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카페] Syrup, Bitter Sweet

드르륵.

노트북 키보드의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조용한 구 이과준비실의 문이 열렸다. 미닫이문의 특성으로 인한 약한 진동이 문 옆 사물함 위의 먼지를 옅게 일으켜 세워보지만, 문을 연 주인공이 그대로 사물함을 스쳐지나가자 다시 조용히 내려앉았다.

“오, 카페 군. 트레이닝은 끝났나? 그럼 자네의 겉옷을 잠시 맡아두지. 실은 아까 자네가 나가기 전에 자네의 트레이닝복 겉옷 주머니 안에 측정기를 넣어뒀거든. 몸에 붙이는 것만 못 하다만, 자네라면 나름 유의미한—”

“그건 이미 꺼내서 당신 서랍 두번째 칸에 넣어뒀어요. 제 옷에 손 댈 거면 미리 말 좀 하시죠.”

“이야, 어쩐지! 사실은 나도 이 장비가 처음이라, 기록이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측정기가 아닌 줄 알았네만.”

계속해서 자신의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아그네스 타키온을 뒤로 하고, 맨하탄 카페는 커피 포트에 물을 올리고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트레이닝 전에 미리 로스팅해두고 뚜껑을 살짝 열어둔 채 어두운 곳에 잘 덮어둔 원두는 카페의 손길에 부드럽게 갈리며 감미로운 향을 이과준비실 안에 퍼트리고 있었다.

커피 같은 쓴 음료를 싫어하는 타키온도 원두를 갈면서 나오는 향까지 싫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커피 자체에는 커피만큼이나 쓴 평가를 내리면서도 카페가 원두를 가는 것까지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카페는 가장 좋아하는 이 짤막한 시간을 굳이 번거롭게 다른 곳을 오락가락하지 않아도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어느새 다 갈린 원두를 잘 눌러 걸어두고 뜨거운 물을 받아내 커피를 내리는 카페의 얼굴은 꽤나 흐뭇해 보였다. 아침에 원두를 볶을 때부터 꽤나 즐거운 표정이었으니 아마도 이번 로스팅은 꽤나 잘 볶아졌던 모양이었다.

그런 카페를 바라보던 타키온은 자신의 책상을 넘어 베란다 창고로 잠시 들어가더니, 카페의 것과 꽤나 비슷한 머그컵을 가져왔다. 홍차에게는 카페의 커피만큼이나 까다롭게 구는 - 그런 주제에 홍차의 향을 어지럽힐 정도의 각설탕을 들이붓는 - 타키온은 홍차 찻잔만큼은 전용의 찻잔을 사용했지만, 가끔 다른 음료를 마실 때에는 자신의 머그컵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카페의 머그잔과 꽤나 비슷하게 생긴 탓에 카페가 헷갈려 잘못 집는 일이 꽤 빈번하게 있었다. 다행히도 카페가 타키온의 머그컵을 쓰는 일이 아직까지는 없었다. 타키온의 컵이 더 컸던 것도 있거니와, 타키온이 자신의 컵을 꺼내는 일이 잦지는 않았기에 꺼내둔 채로 잔을 집는다면 둘을 같이 세워둔 채로 헷갈리는 일이 주였다.

무엇을 마시려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타키온은 컵에 자신이 낮에 심심풀이로 만들어본 단맛 증폭 시럽을 살살 짜기 시작했다. 각설탕 팩을 하나하나 뜯어 탑을 세워놓고 한 알 한 알씩 떨구자니 쓰레기도 많이 나오는데다 떨어진 각설탕 가루들이 개미들로 하여금 이과준비실을 식량 창고로 쓰게 만들어버리자, 놀러 온 단츠 플레임과 정글 포켓에게 한 소리 듣고 만들어본 프로토타입 중 하나였다.

시럽을 컵 벽면까지 꼼꼼하게 다 펴 바를 무렵, 타키온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컵이 남의 것 같아보이는, 현실과 자신의 사이를 살짝 멀어져 보이게 만드는 괴리감.

타키온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머그컵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이상한 느낌이 생기는 원인을 그녀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녀가 들고 있는 머그잔은 실제로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컵의 바깥 벽면에 선명하게 보이는 검은 고양이 얼굴 무늬의 각인이 보란 듯이 타키온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실수를 질타하듯 양쪽 볼의 세 가닥 수염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 지금 카페가 커피를 내리고 있는 저 컵은….

“어어, 카페 군. 할 말이 있는데,”

“이번엔 또 무슨 실험을 하려고요. 안 받아줄 겁니다.”

“아니, 그거 말고.”

“하…. 늘 말하지만, 저는 홍차보단 커피가 좋아요.”

“너무하잖나! 말 끊지 말고 좀 들어봐주게!”

“제가 커피를 내릴 때에는 매번 그런 소리밖에 안 하잖아요.”

“이번엔 그런 얘기가 아닐세!”

“…?”

“자네가 들고 있는 그 컵, 그거 내 컵인 것 같네만….”

“……?”

카페는 뒤늦게 커피로 가득 차 찰랑이던 자신의 잔을 들어보였다. 아무런 무늬도 없이 깔끔한 흰색. 사용한 빈도 자체가 적어 보이는 반짝이는 그것은 영락없는 타키온의 머그컵이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소파에 앉은 카페는 약간의 불신을 담은 눈빛으로 타키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카페가 커피에 대한 신념이 있고 깐깐하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새로 사 온 원두로 내린 첫 커피를 그저 남의 컵에 내렸다는 이유로 버리고 다시 내려 올 만큼 그녀는 정 없고 꽉 막힌 우마무스메가 아니었다.

“…설거지는 잘 해 두신 거겠죠?”

“아, 물론이고 말고! 디지털 군이 마지막으로 설거지했던 상태 그대로일 것이네!”

“…그럼 됐어요. 이건 제 실수이니…. 다음부터는 잔을 두는 곳을 따로 놓도록 하죠.”

타키온은 애써 미안한 눈빛으로 카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마실 걸 찾기 위해 잔을 들고 이과준비실을 나갔다. 잠깐의 소란이 지난 후 카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해진 이과준비실 속에서 컵을 들었다.

타키온이 아무리 집안일 경험 없이 자라 그릇을 깨먹거나 세제 잔향이 남는 일이 잦았다고는 해도 그녀 옆에는 그녀를 뒷바라지해주는 우마무스메들이 몇 있었다. 물론 타키온의 머그컵이라는 것이 내심 언짢긴 했지만, 우선 설거지를 한 사람 이름에 그녀 옆에 붙어있는 우마무스메의 이름이 들렸다는 것은 적어도 커피에서 세제 맛을 느낄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보증수표였으니.

“푸흡—”

‘…이 단맛은, 원두에서 나는 단맛이 아닌데….’

이과준비실의 짧은 정적을 다시금 깨버린 것은 카페 본인이었다. 원두에 대해서는 대단히 깐깐하고 예민했던 카페답게, 그녀는 그녀가 방금 느낀 단맛이 원두에게서 나온 자연스러운 단맛과는 거리가 꽤나 멀리 있음을 겨우 반 모금 만에 알아차렸다. 아무리 처음 사 본 원두인데다 단맛이 꽤 강한 풍미라고 쓰여 있었다지만 마치 시럽을 살짝 발라 놓은 듯한 인위적인 단맛은 커피의 향을 덮어내고 카페를 놀래키기 충분했다.

당황에 순간 컵을 떨어뜨릴 뻔한 것을 간신히 붙잡은 후, 컵을 면밀히 살펴본 카페는 놀랍게도 아무 정황도 찾아내지 못했다. 원두 가방에 손을 넣고 쓸어봐도, 커피 기계에 맹물을 넣어 다시 내려봐도, 그라인더를 전부 분해해 봐도 커피에서 난 그 단맛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슬슬 카페가 당황을 넘어 패닉이 올 때쯤, 카페의 주의를 환기시켜주며 이과준비실의 문을 열어젖힌 것은 타키온이었다.

“오야, 카페 군. 갑자기 커피머신을 청소할 생각이라도 들었나? 바로 어제 청소를 해놓고서는 이렇게 다시 전부 풀어헤치다니, 커피 속 카페인이 자네에게 주는 영향력을 다시 측정해보고 싶군! 가능하면 트레이닝 때에도 데이터를 쌓을 수 있게끔 조금 전의 그 측정기를 같이 가져갔으면 하네만!”

“…타키온 씨….”

“엥, 나를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겐가? 컵이 바뀐 일으로서는 이미 내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나.”

“제 커피에, 무언가 해둔 것이 있나요…?”

“커피…? 카페 군, 잠시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는 게 어떻겠나.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커피라면 질색하지 않나. 그건 내가 좀 전에 만든 특제 시럽을 넣어도 쓴 맛밖에 나지 않을 걸세.”

“…그건 당신 생각이겠죠. 전 잠시.”

“아, 이왕이면 측정기도 같이 가져가게—”

“필요 없어요.”

카페가 자리를 비우자, 타키온은 홀로 남아 가져온 음료를 홀짝였다. 점도와 단맛의 비율을 머릿속으로 고민하며 다음 실험의 계획을 짜고 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짧은 한순간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컵을 헷갈렸던가…?’

카페가 트레이닝을 위해 아침에 자리를 비웠을 때, 시럽을 테스트해보기 위해 꺼내들었던 컵은 확실히 타키온의 머그컵이었다.

하지만 시럽이 너무 묽은 탓에 단맛도 약한데다 짜놓고 나서 바닥에 몇 방울이 떨어지는 건 개미가 꼬이지 않게 하기 위한 당초의 계획과도 맞지 않아, 시럽을 그대로 버리고 컵을 물로 헹군 다음 잠시 시야 밖에 두었던 것이었다.

마침 카페는 어제, 조금 전 타키온이 말했던 대로 커피머신 전부를 싹 분해해 청소하는 과정을 거치느라 점심 때 이후로 그녀의 머그잔을 잘 씻어 창고에 넣어두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원두를 사오고 잘 볶아서 덮어두는 과정에 잔을 쓸 일은 없었으니, 창고 속에 있던 것은 타키온의 머그컵이 아닌 카페의 머그잔이었던 것.

타키온은 이미 자신의 컵이 나와 있었다는 사실을 놓치고 늘 하던 대로 창고에 있던 컵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한 채로 가져왔다.

시럽이 뜨거운 커피와 다시 닿으며 빠르게 녹아 사라졌기 때문에 카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컵 속에 남아있던 시럽의 단맛을 그대로 마셔버리고 말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타키온은 약간의 고뇌에 빠졌다. 사실대로 카페에게 말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카페가 아직 눈치채지 못했으니 그냥 덮어두고 모른 척 해야 하는가.

사실대로 모든 걸 털어놓는다면, 카페는 그녀에게 실망을 감추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혐오 가득한 표정을 보는 건 익숙해도, 그닥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냥 덮어두고 모른 척 한다면, 카페가 당장 그녀에게 실망하거나 싫어하는 표정을 짓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녀만이 볼 수 있는 ‘친구’라는 것이 있다. 타키온 본인이 가장 가까이 다가갔었다는, 그녀가 겹쳐보였다고 한 그 ‘친구’.

비록 타키온은 오컬트적인 것을 믿는 우마무스메는 전혀 아니었지만, 그 ‘친구’가 자신이 한 실수를 아예 모르지는 않을 거라는 불안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과하게 오컬트적인 이야기이지만, 창틀에 걸린 프리즘 볼 장식은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의 인위적인 단맛…. 타키온 씨 말고는 할 사람이 없을 텐데.’

‘하지만 그 눈빛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어.’

‘왜…. 왜 그 단맛이 그닥 싫은 맛은 아니었던 거지…?’

‘혹시, 아까 만들었다던 그 시럽…?’

타키온이 자신의 기억을 되짚으며 안색이 파래지는 사이, 카페는 복도 수돗가에서 컵을 헹궈내고 있었다. 묘하게 싫지만은 않았던 그 맛을 다시 되짚어보며, 분명 타키온이 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과 딱히 거부감이 들 만한 단맛은 아니었던 점이 그녀의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어지럽히고 있었다.

단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카페에게 난생 처음으로 느껴진 쌉쌀하고 포근한 단맛은 꽤나 달갑게 느껴졌다. 당류를 좋아하는 우마무스메들 - 특히 자신과 같은 곳을 공유하는 실험가와 어떤 은발의 명문가 아가씨 - 을 잘 이해하지 못하던 카페는 왜 그들이 그렇게까지 단 것에 환장하는지를 조금은 어렴풋이 이해할 것만 같았다.

드르륵.

노트북 키보드의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조용한 구 이과준비실의 문이 열렸다. 미닫이문의 특성으로 인한 약한 진동이 문 옆 사물함 위의 먼지를 옅게 일으켜 세워보지만, 문을 연 주인공이 그대로 사물함을 스쳐지나가자 다시 조용히 내려앉았다.

조금 전과 약간 다른 점은, 문이 열리고 나서 노트북 키보드 소리가 끊겼다는 것.

키보드 소리의 주인은 카페가 들어오자마자 키보드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꿍꿍이를 들킨 어린아이처럼 잔뜩 겁먹은 눈빛은 카페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이내 패닉으로 바뀌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 어어, 카페 군 아닌가. 그래, 어, 으응, 커피에서 단 맛이 난 건, 유, 유감이네.”

“딱히 단 맛이 났다고 입 밖으로 말 한 적은 없는데요.”

“아, 어, 그랬나? 그, 그게, 절대 내가 한 짓은 아니고! 유추를 한 거라네. 그래, 유추를 한 거지.”

“….”

“…미안하네, 내가 내 컵을 꺼내놓고 창고에서 자네 컵을 내 것인 줄 알고 꺼냈네.”

“…….”

“그, 일부러의 의도는 전혀 없었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바라보는 건 그만 해주지 않겠나…?”

“…그 단 맛, 어떻게 만든 거죠…?”

“…아?”

달그락, 덜컥, 달그락.

커피포트의 물이 끓는 소리와 각종 집기들이 어수선하게 뒤적이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좋은 일이 아닌가, 카페 군! 이렇게 같은 맛을 놓고 즐길 수 있다니!”

“…좋은 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아직은 시럽 없는 커피가 더 좋아요.”

“그래도 단맛이라는 개념을 자네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나. 실험도 첫 결과가 다음 실험의 조건을 제시해줄 아주 중요한 길잡이가 된단 말일세.”

“단맛이 무엇인지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아무렴 상관없네! 이왕이면 홍차도 좋은 취미가 될 수 있겠네만?”

“그건 싫어요.”

“하하, 여전하군! 아직은 뭐 딱히 중요하지 않으니 됐지. 다양한 시럽의 바리에이션을 만들어 봤으니 마셔보고 어떤 시럽이 가장 적절한지 좀 알려주지 않겠나? 하는 김에 마시고 나서의 반응과 각종 신체의 수치를 좀 잴 수 있으면 좋겠네.”

“카페인 과다일지, 혈당 과다일지…. 오늘은 그만 했으면 좋겠는데요.”

“그래? 이런이런, 아쉽게 되었군! 그럼 나머지 실험은 내일 마저 하도록 하겠네. 배합 비율을 조금씩 조정한 다음 시료를 준비해둘 테니 내일 아침 커피를 내릴 때 다시 보도록 하지!”

“내일도 한다고요…?”

작고 조용한 이과준비실 안에서는 고소한 커피의 향기와 달콤한 시럽의 냄새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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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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