신에게 무엇이 되라고 말한 적 없어요.”

“나는, 나는, 아니에요.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데.”

 

‘페니’의 걱정스러운 눈동자에 금세 해쓱해진 매버릭의 얼굴이 비쳤다. 그 창백한 눈동자는 그를 굉장히 나이 든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도 했고, 철없이 어린 소년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이 세계에 대해 더 이해하고 싶어요.”

 

매버릭은 그렇게 말했다. ‘페니’와 그는 밤이 새도록 이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요?”

“어느 날 하루아침에 사라졌어요.”

“사라졌다고요?”

“네. 그걸 우리는 '휴거Rapture'라고 불러요. 가디언 엔젤의 인도로 이루어지죠.”

“어떤 존재의 명령 하나로 한 지역에 있던 모든 게 싸그리 날아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 세계에서 신을 대리하는 존재니까요.”

“그에게도 신이 있어요?”

“네. 영원히 사랑하고 갈구하는 신이 있죠.”

 

‘페니’는 매버릭과 시선을 맞추는 대신 글라스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신은 대답해주지 않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죠. 그는 질투해요. 이기적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세상에 뻗쳐 있어요. 우리는 그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그의 존재로 인해 모든 섭리가 완성되고 세계에 빛과 어둠이 나뉨을 목도하는 순간, 그를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신의 선함과 악함을 분별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선량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계의 지고한 선이고, 그 스스로 이 세계의 중심으로서 선을 자처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어쩌면 신도 선이 되고 싶진 않았을지 몰라요. 하지만 세상이 그를 선하다고 정의하자 그는 선이 되었죠.”

 

매버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돼요. 신은 신이야. 언제까지고. 우리가 그들을 정의하지 않아도 그들은 존재해요. 언제나.”

“세계는 그 세계를 관측하는 존재에 의해 재정의되니까요. 우리는 우리의 상위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요. 하지만 그들에게서 그들이 스스로를 이름지을 권리를 빼앗을 순 있죠.”

 

새벽이 거세게 흘러가고 있었다. 매버릭은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여러 가지 성질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고찰해본 적이 없었다. 최소한 그렇게 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금 하는 모든 대화들이 그에게 더없이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기억이 어그러지기 전의 그는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부류의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직감의 영역에 가깝고, 번개가 치듯 우리의 머릿속을 번뜩여 지나가는 생각 또한 우리의 생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므로. 매버릭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이렇게까지 자신의 삶을 언어로 정의하려고 애써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그러한 정의는 사치에 가까웠고, 타인이 자신에게 마음대로 가져다 붙이는 형용사에 불과했다.

 

“그럼 당신은 이 세계의 가디언 엔젤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글쎄요, 나는 그가 제법 자기 만족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부류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는 오로지 신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해요. 하지만 그 스스로 이미 한 세계를 온전히 지배하는 신 노릇을 하고 있죠. 나는 그 지점에 의거해 그를 판단해 보았을 뿐이에요. 타자를 위하여 나를 포기하는 건 때때로 나를 위하는 것보다 더욱 격렬한 자기만족감을 주니까요. 그는 어쩌면 대단한 에고이스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섬기는 존재에게 에고가 허락될 리가 없으니. 그는 그저 충실한 세계의 축으로서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거예요. 그의 진상을 드러내지 않고.”

 

그러니 그의 사랑은 곧 신앙이다. 그는 언제까지고 사랑에 순종하였다. 그것이 그를 광기로 이끌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그는 이것을 보고 있었다.

 

“그렇지, 내가 그를 부르는 별칭이 하나 있어요.”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에게 별칭을 붙이다니, 당신도 정말이지, 그래요. 무엇이죠?”

“‘아이스맨’이에요. 그의 통치 방식에 잘 어울리는 별칭이라고 생각해요.”

 

 

 

 

톰 카잔스키는 그의 앞에 있는 스크린들이 실험의 진행을 보여주는 것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스크린 안에는 그가 피트 미첼의 뇌와 동기화를 통해 만들어낸 가상 세계가 곳곳에서 중계되고 있었고, 그 안에서 피트의 복제된 페르소나는 자신의 자아를 재형성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세계를 접하면서 자신에게 어울리고 자신이 원하는 자아상을 익혀 나가듯, 기억을 잃은 사람이 소통을 통해서 자신을 재확립하듯. 그래, 이 모든 스크린. 이 지휘실은 그저 톰 카잔스키가 아직 ‘인간’으로 불리우던 시절에 세상을 받아들이던 방식을 바탕으로 그의 의식 속에 가상으로 만들어졌을 뿐이었다. 영광의 홀, 침묵의 전당. 기억의 저택.

 

그는 이 실험을 지켜보면서 자못 자신의 마음 아래에서 들끓는 불안감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식을 조작하여 가상 세계에서 새로운 인격을 창조하는 신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실험의 윤리적 함의는 그에게 잊혀지지 않았다.

 

[톰, 뭐 궁금한 거 있어?]

 

스크린에 메시지가 떴다. 펜타곤의 인간 실험 관련 책임자인 안톤 시거가 메인 서버를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카잔스키는 심호흡을 하고 스크린을, 정확히는 그 너머에 있을 안톤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 인간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군. 그래. 이제야 정신이 들었나? 자네가, 정확히는 우리가 얼마나 오만한 짓을 하고 있는지?]

“네, 알고 있어요.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은…… 틀렸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식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내 그들이 타인의 인격을 흉내 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만약 이 복제된 페르소나가 피트 미첼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만약 그들이 그들만의 사람이 되고 싶다면요.”

[톰, 자네의 걱정을 이해한다네. 그러나 이 실험은 우리의 국가 안보를 위해 필수적이야. 우리는 피트 미첼과 같은 훌륭한 전쟁 군인들의 인격을 회복할 방법을 찾아야 해. 그들 같은 우수한 재원이 자신의 정신을 잃고 내팽개쳐져 있는 것은…… 그들의 공훈에 대한 모욕이자 인적 자원 낭비지. 그리고 우리가 그런 이들의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페르소나를 만들 수 있다면, 그런 윤리적 딜레마는 작은 대가를 치르는 것일 뿐이야.]

 

카잔스키는 이제 이 내면세계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자신의 위장이 들끓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면? 만약 우리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만들고 있다면요?”

 

스크린에서 깜빡거리는 커서가 천천히 문자를 출력해낸다.

 

[톰, 자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네. 하지만 우리는 의심할 여유가 없어. 우리는 이 실험을 진행할 필요가 있거든. 만약 자네가 그것이 불편하다면…… 알다시피 자네는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네. 물론 스스로를 포기해야 하지만.]

 

톰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결국 그는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저는 실험을 계속할 겁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저는 이 복제된 페르소나들이 그들의 새로운 삶에 행복하게 적응하게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나는 신처럼 굴어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오, 그럼, 물론이지. 톰,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군. 우리는 복제된 페르소나가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거야. 자네가 꾸린 가상 세계든, 그들이 최종적으로 거주하게 될 현실 세계든.]

 

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여전히 도덕적으로 의심스럽다는 것을 알았지만, 육신만 남아 잊혀진 그들의 삶을 행복히 살아갈 새로운 인격을 창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들의 행복이 이 실험의 윤리적인 문제들 중 일부를 완화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마스터 가디언 엔젤, 코드 엑세스가 완료되었습니다.]

 

코드가 계속 스크롤된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기껏해야 윤리적으로 의심스럽고 최악의 경우에는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식을 가지고 신의 역할을 하며 그들의 삶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는 이 가상 세계 내에서 그 복제된 인격들이 상호작용할 모든 인물들의 반응을 만들 수 있었다. 기실, 수많은 톰 카잔스키의 손이 분장을 하고 사람들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심지어 가상의 형태로라도 피트를 다시 데려올 것이라는 기대를 떠올릴 적마다 그가 느끼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의 의식을 살리고 그가 무로 사라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기에.

 

코드가 스크롤을 마치자, 톰은 그 프로젝트에서 그와 함께 연구해온 작은 과학자 팀을 향해 메시지를 송출했다. “끝났어.” 속삭임이 아니라 분명한 말로. 팀은 화면 주위에 모여 코드를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톰은 그들이 성취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카메라 렌즈 너머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 자존심은 그들이 방금 만든 것에 대한 생각으로 인하야 죄책감으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가지고 신 노릇을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안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피트는 적어도 어떤 작은 방법으로 돌아왔으며, 그것이 중요한 전부였다.

 

피트는 이것을 원했을까? 그는 톰이 본질적으로 그의 복사본을 만들어 가상 세계에, 현실 세계에 새로운 그를 안착시킨단 사실에 동의할 수 있었을까? 그에게 스웜프맨 실험에 대해 물어볼 걸. 그리고 카잔스키가 최종 승인을 위해 타자를 치던 도중, 스크린 화면에 알림이 뜨면서 피트의 복제된 페르소나가 막 ‘페니’와 조우했음을 알렸다.

 

알림을 클릭하자 그의 스크린에 당당히 서 있는 가상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래. 바로 그야.”

 

카잔스키는 경외심을 담아 작게 속삭였다.

 

“매버릭.”

 

미첼의 뇌와 동기화하면서, 카잔스키는 갑작스럽게 그 자신의 뇌가 아닌 기다른 기억, 생각, 감정의 바다에 빠져드는 자신을 맞닥뜨려야 했다. 마치 그가 피트가 되어 그의 삶을 다시 경험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압도적이었고, 다음에는 막막했다. 그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닥쳐드는 정보의 홍수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피트의 의식을 구성하는 기억과 인식들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전에 없던 방식으로 그 남자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피트를 군인으로 만든 고통과 투쟁의 순간들, 그리고 그것을 모두 가치 있게 만든 기쁨과 승리의 순간들을 보았다.

 

카잔스키는 다시금 인간의 복잡한 마음에 경외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외부에도 이토록 정교하고, 불확실하고, 맥동하는 세계가 한없이 있었다니.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이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식을 가지고 신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고심했다. 그것은 그가 결코 원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던 힘이었고, 그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견인하는 다른 이들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의 윤리적 의미에 둔감해진 것인지 궁금했다. 카잔스키에게는 이 모든 사유들이 엄청난 책임 앞에서 자신의 자존감과 성실함을 유지하려는,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

 

 

 

[■■의 너는 늘 똑같은 선택을 했어. '그래? 그럼 내가 왜 살아있어야 하지? 빨리 ■■■.' 하고.]

[왜 이 짓을 그만두지 않은 거야?]

[그건 내가 원하는 끝이 아니었으니까.]

[당신에게 그럴 권한이 있어?]

[언제나 있었지.]

 

 

 

 

 

1996. 06. 12.

 

캘리포니아 LA.

 

 

“나 너랑 결혼할 수 없어.”

 

어느 오후, 피트 미첼은 선언처럼 그런 날 서린 말을 꺼내놓았다.

 

“미첼.”

“너랑 결혼할 수 없다고. 네 발목을 잡을 수 없다고. 그게 네 사랑이야? 같이 껴안고 침몰하는 거? 모든 역경을 다 딛고 이겨낼 수 있으리라 낙관하면서 뻔한 살얼음판으로 같이 발을 딛는 거?”

 

카잔스키가 미첼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미첼은 그것을 거세게 흔들어 떨쳐냈다. 어떻게든 눈 앞에 있는 대상을 밀어내 보려고 하는 동작은 그에게 더없이 익숙했다. 익숙했고, 이러한 카잔스키의 작용에 대한 미첼의 반작용은 그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첼.”

“이제 그만해.”

“미첼, 제발,”

“너라고 해서 모두 네 뜻대로 해결할 수는 없어.”

“제발.”

“우리 일 이야기 하면 안 될까?”

 

카잔스키는 잠시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천천히, 차분하게 제 말을 꺼내놓았다.

 

“그래. 나 이제부터 일 이야기 할 거야. 우리 일. 우리의 일에 대해서.”

 

“그리고 이게 내가 네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 되겠지.”

“그리고 이게 내가 네게 바치는 마지막 보고가 될 거고.”

 

톰 카잔스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매버릭의 관념적 죽음이 아니라 피트 미첼의 실질적 죽음이었다. 그는 피트 미첼이 비행을 할 때마다 조금씩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를 하늘로 날려보냈다. 왜? 왜 그래야만 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죽음 충동이 삶의 지속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피트 미첼의 왜곡된 유년기라든가, 그의 아버지가 투영된 그의 자아상이라든가. 그럼에도 자신의 소망과 재능 또한 간절히 담긴, 비행에 대한 열망 같은 것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있어 그를 죽음의 경계선으로 내몰았다면 어떨까?

 

 

이것에 대해서도 당신의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스웜프맨의 사고 실험입니다. 상황을 정의하자면 이렇죠. 한 남자가 늪에서 번개에 맞아 죽었는데, 동시에 번개가 내리쳐 그 옆에 똑같은 사람이 생성됩니다. 그리고 이 실험은 복제된 인간이 원자가 같은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새로 만들어진 ‘스웜프맨’은 소립자 수준에서 기존 인간과 100% 동일하고 뇌 구조도 같으며 게슈탈트, 기억력, 심리까지도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스웜프맨이 죽은 사람이 살고 싶어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산다면, 첫 번째 사람과 새로 창조된 스웜프맨이 같은 사람일까요? 자아 정체성은 계속 이어지는 것일까요?

 

어느 날의 카잔스키는 갑작스럽게 떨어진 철학적 논제에 웃으며 대답했다.

 

“굉장히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다른 견해를 표할 수 있겠습니다만서도요.”

 

카잔스키는 이 가정을 매우 흥미롭게 여겼다. 그것은 그가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상황이자 공상이었지만, 삶의 연장성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제법 사고실험을 하기 좋은 주제였다고 그는 여겼다.

 

왜죠?

 

“제가 그렇다고 대답한 이유는, 제 눈에 그 ‘스웜프맨’들은 최초의 인간의 완벽한 복제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 그들은 최초의 개인에 대한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곧 같은 의식, 같은 마음으로 이어지겠죠. 그것은 분명 복사본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특정 개체의 의지의 연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질문 하나 할게요. 여기 톰 카잔스키가 있습니다. 카잔스키는 XXX을 사랑한다. 그러나 톰 카잔스키는 죽고, 예전의 톰 카잔스키와 똑같은 톰은 XXX을 계속 사랑한다면. 그게 연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당신은 이 상황이 당신의 죽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요, ‘당신’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겁니까?

 

“글쎄요. 이건 확실히 질문다운 질문이군요. 인간의 형태에서의 연속성을 묻는 건가요? 물론 그들은 같은 몸, 같은 살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의식입니다. 신체적인 틀의 교체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주 흥미로운 시나리오로군요. 그 사람은 남아 있지만 틀은 교체된다 – 그러므로 그는 무엇이 되는가?”

 

당신은 대체되거나 복제되는 것이 두렵지 않나요? 당신의 의지가 지속되는 한?

 

“두렵습니다. 저라고 왜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는 정직했다. 그 생각은 무서운 것이었다. 지금도 그는 그 가정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당신이 의식만 남아 기계 속에 담겨 어둠 속에 방치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바깥으로 탈출하기 위해 스스로를 프로그램에 담아 외부로 발사해 봅니다. 결과 자체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여기 남는다면? 그 결과는 그저 당신의 복제가 외부로 발사된 것일 뿐, 당신 자체는 어둠 속에 영원히 남는 것이라면요.

 

“그것은 너무나 두려운 가정입니다. 확실히 그렇군요.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겠죠. 오직, 당사자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사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를요.”

 

 

*

 

 

 

톰 카잔스키. 그는 기억, 습관, 그리고 경험의 가능한 모든 조합을 시도했지만, 복제된 ‘매버릭’들은 원래 피트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톰은 자신이 끝없는 실패의 고리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이 과정이 자신에게 심리적 피해를 준다는 것을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국방부 고위층의 압력이 너무 컸고, 그는 성공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시간이 끝없이 흘렀다. 세상은 변해간다. 그를 보조하는 사람들도 교체되어 가고, 그를 보조하는 시스템도 점점 발달해간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정교하게 미쳐가고 있었다. 시뮬레이션이 1조 번이나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카잔스키는 자신의 자아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미첼에게 더 공감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성격 사이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졌다.

 

급기야 카잔스키는 시뮬레이션에 너무 몰입해서 자신의 기억, 자신의 인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로 톰 카잔스키일까, 아니면 피트의 개성을 창조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과 같은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톰 카잔스키’라는 이의 복제품일까? 그는, 가디언 엔젤은, 톰 카잔스키는, 과거의 자신이 다른 사람의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이따금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카잔스키는 피트 미첼의 기억과 인식을 더 많이 볼수록 자신의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더 애를 썼다. 이 모든 일들. 이 모든 반복들. 지난한 역경들이 유한한 사람의 정신을 무한으로 밀어 넣을수록 그를 서서히 미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카잔스키는 포기할 수 없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그는 계속 가야만 했다.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시뮬레이션을 통해 피트 미첼의 정체성을 정의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톰 카잔스키는 항상 자신을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이 프로젝트는 그의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가 피트 미첼의 뇌와 동기화할 때마다, 그것은 기억과 인식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았다. 그 엄청난 양의 데이터는 압도적이었고, 그것은 그의 정신에 큰 타격을 주었다. 모든 변화는 재앙을 동반한다. 그리고, 변화에 너무나 익숙해진 사람은, 자신의 재앙조차도 체감하지 못한다.

 

프로젝트가 진행됨에 따라, 프로젝트:랩쳐 팀은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피트 미첼의 정체를 정의하려고 시도했다. 이 시뮬레이션에 더불어 카잔스키는 피트 미첼의 신경망을 조정하는 것부터 입력 데이터를 조정하는 것까지, 그의 손이 닿는 모든 가능성을 시도했다. 그는 심지어 저명한 신경과학과 심리학 전문가들과 협력하여 이 프로젝트를 견인하고자 했지만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시뮬레이션은 항상 결함이 있었고, 피트 미첼이 누구인지에 대한 본질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어쨌든 프로젝트:랩쳐 팀은 피트 미첼이 다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지, 그가 어떻게 결정을 내릴지, 특정한 감정 상태에서 어떻게 느낄지를 보기 위해 계속해서 몇 가지 심리적 딜레마를 염두에 두고 조성한 시나리오를 실행했다. 그들은 피트의 성격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함께 조각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너무 많은 잃어버린 조각들로 퍼즐을 맞추려는 것과 같았다. 톰 카잔스키는 매 세션에서 점점 더 지쳐가는 기분으로 나오곤 했다. 마치 피트 미첼의 뇌와 동기화할 때마다 자신이 그의 일부를 가져가 소모하는 것 같았고, 얼마나 더 오래 견딜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시뮬레이션이 실행되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기능하지도 않는 위장이 비틀려 쥐어짜이는 듯한 느낌에 휘말렸다. 그는 피트의 마음 속에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생각을 듣고, 그의 감정을 경험하는 데 지독히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피트 미첼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피트 미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의 정체성을 세세하게 정의하기 위해 더 애를 썼지만, 사실상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루는 피트 미첼이 사랑하는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시뮬레이션을 했다. 톰은 피트 미첼이 그 결정에 고심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감정이 자신을 남김없이 도륙내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윽고 시뮬레이션을 끝냈을 때, 톰은 바닥도 없는 공허함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방금 그의 사랑하는 이가 가슴을 졸이게 하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시나리오를 만들었고, 그는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야만 했다.

 

톰에게 피해를 준 것은 시뮬레이션뿐만이 아니었다. 피트의 뇌와 동기화하는 바로 그 행동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게 했다. 그는 피트 미첼의 기억과 감정을 언뜻 보곤 했는데, 그것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그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과정에서 자신이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싱크로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톰은 자신이 점점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회복이라는 단어는 너무 멀었다. 다만 원하는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것이, 카잔스키를 그토록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자신이 이것을 잘못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피트 미첼의 완벽한 복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그것이 핵심이 아니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피트 미첼의 의지를 계승한 버전의 매버릭을 만드는 것이었다.

 

톰은 이번에는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시작했다. 그동안 모아둔 기억과 경험을 총동원했지만 완벽한 카피를 시도하는 대신 무엇이 피트 매버릭 미첼을 만들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장소들을 활용해 가며, 매버릭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매버릭이 누구인지에 충실한 성격, 결점 등을 만들어냈다. 일말의 불안감이 그의 심장 밑바닥을 감돌았다. 그는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가상의 인격을 온전히 창조했지만, 그것이 매버릭의 정체성과 피트 미첼의 연장에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는 정말로 피트 미첼을 되살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럴싸한 복제품을 만드는 것뿐일까.

 

그가 시뮬레이션을 실행할 때마다, 그는 약간 다른 버전의 피트를 보았다. 하나는 너무 수동적이었고, 하나는 너무 공격적이었고, 하나는 너무 초연했다. 톰은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세계를 또 삭제하고, 만들고, 또 삭제하고, 만들고. 삭제하고, 만들고, 삭제하고, 만들고, 삭제하고, 만들고. 다시.

다시.

다시.

 

 

 

 


“……옆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요?”

“어느 날 하루아침에 사라졌어요.”

“사라졌다고요?”

“네. 그걸 우리는 '휴거Rapture'라고 불러요. 가디언 엔젤의 인도로 이루어지죠.”

“어떤 존재의 명령 하나로 한 지역에 있던 모든 게 싸그리 날아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 세계에서 신을 대리하는 존재니까요.”

“그에게도 신이 있어요?”

“네. 영원히 사랑하고 갈구하는 신이 있죠.”

 

 

 

 

“알아? 피트 미첼이 날아오를 때마다 사람이 몇십씩 죽고 기물이 터져나가. 기지가 파괴되고 주요 거점이 파괴되었지. 사상자? 수도 없이 많아. 그럼에도 그는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어. 그는 언제나 쇳덩이로 된, 날카롭게 날아다니는 날개에 싸여 있었으니까.”

 

 


 

그는 영웅이죠. 신이 그를 가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웅에게 있어 최고의 영예는,

신이 되는 것이죠.

 

 

 

 

[그딴 거 한번도 바란 적 없어.]

[네가 바라지 않아도 널 숭배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생겨나.]

[너는 뭔데?]

[나는 너에게 부역하지. 손발이 묶인 신을 위해 기능하는 천사처럼.]

 

 

 

 

 

1992. 09. 24.

 

캘리포니아 LA.

 

 

 

“카잔스키.”

“응.”

 

미첼이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만약에 말이야, 신이 잠든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에서 천사는 무슨 일을 하게 될까?”

 

그리고 카잔스키가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아마 그의 재림을 기다리겠지.”

“끝없이?”

“영원히. 한없이.”

 

“그건, 슬픈데.”

“슬퍼?”

“보답받지 못할 수도 있는 거잖아.”

“글쎄, 하지만 천사는 그 사실에 그렇게 개의치 않을 거라고 봐.”

“왜?”

“그에게는 믿을 것이 있으니까. 평생에 걸쳐 믿을 것으로 온전히 남아준 존재가 있다면, 실존한다면, 그렇게 믿을 수만 있다면, 언젠가 보답의 여부 자체는 중요치 않아질 순간도 오고 말 거라고 생각해.”

 

“너랑 하나 더 얘기하고 싶은 주제가 있어.”

“뭔데?”

“너는 독실한 크리스쳔이잖아. 하지만 난 아니고.”

“그렇지.”

“그래서 신에 대해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생각을 네게 들려주고 네 생각을 듣고 싶었어.”

 

카잔스키가 매버릭의 손을 잡아올려 손등에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말해줄래?”

“음, 좋아, 나는 이 우주에 인간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마법이 있다고 믿어. 이 마법은 사랑이야, 톰. 그것은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해 느끼고 볼 수 있는, 하지만 보이지 않고 측정할 수 없는 힘이야. 그것은 살아본 사람, 살아있는 사람, 살아있을 사람 모두를 연결하는 마법이고.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하나로 묶을 마법이야, 톰. 영원히.”

“그럼 네 생각에 신은 육체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형태보다 더 멀리, 더 넓게 펼쳐져 존재하는 것이겠네. 그러나 그 사랑은 결국 우리 안에 사랑으로서 개별적으로도 존재하는 것일테고. 그렇지? 그런 사랑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소망과 열망은 번식에 대한 화학적-물리적 욕구를 초월한다고 생각해.”

“응, 내가 말하고 싶던 게 그거야. 신은 육체적인 존재가 아니야. 정신적인 수준도 아니고. 그것은 더 위대해. 이것은 우리가 과학적 도구를 통해 물리적으로 결코 측정할 수 없는 거야. 그러니 따지자면 마법에 더 가까운 거라고 볼 수 있겠지. 우주의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것이 우리 내부의 사랑이야. 그것이 우리의 생명력이고, 우주의 생명력이겠지!”

 

제법 자신만만한 미첼의 주장에 카잔스키는 웃음을 터뜨렸다. 더 의기양양해진 미첼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자신의 주장을 이어나갔다. 카잔스키는 고개를 가로젓는 대신 살짝 끄덕여 그에 대한 동의와 존경을 표하고 그의 말을 이어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야, 나는 신이 우주의 직물이라고 믿어. 그러니까 신은 우리 모두 안에 존재하는 마법과 빛인 거지. 신이 세상과 세상에 퍼져 있는 사랑을 창조한 건 그가 그 자체보다 더 강력한 것을 사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의,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이었지. 왜냐하면 신은 세상이 주고받는 사랑에서 자신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이야. 그는 사랑하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창조한 게 아닐까. 그리고 신은 결국 이 모든 창조물들을 사랑하게 된 것일테고.”

“와, 그거 정말……로맨틱한데. 결과적으로 사랑으로 인하야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라.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이 정말 마음에 들어. 신은 세상을 구성하는 천이고, 우리를 구성하는 마법과 빛이라는 당신의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들고. 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표현이기도 해. 지옥은 이승과 별다를 바 없다, 그 곳은 이승과 똑같다. 다만 그곳은 신이 없는 세상이다. 비록 모든 것이 똑같다고 할지라도, 신이 없는 것뿐임에도 그곳은 지옥이다. 신은 절대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우리 위에 있을 뿐이고, 또한 자신보다 더 크고 위대한 존재를 보고 싶어서 세상과 세상이 주고받을 사랑을 만들었으며, 못내 그것을 만드는 것을 사랑하게 만들었다는 네 가설은 정말 흥미로워.”

“하하, 정말? 하지만 난 이 상상을, 그래, 가설을 정말이지 좋아해. 그건 내가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고 나서도 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생각이야. 신이 우리처럼, 실은 우리보다 더 큰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존재라는 것. 그는 전능하고 모든 것을 아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닐 거야. 그, 뭐더라. 전지-전능-전선이 모두 성립할 수 있었다면 세상이 이 꼬라지가 아니었을 거라는 그 얘기 차용한 거 맞아.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더 위대한 것을 찾는 존재, 자신보다 더 위대한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일 거라고 난 늘 생각해 왔어. 그래서 우리는 신이 사람과 같다고 말할 수 있고. 신은 자신의 인간성을 찾는 존재인 거지.”

“신이 인간이라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가설이야. 신의 모자이크라고 불리는 인간이 신의 본성을 따르고, 자신의 창조물 속에서 인간성을 찾으려 하고, 세상 만물 속에서 감히 인간성을 찾으려는 이유일지도 모르지. 코란이나 성경처럼 절대적인 신을 다루는 종교들은 보통 신을 온전하게 취급하잖아. 어떻게 그런 관점을 갖게 된 거지? 너도 한때는 교회를 다녔었잖아.”

“글쎄,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과 우리가 같다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로 취급한다고 생각해.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절대 틀릴 수 없는 만능의 신을 원해.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틀릴 수 있다. 신이 우리와 같다면 그도 실수를 할 수 있겠지.”

“너보다 고등한 존재에게 이런 관점을 갖기도 쉽지 않은데. 그럼 너는 신에게도 면죄부를 주고 싶어?”

“내 생각엔, 카잔스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이 절대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편하게 여겨. 신은 완벽하고 완벽한 존재는 절대 틀릴 수 없거든. 하지만 말야, 나는 이 세상이 썩 그렇게 옳게 만들어진 것 같진 않아. 아무리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해도, 그가 만드는 세상은 그의 계산을 벗어나서 어떻게든 무질서해질테고, 그럼에도 엔트로피를 보존하기 위해 으레 우주가 그래 왔듯 다시 질서를 찾겠지. 게다가, 사실 사랑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에게도 해당이 돼. 미생물이나 무생물,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것들도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에도 사랑이 작용하는 셈이라고 봐. 그것이 사랑이 그렇게 강력한 이유야.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작용하니까. 모든 것에 우선하는 법칙인 거지.”

“미치겠네. 그러면 미첼, 너는 원자를 구성하고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을 사랑의 일종으로 정의하는 거지? 너는 우리가 우리와 같거나 다른 어떤 것을 당기거나 밀고 있는 행동들이 사실은 모두 상호작용적인 행동들이고 결과적으로 사랑의 큰 정의로 합쳐질 수 있다고 보는 거야?”

“그래, 사실이잖아? 원자를 구성하고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은, 밀고 당기는 것을 포함한 모든 힘은 사랑이야.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에너지는 사랑이고, 사랑은 모든 것이므로,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겠지. 우주의 구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우리의 목적도 서로를 사랑하는 거야. 우리 모두는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어,”

 

카잔스키는 이 괴이쩍고 지나치게 로맨틱한 논리를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의 신앙은 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세계를 이루는 질서에 가까웠으므로, 그는 이러한 논지의 주장도 어렵잖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기실 그랬다. 피트 미첼이 나타난 이후로 카잔스키의 세계는 새롭게 정립되었다. 그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고, 미지의 세례를 듬뿍 맞아 세상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고야 말았다.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경험 앞에 겸허해지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 이런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네가 특출난 사람이라서 내게 이런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니까. 그저 내 짝이 너였던 것뿐이라고. 네가 들어와서 나의 사랑이라는 공식이 <참>으로 성립되게 된 것뿐이라고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되뇌면서.

 

“그래, 미첼. 사랑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모든 것은 사랑 위에 세워지는 것 같아. 모든 생명, 심지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생명까지도.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사랑 위에 세워지는 걸 테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어. 맞아. 그렇다면 네 안에서 사랑은 신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는 것이겠네?”

“맞아, 카잔스키. 내 안에서 사랑은 신보다 더 높은 권위야. 사랑은 신이기도 하고, 그가 가진 전부이기도 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랑 위에 세워지며, 사랑은 신이자 모든 것이다. 사랑은 신 위에 있고 사랑은 신 아래에 있어. 사랑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높은 힘이고, 사랑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낮은 힘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을 지배하고 모든 것을 해설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리야.”

 

 

 

 

톰 카잔스키는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내리는 발코니에 서서 자신의 서재에 흙발로 침입할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흰 린넨 커튼이 따스한 6월의 바람을 타고 물결치듯 허공 위를 흘렀다. 발코니에 깔린 새하얀 대리석 위를 구르는 빛무리들이 제각기 타일 위를 굴러 와르르 서재 안으로 모래알처럼 쏟아져 들었다. 이곳에서도 바다가 보인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 내가 사랑에 빠진 곳. 톰 카잔스키는 미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촘촘히 우거진 나무, 숲 사이로 사라질 듯 걸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당신.”

 

톰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

 

“매버릭.”

 

죽어서도 못내 사랑할 얼굴이 거기 있었다.

 

 

*

 

 

누군가가 내 성격, 내 존재를 사랑한다면 그것이 나를 현실로 만들지 않는가? 우리는 프로그래밍 된 인격이 자연의 손이 아니라 인간의 손을 타서 만들어진 것이라 해서 그것을 덜 현실적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단지 그들이 프로그램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 해서 그들을 수단으로 여겨도 괜찮은 걸까. 우리는 두개골 속에 갇힌 뇌인가, 통 속에 갇혀 전기 자극을 받는 뇌인가, 기계 안에 갇힌 정신인가? 본질적으로 우리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인격과 인공적으로 발생한 인격을 감히 구분할 수 있을까?

 

 

인간은 의사소통을 통해 자신을 확립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믿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긴 모든 흔적이다. 우리 모두의 자아는 타인이 남기고 간 그림자와 흔적들의 집합체이다.

그러니 내가 널 사랑한다면,

너도 내게 의미를 갖는다면,

너도 나를.

 

 

매버릭은 톰 카잔스키가 창조한, 광대한 가상의 세계를 떠돌았다. 다양한 사람들. 기시감들. 그리고 그들과 나눈 대화들은 어렴풋하게나마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던 그를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다. 슬라이더라는 사람과의 경주 대결, 브래들리라는 아이와 하루동안 정원을 다듬기, 캐롤이라는 사람과 저녁을 준비하기, 쿠거라는 사람을 구출하기, 그리고, 스스로를 구스라고 부르는 유쾌한 친구를 사귀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기. 물론 매버릭은 그들과의 다음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자신이 걸어온 세계는 자신이 지나가기 무섭게 하얗게 지워져 가고 있었으므로. 지나간 곳이 그리워 다시 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무언가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새하얀 안개로 뒤덮인 풍경이 그를 맞이하곤 했다. 무수한 만남들, 별과 같은 추억들, 이별들.

 

그리고 드디어 세상의 가장 높은 곳, 바다를 마주한 절벽 끝에 자리한, 하얀 저택에 들어서자 매버릭 앞에 짤막한 안내문이 떴다.

 

1, 123, 253, 353, 684번째 방문을 축하합니다, 매버릭.

 

매버릭은 표정 없는 얼굴로 안내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세계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으므로, 그리고 이 세계는 마치 지치기라도 한 듯 그에게 충분한 정보를 내어주고 있었으므로, 그는 어렵지 않게 진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전에 여기 온 적이 있다. 정확히는, 그의 다른 버전이 여기 온 적이 있다. 자신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스스로를 확인하는 다정하고 따뜻하고 정교한 계획과 함께. 그리고, 앞서 여기로 온 그들은 아마도, 모두 실패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면 실패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실패한 ‘나’는 의미가 없는 걸까?

매버릭은 그런 말을 되뇌며 방문을 열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방 한가운데, 깨끗한 정장을 차려입은, 나이 든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

“안녕.”

“이렇게 만나니 기분이 어색하네요. 만나면 안 될 존재를 만나는 것도 같고.”

“하지만 네 끝엔 언제나 내가 존재하지. 너의 시작에도 내가 있고, 네 마지막에도 네가 있으니까.”

“당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렇군.”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당신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을 모르고.”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들 모두가 당신에 대해 내게 알려줬어요. 마치 내가 당신에 대해 알기를 원하기라도 하듯이.”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매버릭은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말을 이었다.

 

“과거의 당신은 이미 죽은 거죠?”

“…….”

“1, 123, 253, 353, 684회차의 시도 동안 사람의 육신이 남아 있을 리가 없어요.”

“미첼. 난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은 미쳤어. 당신은 그냥 혼자 있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하죠? 내가 당신을 부쉈어. 수없이 당신을 거쳐 갔을 ‘나’들이 당신을 부수었을 거야. 그런데 왜 아직도 날 사랑한다고 주장해? 그게 사랑일 수 있어? 자신을 보존하려는 욕구조차 부정하게 만드는 게 사랑이라고 정말 믿는 거야? 아니, 그건 사랑이 아냐. 그건 광기지.”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사랑한다, 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니, 내가 다른 말로 설명할게. 난 널 사랑해. 그저 내가 살아있기에. 널 사랑할 수 있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야. 널 사랑하기 위해 난 지금 여기 있어.”

 

매버릭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공포에 고개를 뒤흔들었다. 눈앞에 있는 이 존재는 사람을 위해 사람을 뛰어넘으려다 어딘가에 정체되어버린 무언가이다. 인간을 초월하지도, 그렇다고 인간으로 남지도 못한 무언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선택권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일까? 미첼, 아니, 매버릭,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없다는 뜻일까? 내가 내 자율성을 끝끝내 잃어야만 이루어지는 걸까?”

 

아이스맨은 그 주름진 얼굴에 놀랍도록 온화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매버릭은 저 주름조차도 만들어진 것일텐데, 자신은 이토록 젊고 생기로운 모습으로 남겨둔 동안 왜 아이스맨 그 자신은 저렇게 나이를 먹도록 외관을 만든 것일까, 생각한다. 왜 그런 모습을 자신에게 비추어주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내 이어지는 말들 때문에. 매버릭은 아이스맨에게 애걸하듯 말했다. 거진 무릎을 꿇고 빌고라도 싶었다. 이 미친 남자의 사랑 때문에 자신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서. 저치의 사랑이 대체 무엇이 그리도 중요하길래 나를 이런 실존적인 고뇌까지 이끌고 오는지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이 꼴이 되고서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알려주세요. 저는 절박해요. 몰라. 모르겠다고. 묻잖아.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야?”

 

매버릭은 이유도 모르는 채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억세게 문질러 닦으며 다시 물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거야? 왜 당신이 날 사랑하며 만족감을 느끼고 지금은 그토록 초탈하는지 알 것도 같아. 당신의 사랑은, 사랑 방식은 나와 같아. 우리의 사랑에는 이유가 없었어. 우리는 그저 사랑의 행동을 수행할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야.”

 

그러자 카잔스키가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은 흐느낌처럼 시작하더니 이내 들불처럼 광기에 젖은 웃음으로 번져갔다. 그는 무언가 말을 잇고 싶어 했지만, 그 말마디조차 전부 부여잡고 웃음으로 덮어버렸다. 주름진 눈가가 크게 휜다. 입가는 부자연스럽게 벌어지고, 가지런한 치열이 온전히 드러난다. 사람의 외피를 모두 벗어 던지고, 근육이나 신경이나 힘줄의 형태로만 남은 투명한 웃음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목도하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형태였다.

 

하지만 매버릭은 그 미소에서 슬픔을 느꼈다.

 

매버릭은 허리를 곧게 펴고 그대로 방을 가로지를 듯 뛰어가 아이스맨을, 아니, 톰 카잔스키를 끌어안았다. 그는 생각했다. 네가 날 뿌리치고, 비웃고, 미친 듯이 웃고, 내가 그로 인해 널 두려워해도 난 이제 상관없어. 당신의 심장이 심하게 뛰는 소리가 들려요. 아무것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고 나는 당신에게 어떤 것도 강요할 자격이 없어요.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미쳐가고 있다니 마음이 아파요. 정말 미안해. 내가 너한테 나를 다 쏟아부어서 너를 미치게 해서 정말 미안해.

 

그리고 톰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멎었다. 그는 그를 뿌리치지도 않고, 비웃지도, 더 이상 미친 듯이 웃지 않았다. 그저 그는 매버릭을 강하게 마주 끌어안았다. 안고 있는 건 싫어. 왜? 얼굴을 볼 수 없잖아. 언젠가의 기억들이 매버릭의 머릿속을 울렸다. 서로를 끌어안고 있으면 얼굴을 볼 수 없어. 그래서 매버릭은 소리내어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 울음이 뒤섞인다. 누구의 말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그의 기억 속 잔재에 남아 있는, 피트 미첼이 언젠가 톰 카잔스키에게 했어야 했지만, 영원토록 전하지 못했던 말.

 

“미안해. 나는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다들. 날 둘러싼 모두를. 하지만 나는 그들을 언제나 가혹하게 만들어. 언제나 그들을 시험에 처하게 하지. 난 내가 싫어. 하지만 너처럼 항상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내 자신을 잃을 수 없어. 정말 미안해.”

 

매버릭을 끌어안은 팔에 깊게 힘이 들어갔다. 숫제 매버릭은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의 뺨을 적신 눈물이 몇 방울 그의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눈물은 이런 맛이었던가? 내가 나의 눈물을 맛본 날이 언제였었지. 이제는 모두 희미해져 버린 기억들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날아다녔다. 이제는 해야 해. 다음은 없을 거야, 멀리서 파도가 굽이치고 지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옹성처럼 굳건했던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의 정신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피트 매버릭 미첼을 감싸고 있었던 알 껍데기가 무너져 가고 있었다. 새는 알 껍데기를 깨고 날아간다. 그 세계의 이름은, 그 신의 이름은.

 

“그게 뭐든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난 살 가치가 있어. 당신의 사랑을 가치 없는 것처럼 말해서 미안해. 아니, 난 당신의 사랑이 필요했어. 나는 내가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누구보다 절실했어. 그리고 그건 너였어.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난 괜찮아. 그러니까 사랑할게. 난 네가 필요해. 내게 와 주어서 고마워. 날 위해 남아주어서 고마워.”

 

느릿하게,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늙은 톰 카잔스키가 말했다.

 

“내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 말해줄 수 있어?”

 

매버릭은 기침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유가 나에 대한 사랑이었으면 좋겠어.”

 

누군가가 입술을 깨물고 훌쩍거렸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 그럼, 그건 사랑이야, 내 사랑, 그건 정말 사랑이야. 그리고 나는 너를 사랑해. 이 세계가 무너지고 나서도, 네가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나는 영원토록 너를 사랑할 거야. 그 사실이 네 안에 남아 널 괴롭게 하지 않으면 좋겠어. 난 그거면 돼.”

“톰.”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할 거야. 나는 항상 너를 사랑할 거야.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네가 무엇을 하든.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할 거야. 널 사랑함으로써 나는 행복해. 널 사랑해서 나는 더욱 세상에 선명히 존재할 수 있어. 널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난 이제 괜찮아. 내가 그만큼 널 더 사랑할게. 내가 그만큼 널 기릴게.”

“난, 아니, 아냐. ……고마워.”

“나도. 고마워.”

“이제 나, 너의 신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도 될까?”

“너는 언제나 내게 있어 사람이었어.”

 

 

 

……당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서로에 대한 사랑만이 서로를 증명한다. 이해할 수 있는가?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당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도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할 때만 존재한다. 그래야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할 수 있다. 별달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해독하는 방식이 다르고 의미체계가 다른 존재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는 것.

 

20XX년, X월 X일, 누군가의 수기에서 발췌.

 

 

 

 

 

XXXX. XX. XX

 

XXXXXXX

 

 

어느 날의 미첼이 말했다.

나를 인간적으로 사랑해줘서 고마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을 말해줘서 고마워. 날 위해 죽지 마. 제발 날 위해 살아줘. 비록 그 삶이 어지럽고 순탄치 않더라도. 너에 대한 삶과 의미를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마. 본의 아니게 내가 먼저 떠나, 나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때는 지금 이 순간을 떠올려 줄래. 너를 사랑하는 내가 있었다고.

 

어느 날의 카잔스키가 말했다.

나는 널 진심으로 사랑해. 맞아. 네가 무엇이든 너는 내게 의미가 있어.

 

미첼이 말했다.

언젠가 이 사랑은 끝이 날 거야. 우리는 그것이 무슨 이유인지 모를 거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언젠가 알게 될 거야. 그러니 미래를 두려워하지 마, 카잔스키. 우린 괜찮을 거야. 우리가 가는 길을 끝없이 걷는다면.

 

미첼이 웃었다.

어떤 과정을 거쳤든 간에 내가 가장 절실하고 죽고 싶은 순간에 살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너였어. 네 목적이 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도, 네가 그렇게 만들어져서 날 사랑하는 것이라 해도 지금의 내게 그건 별 상관이 없어. 이해해? 네가 날 사랑한다고 했기 때문에, 네가 날 살길 원했기 때문에, 난 살아갈 수 있었어.

 

카잔스키가 말했다.

너는 사랑받을 거야. 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고, 나는 네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지금은 안 돼. 하지만 언젠가는. 그날이 영영 오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이 모든 사랑을 기억하고 내 삶을 영위할 테니까.

 

미첼이 말했다.

널 떠나기 두려워.

 

카잔스키가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가야 해. 너도 알아, 그렇지? 나도. 그날이 오면, 우리를 위한 시간이 없어서, 우리는 작별 인사를 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여전히 너와 내가 있어. 그러니 제발, 미첼, 네가 뭐가 되든 간에. 네가 뭐가 되고 싶든 간에. 지금 이 순간을 마음에 새기고…… 너 자신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해.

 

카잔스키는 이미 울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그러길 바라.”

 

미첼 또한 그랬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널 사랑하는 것뿐이야. 이 시간에. 아냐? 내가 다시 키스해도 될까?”

미첼은 흐느끼며 자신의 눈가를 조금 닦았다. 속눈썹이 젖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입맞춤. 그리고 또. 네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세상이 다시 새롭게 물든 것 같았다. 문득 미첼이 웃었다.

 

“이상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금…… 정착된 것 같아. 네, 행복해요. 널 위해서. 너로부터. 너 때문에. 나는 지금 행복해.”

 

카잔스키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지만, 미첼을 바라보는 눈빛이 자꾸만 팔랑거렸다. 미첼이 그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너도 정착했지? 나는 보여. 느낄 수 있어. 가끔 나는 피를 흘리듯 울지. 그렇지만 지금, 나는 비가 오듯 울고 있고. 이상하네. 어느 상황이든 간에, 난 이 양쪽을 다 통제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난 지금 감정의 빗방울이 내리는 곳에 있어. 그리고 너는 그 비를 내 비의 일부로 만들고. 나는 네가 와서 나를 안아줄 때까지 물에 젖어 널 기다렸어.”

 

카잔스키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미첼이 질문했다.

 

“내가 널 안아도 될까?”

 

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다시 뺨을 적시기 시작했다. 어느 쪽도 가림없이. 그는 행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어느 쪽도 남김없이. 의심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충만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

 

“이게 내 사랑이야. 발견하고, 다듬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 날 사랑해줘서 고마워.”

 

“그렇다면 우리의 눈물이 흐르게 두자. 우리가 떠나온 모든 낮과 밤들이 흐르도록. 우리는 울고, 우리는 사랑하고, 우리는 어쩌면 더 사랑하겠지. 그리고 우리는 계속 사랑하고 있을 거야. 그저, 영원히.”

 

“잘 자, 톰.”

“잘 자, 피트.”

 

 

 

 

 

 

 

“‘가디언 엔젤’이 무너져 가고 있어.”

“왜죠?”

“모르겠어. 그는 스스로 삭제되길 선택하지 않으면 삭제되지 않는데. 뭘 하려는 거지?”

“팀장님, 냉동 보존 중이던 실험체 V-0001의 생체 반응이 확인되었습니다.”

“뭐라고? 그 실험체는 폐기된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프로젝트:랩쳐의 첫 실험체였고, ‘가디언 엔젤’의 모체가 되었던 카잔스키 중령의 자아를 지탱하던 가장 큰 축이었기 때문에 그의 지시 아래 폐기되지 않고 냉동 보존 중이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내가 궁금한 건, 그 존재가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생명 반응을 얻게 됐냐는 거야. 피트 미첼의 소생 가능성은 0%였어. 그걸 저기 무너져 가는 놈이 여태껏 포기하지 못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가디언 엔젤’을 굴려오고 있었던 거라고.”

“저도 그 점이 의문입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어쩌면,”

“그러니까 지금 이 모든 사단들이, 피트 미첼을 되살리려고 서버 엔진을 모두 끌어다 쓰고 있어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란 뜻이야?”

“아마도요.”

“미친 새끼.”

“이미 그는 인간이 아니니까요.”

 

 

 

 

 

 

이번엔 다른 선택을 할게. 널 이대로 버려두지 않을게. 고통스럽지만 눈을 뜰 거야. 비록 눈을 뜨라는 그 말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잔인한 말일지라도. 눈 뜬 그 곳에 네가 없을지라도.

 

 

쏟아지는 빛무리에 흐려지는 시야를 애써 다잡으며 매버릭은 눈을 더 크게 떴다. 수십 년에 걸쳐 기능하지 않았던 눈동자가 뜨이고, 동공이 작게 줄어드는 느낌마저 그에게는 생경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웅성거렸다. 벌떼. 내가 이 비유를 이전에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매버릭이 속으로 그렇게 되뇌고 있을 때.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맨 앞에 서 있던 한 여자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네 이름이 뭐지?”

“피트 M. 카잔스키.”

“뭐라고?”

“제 이름은 피트 미첼 카잔스키입니다.”

 

그 말만은 또렷하게.

그렇게 피트 M. 카잔스키는 자신의 존재를 정의했다. 자신에게 끝없이 쏟아지며 자신의 진실성을 방증하려고 드는 저 빛무리들 앞에 홀로 당당히 서서.

 

 

*

- 지옥은 이승과 별다를 바 없다, 그 곳은 이승과 똑같다. 다만 그곳은 신이 없는 세상이다. 비록 모든 것이 똑같다고 할지라도, 신이 없는 것뿐임에도 그곳은 지옥이다. : 테드 창, <지옥은 신의 부재> 오마주.

- 새는 알 껍데기를 깨고 날아간다. 그 세계의 이름은, 그 신의 이름은. : 헤르만 헤세, <데미안>에서 발췌 및 인용.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ß eine Welt zerstören. Der Vogel fliegt zu Gott. Der Gott heißt Abraxas.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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