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살아있는 지도
부셈이
미노루가 십대 초중반 정도일 때입니다.
부잣집을 털려고 기생으로 위장을 한 미노루가 술을 거나하게 마신 타겟과 방에 들어갑니다. 타겟은 단추 몇 개가 풀어져 흐트러진 차림의 양장을 한 아저씨고요.
방에는 일본식 병풍이 하나 있고, 둘이 마실 술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에이미
이 임무가 첫 번째 임무일까요?
부셈이
그래도 되고 아니어도 되고…… 일단 물귀신의 강요로 시작했을 것 같아요.
한 열 살 이하까지는 소매치기 같은 것만 시켰는데요. 미노루가 나이를 먹을수록 곱게 자라는 걸 보고, ‘동경의 부자들은 남색을 그렇게 한다더이다’ 같은 얘기를 어디선가 듣고는 이게 소매치기보다 수입이 낫겠다고 생각을 했을 수 있겠네요.
물귀신이 미노루에게 기모노 같은 걸 던져주고 그런 일을 하라고 하면…… 처음에는 반항을 했겠죠?
에이미
엄청 반항해서 두들겨 맞았으면 좋겠어요. 몇 번 두들겨 맞은 뒤 의지를 잃어서 시작하게 된 거죠.
부셈이
두들겨 패고, 마굿간이나 돼지우리 같은 데다가 가둬놓고.
문 앞에 서있는 물귀신의 얼굴은 역광에 가려진 채로, “밥 노나 먹는 것만 식구 아니여. 밥값을 혀야 식구지. 밥값 못하면 돼지들처럼 고깃값만 하다가 뒤지는 거다.”
에이미
그러면 그 당시에는 “시끄러워! 마귀 할멈 같은 년이! 죽여버릴 거야!” 하면서 난리를 쳤을 것 같아요.
부셈이
미노루가 달려들면, 물귀신은 마지막으로 발길질을 해서 진흙탕에 처넣습니다. 그 직후 미노루의 눈앞에서 문이 닫힙니다.
에이미
그러고는 밥 한 톨 안 주고 오래 가뒀을 것 같거든요. 물귀신이 나중에 다시 왔을 때는 피골이 상접해서 “자, 잘못했습니다…… 하라는 대로 할게요…….”
부셈이
물귀신은,
“여우야 있잖냐…… 이 험한 시상을 살아가려믄 말이다…….”
“자존심을 힘으로 알면 안 디야…….”
“빨리 뒤지는 지름길잉게.”
당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돈 많은 양반들 털러 가야된께 깨깟하게 씻고 나와라잉.”
에이미
미노루는 물귀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물귀신이 나가면 부들부들 떨면서 울기 시작합니다.
이게 미노루가 살기 위해 자존심을 버린 첫날이었던 거죠.
그 모습 뒤로 나레이션이 깔립니다. ‘그 후로는 자존심을 꺾는 게 어렵지 않았다.’
나레이션 뒤 바로 다음 씬으로 넘어가서, 남자 앞에서 기모노를 벗으며 뒷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면 좋겠네요.
부셈이
그런 밤들이 몽타주 식으로 몇 번 지나가고, 이번도 매일과 같은 밤.
미노루가 익숙한 듯 기모노의 한 쪽 어깨를 내리려 하는데, 바깥에서 쿵쿵쿵 소리가 납니다.
남자는 처음에는 “거 누구 나가봐라!” 하고 무시하려 했지만, 소리가 계속 나니까 “빌어먹을 여관 같으니!” 하면서 일어나 문을 엽니다.
미닫이 문을 드르륵 하고 열면 문 너머에 누군가가 있는데, 키가 너무 커서 그 사람의 가슴팍 까지만 보입니다.
남자가 “엇…….” 하고 당황하면, 손이 불쑥 튀어나와 남자의 목을 조르기 시작합니다.
에이미
깜짝 놀라서 “뭐 하는 거야!” 합니다.
부셈이
오도깨비는 무감정한 얼굴로 “(어눌하게) 어차피 죽을 놈이다.” 하고는 남자의 목을 점점 더 강하게 거머쥡니다.
남자는 계속해서 버둥거리며 저항하고요.
에이미
남자가 이쪽을 보며 애원의 시선을 보내는데요.
저는 그걸 본 척도 하지 않고, 내렸던 옷을 딱 올리면서 “그건 그렇지.” 라고 얘기하고 자리에 앉아 곰방대를 피우기 시작합니다.
부셈이
남자는 다리를 부들부들 떨다가 축하고 늘어집니다. 오도깨비가 쥐었던 손을 펴면 남자의 몸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고요.
에이미
“하…….” 하고 곰방대를 털면서 “엄마한테 또 혼나긴 하겠네.”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째야, 이게.”
부셈이
“어, 어, 엄니한텐 내가 했다고 한다.”
에이미
“매번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결국 혼나는 건 나잖아.”
부셈이
“미…… 미안하다.”
에이미
그러니까 여태까지 항상 이런 일이 있었던 거죠. 화가 난 오도깨비가 사고를 쳐서 일을 끝까지 진행하지 못하고 마무리 직전에 얼버무리곤 했는데, 그 책임은 항상 미노루가 물었던 거예요. 그래서 “너는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구나.” 라고 얘기합니다.
부셈이
“아…… 아니다. ……미안하다.”
에이미
“이리 와, 오도깨비.”
부셈이
그러면 주춤주춤 걸어와가지고 당신 옆에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에이미
그러면 곰방대를 내리고 오도깨비를 끌어서 입을 맞출 것 같고요. 그러면서 “이런 걸 바라는 거면, 굳이 그런 짓 안해도 돼.” 라고 합니다.
부셈이
오도깨비는 어린아이가 도와주듯이 자기도 자기 마음을 제대로 모르는 채로 끼어든 거잖아요. 그래서 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입니다.
에이미
오도깨비가 딱히 자신과 이런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게 아닌 건 미노루도 알아요. 하지만 이게 미노루가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미노루는 씩 웃으면서 “나는 이런 방식으로밖에 사람을 위로할 줄 몰라. 다른 방식을 바라면 네가 알려줘.” 라고 합니다.
부셈이
오도깨비는 말 없이 미노루를 봅니다. 한참을 서로 대화 없이 가만히 앉아있을 때, 열린 창문으로 반딧불이 몇 마리가 들어오고요, 한 마리가 미노루의 무릎 위에 내려앉습니다. 그러면 오도깨비가 “여…… 여우불이다…….”
에이미
손으로 털어 반딧불을 날아가게 합니다.
부셈이
“엄니두…… 미노루를 아낄 거다.”
에이미
처음엔 큭큭거리다가 곧 깔깔깔 하고 웃으면서, “너는 내가 무엇으로 보여? 혹시 인간으로 보여?”
부셈이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것처럼 의문 가득한 눈으로 볼 것 같아요.
에이미
“난 인간이 아냐. 도구지. 물귀신도 나를 도구로 쓰는 거야. 도구는 쓸 때는 아낄지 몰라도 이가 나가면 버리게 되어있지."
부셈이
“그럼…… 나, 나도. 도구인 거냐? 나도 엄니가 데려온…….”
에이미
“너는 인간이야.” 어쩐지 단호하게 얘기합니다.
“너는 물귀신에게 쓸모없는 존재야.”
“사고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네가 무슨 쓸모가 있겠어?"
“처음엔 네 덩치가 쓸모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물러서야.”
“그래도 물귀신은 아직 네가 쓸모 없다는 걸 눈치 못챈 것 같은데, 그년이 죽이기 전에 도망치는 게 어때?”
부셈이
“도…… 도망…… 쳐?”
에이미
“그래.”
부셈이
“미노루도…… 같이 도망치는 거냐?”
에이미
웃으면서 “나는 물귀신의 것이라서 도망은 칠 수 없어.”
부셈이
“미노루가 같이 안 가면 나도 도망 안 친다.”
“나를…… 사람 대접 해주는 것도 너밖에 없다.”
에이미
“뒤지려고 작정했구나.” 라고 얘기하면서 다시 날아온 반딧불을 손끝에 얹어 바라봅니다.
“나는 요호(妖狐)고, 이 불은 언젠가 너까지 태우고 말 거야.”
“물귀신한테 끌려가서 익사 당하든, 나한테 타죽든 어차피 결과는 하나라니까.”
“너는 이 불길을 감당할 수 없어.”
부셈이
오도깨비는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언젠가 그 불도 꺼질 거다.”
“영원히 타는 건 없으니까.”
에이미
그러면 데리고 놀만큼 놀았다는 양, 질렸다는 얼굴로 “……헨나 오토코.”
“어서 나가. 물귀신이 두들겨 패러 올 시간이니까.”
“빨리 가라고. 네 낯짝 오늘은 더 보기 싫으니까.”
부셈이
미노루의 말에도 나가지 않고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소귀에 경읽기 하듯 가만히 앉아있습니다.
에이미
그러면 제가 일어나서 나갈 것 같아요. 기모노 자락이 사라락 하고 앉아있는 오도깨비를 스치고, 쓰러져 죽어있는 남자를 스치면서 밖으로 향하고요.
망을 보고 있던 자에게 묻습니다. “엄마 어디 계셔?”
부셈이
담배를 피우며 망을 보던 달걀귀신일 것 같네요.
“일이 예정대로 안 됐나?”
에이미
“죽였어.”
부셈이
“(낮게 한숨 쉬고) 오도깨비 그 녀석인가?”
에이미
“아니, 내가 죽였는데?”
부셈이
“이럴 땐 거짓말이 서툴군.”
에이미
“뭐, 자기만 조용히 해주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 여자 성격에 쟤가 손님들 썰어댄 거 들키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뒤지는 거잖아. 알지?”
부셈이
“네 몸은 무슨 강철이라도 된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에이미
“구미호는 목숨이 9개거든.”
부셈이
“미친놈들……. 그게 정 네 소원이라면 어머니께 그리 보고하마.”
에이미
“항상 고마워, 자기.”
“그리고…… 전부터 얘기했지만……. 저 녀석 진짜 어디 내보낼 곳 없어?”
“전엔 무례한 놈들만 죽이더니 요즘은 죄다 죽이려 든단 말이야."
부셈이
“네가 아무리 너가 불여우니 뭐니 하는 소릴 듣더라도, 진짜 요술이라도 부리지 않는 이상 인력으로 사람 마음에 붙은 불을 끌 수는 없을거다.”
에이미
그럼 부채를 펼쳐서 느긋하게 젓다가 말해요. “괜찮아, 여우불은 허상이거든. 원래 지펴진 적도 없는 불이거든.”
아까 오도깨비에게 미처 해주지 못한 답입니다.
부셈이
“……모르겠다. 바람이 차갑군.” 하면서 옷 깃을 세웁니다.“어머니께는 알아서 말해 둘 테니까…… 들어와라.”
에이미
제 반항을 물귀신은 알고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물귀신을 죽이고 싶어한다는 것도 물귀신은 다 알 것 같아요.
부셈이
그리고 당신은 그것도 알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이렇게 반항을 했으면 진작에 죽고도 남았을 텐데, 물귀신이 자신만큼은 죽이지 않는다는 걸요.
에이미
미노루는 그걸 자신이 쓸모가 있어서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실제로는 물귀신 나름의 애착이 있어서 그러는 거겠지만, 미노루는 그런 건 생각 못하겠죠.
‘나는 이 정도 해도 물귀신에게 맞긴 하지만 죽진 않는다. 그러니 내가 하는게 낫다.’ 라는 생각이겠죠.
안으로 들어가 물귀신이 저를 필요로 하는 이유인 미모를 단장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서서 화장을 한 번 더 합니다.
이제 곧 맞으러 갈텐데, 맞는 동안에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면 얼굴은 안 때렸거든요.
그러니 얼굴이라도 맞지 않도록 최대한 아름답게 화장을 합니다.
부셈이
미노루가 물귀신을 만나러 가기 전, 달걀귀신은 물귀신에게 두둔을 하려고 “죽였답니다.” “쿠라마 그 자식이 또 제 성질을 못 죽이고…….”
물귀신은 뒤돌아 앉아 자기 비녀를 만지다가 그것을 확 하고 던집니다. 달걀귀신의 바로 옆으로 비녀가 스치고 지나가 벽에 꽂히고요.
“아~ 따. 어디서 쥐 새끼가 앵알앵알거리냐.”
“동상이 허튼 짓 할라 그러면 단도리 치는 것이 성님 역할 아니여? 근디…… 어찌 성님이라는 놈도 믿을 수가 읍는 것 같냐.”
“너가 먼저 뒤질래?”
달걀귀신이 “어쩔 거요? 그래서.”
“오도깨비 말이요. 그놈 죽이기라도 했다간 쿠라마가 난리를 칠 텐데.”
물귀신은 비웃으며, “아니 개구락지가 힘 준다고 용댄갓디? 즈그가 난리를 쳐봤자 개구락지제. 나가 알아서 할 테니께.”
“데리고 와라.”
달이 뜬 밤, 절벽에 있는 동굴 안에 모닥불이 켜져있습니다.
물귀신의 호출에 미노루가 단장을 마치고 가면 오도깨비가 죽어있습니다.
첫 세션 때 회상에 나왔던 것처럼, 부릅뜬 눈으로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있습니다.
그리고 물귀신은 오도깨비의 등에 기대어 앉아있습니다.
에이미
그걸 보고 굉장히 동요하지만, 필사적으로 냉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앞에 앉습니다.
“오늘도 또 손님을 죽여버렸어, 엄마.”
“근데, 난 계속 이럴 것 같아.”
부셈이
“나가 니를 몇 살부터 봐왔는디.”
“거짓말을 하는디 눈까리를 그릏게 써갖고 어디 밥값할 수 있것냐?”
에이미
평정을 유지하려고 굉장히 애를 쓰고 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물귀신을 죽여버리고 싶지만, 필사적으로 그 마음을 억누릅니다.
사실 겉으로는 그런 감정이 티가 날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걸 알지 못하고, 겉으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달콤하게) 맞아. 나 밥값도 못하는 구제불능이야. 그러니까 슬슬 폐기하지그래?”
부셈이
“사람이 뒤지고 사는 문제는 말이여, 지가 결정하는 게 아니여.”
에이미
억눌러도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이성을 잃을 것 같은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냉철한 계산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이 년에게 복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여기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어 개죽음을 당할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서 도망쳐 물귀신을 죽일 방법을 찾을 것인가.
“……아, 나는 엄마의 인형이니까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거네?”
부셈이
“누가 됐든 더 높이 앉은 년이 칼 꽂는 게지.”
에이미
“그럼 엄마보다 높이 앉은 년은 누구야?"
부셈이
“글쎄…… 만주땅 어디 고원에 있을려나? 어뜬 놈이려나?”
“확실한 건 여지꺼정 아무도 나를 못 죽였단 말이지.”
에이미
어슴푸레한 와중에도 물귀신이 킬킬 웃는 게 느껴져요.
자길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아요.
너 같은 년은 날 죽일 수 없다고 비아냥대고 있는 거예요.
미노루를 싸늘하게 말합니다. “그래? 그럼 내가 엄마보다 높은 곳에 앉는 년이 될래. 지폐 다발을 백두대간처럼 쌓아서 그 위에서 엄마를 내려다 볼래.”
부셈이
“단도리 잘 혀라, 혓바닥 가는 대로 눌리지 말고.”
에이미
“혀라도 자르게?”
부셈이
“꼬리를 못 자릉께, 혀라도 잘라야 되나.”
에이미
혀를 쏙 내밀면서, “잘라.”
부셈이
“너 지금 엄니한테 명령하냐?”
에이미
“명령 아니고 제안인데?”
“조금이라도 엄마하고 눈높이가 맞을 때 날 죽이는 게 좋을걸?”
“곧 쳐다도 못볼 년이 될 거니까.”
부셈이
“야 이 썩을년아 우째 그래싸. 정신 나가부렀냐?”
에이미
“그걸 이제 알았어?”
부셈이
물귀신은 당신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당신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들어올립니다.
에이미
물귀신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머리채를 잡아올릴 때 미노루의 긴 머리가 목에 감겨가지고 목이 졸려 숨이 막히는 상황이 되면 좋겠어요.
컥컥거리게 되도록.
부셈이
그럼 물귀신은 날이 벼려진 비녀를 위협하듯 당신의 목에 갖다댑니다. 비녀의 끝이 살갗에 닿아서 붉은 피가 비치지만, 더 깊이 찌르지는 못합니다.
에이미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서 물귀신 등 뒤의 오도깨비의 모습이 보입니다. 희번득 뜬 두 눈에 살기가 어립니다.
“그래, 죽여봐.”
“빨리 죽이라고……!”
부셈이
물귀신은 핏대가 선 눈으로 당신을 마주보다가 당신의 머리를 확하고 밀칩니다.
에이미
머리가 자유로워지자 가까스로 일어납니다.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헐떡대고 있습니다.
부셈이
물귀신은 숨을 몰아쉬면서 화를 삭히다가,
“니가 원하는 것이 죽음이면 그렇겐 절대 안 될 것이다.”
“어떤 미친 년이 지 자식을 지 손으로 죽이겄냐?”
에이미
“내가 왜 당신 자식이야.”
부셈이
“누구를 탓할 것이냐.”
“조선을 탓할 것이냐, 왜놈을 탓할 것이냐, 떼놈을 탓할 것이냐?”
“시상 사는데 뭐 의미가 있어서 사는 거 같냐?
”뒤지는 데도 의미 없고 사는 데도 의미 없는 거여.”
에이미
“아주 지랄을 하네.”
부셈이
물귀신은 당신의 말에 답을 하지 않고, 당신의 곁을 지나쳐갑니다.
당신의 어깨를 팍하고 밀치면서, “썩을 년…….”
에이미
“……망할 년.” 물귀신이 자리를 떠나고 나면, 흐트러진 옷을 여미고 오도깨비에게 다가갑니다.
부셈이
물귀신 때문에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가 물귀신이 사라지자 오도깨비의 시체가 천천히 눈에 들어옵니다.
뜬 눈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오도깨비의 이마 위에 반딧불이 한 마리가 살포시 내려앉습니다.
에이미
다가가서 오도깨비에게 무릎베개를 해줍니다. 오도깨비의 몸에 감겨있는 붕대를 하나하나 풀어내고, 뜬 눈을 감긴 뒤 고개 숙여 뺨에 입을 맞춥니다.
그러고는 화면이 올라가면서 달을 비추고, 달 위로 날아가는 반딧불을 보여주면서 끝나면 좋지 않을까요?
부셈이
좋아요. 그러면 이렇게 회상씬 마무리 하겠습니다.
에이미
너무 좋았습니다.
부셈이
다시 정신을 차리면 여러분은 백팔요괴단의 추적을 따돌리고 설원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에이미
물귀신을 봤기 때문에 그 회상을 한 거군요.
부셈이
당신은 석진과 몽희에게 주변 정찰을 하고 오겠다고 말을 하고 오토바이를 세워둔 채 눈 쌓인 평야를 걷다가 과거의 일을 떠올렸습니다.
새하얀 지평선이 보이고, 저 멀리 열차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요. 더이상 추격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누
미노루가 정찰을 하는 동안 저는 몽희랑 그간의 일에 대해 얘기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저승사자는 어떻게 됐고, 저승사자는 같이 오지 않은 거냐. 넌 왜 여기에 온 거냐.
버팬
몽희는 조금 침울해진 얼굴로 “할머니는 아마…… 죽었을 거야.”
“일본 순사 놈들이 쳐들어와가지고 우리 여관이 다 불탔거든.”
하누
저승사자는 저의 은인이고 존경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부고 소식에 한숨처럼 “그렇군…….” 이라고 중얼거리고 애도하듯 고개를 숙입니다.
하지만 많이 놀라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이 어린애 혼자서 여기 와있는걸 본 시점에서 예상하기도 했을테니까요.
거기서 도망쳐온 거냐, 저승사자가 널 여기로 보낸 거냐, 그런 걸 물어봅니다.
버팬
“할머니가 만주로 가라고 했어. 만주에 가서 당신을 찾으라고 했거든.”
할머니가 준 석진의 사진을 품에서 꺼내 보여줍니다. “아저씨는 우리 할머니랑 어떻게 아는 거야?”
하누
그 사진을 추억에 잠긴 눈으로 보다가, 짧게 “네 할머니께 목숨을 빚졌다.” 라고 대답합니다.
버팬
석진의 말을 듣고 눈이 크게 떠집니다. 사진을 자랑스럽게 쳐다 보고요.
“할머니의 말은 역시 진짜였어! 우리 할머니, 만주의 전설이었던 거지?”
주변 사람들이 할머니를 괴짜, 허풍쟁이 노친네라고 불렀던 시절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갑니다. 하지만 몽희만은 할머니의 말을 믿었어요.
밤중에 이따금 할머니가 홀로 술을 마시며 이야기해주던 무용담을 여관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주의 깊게 듣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만주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보면서 “역시 우리 할머니는 멋진 사람이야, 그치?” 석진을 돌아보며 활짝 웃습니다.
하누
함께 들판을 바라보다가, 몽희를 만난 뒤로 처음으로 웃습니다. 보일 듯 말 듯 작게 미소지으며, “그래, 멋진 분이었지.” 라고 대답합니다.
에이미
정찰을 하고 돌아와보면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아 있는 게 느껴집니다.
버팬
몽희는 웃고 있지만 볼에 눈물이 묻어있을 것 같아요.
에이미
“어머어머! 왜 애를 울리고 난리야!”
사실 두 사람의 대화를 얼마만큼 들었지만, 그런 티를 내지는 않고.
“이 애, 사정은 모르겠지만 먼 길 오느라 고생한 것 같은데. 그만 괴롭히지 그래?”
석진을 타박하면서 몽희의 머리를 정돈해줍니다.
하누
몽희를 볼 땐 웃고 있었는데 끼어드는 미노루를 보자마자 인상을 쓰면서 한숨을 쉽니다.
버팬
미노루가 갑작스레 끼어들자 몽희는 잠깐 놀라지만, 다정한 손길에 곧 헤헤 웃습니다.
에이미
게다가 미노루에게선 좋은 향기가 나고 손도 부드럽습니다.
하누
원래 어린 여자애는 예쁘고 친절한 연상의 여자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버팬
맞아.
하누
한숨을 쉬면서 “임무 얘기나 하지.”
에이미
“그래, 그러고 보니까 이 아이였던 거지? 임무에서 말하던 게.”
하누
임무 내용이 애를 살려서 데려오라는 거였던가요?
부셈이
‘애와 물건을 함께 챙겨서 데려와라’요.
에이미
물건이 뭔지 확인해야겠네요.
하누
그러게요. 그러면 일단 애는 임무에서 말하던 그 애가 맞는 것 같으니, “가지고 온 물건이 있나?” 라고 물어봐요.
버팬
몽희는 머릿속으로 고민을 좀 하지만 할머니가 소개해준 사람이니까 석진을 믿어요.
“이거…… 되게 중요한 물건인데…….” 하면서 품 속에서 지도를 꺼냅니다. 지도는 둘둘 말린 낡은 두루마리고요.
에이미
지도를 보자 미노루의 실눈이 슬쩍 뜨입니다.
부셈이
두루마리를 펼치면 오래되고 꼬깃꼬깃한 흑백 사진 한 장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사진 속 장소는 식당이나 술집으로 보입니다. 금은보화가 테이블 곳곳에 쌓여있는 것을 봤을 때 사치스러운 술자리나 연회 같아보입니다.
열댓 명 정도의 사람들이 밝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고 있고, 그 중심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격식 있는 복장을 하고 있으며, 키는 작지만 위엄있는 사람이 앉아있습니다.
사진의 뒷면에는 휘갈기듯 쓴 한시가 있습니다.
에이미
“이건…… 장쭤린이잖아?”
버팬
“장쭤린?”
에이미
“그래. 몇 년 전 죽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버팬
“장쭤린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에이미
“글쎄, 한때 만주의 왕이라고 불렸던 남자라고 하면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작은 마적단의 두목으로 시작해서 천하를 호령하는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지.”
“하지만 지금은 이 세상에 없어. 관동군이 열차째로 퍼엉~ 통째로 날려버렸거든.”
하누
저는 이게 중요한 물건이라는 건 알고 있었잖아요. 이것을 찾기 위해 독립군 쪽에서도 의뢰금으로 큰 액수를 불렀고, 게다가 마적단이니 뭐니 하는 곳에서도 노려지고.
장쭤린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알고 있지만, 장쭤린의 낡은 사진 한 장을 여러 집단에서 노리다니 오리무중입니다.
“네게 이걸 전달한 사람은 누구지?”
버팬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고,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였는데…….”
사람을 설명할 때 손가락을 둥글게 모아 안경 모양을 만들거나, 머리를 하나로 묶는 시늉을 하거나 해요.
“독립군인 것 같은데 우리 할머니를 찾아와서는 이 두루마리를 맡기더라구. 이게 광야의 빛의 위치를 표시하는 보물지도라고 했어!”
하누
“보물지도라고?”
에이미
“광야의 빛?”
“만주의 왕이 숨겨둔 보물, 광야의 빛에 대한 소문은 들은 적이 있어.”
“뜬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지도가 진짜로 있었다니…….”
하누
독립군이라는게 되게 좁은 바닥이잖아요. 그래서 저도 아는 사람일 것 같아요.
“혹시 그 사람 코에 이렇게 생긴 점이 있나?” 이런 식으로 물어봐요.
버팬
“(놀라며) 그 사람 알아? 나, 그 사람을 만나야 해!”
하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화를 좀 해볼까요?
부셈이
좋아요. 일단 지금 밝혀진 정보는 이래요.
처음에 신문에 조선은행의 금고가 털렸다는 기사가 실렸죠. 값진 물건들은 다 그대로 있고 그 두루마리만 도난당했어요. 하지만 이 정보는 공개할 수가 없어서, 언론에는 은행이 털렸지만 도난당한 물건은 없다고 기사가 났어요. 그리고 범인의 행방은 묘연하다고 발표되었습니다.
그 은행 절도범이 바로 이 사람인데요. 만주 독립군으로서 임무를 받고 조선은행에서 지도를 챙겨 도주했는데,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어요. 강에 투신을 했는데 죽지 않고 기절한 채로 흘러흘러서 청계천 다리 아래까지 도달했고 몽희를 만났습니다.
다른 독립군 요원들은 이미 일본에 얼굴이 알려져있거나 밀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접선지가 노출될 위험도 있어서 노출 위험이 적은 뜻밖의 장소, 청맥여관에 지도를 잠시 맡겨두기로 한 거죠.
저승사자에게 지도를 맡기며 얘기했었죠. ‘곧 동지들이 찾으러 올 겁니다’ 라고요. 이후 본인은 일본의 추격을 피해 만주로 도망쳤고, 이틀 뒤 만주에서 동지들이 내려와 물건을 찾아갈 계획이었는데 그 전에 이미 일본군이 선수를 친 상황인 거죠.
버팬
이 여자가 할머니랑 대화하는 장면을 생각해 봤을 때 고집도 있고 예의도 바른, 완고한 독립군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부셈이
독립군 출신 중에 전투 특화는 석진이 있고, 은행을 털기도 했으니까 도둑질, 잠입, 위장, 게릴라 뭐 이런 쪽에 특화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군인이라기보다는 스파이, 밀정에 가까운 캐릭터인거죠.
하누
이름은 은미옥 어때요?
에이미
은미옥 좋네요.
부셈이
비밀스러운 첩보 활동을 주로 하기 때문에 은미옥의 본명을 알고 있는 사람도 얼마 안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은미옥이 저승사자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석진이에 대한 거니까, 석진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겠고요. 은미옥의 코드네임은 뭘까요?
에이미
고양이 비슷한 거면 좋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엄청 능수능란하게 돌아다니니까.
버팬
승냥이?
하누
승냥이 좋다.
부셈이
은미옥은 계파로 치면 의열단이 제일 어울리는 것 같아요. 모던한 느낌에, 아나키스트에 도시에서 활동하는 느낌과도 잘 어울리고요.
성격도 저승사자와의 대화장면 보면 차분하고 인텔리한 느낌이니까요.
버팬
독립군 활동을 할 때도 이 사람은 얼굴이 알려지면 안 되는 사람이라 전투에는 별로 참여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밀정을 못 하게 됐네요. 얼굴이 신문에도 실렸으니…….
부셈이
경성에서는 그렇죠. 그렇지만 일제시대 때 실제로도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밀정으로 많이 활약을 했다고 해요. 여성이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 이런 식의 편견을 이용해서.
신문에 실린 몽타주도 그냥 안경을 쓴 여인이다라는 정보 뿐이고, 그마저도 그림이지 사진은 아니니까 안경 벗고 변장하면 충분히 밀정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에이미
은미옥에 대해서는 이 정도 설정이면 될까요?
부셈이
좋아요. 다시 진행 해보죠.
에이미
몽희가 가지고 있는 것의 정체를 알게 되자 고민합니다. 만약 저게 진짜 ‘광야의 빛’의 위치를 담은 지도라면, 그 가치는 어마어마할 거예요. 적어도 독립군이 주는 푼돈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겠죠. 지도를 독립군에게 넘겨주고 의뢰비를 받기보다는 지도를 확보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웁니다.
‘하지만 지도를 빼돌리는 일에 저 샌님이 고분고분하게 협조해줄지…….’
여우처럼 가늘게 뜬 실눈으로 석진 쪽을 슬쩍 보고요.
하누
저는 당연히 임무를 완수할 생각밖에 없고요, 또 갈 곳 없는 아이를 독립군이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운이 좋으면 그쪽에서 미옥과 연락을 하거나 미옥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래서 깊게 고민을 하다가, “너, 나와 함께 독립군 기지로 가자.” 라고 합니다.
에이미
저는 놀라움과 한심함이 섞인 얼굴로 석진을 봅니다. 설마 만주의 왕의 보물지도를 앞에 두고도 저럴 줄이야. 융통성이 없어도 좀 없어야지…….
버팬
몽희는 석진의 말에 “응!!” 이라고 외치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요, 독립군이 보물을 찾고 있는 거냐고 물어요.
하누
“그래, 내가 널 찾은 이유 역시 독립군 측의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니까.”
“알겠나? 많은 곳에서 그 지도를 노리고 있다. 기지로 가는 길까지 나와 쿠라마와 동행하겠지만, 너도 모쪼록 품행을 조심하도록.”
에이미
저는 그 결정이 달갑지 않기 때문에 대화에 동참하지 않고 있어요.
“아이, 지루하다. 재미없는 얘기만 계속 하고.”
그러면서 몽희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다가요. 몽희의 목덜미에서 희끄무레하고 피로 얼룩진 뭔가가 덜렁덜렁거리는 게 보여요.
“이건 뭐야?” 하면서 쇽 꺼내서 펼쳐보니까, <현상 수배, 생사 불문 만 원>이라고 쓰여있고 몽희의 얼굴이 나와있어요.
버팬
미노루가 그러는 걸 눈을 꿈뻑꿈뻑 거리면서 보다가요.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아앗, 안 돼!” 하면서 현상금 포스터를 뺏어서 막 찢어요.
하누
하지만 이미 다 봤어요. 경악한 얼굴로 몽희를 봅니다.
부셈이
그럼 이제 석진의 눈앞에서 몽희 얼굴이 3단 클로즈업 되더니 “(나레이션 톤으로) 현상 수배, 생사 불문 만 원!”
버팬
“(다급하게) 나, 나, 나 팔 거야?! 아니지? 아니지???”
하누
“너…… 너……!”
에이미
“잠깐! 자기, 나랑 얘기 좀 하자!” 하면서 석진을 끌고갑니다.
버팬
“안 돼애애!”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규합니다.
에이미
“(상냥하게) 아저씨랑 언니랑 잠깐 얘기 좀 할게~? 어디 가면 안 돼~?”
그러고나서 석진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가서 손을 펼쳐 보여줍니다.
몽희가 포스터를 뺏어갈 때 손에 들고 있던 부분이 찢어졌는데, 남아있는 부분에 <현상 수배, 생사 불문 만 원>이라고 쓰여있어요.
“(냉정하게) 어떡할 거야?”
“설마, 이래도 약속 지킬 생각만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누
미노루의 말에 생각도 못해본 말을 들었다는 듯이 인상을 씁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의뢰를 어기고 저 아이를 팔아넘기기라도 하자는 건가?”
에이미
“하아, 저 부처님 가운데 토막, 정말 답답해 죽겠네.”
“그러지 말고 합리적으로 생각을 좀 해보라고. 우리가 평생 몸이 부서져라 일한다고 만 원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만주의 왕의 보물지도야. 저 꼬맹이가 가지고 있는 건 독립군이 쥐여주기로 한 그 푼돈과는 비교도 안 될 가치라고.”
“게다가 우리가 운좋게 그걸 팔아치운다고 해도 만 원 값을 받는건 어림도 없을걸.”
“그냥 눈 한 번 딱 감으면 만 원이 안전하게 굴러들어오는데 이걸 왜 마다해?”
하누
“그런 비열한 짓을 할 수는 없어. 의뢰는 의뢰고, 저 애는 내 은인의 손녀야!”
“지금 은인의 손녀를 돈에 팔아치우라는 건가?”
에이미
“아니, 그럼 평생 푼돈이나 벌며 살다 갈 거야?!”
하누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해서 갑부가 될 바엔 푼돈이나 벌며 살다 가는 게 낫지.”
“만 원이든 십만 원이든, 안 되는 건 안 돼.”
“저 애는 독립군으로 데려간다.”
독단적인 말로 미노루의 항변을 일축하고는, 이 대화는 여기서 끝이라는 듯 몸을 돌립니다.
“만약 불만이 있다면, 넌 이 임무에서 빠…….”
빠지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미노루는 속내를 알 수 없는 교활한 녀석이에요. 이대로 보낸다면 몽희의 정보를 어딘가 팔아넘길지도 모르죠.
“……아니야. 너도 나와 함께 간다.”
에이미
석진의 태도에 빈정이 상해있는데 뜻밖의 말에 굳은 얼굴이 풀릴락 말락 합니다.
“……아니, 갑자기 뭐람? 항상 너 같은 놈은 필요 없네 혼자서도 할 수 있네 어쩌네 하더니.”
“이제야 내 필요성을 좀 깨달았어?”
하누
“그냥 보냈다가는 네가 어떤 헛수작을 부릴지 모르잖아.”
“그 애에게 허튼 짓거리라도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라.”
에이미
‘이 새끼가 진짜…….’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실눈으로 돌아갑니다.
“아니 난, 자기 걱정해서 해준 얘기였구~ 자기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나도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잘 생각해봐, 응?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잠시나마 저런 녀석을 회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제가 바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석진을 방심시킨 뒤 지도를 빼돌려 달아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대화가 끝나자 다시 몽희에게로 돌아가요.“얘기 끝났어~”
버팬
두 사람이 돌아오면 몽희는 말꼬리에 매달려 있습니다.
원래는 말을 타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말이 말을 안 듣고 난동을 부려가지고 꼬리에 가까스로 붙어있는 상태였던 거예요.
부셈이
이 시점에서 석진의 말 설정도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누
제 말은 덩치가 크고 성질이 아주 더러운데 제가 잘 길들여놔서 제 말만은 잘 들어요. 아주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말입니다. 색깔은 밤색이에요.
부셈이
서러브레드 품종의 덩치 크고 힘센 준마일 것 같군요. 이름은 뭐예요?
하누
이름 뭐라고 할까요?
버팬
돌풍?
하누
돌풍 좋네요. 돌풍이 갑작스러운 바람이라는 뜻이잖아요? 얘 성격이랑 되게 잘 어울려요.
부셈이
좋습니다. 돌풍은 화 난 듯이 “푸르르, 푸르르~.” 하면서 빙빙 돌고 있습니다.
버팬
“으아아, 제발 멈춰!” 말꼬리에 대롱 매달린 채 눈이 핑핑 돌고 있어요.
부셈이
몽희의 목소리에 이빨로 위협적인 딱딱 소리를 내고요. 몽희를 물어뜯으려고 계속 자기 꼬리를 쫓아 돌다가 벌러덩 넘어집니다.
에이미
“어머! 안 돼, 우리 만 원!”
하누
몽희를 만 원이라고 부르는 미노루를 향해 눈을 흘기고요. 쓰러진 돌풍과 몽희에게 다가갑니다.
“도망치려 해봤자 소용없어. 돌풍은 내 말만 듣는다.”
버팬
바닥에 누워가지고 ‘꼼짝 없이 잡혀가는구나…….’
에이미
몽희를 일으켜 세워주면서, “어머, 자기 말 성격 드럽다는 얘기를 꼭 저렇게 한다니까~” 하면서 몽희를 탈탈 털어줘요. “괜찮니?”
하누
허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몽희에게 말해요. “결정은 그대로다. 넌 우리와 함께 독립군 기지로 간다.”
버팬
핏기가 빠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화색이 돌아서 미노루를 덥썩 안아요. “그럼 나 안 파는 거지?!”
하누
어이없다는 듯이 “팔긴 누굴 판다는 거야.”
“쓸 데 없는 걱정하지 마라. 정신력 낭비다.”
에이미
‘역시, 말도 참 밉게 한다니까~?’
몽희가 석진보다 저를 좋아하고 신뢰하면 지도 빼돌리기에 도움이 될테니까요. 몽희의 환심을 사기 위한 꿍꿍이를 부리고 있습니다.
버팬
꼼짝없이 팔리는 줄 알았는데, 한숨 돌렸어요. “약속 무르기 없기다!”
하누
몽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돌풍에게 가서 목을 긁어주며 달랩니다.
에이미
“정말이지 어른이 되어서 말이야, 애한테도 친절하지 못하고.”
몽희를 돌아보며 말합니다. “난 미노루라고 해. 언니라고 불러도 돼.”
하누
몽희는 미노루 성별 알고 있나요?
에이미
모르지 않을까요?
버팬
모를 것 같아요.
하누
미노루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석진은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요.
에이미
지옥의 드랙 세션…….
부셈이
언니라고 불러도 돼. 오빠라고 해도 되고. 라고 얘기를 하면 그제서야 뭔가 기시감을 느끼겠죠.
버팬
미노루의 말을 들으면 ‘언니? 오빠?’ 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 해요.
에이미
그러면 도화살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봐요.
버팬
몽희는 그제서야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뭐, 알게 뭐야.’라고 결론 내리겠죠.
그럼 몽희가 미노루를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
에이미
미노루가 좋은 것 같아요.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부셈이
‘언니’도 ‘오빠’도 애매하니까요.
버팬
그러면 “이름이 뭔데?” 하고 물어보고요, 미노루가 이름을 알려주면 “그래, 미노루!”
(일동 귀여워서 죽음)
에이미
“그래, 잘 부탁해.” 하면서 머리를 복복 쓰다듬어줍니다.
버팬
“난 몽희야. 윤몽희.”
에이미
“(되새기듯이) 몽희구나. 윤몽희…….”
눈을 가늘게 뜨면서 중얼거리다가 빙긋 웃습니다. “기억할게.”
버팬
그러면 이제 말을 달래고 있는 석진에게 달려가요.
“아저씨! 아저씨는 이름이 뭐야?”
하누
말이 진정하자 말의 옆얼굴을 툭툭 칩니다. 몽희 쪽은 보지도 않고 짧게 “임석진.” 이라고 대답해요.
부셈이
말이 몽희를 흘겨봐요.
에이미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첫인상이 안 좋았어. ‘날 만나자마자 타려고 하다니…….’ 하면서.
버팬
“임석진이구나. 난 몽희야! 윤몽희. 이 말은 이름이 뭐야?”
하누
갑자기 말이 ‘푸르르!’ 하고 투레질을 하면서 당신에게 침이 튑니다.
버팬
얼굴에 침이 튀자 “악!” 하고 소리치면서 손으로 마구 닦아요. “으……. 냄새~! 아저씨 말은 대체 성격이 왜 그래?”
하누
“돌풍이다. 함부로 자극하지 마라.” 라고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모닥불로 걸어가 앉습니다.
버팬
그럼 이제 말이랑 눈싸움을 하다가 “이렇게 지멋대로인 말은 처음 봐!” 라고 투덜거립니다. 축축한 손을 털면서 “사실 돌풍이 아니라 홍수 아냐?”
에이미
“주인 닮아서 성질이 더러워.” 옆에서 몽희의 비위를 맞춰줍니다.
버팬
“말도 그렇고, 저 아저씨도 진짜 성격 별로인 것 같애.”
부셈이
한편, 원경으로 배경에 있는 말에 초점이 잡히고 말은 계속 당신을 째려보고 있습니다.
에이미
지퍼 열면 사람 나오는 거 아냐?
부셈이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독립군 기지까지 가는 <광야에서> 판정 시작하겠습니다.
‘만주를 향해 쏴라’의 세계는 발전된 주거지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는 산과 숲, 물길과 철길,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제부터 광야를 지나는 장면의 묘사를 할 것이기 때문에 <광야에서> 판정이 필요합니다. 장면표를 보고 주사위를 굴리거나 하고싶은 장면을 직접 골라서 연출합니다.
지도의 육각형은 한 칸 당 100km입니다. 서울에서 춘천 거리 정도예요.
우리의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300km가 넘어요. 게다가 백두산맥을 끼고 있습니다.
평야와 산, 절벽들이 이어져있고 길이 가파르고 험해요. 산길인걸 감안한다면 한 칸 당 최소 4일 정도로 봐야 합니다.
즉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은 거의 12일, 약 2주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누
여기 이동할 때 한 칸 당 재산을 1점 소모해야한다고 나와있는데요. 이건 한 명 당인가요?
부셈이
아니요, 전원 합쳐서 1점입니다. 그리고 1점이라는건 기본치고요, 절벽, 늪지대 등 험난한 지형을 통과할 때는 +1, 중간에 주거지를 거치지 않고 두 칸 이상 이동한다면 +1입니다. 장면표에 따라 주거지를 거칠 수도 있고 거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만일 재산이 부족하다면 소모해야하는 재산 수치X2의 피해를 나눠받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재산을 총 4점 소모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우리에겐 재산이 2점 밖에 없어요. 그럼 2점 소모하고 2점이 남죠. 그럼 2X2=4점의 피해를 여러분이 나눠받습니다.
에이미
재산 소중한 거구나. 잘 챙겨야겠어요. 이전에 받은 타격은 회복할 수 있나요?
부셈이
광야에서는 스트레스는 회복이 되지만 타격은 회복이 안 됩니다. 타격은 주거지에 들러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만 회복할 수 있어요.
그럼 일단 첫 번째 칸은 토탈 2점입니다. 여러분이 나눠서 소모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누
일단 제가 하나 소모할게요. 이 1점이 제 전재산입니다.
에이미
그러면 제가 2점이 있으니 대신 쓸게요.
하누
하지만 저는 성격상 자기 자원을 쓰려 할 것 같아요. 제가 1점, 에이미님이 1점 쓰는 걸로 해요.
부셈이
좋아요, 그럼 이제 돌아가면서 장면 연출을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 전에 잠시 쉰다음 이어서 하겠습니다.
부셈이
복기하자면, 쿠라마의 회상씬으로 쿠라마가 어째서 물귀신을 떠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했습니다.
또한 몽희가 가진 물건이 사진이라는 것, 그리고 몽희에게 현상수배가 걸려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지도를 전해주었던 묘령의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했으며, PC들의 1차 목적지가 독립군 기지로 정해졌습니다.
이제 <광야에서> 장면을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면표가 있으니 주사위를 굴려 정하셔도 되고, 원하시는 장면을 골라 하셔도 됩니다.
에이미
주사위를 굴려볼게요. (도르륵) 5. 불화. 벌써 PC간의 갈등이 나올 차례인가?
하누
저도 굴려볼게요. (도르륵) 3. 광야.
부셈이
악천후, 마적단, 소수 민족, 동식물 등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 난이도는 5고요. 자연재해, 악천후, 사고, 짐승, 소중대, 사냥. 습격 등 카테고리가 다양합니다.
세부 카테고리가 3가지 있잖아요. 다이스를 굴려서 정해주세요.
하누
그럼 일단 한 번 굴려보자. 자연재해네요. 얘네가 지금 만날 자연재해가 뭐가 있을까요?
부셈이
자연재해는 폭우, 산사태……. 아니면 겨울이니까 폭설도 있겠네요.
버팬
눈이 내릴만한 계절인가요?
부셈이
지금은 2월 초순입니다. 만주는 겨울이 길기 때문에 아직 눈이 쌓여있는 와중에 풀밭도 보이고, 일찍 잠에서 깬 짐승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할 즈음일 것 같아요.
하누
그랬는데 별안간 폭설이 내리는 거죠.
에이미
그래서 동굴 같은 데에서 추위를 피하며 불 피워놓고 도란도란 얘기를 하다가 싸움이 나겠네요.
에이미
몽희는 경성에서 왔으니 겨울 채비를 못하고 왔을 것 같아요.
하누
정말 급하게 나왔으니 맨몸이나 다름 없겠네요.
부셈이
일단 버팬님도 장면표를 굴려주시죠.
버팬
나와랏! (도르륵) 2. 질병.
에이미
폭설로 고립된 상태에서 질병에 걸려가지고 싸우는 거 어때요?
부셈이
폭설 때문에 감기에 걸릴 수 있겠네요.
하누
폭설 때문에 몽희가 감기에 걸려서 미노루와 석진이 싸우는 거야.
에이미
그래서 “아니, 애를 어떻게 한 거야”……. (일동 폭소)
부셈이
이거 너무 양육자 간의 다툼 아니에요?
하누
평소에 몽희가 있으면 화나는 일이 생겨도 ‘에이씨 내가 참자…….’ 할 수 있는데 몽희가 없으니까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폭발하는 거죠.
에이미
아, 너무 재밌다. 빨리 해봐요.
부셈이
그렇다면 폭설 장면이 첫 번째겠네요. 폭설로 인한 장면을 연출해볼까요?
하누
독립군 기지로 가기 위해 백두산맥을 통과하고 있었잖아요. 산을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적당히 내리고 말겠지, 했는데 점점 눈이 거세지더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거죠.
눈이 정강이, 무릎까지 푹푹 쌓이고. ‘우리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셈이
‘적당히 내리고 말겠지’하는 건 석진일 것 같네요. 신체능력이 가장 좋으니까요.
에이미
그래서 미노루와 몽희는 쉬었다 가자고 하는데도 석진은 이 정도면 괜찮다고 강행하고, 폭설이 내리면서 삐걱삐걱 하는 거죠.
완전 좋네요. 각자의 성격도 보이고.
하누
맞아요. 석진은 권위적인 성격이니까요.
에이미
할아버지를 닮은 거죠. 본인은 부정하고 싶어도 자기 안에 할아버지의 가부장성이 남아 있는 거야.
하누
게다가 석진은 소통이 잘 안 돼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부셈이
좋아요. 세 사람은 독립군 기지로 목적지를 정한 뒤, 야트막한 산길을 지나고 있습니다.
몽희는 지금 교통수단이 따로 없죠?
버팬
네, 아마 미노루 오토바이의 사이드카에 타고 있겠죠.
가는 도중 미노루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였을 것 같아요.
“나, 장쭤린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더 듣고 싶어.”
에이미
저는 몽희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하든 다정한 태도로 대답해줬을 것 같아요.
“장쭤린은 말이야, 봉천이라는 곳의 빈민으로 태어나 봉천군벌을 손에 넣은 사람이지.”
“그에게는 그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는 열 명의 부하가 있었는데, 그들을 ‘흑룡십걸’이라고 불렀어.”
버팬
저는 그 이야기를 눈을 빛내며 매우 흥미롭게 듣습니다.
“봉천에서 태어나 봉천군벌을 손에 넣었다면, 봉천이라는 곳은 장쭤린에게 아주 중요한 곳이겠다.”
“만약에 장쭤린이 보물을 숨겼다면 그 봉천이라는 곳에 무언가 단서가 있을 수도 있겠네, 그치?”
에이미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우리 몽희는 보물찾기에 관심이 많은가보다.”
버팬
“헤헤, 응! 보물찾기라니, 꼭 책 속에 나오는 모험 같잖아.”
에이미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가고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하는 거죠.
말을 타고 앞장서서 저벅저벅 가고 있는 석진을 “어이 어이, 잠깐~!”하면서 불러 세웁니다.
“오늘 안에 산을 못 넘겠는데? 지금 내려가서 잘 곳을 찾는 게 낫지 않겠어?”
하누
저는 독립군으로 활동하면서 험난한 지형과 기후를 많이 겪었거든요. 그래서 이 정도 날씨는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구름을 보니 눈이 많이 내리진 않을 거야.”
“해가 지기 전에 산맥을 빠르게 통과하는 편이 나아.”
부셈이
그러고보니 몽희는 겨울 채비가 제대로 안 됐잖아요.
하누
둘이 옷을 입혀주긴 했을 것 같거든요. 석진도 자기 코트를 빌려줬을 것 같아요.
그래도 역시 경성에서 살던 몽희는 추울 수 있겠죠. 석진이랑 미노루는 만주 기후에 익숙하겠지만요.
에이미
그래서 만주 기후에 익숙한 사람 기준으로 옷을 입혀줬는데 몽희에겐 그 정도로 안 됐던 거죠.
부셈이
못해도 영하 20도는 될 거예요. (일동 경악)
강원도도 이 계절이면 영하 15~20도 정도 되는데, 만주는 강원도보다 더 북쪽이니까 더 춥겠죠.
에이미
몽희는 진짜 쌍욕만 나오겠다. 나 같으면 욕 했어. 게다가 가지도 않고 멈춰서서 계속 실랑이 하고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가면 안 된대두~! 오토바이 미끄러진다니까?”
부셈이
눈발은 점점 굵어지다가 이제 거의 폭설이 되어 내립니다.
그리고 둘이 다투는 십여 분 동안 눈은 무릎 아래까지 빠르게 차오르고요.
에이미
“자기 정말 미쳤어? 우리 빨리 내려가야 한다고!”
버팬
몽희는 코트를 둘러싼 채 사이드카에 앉아있는데요. 이가 계속 딱딱딱 부딪쳐서 말이 제대로 안 나와요.
부셈이
구체적인 기온이 정해지니까 RP가 생생해졌어 ㅋㅋㅋ
버팬
그러면 미노루가 오토바이에서 내려서 석진이랑 다투고 있는 동안에요.
눈 쌓인 경사로잖아요. 오토바이가 쭉 미끄러지면 어때요?
부셈이
오토바이가 미끄러지는 게 아니고 눈이 많이 쌓이자 지반이 내려앉아서 오토바이가 굴러도 되지 않을까요?
에이미
오, 좋아요. 그럼 큰 소리를 듣고 그쪽을 돌아보면 오토바이도 없어, 몽희도 없어…….
“안 돼, 만 원!”
부셈이
방금 전까지 오토바이가 있었던 자리는 눈으로 뒤덮여 있고요. 오토바이는 산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 같습니다.
에이미
그걸 보자마자 고개를 쳐들고 석진에게 일본어로 욕설을 쏟아내고요.
하누
석진도 잔뜩 굳은 얼굴로 오토바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일단 몽희를 찾는 게 우선이야.”
부셈이
하지만 이렇게 폭설이 쏟아진다면 몽희를 찾기 쉽지 않겠죠.
에이미
눈 피할 곳도 찾아야 하는데…….
하누
“몽희는 내가 찾겠다.”
“넌 그동안 대피할 곳을 찾아봐.”
에이미
눈물을 찔찔 흘리면서, “너…… 너…… 만 원 못 찾아오면 가만 안 둬!” 라고 소리친 뒤 눈을 피할만한 피난처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부셈이
그럼 미노루는 피난처를 찾는 기회 만들기 판정을 하고요.
석진은 몽희를 구하는 극복 판정을 하고, 몽희는 두 사람이 먼저 판정한 뒤 판정할지 안할지 정합시다.
각 판정은 전부 난이도 5입니다.
에이미
피난처 찾기에 어울리는 기능이 하나도 없어요. 저는 운전, 속임수, 이런 인간 사회에서 쓸만한 기능 뿐이라서…….
일단 주의력으로 해볼게요. +1입니다. 아 제발~!
주사위값 –1……. 결괏값 0이네요. 5 격차 실패…….
부셈이
기회 만들기에 실패하면 둘 중 하나예요. 복선이 생기지 않거나, 즉 피난처를 찾지 못했거나. 혹은 복선은 생기지만 공짜 격발은 얻지 못하고, 적이 공짜 격발을 가져가서 불리한 상황이 되거나.
에이미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공짜 격발을 못 얻는 걸로 할게요.
부셈이
산을 쥐잡듯이 뒤지지만 눈이 미친 듯이 내리고 있어서 그럴듯한 피난처를 찾기에 쉽지 않아요.
그때, 거대한 나무의 뿌리 아래쪽에 패여있는 굴 같은 것이 보입니다. 산짐승이 썼을만한 그런 굴이에요.
에이미
안쪽에 소지품을 던져서 곰 같은게 있진 않은지 확인하고요. 아무 동물도 없는 것 같으면 그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부싯돌로 불을 피워서 모닥불을 만들어요. 젖은 장작으로 연기를 피워서 석진에게 신호를 보낼게요.
하누
그러는 동안, 석진은 눈보라를 헤치면서 필사적으로 몽희를 찾기 시작합니다. “몽희! 몽희!” 하고 절박하게 외치면서요.
다른 사람도 아닌 생명의 은인의 손녀인데, 만약 여기서 몽희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저승에서 저승사자를 볼 낯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하얀 눈앞으로 멍석에 둘둘 말린 두 개의 앙상한 발이 떠오릅니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세차게 젓고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합니다.
에이미
이건 체력이죠?
하누
네. 무식하게 그냥 돌아다니면서 겁나 열심히 뒤집니다. 주사위값 +1. 체력은 +3이니까 결과값 +4. 탄환을 쓸까…….
부셈이
재산을 쓰는 방법도 있고요. 재산 남아 있나요?
하누
오는 길에 재산을 다 써서요.
그러면 ‘신념은 값싸고 죽음은 비싸게 팔리는 시대’를 쓸게요. 비록 신념이 값싼 시대라지만 은인의 손녀만큼은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요.
스승님 때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 싫어요. 비록 10년 동안 많은 신념을 포기했다곤 해도 이게 석진의 최후의 보루 같은 거죠.
부셈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다치고 갈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몽희를 찾는 거군요. 이 탄환은 결과값에 +2 하는 거죠?
하누
네.
부셈이
최종적으로 결과값 +6, +1 격차 성공입니다.
몽희를 구하는 데에는 성공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생각엔, 수색하는 동안 눈이 엄청 많이 내려서 그날 몽희와 함께 고립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서 폭설이 그치고 눈이 좀 녹을 때까지, 한 이틀 정도는 미노루와 떨어져 있을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좋겠죠.
그럼 이제, 체력으로 찾았으니 석진은 거의 탈진하기 직전이 되고 시간도 반나절은 걸렸을 것 같아요.
그러는 동안 몽희는 어떻게 하고 있었나요?
버팬
어떻게 할까? 저도 고민이네요. 영하 20도의 기온에서 몽희가 어떻게 할지…….
부셈이
그러면 오토바이가 굴러떨어지기 직전으로 돌아가서.
몽희가 호달달 떨면서 사이드카에 앉아있는데, 눈발이 점점 거세져서 저쪽에서 싸우던 소리도 이제 잘 안 들려요.
그러던 그때, 미노루가 눈보라를 뚫고 들릴 정도로 째지는 소리로 “자기 미쳤어! 우리 빨리 내려가야 한다고!”라고 소리치자 벼락맞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고요, 정신이 든 몽희의 눈엔 보이는 거죠. 오토바이 주변의 바닥이 쩍 하고 갈라지면서 쿠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지반이 내려앉기 시작합니다.
버팬
몽희는 그걸 보고 급하게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려 옆으로 몸을 던져요. 그렇게 해서 나뭇가지를 잡았다든가 하고 싶은데 어떨까요?
부셈이
강에 빠지는 건 어때요?
하누
죽는 거 아니에요?
에이미
하긴, 그 정돈 되어야 심하게 앓겠네요.
부셈이
본인도 젖은 옷을 안 말리면 저체온증으로 죽는다는 걸 아니까 어디 동굴 같은 데서 불을 피우고 있는 거죠.
좋아요, 그러면 우르릉 하면서 지반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눈더미와 함께 오토바이도 떨어집니다. 그리고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본 몽희는 고민할 것도 없이 몸을 던져 나뭇가지를 잡았는데, 나뭇가지가 몽희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고 몽희는 언덕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져요.
바닥을 어떻게든 붙잡아보려 애쓰지만 눈과 굴러가는 돌 말곤 잡을게 없는 상황에서 손톱과 손이 엉망이 될 뿐입니다.
몽희는 그렇게 강 가장자리까지 굴러떨어지는데, 영하 20도니까 강이 얼어있어요. 몸을 추스르고 일어서려는 순간 쩌적 하고 얼음이 갈라집니다.
강 가장자리 얕은 곳이라 가까스로 물에 휩쓸리지 않고 버티고 설 수 있었지만 하반신은 물에 푹 젖었어요.
버팬
가까스로 강 밖으로 빠져나와 눈 위에 벌렁 드러누워요. 얼음물에 빠진데다가 주변은 눈이 쌓여있으니 너무 추울 것 같아요.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벌벌벌 떨리고 팔다리가 다 곱아 움직여지지 않는 채로 하늘을 봅니다.
이대로 쉬면 100% 얼어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엉금엉금 눈을 피할 곳을 찾기 시작합니다.
부셈이
그럼 이제 인간이 영하 20도 추위에 물에 젖은 상태로 버틸 수 있는 시간! 단 10분 동안! 눈을 피할 곳을 찾고 불을 피워야 해요!
제안이 있어요. 재산 1점을 써서, 지금 갖고있는 귀곡성의 약실을 찍어서 화약으로 불을 피우는 건 어떨까요? 몽희는 모험 소설 같은걸 많이 읽었으니까.
버팬
그거 좋은데요. 성냥팔이 소녀가 할머니한테 물려받은 성냥을 하나 피우듯이 귀곡성 약실을 딱 깨는 거죠.
부셈이
좋아요. 그럼 재산 1점 써주시고요.
한편 석진은, 온갖 곳을 다 뒤져도 몽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산 비탈 쯤에는 쌓인 눈이 당신의 명치 정도 높이에요.
몽희가 살아있으리라는 희망이 점점 사라져가는 가운데, 강가에 미노루의 바이크가 엎어져있는 것이 보입니다.
하누
이쪽도 아무리 만주 추위에 익숙하다지만 옷 안쪽은 땀으로 푹 젖고, 정신이 혼미하고 눈앞이 흐릿한데도 정신력으로 강제로 정신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 미노루의 바이크를 보고 거의 눈이 뒤집혀서 그쪽으로 달려가요. 바이크가 있는 곳까지 가면 연기나 불빛 같은 게 보이지 않을까요?
부셈이
산은 해가 빨리 지니까 슬슬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을 것 같아요. 주변이 어둑어둑하니 불빛이 더욱 명확하게 보입니다. 강변 어딘가에서 불빛이 빛나고 있어요.
하누
안 그래도 눈은 이렇게 많이 내렸고 몽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해까지 져가니 거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있었는데요, 찾는 걸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겠어요.
이러다 얼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찾는 일만은 포기하지 못하는 거죠.
그러던 때 기적처럼 미노루의 바이크와 불빛을 발견한 거예요. 그게 꺼져가던 희망의 불이 다시 피어오른 것처럼 느껴지고, 그쪽을 향해 막 달려갑니다.
부셈이
그러고보니 석진은 돌풍을 데리고 있나요?
하누
제가 알기로는 눈 내리는 데에서는 말이 이동력이 안 좋아요.
에이미
그러면 돌풍은 저한테 맡겨둔 걸로 하고, 전 땅굴에서 돌풍에게 발길질 당하고 있습니다. (일동 폭소)
“아 곧 네 주인 온다고! 아아악 왜이래!” 꼬리로 싸대기 맞고 뒷발길질로도 쳐맞아 쓰러지는 걸 반복하고 있습니다.
부셈이
어우, 이거 내가 봉천 데리고 가면 육포로 만들어버릴라.
에이미
그러니까요. 아주 쫄깃쫄깃 맛있겠구만!
부셈이
옛날 슬레이어즈식 연출이면 말이랑 미노루가 이마 맞대고 눈에서 안광이 치지지직 나와서 싸우고 있고. 말과 영혼의 배틀 중.
하누
저는 이렇게 폭설이 내리고 급경사가 진 지형에서는 말을 타고 찾는 것보다 발로 뛰어 찾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불빛이 나오는 동굴을 발견해서 그쪽으로 다가갑니다.
목도리로 눈 아래까지 둘둘 감고 있지만 그래도 얼어 죽을만큼 추워요.
눈 아래부터 발끝까지 옷을 어두운 색으로 입고 있으니까 처음에 몽희는 석진을 보지 못했는데, 점점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데 두 눈만 형형하게 보이는거죠.
부셈이
몽희는 가까스로 동굴을 찾아 들어왔지만 밖에는 눈이 한참 쌓이고 있고. 혼자 조난당했는데 어쩌지 하고 있는데 모닥불이 훅 하고 피어오르자 밖에 검은 그림자가 보이는 거죠.
버팬
그렇죠, 몽희는 신발과 젖은 옷을 모닥불 옆에 두고 말리고 있고요. 새빨개진 얼굴로 언 몸을 녹이고 있어요.
그러고 있는데 어디선가 뿌드득, 뿌드득, 뿌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딱 들어요.
그러자 굴 입구에서 키가 6척은 될 것 같은 인영이 보여요. 두 눈만 형형하게 빛나고 있고 뒤로는 뭔가가 펄럭펄럭하고 날리고 있어요.
그걸 보고 몽희는 옛날에 읽었던 <설인의 위협>이라는 모험 소설이 떠오릅니다.
부셈이
(나레이션 톤으로) 그 순간 몽희의 머릿속에는 <설인의 위협>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옛날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를 잡아갔다고 하는 전설의 설인. 그 설인이 하바롭스크를 지나 백두산맥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전설을 몽희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었다!
버팬
몽희의 등뒤에 싸늘한 땀이 흐르고요. 몽희는 ‘이제 잡아먹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다가 모닥불 속 장작을 횃불처럼 잡아들곤 천천히 일어섭니다.
하누
얘도 진짜 범인이 아니야. 얘도 진짜 제정신 아니야. 배짱 국가대표 할 만 하다.
버팬
횃불을 들고 경계 태세를 갖추고요. 눈앞의 위협에 정신을 집중한 채로 한 손에는 횃불, 한 손에는 귀곡성을 쥔 채로 덜덜덜 떨면서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누
오다가 석진이 어디 다쳤으면 어떨까요? 팔이 부러졌다든가.
부셈이
산을 빠르게 내려왔으니 다리를 다치는 게 제일 타당한 것 같아요. 무릎 부상 어때요?
하누
그러면 한 쪽 다리를 질질 끄느라고 걷는 소리가 터벅, 지이이익…… 터벅, 지이이익…… 터벅, 지이이익…… 하겠네요.
버팬
발걸음 소리를 듣고 몽희는 “꼼짝 마! 이…… 이…… 괴물!”이라고 소리칠 것 같아요.
하누
몽희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제 모닥불과 횃불의 빛을 받아서 상대방의 정체가 드러날 것 같아요.
어둠 속에서 안광만 보였던 인영이 드러나는데, 어깨와 머리 위로 눈이 한가득 쌓여있고 한쪽 다리를 질질 끌고 있는 석진인 거죠.
석진은 간신히 버티고 서서 동굴 입구에서 당신의 모습을 봅니다.
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보다,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정말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제서야 여기까지 올 때까지 석진을 괴롭혔던 스승님의 앙상한 발의 환영이 사라지고요.
“꼬맹이……. 무사했구나.” 라고 말하면서 당신에게 걸어가려 하는데 몸이 천천히 무너집니다.
버팬
상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석진의 얼굴이 보이자 “아저씨!” 하고 외쳐요. 아저씨가 날 구하러 와줬구나, 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어 얼굴에 화색이 도는데요.
눈앞에서 석진이 쓰러지자 깜짝 놀라서 손에 든 걸 내던지고 다다닥 달려가 쓰러지는 석진이를 붙잡습니다.
그럼 석진의 무게에 짓눌려서 비틀거리는데 간신히 버티고요, 석진을 이끌고 모닥불가로 데려갑니다.
부셈이
그러는 동안에도 동굴 밖에는 미친 듯이 폭설이 내리고 있습니다.
버팬
“아저씨, 다쳤어?” 라고 물으며 석진의 불편해보이는 다리를 살펴봅니다. 눈으로 보기에 부상이 있나요?
하누
바지를 걷으면 피는 안 나지만 무릎을 중심으로 다리 전체가 붉고 푸르게 부어있을 것 같아요.
석진은 기절한 건 아니고 녹초가 된 건데 의식은 있어요. 당신이 잘 부축을 해서 모닥불가에 앉혀두면 그래도 기운을 조금 차립니다.
양반다리를 한 채로 그냥 조용히 앉아있어요. 원래 붙임성이 없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몽희에게 면목이 너무 없어서요. 미안한데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하겠는 거죠.
한참 주저하다가, “여기는 어떻게 왔나?”라고 물어봐요. “여기서 얼마나 있었지?” 뭐 그런 거.
버팬
몽희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석진의 다리와 얼굴을 번갈아 쳐다봐요. 나를 찾다가 다쳤나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석진이 물으면 “강에 빠졌다가 겨우 나오니까 동굴이 있어서 들어왔어. 얼마나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미노루는 어딨어?”
하누
“돌풍이랑 함께 안전한 곳에 피해 있으라 했다.”
한숨을 푹 쉬고는, 가방을 뒤져서 육포를 꺼내 당신에게 줍니다.
버팬
몽희는 내내 쫄쫄 굶었기 때문에 화색을 보이고요. 육포를 우물우물 먹는데 오늘 고생을 너무 해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요.
모닥불 앞에서 발을 꼼지락거리는데요, 두 발은 생채기투성이에 피가 흐르다 군데군데 딱지가 져 있고요. 옷은 원래 석진이 입혀준 코트 같은게 있었지만 다 젖어서 말리는 중이라 가볍게 입고 있어요. 허름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앉아서 언 손을 녹여가며 육포를 먹습니다.
하지만 씩씩합니다. 아프다는 얘기 한 번 하지 않아요.
하누
그 모습에 몽희가 했던 고생들이 전해져오는 것 같아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요.
한참을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다가, “미안하다.”라고 말해요.
버팬
“응? 미안해? 뭐가?”
하누
그 말에 놀라서 몽희를 봅니다. 몽희가 저한테 엄청나게 화나있을 줄 알았거든요.
“네가 이렇게 된 건…… 내가 산행을 무리하게 강행한 탓이다.”
책임감이 느껴지는 어조로 말합니다.
버팬
“으음…….” 하고 뭐라 말할지 고민하다가요, “하지만 산을 넘는건 우리가 원래 해야했던 일이고, 눈이 갑자기 내린건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아저씨는 생각이 참 많구나?”
하누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몇 년 전의 일이 떠오릅니다.
죽음을 각오한 순간 저승사자가 자신을 구해주었고, 자신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저승사자가 그렇게 말했죠. ‘독립군들은 생각이 너무 많다’고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몽희의 앳된 얼굴에 저승사자의 모습이 겹쳐져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가, “네가…… 저승사자의 손녀가 맞긴 맞구나.”라고 중얼거리곤 복잡한 표정을 짓습니다.
부셈이
밤이 깊었고 미노루를 찾으러 가긴 어렵게 되었으니, 두 사람 모두 모닥불 곁에 누워 잘 준비를 하겠네요.
하누
몽희에게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고, 눈이 그치면 쿠라마와 합류하자.”라고 얘기를 할 것 같아요.
버팬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미노루는 괜찮을까?”
하누
전혀 걱정 안 하는 듯한 태도로, “그 녀석 걱정은 하지 마. 목숨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질긴 놈이니까.”
“그 녀석 말로는, 구미호는 목숨이 아홉 개라지.”
버팬
“만주에는 참 신기한 사람이 많은 것 같아.”
하누
“조선과는 비교도 안 되지.”
버팬
그런 얘기를 하면서 몽희와 석진이 모닥불 곁에 누워있고요. 몽희는 석진이 입고 온 코트를 덮고 있을 것 같네요.
둘이 나란히 누워서 똑, 똑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동굴 천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부셈이
그 아래에는 수통을 놓고 물을 받고 있을 것 같네요.
버팬
몽희는 석진을 보면서 ‘이게 모험가의 지혜……!’라고 생각하며 눈을 반짝입니다.
에이미
현상금 사냥꾼을 모험가라고 하는 게 귀여워.
버팬
자려고 누웠지만 여전히 말똥말똥한 눈을 뜨고 천장을 보고 있다가, 몽희가 물어요.
“조선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신기한 놈이 많다고 했잖아. 우리 할머니도 그 중 하나야?”
하누
자려고 모자로 얼굴을 덮고 있다가, 모자를 슬쩍 내립니다.
“네 할머니는…… 내가 만주에서 본 사람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별난 사람이었지.”
버팬
몽희의 몸이 석진 쪽으로 확 돌아갑니다.
“우리 할머니가? 어떤 거? 어떤 게 별났는데?”
하누
아까 그 대답을 하고 자려고 모자로 얼굴을 다시 덮었는데, 완전히 치웁니다.
“분명 자라고 했을텐데, 잘 생각이라곤 하나도 없군.”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워낙 말주변이 없는 성격이니까요
그러다가 “흑산동 고지전에서 있었던 일인데…….”라고 이야기를 시작해요. 수십 명의 총검을 든 일본군에게 둘러싸인 순간. 이젠 정말 죽는구나 싶었던 그때, 일본군의 머리를 관통했던 탄환……. 저승사자에게 목숨을 구제받았던 잊을 수 없는 첫만남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 일 때문에 네 할머니는 만주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경성으로 귀향하시게 된 거다.”
버팬
몽희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그 모험담을 듣고요.
“우리 할머니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역시!”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를 허풍쟁이라고 불러가지고 내가 얼마나 화났는지 몰라.”
“하지만 난! 알고있었지. 할머니가 진짜 만주의 전설이라는걸!”
“아저씨도 되게 대단한 사람이다! 그 많은 일본군들이랑 싸운거야?”
하누
석진은 내내 무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저승사자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약간 기분이 좋아보였는데요. 화제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니까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아주바이, 저승사자…….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은 자신이 도달한 지금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요.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어.” 라고 하면서 다시 모자로 얼굴을 덮어요.
“너도 자라. 체력을 비축해야 쿠라마를 찾을거 아니냐.”
버팬
몽희는 그 모자를 덥썩 잡아서 내려요.
“아 왜~! 얘기 더 해줘!”
하누
순간 당황하다가 일단 모자를 확 뺏어요. 힘 차이가 엄청나니까 몽희는 맥없이 모자를 놓칩니다.
“너 같은 꼬맹이가 들어봤자 재밌을 거 하나 없는 얘기다.”
“잊은 모양인데, 너와 나도 며칠만 지나면 다시 볼 일 없는 사이다.”
“금방 독립군 기지에 도착할 거고, 널 거기 맡겨두면 내 임무는 끝이야.”
“우리가 친구 같은 거 하려고 만난 사이는 아니지 않나.”
“어차피 며칠 뒤 헤어질 사람에게 그렇게 구구절절 얘기하는 취미 없어.”
신경질적으로 따따따 말한 뒤에 뒤늦게 얼굴에 약간의 죄책감이 스쳐지나가고요. 그런 자신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 다시 누워 모자를 얼굴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한테나 경계심 없이 구는 거, 만주에서는 좋은 일 아니야.”
“그런 녀석들이 제일 먼저 뒤통수 맞고 나가떨어진다, 꼬맹아.”
“빨리 자. 내일 쿠라마 찾으러 갈 생각 있으면.”
버팬
석진 옆에 앉은 채 불퉁한 표정으로 모자를 노려보다가요,
“헤어지더라도 친구는 친구야! 왜 다시 볼 일이 없어?”
“떨어져 있더라도 마음이 연결되어 있으면 친구라고. 아저씨는 어른이면서 그것도 몰라?”
얼굴을 옆으로 팽 돌리고 입이 3 모양이 되어서는 종알거립니다.
“할머니랑 아저씨도 그랬잖아. 할머니랑 아저씨가 만난 시간은 짧았고 헤어진 시간은 훨씬 길었지만, 그래도 계속 친구였잖아.”
“할머니는 아저씨를 친구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할머니가 날 여기로 보낸 거야.”
하누
몽희의 말에 석진은 마음이 엄청 복잡해져요. 초라한 자신과,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과 수치심 때문에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하고요.
그래서 대답은 하지 않고 깊게 한숨을 쉽니다. 너무 마음이 복잡해서 오늘은 잠을 못 잘 것 같아요.
버팬
석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몽희는 벌떡 일어나 석진을 째려봐요. 하지만 석진은 계속 모자를 덮은 채 무시하고 있었겠죠.
그러면 계속 석진을 흘겨보다가 삐진 얼굴로 자기 자리로 갑니다. 그리고는 석진에게 등을 돌리고 누워서, “아저씨 진짜 성격이……. 우리 할머니는…….”하고 쭝얼쭝얼쭝얼거려요.
하누
그렇게 중얼중얼 하니까 이쪽도 시끄럽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점점 어느 순간부터 조용한 거야. 그래서 자나 보다 했는데 보니까 열이 펄펄 끓고 있는 거 어때요?
부셈이
오, 좋다.
하누
좋아요, 그러면……. 한참을 쭝얼거리던 몽희가 조용해지자 드디어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요.
어차피 잠이 안 왔으니까 소지품 손질이라도 해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어나보니까 뭔가 애 호흡 같은게 좀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뭐지?’하고 다가가서 보니, 얘가 얼굴이 새빨갛고 열이 펄펄 끓고 있어요.
깜짝 놀라서 “꼬맹이! 꼬맹이! 괜찮나?”하면서 몽희를 흔들어 깨워보려고 합니다.
버팬
몽희는 입김이 하얗게 올라올 정도로 숨이 뜨겁고요. 계속 불러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못 떠요.
하누
몽희를 최대한 모닥불 쪽에 가까이 데려다 놓고 간호를 하기 시작합니다.
부셈이
그러는 동안 해가 뜨고요, 아침이 되자 눈을 그칩니다.
하룻밤 동안 간호를 했지만 몽희의 열이 내릴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아요.
약을 찾아 먹이거나, 제대로 된 마을에 데려가 의원에게 보이거나 해야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노루와도 헤어진지 오래되었으니 이제 슬슬 합류해야겠죠.
에이미
눈이 그치고 하늘이 갰잖아요.
터오르는 동을 돌풍과 함께 앉아 보면서 담배를 피우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이니, 우리 둘 다.” 그러는데 둘 다 얼굴은 밤탱이 되어있고 돌풍이 갈기 뜯겨있고 그런 거죠.
버팬
미노루는 담배 피우고있고, 돌풍은 풀 같은거 질겅질겅 씹고 있고.
에이미
“슬슬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싶어…….”하다가 한숨 푹 쉬곤 “가자. 네 주인 찾으러.”
부셈이
그러면 돌풍은 “푸르르~.” 하더니 따각따각따각 하고 발굽소리 내면서 산 아래로 내려갈 것 같네요.
함께 산길을 내려가다보면, 해도 떴으니까 미노루가 쓰러진 오토바이를 발견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오토바이를 발견하면 자연스럽게 저쪽이 있는 동굴도 발견하겠죠. 연기가 올라오고 있을테니까요.
에이미
그렇게 찾아가서 동굴 안을 보면 몽희와 석진이 보이는 거죠.
“뭐야, 둘 다 살아 있었어?” 하면서 들어오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만 원은 어떻게 된 거야?”
하누
당신을 보고 한숨을 삼킵니다.
저는 몽희 머리맡에 앉아있고요, 몽희 머리 위에는 눈으로 차게 식힌 헝겊이 얹어져 있어요. 뭐라 설명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입니다.
에이미
그럼 가서 몽희의 상태를 살피고요. 엄청 심각한 상태라는걸 알고서 얼굴이 사색이 돼요.
상황이 급하니 잘잘못을 따질 생각도 안 들어요.
바로 옆에 앉아가지고, 기모노 소매를 걷어붙인 다음에 석진에게 당장 나가서 이러저러하게 생긴 약초를 뜯어오라고 지시합니다.
하누
아, 확실히 미노루는 독에 대해서 잘 아니까 약에 대해서도 알겠군요.
몽희의 열이 계속 오르는데 방도가 없어서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미노루가 지시를 내리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됩니다.
“내가 찾아오겠다.”라고 하면서 다리를 질질 끌면서 동굴 밖으로 나갑니다.
에이미
석진이 약초를 찾는 동안 몽희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합니다.
부셈이
그러면 약초 찾는 걸 판정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약초를 빨리 찾아서 치유를 하는게 정해진 수순이니까요. 석진이 아마 돌풍을 타고 나갔겠죠?
미노루의 눈에 석진이 밖에서 돌풍 타는 게 보이는데, 자기한테는 그 지랄발광을 해가지고 여기로 올때조차도 고삐만 겨우 잡고 끌고 다녔던 놈이 얌전히 석진을 태우고 달려나갑니다. (일동 폭소)
그러고 나가면, 산비탈 아래로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고요. 거기서 미노루가 말해준 약초들을 발견해 뜯고있는데, 갑자기 돌풍이 푸르륵, 푸르륵하면서 불안한 소리를 냅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싶어서 말을 달래는데 저 지평선 끝 쪽으로 백팔요괴단과 관동군이 진을 이뤄 이동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분이 가던 방향, 그러니까 독립군 기지가 있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일동 경악)
버팬
와, 제시간에 도착했으면 우리까지 타진됐겠는데?
에이미
그러네. 오히려 늦어서 다행이네요.
하누
그걸 보고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었다가 얼른 돌풍에 타가지고 돌아갑니다.
미노루에게 약초를 준 다음에 “관동군과 마적단이 우리 목적지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 빨리 가봐야 해.”
부셈이
쿠라마 입장에서는 어때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빨리 거기로 가야된다는 말은, 독립군을 구하러 가겠다는 얘기잖아요.
하지만 쿠라마 입장에서는 물괴신과 백팔요괴단, 일본군이 동맹을 맺었다고 하면 규모에서 상대가 안 된다는 생각이 들겠죠.
에이미
“아니, 애가 죽어가는데 지금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니잖아.”
“얘 오늘 고비야. 못 넘기면 죽어.”
하누
미노루의 말에 입술을 깨뭅니다.
관동군과 백팔요괴단이 향하고 있는 독립군 기지에는 김완, 제 옛 친구가 있어요. 그리고 옛 전우들도 있죠.
‘꼬맹이에겐 쿠라마가 있지만 기지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역시 혼자서라도…….’라고 생각하면서 주먹을 꾸욱 쥡니다. 눈에 어떤 결심의 기색이 어리는게 미노루의 눈에도 보일 것 같아요.
에이미
“그거 알아?”
“어제 내가 내려가자고 할 때 내려가기만 했어도 그 잘난 은인의 손녀 목숨이 간당간당해지는 일은 없었겠지.”
하누
미노루의 말에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요. 확실히 몽희가 이렇게 된건 완전히 자기 탓이죠. 엄청나게 갈등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미노루를 완전히 믿고 몽희를 맡길 수가 없어요. 미노루는 몽희의 현상금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고, 자기도 그게 걱정돼서 미노루와 동행하고 있었잖아요.
자기만 없어지면 미노루가 몽희를 팔아먹을지도 모른다고 석진은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옛 동지들을 그대로 둘 수는…….’
사실 석진도 알아요. 자기가 혼자 가봤자 전력에 엄청난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 정도는요.
하지만 자기가 여기 남으면 미노루가 몽희를 팔아먹는건 확실히 막을 수 있잖아요?
옛 친구냐, 은인의 손녀냐. 김완이냐, 윤몽희냐.
‘그래, 어쩌면 기지에서 침공을 막아낼지도 몰라. 전력 차이가 크긴 하지만 거긴 지형적으로 수비전에 유리한 곳이고, 모두들 지형지물에 익숙하니까.’
‘하지만 꼬맹이는 내가 없으면 확실히 팔아넘겨진다…….’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한 석진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는 제 자리에 앉습니다.
안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에이미
그런 석진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다가, 자리에 앉는 걸 보자 몸을 돌려 치료에 전념하기 시작합니다.
옛날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요. 미노루가 어릴 때 엄청 아팠는데 물귀신이 치료해준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도 지금과 같은 광야 한복판이었기 때문에 의원이고 제대로 된 약이고 없었고, 생 약초만 있었어요.
미노루는 너무 아파서 생 약초를 씹어 넘길 수가 없었는데, 물귀신이 약초를 직접 씹어서 입으로 넘겨준 거죠.
그러고나서 물귀신이 “망할 년…….”이라고 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전 그 기억을 되게 싫어했어요.
하지만, 저도 지금 그 방법밖에는 없는 거죠. 석진이 가져온 약초를 입으로 씹어다가 몽희의 입안으로 넘겨줍니다.
그러고나서 “……하!”하고 자조적으로 웃어요. ‘결국,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라곤 당신한테 배운 것밖에 없네.’라고 생각하면서 몽희에게 약초를 씹어 넘겨주는 일을 계속합니다.
하누
왜 이렇게 맛도리 무한 제공 사건이지?
에이미
‘그래, 그 여자는 그렇게라도 해야 했을 정도로 내가, 내 얼굴이 필요했던 거야.’
‘정말 탐욕으로 가득한 여자였어.’ 사실 물귀신에게는 탐욕뿐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애정도 있었기에 그런 일을 했던 거겠지만 그런 사실은 애써 부정하고요.
하지만 그렇게 치면 자신도 물귀신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거죠. 자기도 이 아이를 이용해 먹으려고 살리려고 하는 거니까.
그런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열심히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부셈이
이제 몽희가 나을 때까지 며칠이 지나고 갈등 씬 만들면 어떨까요? ‘이게 다 뭔 소용이냐, 일단 기지로 가서 애 넘기고 우리는 이대로 갈라서자.’ 같은 얘길 하는 거죠.
에이미
좋아요. 그럼 쿠라마가 동굴 바닥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고비는 넘겼어. 오후쯤이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합니다. 둘다 확연히 지친 모습이고요.
하누
미노루는 몽희 옆에 붙어 간호하고, 저는 물 떠오거나 사냥 해오거나 하는 보조일을 했을 것 같네요.
에이미
“알고 있었잖아, 자기랑 나 안 맞는다는 거.”
“자기가 아무리 짜증나게 굴어도 쓸모는 있으니까 참아주자, 나 하나만 참아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이야.”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거든.”
“만 원짜리가 넝쿨째 굴러들어왔는데, 뭐? 비열한 짓으로 돈을 벌 바엔 평생 푼돈이나 벌며 사는게 낫다고?”
“미안하지만, 내가 같이 일하고 싶었던 자기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습니다.
“어차피 우리 원래 임무는 기지까지였잖아.”
“거기서 이 계집애 넘기든지 말든지, 어떻게 하든간에…….”
“너랑 나는,”
“거기서 끝내자.”
하누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진한 충격이 묻어납니다.
석진 입장에선 맨날 밀어내고, 동업자 아니라는둥 했는데 항상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온게 미노루잖아요.
그런 미노루가 얘한테 이렇게 차갑고 실망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미노루를 맨날 안 믿고 의심하고 그런대도 꽤 충격일 것 같고요.
그리고 자기가 생각해도 이번에 자신은 실책만 거듭했죠. 지켜야 할 꼬맹이는 사경을 헤매고 옛 동지들을 도우러 가지도 못하고.
안 그래도 자신이 너무 실망스럽고 괴로운데 미노루가 막타를 먹였어요.
자기는 나름대로 어느 때나 최선을 다했던 건데. 일이 죄다 엉망이 되니까 엄청 무력감이 들고, 미노루를 잡을 생각도 안 들어요.
변명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듣고 있다가, “알았다.” 짧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갑니다.
에이미
변명도 안 하는 모습이 더 마음에 안들어요. 그래서 칫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독립군 같은 소리 하네.”
“너처럼 줏대 없는 인간이 무슨 독립군을 하니?”
“그러니까 조선인들은 자유로워질 수 없는 거야.”
경멸하듯 이야기하곤 몽희한테 갑니다. 몽희가 눈 뜨고 있다가 마주쳤으면 좋겠어요.
버팬
몽희는 두 사람 쪽을 힐끔대며 눈치 보고 있다가요.
‘왜 싸우지? 나 때문에 싸우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미노루가 다가오자 찔끔 놀라 눈을 감고 자는 척 해요.
에이미
몽희가 눈을 뜨고 있는 걸 봤거든요. 몽희가 자는 척 하는 걸 알지만 모르는 척 해요.
몽희의 체온을 한 번 더 체크하고는 아주 작게 말해요.
“미안하게 됐다, 너에겐.”
미안하다는 건 물론 싸워서가 아니고요. 전 독립군 기지는 이미 전멸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의뢰비를 줄 주체가 없어지면 전 플랜B를 생각해봐야겠죠.
게다가 생사불문 만원이잖아요. 팔아넘길 때 살아있는 건 거추장스러우니까 죽이는 편이 편하겠죠.
그러니까 이 미안하다는 말은 자기가 곧 몽희를 죽이게 될테니 그에 대한 사과입니다.
부셈이
그런 얘길 하면서도 자기혐오가 오지게 들지 않을까요? 완전 물귀신 그 자체잖아요.
외양간에 처넣으며 밥값을 해야 식구지, 밥값을 안하면 고깃값만 하고 죽는 돼지나 다를 바 없다고 했던 말이 떠오를 것 같아요.
에이미
맞아요. 몽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런 말을 할 것 같아요. “그래도 너는 비싼 고기잖아.”
몽희가 제 얘기를 듣고 어떤 식으로 이해할지 그리 신경 쓰지 않아요.
사실은 이런 제가 너무 싫어서, ‘할 수만 있다면 재주껏 도망쳐보든가. 그래봤자 난 잡아서 죽일 거지만.’ 같은 생각도 있을 것 같아요.
버팬
몽희는 미노루와 분명히 눈이 마주쳤잖아요. 그래서 미노루가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하는게 사실 몽희가 안자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얘기하고 있는 거라는 걸 깨달아요.
몽희는 미노루가 조금 위험한, 꿍꿍이가 있는 사람이라는걸 느낄 것 같아요. 석진은 무뚝뚝하고 성격이 별로라고 생각하면서도 할머니의 친구이기도 하고 몽희의 직감이 자신을 해치진 않을 거라고 말해주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미노루는 자길 간호해주고 되게 친절하게 대해주는데도 이상한 말을 하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람이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 나한테 도망치라고 하는 걸까?’
부셈이
그러면 이제 몽희가 완전히 회복을 하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그 사이에 뭔가 장면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버팬
몽희가 독립군 기지에 도달했을 때 자기 신변에 위협이 닥치는 걸 대비해 몰래 뭔가 준비해 뒀으면 좋겠는데 뭘 할지 떠오르지 않아요.
지금 분위기상 기지는 안전한지 불확실하고, 미노루는 수상쩍은 낌새를 보이고 있잖아요.
만일 기지 상태가 안 좋다면 어른들이 자길 데려다줄 곳이 없고, 그럼 이 둘은 자길 버리거나 죽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거예요.
하지만 둘 중 누가 더 위험한지, 아니면 둘 다 위험한지는 아직 몽희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방법을 찾고 있는데…….
‘도착했을 때 독립군 기지가 멀쩡하면 나는 약속대로 괜찮을 거야. 하지만 기지가 멀쩡하지 못하다면…… 모든 게 어그러졌다면 나도 위험해질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귀곡성을 장전해놓은채 항상 품 안에 품고 있을 것 같아요.
부셈이
좋습니다. 과거 회상신 같은 거 들어가기 적절한 타이밍인 것 같네요.
(어떤 회상을 할지 길고 열정적인 토론)
부셈이
이런 건 어때요? 몽희의 병이 낫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아주 견디기 힘든 고열이 나는 밤이었어요.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잘 안 가고요.
석진과 미노루는 이미 잠들어있고, 불은 잔불만 겨우 남아있어 동굴 안이 어둑어둑한데, 사람 그림자가 하나 더 있는 거죠.
할머니가 몽희에게 말을 합니다. “평생 경성에서 살다가, 갑자기 총알이 날아다니는 만주에 오니까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지?”
버팬
“피, 할머니도 살았던 곳인데 뭐……. 사람 사는 곳이 다 사람 사는 곳이지.”
부셈이
“전부 내 친구고 내 사람이다, 만주는 그런 말랑한 정신머리로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야 이놈아.”
버팬
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앞이 가물가물한 눈을 꿈뻑거리면서 석진이와 미노루를 보고요.
“그러게. 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들 마음을 전혀 모르겠어.”
부셈이
“저승 가는 길, 노자라도 든든하게 챙겨줄 줄 알았더니만 손녀랑 길동무하게 생겼구먼.”
버팬
할머니의 말에 킥킥거리며 웃다가요.
“할머니, 그거 알아?”
“나한테 만 원이 걸려 있대! 어때, 노잣돈으로 든든하지?”
부셈이
“이놈아, 그게 딴 놈 아가리로 들어가면 내 노잣돈이냐?”
버팬
헤헤헤…… 하고 웃으면서, “그건 그렇네.”
“아……. 죽기 싫다.”
부셈이
“아서라. 내 저승사자인데 명부에 아직 네 이름은 없다.”
버팬
“할머니…….”
“나 잘 살 수 있을까?”
부셈이
할머니가 뭔가 조언을 주는 게 좋겠죠. 아이디어 좀 주십시오.
에이미
제 생각에는 몽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좋은 자질을 팍 개화시켜가지고 그걸로 뭔가 하게되면 좋을 것 같거든요.
부셈이
지금 제일 큰 문제가 그거잖아요. 몽희가 생사불문 만원이라는 거요.
생사불문이라는 건 얘를 죽여서 데려가도 된다는 건데, 무조건 살아있어야만 하는 상태를 만들 수 있으면 살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제안인데…… 그 사진 내용과 뒤의 시를 통째로 외운 뒤 사진을 불태워버리면 어때요?
그럼 보물 지도는 몽희 머릿속에만 있으니까 누구도 몽희를 죽일 수 없게 되죠.
에이미
그리고 이걸 태울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으니까 아무도 사진 구석구석까지 기억하고 있진 않을 거 아니에요. 아니 천잰데?
버팬
미친 거 아니야? 진짜 왜 이래?
하누
이거 진짜 몽희만 할 수 있는 미친 짓인 것 같아요!
(일동 대흥분)
부셈이
“만주엔 골때리는 놈들이 많지.”
“생사불문이라고 하면 다 시체만 가져갔겠냐? 절대 못 죽이게 만드는 놈들이 있다.”
“적의 급소는 곧 나의 급소다. 뻔히 보이는 급소만 노려서는 언젠가 벽을 만나지.”
“뻔히 보이는 약점을 노릴 게 아니라 없는 약점을 만들어야 된다.”
몽희가 ‘없는 약점?’이라고 생각할 때, 저쪽에 배낭이 널브러져 있는데 그 안의 두루마리가 살짝 삐져나와 있어요.
그쪽을 슬쩍 봤다가, 실마리를 얻은 표정으로 할머니가 있던 자리를 보자 몽희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동이 트고, 새벽 어스름이 동굴 안으로 드리우고, 할머니가 있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누
미친 거 아냐? 왜 이런 대사가 미리 준비해놓은 것처럼 술술 나옴? 왜 이렇게 천재임?
에이미
이 장면 안 했으면 어쩔 뻔 했어?
부셈이
이 모든 게 준비된 게 하나도 없어서 여러분이 준 아이디어가 없었으면 나올 수 없었을 장면이란게…….
에이미
지도를 외워서 이제부터 얘가 살아있는 증거가 되는 거네요.
하누
몽희가 살아있는 지도가 되는 거네요.
버팬
푸른 빛이 들어오는 동굴을 꿈뻑이는 눈으로 둘러보고요.
두 사람이 아직 자는 걸 확인하곤 조용히 일어나서 배낭으로 갑니다.
그리고 배낭에서 광야의 빛을 꺼내들고 아직 타오르고 있는 잔불에다가 비쳐보며 뒷면에 적힌 한자들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요. 그 내용을 머릿속에 깊이 박듯 새깁니다.
그러고는 다시 사진의 앞면을 봐요.
부셈이
사진이 클로즈업되면서, 식별하기 어려운 희뿌연 얼굴들이 한 명 한 명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마지막으로 장쭤린 얼굴이 탁 하고 비춰지는 거죠.
그걸 보며 나지막히 “내가 기억할게.” 라고 얘기하면서 사진을 불에 태우는 거죠.
그럼 잔불이 화르륵 하고 타오르면서, 모두가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단서는 지금 이 자리에 불타 없어지고 전 세계에 오직 몽희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됩니다.
하누
저는 보물지도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제 자신이 보물지도가 되었습니다.
에이미
주인공이 탄생하는 순간인 것 같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포지셔닝하는 장면이야.
부셈이
그럼 여기서 장면 스킵 해가지고 독립 기지에 도착해서 미노루는 쿠나이 들고 몽희를 붙잡고 있고, 석진은 총으로 미노루를 겨누고 있는 대치 상황으로 가는게 어떨까요?
여러분이 기지에 도착하면 그곳은 마적단의 말발굽과 일본군의 군화에 짓밟혀 완전히 초토화 되어있고요. 정말 무자비한 학살의 현장이었을 것 같아요.
하누
석진이 아는 얼굴들이 전부 불탄 시체가 되어 여기저기 널브러져있는 것을 보며 망연자실한 얼굴을 합니다. 꽉 쥔 주먹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요.
‘설마…… 한 명도 남지 않고 전멸했을 리가 없어.’
‘그래도 한 사람, 한 사람 쯤은…….’
그런 생각을 하며 폐허를 뒤지기 시작해요.
부셈이
오래지 않아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눈에 익숙한 의수가 폐허더미 사이로 비져나와 있습니다. 김완의 의수죠.
하누
“완!”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의수를 붙잡고 끌어당깁니다. 그러면 건물 잔해 사이에서 의수만 쑥 하고 빠져나와요.
저는 처참한 얼굴로 제 손 안의 의수를 멀건히 보다가, 다리에 힘이 빠져 무릎을 꿇습니다.
부셈이
당신이 그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몽희의 비명소리가 들려요. 그럼 미노루가 몽희를 붙잡고 있겠죠.
에이미
저는 몽희의 목에 쿠나이를 들이대고 있어요. 쿠나이 끝에는 독이 발라져 있고요.
“자, 그럼 기지에도 도착했으니 약속대로 우린 여기서 끝내볼까, 자기?”
“새삼스레 총질 같은 거 할 필요 뭐 있어? 넌 너대로, 난 나대로 할 일을 할 뿐인데.”
그러곤 몽희에게 작게 속삭여요. “안심해, 정말 순식간이면 끝나니까.”
“아프지도 않을 거야. 약속할게.”
“어린애를 구태여 괴롭히는 취미는 없거든.”
하누
“꼬맹이를 내려놔.” 일그러진 얼굴로 소총을 들어올립니다. “어서!”
에이미
언제나 실눈처럼 감고 있던 눈을 탁 뜹니다. 두 눈동자는 광기에 절어있습니다.
“멍청아, 이건 꼬맹이가 아니야. 내 복수를 이뤄줄 광야의 빛이지!”
“난 이 아이를 죽이고 나의 빛을 손에 넣을 거야.”
“그걸로 산더미 같은 돈다발을 만들어서, 그 위에 올라 앉을 거야!”
"그리고 물귀신 그년이 날 올려다보면 그 두눈에 이 칼을 꽂아넣을 거라고!"
하누
“쓸데없는 욕심은 집어치워라. 그 애는 네 빛이 아니야.”
“너 한 명의 욕심을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만족할 셈이냐!”
에이미
“원래 구미호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야.”
“눈앞에 싱싱한 간이 있으면 탐욕스럽게 집어삼킬 뿐이지.”
“난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어.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뿐이야.”
차갑게 말하고는 쿠나이를 몽희의 가슴팍에 가져다대요. “자, 네 간은 어디 붙어있으려나?”
버팬
몽희는 긴장한 채 미노루에게 붙잡혀 있다가 쿠나이가 금방이라도 찌르려는 듯 다가오자 외칩니다.
“백일의산진. 흑룡입해류!”
“다음 두 문장은 오로지 나만이 알고있어.”
“내 목숨에 걸려 있는 만 원. 그건 광야의 빛에 대한 값이지.”
“하지만 이제 날 죽인다면 십 원 한 장 얻을 수 없을거야!”
에이미
눈이 뒤집어져서 “그게 무슨 말이야!” 합니다.
버팬
저는 호주머니에 담겨있던 잿가루를 꺼내 던집니다. 잿가루는 눈바람에 휘날리며 미노루의 눈 앞에서 흩어져요.
“모두가 그렇게 찾아헤매던 광야의 빛은 이제 내가 없으면 누구도 손에 넣을 수 없어.”
“내가 보물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난 살아있는 지도야!”
에이미
미노루는 거의 실성했고요. 몽희의 짐을 빼앗아서 죄다 털어봐요.
‘그럴 리가 없어. 몽땅 장난일 거야! 그래야만 해!’ 라고 생각하면서 필사적으로 몽희의 소지품을 뒤집니다.
하지만 두루마리도 찾아서 열어본 뒤에야 정말 지도가 없어졌다, 불에 타버렸다는 것을 깨닫고요.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지면서,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넌……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
몽희의 멱살을 낚아채고요. “너…… 너 인간이 도구가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지도에 눈이 먼 인간들이 너를 고문하고 유린할 거야!”
“네가 지금 뭐가 됐는지 알고나 있는 거냐고!”
자기도 모르게, 돈이 될 지도가 사라진 것보다도 몽희가 도구가 되어버릴 것을 두려워하며 절규합니다.
그건 미노루에겐 자기 외의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거든요.
버팬
미노루에게 멱살을 잡힌 채 두 눈을 똑똑히 바라봐요. 그러다 씩 웃으며,
“그것도 멋진 모험이 될 거야.”
하누
와…… 미친 새끼 무한 제공 사건…….
에이미
진짜 할 말을 잃을 것 같아요. 몽희를 내팽개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요.
하누
저는 계속 총을 쿠라마에게 겨누고 견제하고 있다가요, 이 상황을 보고 쿠라마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 머리통에 총구를 가져다댑니다.
“변명할 말은 필요 없겠지.”
저는 문답무용으로 쿠라마를 처단할 생각이에요. 신의를 어기고, 자기 욕심에 따라 몽희를 죽일 뻔한 걸 봤으니까요.
쿠라마와의 옛정 때문에 주저하기에는 저도 방금 옛 동료들을 죄다 잃은 처지라 바늘 끝처럼 곤두서있어요. 핏발 선 눈으로 총을 겨눈 채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다 겁니다.
“이걸로 너와의 질기디 질긴 악연도 끝이군.”
“마침 여기서 갈라서기로 했으니, 잘 됐어.”
에이미
저는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어차피 광야의 빛 지도는 없어졌고, 눈앞의 꼬맹이는 속없이 맹랑합니다.
저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버팬
석진이 미노루를 쏘기 직전의 상황에서요. 몽희가 “그만!” 하고 달려가서 미노루 앞을 막아서요.
“싸우는 거 이제 그만해!”
하누
정말 금방이라도 쏠 것처럼 방아쇠를 반쯤 당기고 있었는데 몽희가 끼어들자 당황하며 총구를 내려요.
“꼬맹이, 뭐 하는 거야? 당장 비켜!”
“그 자식은 널 죽이려고 했어! 처음부터 신뢰할 수 없는 놈이었다고!”
버팬
“하지만 난 안 죽었어, 아저씨.”
“그리고 난 여전히 미노루도, 아저씨도 좋아.”
“기억 안 나? 미노루는 내 목숨을 구해줬잖아. 만약 미노루가 치료해주지 않았으면 여기 오기도 전에 난 죽었을거야.”
에이미
몽희의 말에 놀란 듯 눈을 뜹니다.
당연히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몽희가 총 앞에 뛰어들면서까지 자신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아요.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몽희의 뒷모습을 봅니다.
하누
“이 물러터진 꼬맹아, 아까 같은 꼴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건 저 녀석이 널 이용하려고 그런 거야.”
“널 팔아먹기 위해 살려준 거라고.”
“한 번 배신한 놈이 두 번 배신 못할 것 같나?”
“썩은 싹은 지금 이 자리에서 뿌리 뽑아야 해!”
버팬
석진이 다다다 말을 하는 걸 지켜보다가 씩 웃습니다.
“역시, 아저씨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하누
그러는 몽희의 얼굴에서 다시 한 번 저승사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흠칫 놀라 한걸음 물러나고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건 할머니나 손녀나 똑같군.’
전 여전히 미노루에 대한 살의로 가득해요. 한 번 배신한 놈은 두 번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금의 일로 저는 미노루에 대한 그리 많지 않았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하지만…… 몽희가 얼마나 평범치 않은 꼬맹이인지는 잘 알았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는 쇠고집인건 자기 할머니랑 쏙 빼닮았으니까요.
만일 자신이 몽희 의사를 무시하고 미노루를 죽인다면 몽희는 절대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옛 동료마저 한 명도 남지 않은 자신은 은인의 손녀를 지키는 임무를 좀 더 수행해야 하는데…… 그건 임무 수행에 엄청 방해가 되는 일이겠죠.
몽희에게 미움받을 것이냐, 배신할 위험이 있는 미노루를 감시할 것이냐…….
한참을 고민하던 석진은 이를 꽉 악뭅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거라곤 이 임무밖엔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몽희에게 미움받아서는 안 됩니다.
“제기랄…….”
욕을 내뱉곤 총을 거둡니다. 미노루를 노려보다가, 몸을 훽 돌려서 후 하고 한숨을 쉽니다.
버팬
석진이 화를 삭히고 있는 동안, 미노루를 돌아봅니다.
“이걸로 나도 미노루를 한 번 살렸네, 그치?”
에이미
미노루는 아직도 넋이 나가서 대답을 하지 않아요.
버팬
넋이 나간 미노루에게 손을 내밀고요.
“자, 가자!”
에이미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어딜 가자는 건데.”라고 합니다.
버팬
“어디긴 어디야.”
“광야의 빛을 찾으러 가야지!”
에이미
“광야의 빛을…… 나도 같이 찾으러 가자는 거야, 지금?”
버팬
“그럼 나 혼자 그걸 어떻게 찾아?”
“미노루한테도 광야의 빛이 필요한 거 아냐?”
그렇게 말하는 몽희의 모습이 전신으로 보입니다. 키 작고 힘 하나 없어보이는 소녀의 모습이죠.
에이미
정말 이 모든 게 다 예상 외예요. 제 사고방식으로는 얘가 하는 일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참 무지해서 용감한 아이로구나.’라고 생각하며 몽희를 빤히 봅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요.
“그래, 좋아.”
“나는 너의 빛을 훔칠 때까지 따라다니겠어.”
“난 언젠가 네 빛을 반드시 빼앗을 거야.”
“그래도 넌 상관없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몽희에게 쿠나이를 하나 내밉니다.
“아니면, 지금 죽여.”
버팬
몽희는 미노루가 내미는 쿠나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대로 두고 다시 미노루에게 시선을 옮겨 말해요.
“빛은 훔칠 수 있는 게 아니야. 빛이 손안에 잡히는 거 봤어?”
에이미
몽희의 말에 불현듯 오도깨비와 함께 봤던 반딧불이 떠올라요. 잡힐 듯 말 듯, 결국 잡히지 않았던 반딧불이요.
“그렇지, 빛은 훔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요하다면 그 불을 손에 넣을 거야.”
“그래도 괜찮다면 따라가줄게, 아가씨.”
버팬
미노루의 말에 몽희는 한 번 히- 하고 웃고요. 박수를 짝짝, 두 번 쳐요.
“그럼, 결정된 거지?”
“자, 목적지는 봉천이야!”
“다들 출발하자!”
하고 기지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에이미
몽희가 먼저 씩씩하게 걸어가면요. 저는 뒤에 남아있다가 석진에게 다가가가지고,
“아무래도 이 질긴 악연이 끝나기엔 아직 이른 것 같네.”
하누
진짜 진짜 마음에 안들어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총을 어깨에 짊어지고 몽희를 따라갑니다.
에이미
석진이 대답도 없이 그냥 가버리는 걸 보고 훗 하고 웃더니 혼자 중얼거려요.
“헨나 오토코.”
그러고는 같이 뒤따라가는 걸로.
부셈이
이제, 사이드카에 몽희가 올라타고, 오토바이에 시동을 확 하고 걸고.
“이랴!” 하면서 말을 몰아나가면 석양이 깔리는 불타는 독립군 기지를 뒤로 하고 세 사람의 인영이 달려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장소에서는, 한 사람이 집무 책상에 뒤돌아 앉아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 그의 맞은 편에는 물귀신이 책상에 다리를 척하고 얹은 채로, “그렇게 돼버렸으니께, 돈을 더 주시든지.” 라고 얘기하면서 등돌린 상대에게 종이를 건냅니다. 그 종이를 받아들면, 일본어로 쓰여져 있는 현상수배지예요. 수배지에는 <오니토라>라고 쓰여있고 석진의 얼굴을 본뜬 몽타주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한쪽 뺨에 흉터가 있는 장년의 관동군 장교, 이시하라 겐지가 “하하하하! 이거 일이 재밌게 흘러가는군. 좋소. 그럼 돈을 더 드려야겠군.” 라고 얘기합니다.
물귀신이 씩 하고 웃으면서 “분부대로 헙지요.” 라고 얘기하면서 창밖을 보면…… 드넓은 만주 평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타이틀이 떠오릅니다.
만주를 향해 쏴라.
제 1장, 살아있는 지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