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열] 시선의 끝에는
업로드 2023.08.31
*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다음편
* 인간 강백호 X 요괴 양호열
* 아마 마지막?
농구부 훈련은 고되다. 힘들고, 아프고, 어렵다. 백호는 땀을 흘려가며 몇 번째인지 모를 슛 연습을 했다. 방학동안 호열을 포함한 백호 군단, 그리고 소연이 훈련을 도와주었다. 슛 연습을 비롯해 다른 기본기도 함께 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탕, 타앙 하는 농구공이 코트 위를 튀어오르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렸다. 백호는 림에서 튕겨져나가는 공을 허망하게 보다 고개를 돌렸다. 땀이 묻어 미끄러운 농구공들을 백호 군단이 닦아서 볼 카트에 넣거나, 백호가 날린 공들을 주워오는 것과 달리 호열은 멍하게 체육관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
백호가 눈가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숨을 골랐다. 언제부터였을까. 백호가 용팔이 던져준 공을 받으며 림을 향해 슛을 쏘았다. 텅 소리와 함께 림에 맞아 튕겨져 나온다.
호열이 언제부턴가 하늘 너머를 멀거니 보는 날이 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훈련을 도와주는 게 질렸다고 생각했다. 다른 녀석들도 빨리 늘지 않는 실력에 '천하의 강백호도 어쩔 수 없는 게 있구만!' 하며 비웃었으니까. 흥. 갈테면 가라지. 그래서 백호는 호열을 내려다보며 그랬다.
"야."
"응?"
"너 이 몸의 천재적인 변화 과정을 보는 게 지겨운 거라면 가버려."
"응?"
암녹색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전혀 생각해본 적 없다는 멍한 표정에 되려 민망해진 것은 백호였다. 백호의 말을 되짚어보던 호열이 픽 웃었다.
"뭐야. 내가 너 훈련하는 거 지겨워하는 것 같아 보였냐?"
"누, 눗. 그럼 아니야? 너 계속 바깥만 쳐다보잖냐."
"아…내가 그랬어?"
호열은 자신이 창 너머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던 호열이 백호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그를 지나쳐 코트로 향했다.
"가자.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나봐."
"……."
입술을 달싹이던 백호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커다란 손으로 제 입을 옆으로 쓸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하려고 한 거지. 백호가 앞서 걷는 호열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내 생각 말고 다른 생각할 게 뭐가 있다고……라고?"
내가 왜 그렇게 말 하려고 했지?
호열 본인도 인식하지 못 한 채로 창 밖 너머를 보는 것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훈련 초반보다 확실히 슛 폼도 좋아지고, 드리블 자세도 안정적이게 된 백호가 공을 튀기며 호열을 흘끗 보았다. 호열이 알바로 빠진 날 넌지시 백호 군단에게 호열의 상태에 대해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백호가 소연이 던져주는 공을 받아 소연에게 패스를 날렸다.
'양호열? 별 일 없는 것 같던데?'
'그러고보니 요즘 좀 많이 멍 때리는 거 같지?'
'빠칭코도 잘 안 가고 말이야.'
'원래도 티를 잘 안 내는 녀석이니 물어봐도 일 없다고 해버리니 정말로 알 길이 없다만 말이지.'
"…아!"
소연의 작은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백호가 허둥지둥 소연에게 달려갔다.
"누, 누웃! 소연아! 괜찮아?"
"백호야아, 조금 아팠어……."
"미, 미안합니다……."
발개진 손 끝을 내려다보며 울상지은 백호에게 소연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 정도는. 생각보다 아파서 잠깐 놀라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린거야."
"잠깐 쉬자 소연아……."
"뭐야. 다쳤어?"
멍 때리다 소연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호열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은 채로 둘에게 다가왔다. 소연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무안한 듯 웃어보였다. 소연의 손을 보던 호열이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코트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앉히고 엄지를 뒤로 해 백호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제 내가 할게. 너희 하는 거 자주 봐서 공 주고받기 정도는 나도 도와줄 수 있으니까."
아니면 슛 연습하는 거 도와줘도 되고. 호열의 말에 소연이 그럼 부탁할게, 하고 웃었다. 집에 가서 손가락 봐야하지 않아? 으응. 괜찮아. 얼음찜질이라도 하지. 지금은 백호 연습하는 걸 보고싶어.
"그래?"
호열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쉬고 있어. 그대로 몸을 돌려 백호에게 다가간다.
"소, 소연이는 괜찮아?"
"남은 시간은 내가 같이 할게. 집에 가서 얼음찜질이라도 하라고 했는데 연습하는 거 지켜보고 싶다네."
"오옷! 이 천재님의 활약상을 보여줄 때가 된 건가!"
"하하."
소연을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에 축 처져있던 백호가 눈에 불을 켜고 열의를 불태운다. 소연이 공을 넘겨주던 자리에 서서 볼 카트에 가득 담긴 농구공을 집어들었다. 백호의 눈이 진지해지고, 농구공을 향했던 시선이 호열을 향했다.
"하아……."
"뭐야! 왜 이 몸의 고민을 그렇게 깊은 한숨으로 듣지?!"
왜긴 왜야. 쌍으로 지랄염병하니까 그렇지. 태섭이 속으로 생각했다. 방학의 특훈이 끝나고 농구부에서 조금씩 연습 경기를 하던 백호가 태섭에게 진지한 얼굴로 할 얘기가 있다 해 따라나왔던 건데. 태섭은 백호를 버리고 체육관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했다.
"…그래서, 고민이 뭐라고?"
"아, 섭섭! 내 말 안 들었어!?"
"……."
집에 가고 싶다. 태섭이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한숨을 겨우 집어삼켰다. 이 빈약한 농구부의 한축을 담당해주실 귀한 몸이다. 태섭은 참을 인을 새기며 백호에게 웃어보였다.
"미안. 내가 다음 시합에 대한 생각이 많아서 정신이 좀 팔렸네. 천재 강백호님, 아량을 베푸시어 다시 한 번 얘기해주시면 안 될까요?"
"누, 누웃…그렇다면야……."
참 굴려먹기 좋다. 태섭이 한숨을 흘렸다. 백호가 학교 옥상 위에 온전히 자리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호열이가 자꾸 딴 곳을 쳐다봐."
"응."
"요즘 자주 그래. 무슨 일 있는지 다른 녀석들이 물어봤다는데 별 일 없다고 했대."
"응, 그래. 그럼 정말 별 일 없는 거 아닐까?"
"한번씩 녀석이 멍 때리는 걸 볼 때가 있거든?"
"응. 그렇구나. 그랬구나."
"근데 뭐랄까… 그게 그냥 하늘을 보는 게 아닌 느낌이 들어."
"응?"
대충 백호의 말을 흘려듣던 태섭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백호가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본 상태로 말을 이었다.
"뭔가 보는 것 같은데… 정말 눈 앞에 있는 걸 보는 게 아닌 것 같아.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은. 그만큼 멀어진 시선이라는 느낌이 들어."
"……."
태섭의 높낮이 다른 눈썹이 한 차례 휘었다. 손을 들어 턱을 감싸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백호를 흘끔 본다. 첫사랑 타령을 하는 백호에게 지금의 자신으로는 만날 수 없다며 기억을 다시 지웠었지. 그 뒤로 호열에게서 백호가 꿈을 다시 꾼다는 말을 들은 적 없는 걸 보면 정말로 백호는 꿈에서도 그 기억이 사라진 상태라는 건데. 뭐가 문제지?
태섭은 백호가 제게 했던, 흘려들었던 말들을 곱씹어보았다. 그냥 멍 때리는 게 아닌 것 같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듯한 멀어진 시선이라… 흠. 그런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혼자 고개를 주억거린 태섭이 백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넌 그런 양호열 보니까 어떻게 하고 싶어졌는데?"
"잘 모르겠어."
"왜?"
"주위에 아무도 두고 싶지 않아하는 분위기가 느껴지거든."
"그으래?"
지랄, 폼 잡기는……. 호열 본인은 정말로 과거를 회상하는 동안 방해받고 싶지 않아 그랬겠으나 태섭이 볼 때는 그저 웃기고 자빠지는 모습이었다. 그래놓고 퍽이나 백호 기억을 지우셨어요. 네 업보다, 이 미친놈아.
백호의 과거 첫사랑이 양호열이라는 것을 안다. 그 말인 즉슨 양호열이 바다숲에 살던 요괴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하는 것을 태섭은 안다. 그로 인해 백호가 흔들리기라도 하면, 첫사랑이 사는 산이 깨끗히 밀려버렸다는 사실과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농구부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더욱 흔들리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호열과 같은 바다숲 출신의, 인간을 잡아먹는 요괴인 태섭은 같은 동족인 호열보다 농구부의 귀한 인재가 될 예정인 백호가 더 소중했다. 그러니까 양호열이 과거를 곱씹으며 어린 시절 백호와 함께한 순간을 100번, 1000번, 10010번 회상하든 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백호가 호열에게 신경쓰느라 농구부 활동에 지장을 주느냐는 것.
"그럼 백호야. 호열이는 뭔가 말 못할 고민이 있는 걸 거야."
"말 못할 고민?"
백호의 검은 눈이 둥글게 뜨였다. 태섭이 검지로 코 밑을 쓸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럴때는 말야, 옆에서 누가 아무리 얘기해도 괜찮다고만 얘기하고 선을 그을거라고."
"응, 응."
백호가 큰 덩치를 태섭쪽으로 숙였다. 태섭이 씨익 웃었다. 제게 고개를 숙인 백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인다.
"……."
호열은 고민이 많았다. 생각도 많았다. 백호가 어린 시절 저와 함께한 순간의 꿈을 꾼다고 말해올 때부터 생각도, 고민도 많았다. 결국 백호가 피로 물든 인간을 잡아먹는 요괴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 기억을 지웠으면서도. 그럼에도 고민이 많았다. 생각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백호가 상기시킨 과거의 추억이 호열의 곁을 진득하게 들러붙어왔다. 기억을 지운 것은 자신임에도 백호가 그 때의 추억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기쁘고, 들뜨고, 감사했다. 괜히 들뜬 가슴은 백호에게 당장에라도 그 첫사랑이 나라고, 지금도 나를 좋아하고 있냐고, 나도 널 지금까지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을 갈기고 싶었지만. 참았다. 일렁이는 파도를 겨우 억누르고, 잠재운다.
멍청아. 파도는 그렇게 억누른다고 잠잠해지는 게 아니야.
태섭의 타박이 호열의 머릿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호열은 태섭의 경고를 무시했다. 바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파도칠 일도 없다. 호열은 눈을 감고 감정을 갈무리했다. 해변가로 밀려들어오는 파도가 점차 잠잠해진다. 것봐. 되잖아.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네. 호열이 눈을 떴다. 노을이 지는 붉은 하늘은 누군가의 붉은 머리와 참으로 닮아있었다. 굳이 색을 따지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 붉은 하늘은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를 닮아있어서. 호열은 겨우 억누르고 잠재운 파도가 다시 일렁이며 굽이치는 것을 느낀다. 커다란 잎사귀를 타고 신나게 웃으며 높은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던 기억이 선명하다. 맑게 웃는 목소리가 선명하다. 호열의 암녹색 눈이 과거를 헤집느라 흐려진다. 한 번 더 타자! 제게 내밀어 오는 작은 손이 선명하다. 그 손을 맞잡고, 높은 언덕을 향해 달려가는 둘의 뒷모습이 선명하다. 밝게 웃는 얼굴이 선명하다. 그의 모든 것이 선명하다. 그와 함께했던 그 몇 시간이 방금 전에 있었던 것 마냥 선명하다.
"양호열."
"……!"
그 때와 달리 단단해진 목소리가 호열의 뒤에서 들려옴과 동시에 몸이 커다란 온기에 폭 파묻혔다. 호열이 침을 삼켰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뻐끔거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배, 백호야…?"
"이제 정신이 드냐?"
"어……?"
"몇 번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길래."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숨결과 목소리에 호열이 차마 올려다보지 못하고 앞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다시 일렁이는 파도가 거세지고 있었다. 호열의 손이 방황하다 살짝 떨린 채 저를 끌어안은 백호의 팔을 붙잡았다.
"저, 정신 차렸으니까… 이것 좀 놔줄래……?"
"싫어."
"응?!"
호열을 끌어안은 품이 더욱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호열은 겉잡을 수 없는 감각에 목덜미까지 달아오르는 것을 고대로 느껴야만 했다. 잠시 말 없이 호열을 안고만 있던 백호가 말했다.
"고민이 있는데 말을 해주지 않으면, 그래도 도와주고 싶다면 이렇게 안아주는 게 좋대."
"누, 누가 그래……?"
"섭섭이가."
"…하……."
송태섭 시발 죽여버릴거야. 호열의 암녹색 눈에 서늘함이 내려앉았다. 눈 앞에 태섭이 약올리는 모습이 선했다. 호열이 주먹을 꽉 쥔다. 서로 본체까고 누구 하나 뒤질 때까지 싸워봐야 정신 차릴지.
"좀 괜찮냐?"
"어?"
"안아주면 좋다고 하는데, 어떤가 해서."
"어…괜찮아……."
좋지. 당연히 좋지. 호열의 표정이 단박에 풀어졌다. 호열이 눈을 감았다. 방금까지 선명했던 붉은 머리 소년이 지워지고 크고 듬직하게 자란 백호의 모습이 선명하게 호열의 눈 속에 자리했다. 놀라 굳어졌던 몸이 흐물하게 풀어졌다. 백호에게 완전히 등을 기댄다. 호열의 손 끝이 백호의 교복소매를 쥐었다. 등 뒤로 백호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호열이 천천히 눈을 떴다.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끝자락부터 검은 빛으로 덮이고 있었다. 바다숲에서, 그 산에서 백호를 돌려보낼 수 밖에 없었던 시간. 그 하늘. 호열이 그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기억을 지우고, 마을로 돌려보내고 난 후, 호열은 바다숲에서 어떻게 지냈나. 바다숲 근처조차 오지 않는 그 붉은 머리의 소년의 흔적이 있는지 찾느라 하루에 한 번은 바다숲의 외곽을 그렇게 헤매다가… 안그래도 산골 오지의 작은 마을에 사람이 하나 둘 떠나면서 마을이 있는 땅이, 명시된 주인 없이 요괴만 살던 바다숲이 있는 산을 매입한 자가 나타나 밀리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마을을 떠나던 남자가 붉은 머리의 소년을 품에 안고 산을 밀어버리는 매입자와 공사진행자에게 경고를 날리는 순간을 지켜보다가… 갑작스런 날벼락에 바다숲산에 살던 크고 작은 동물들이 도망치고, 부상을 입고, 죽고, 가족들을 지키다 죽음을 맞이한 친형에 분노한 태섭이 본체의 모습으로 공사를 진행하던 이들을 모두 죽이는 것을 지켜보다가, 기어이 모두 밀려버린 그 작은 마을과, 산을 지켜만 보다가…….
"……."
혼자라도 추억을 할 수 있던 곳을, 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뒤늦은 분노가 호열을 뒤덮었다. 공사 책임자와 땅 매입자만 죽인 태섭과 달리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인간을 죽이고, 그들이 쏟은 피를 모조리 뒤집어쓰고. 호열은 웃었던가. 울었던가.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도 이 무너져버린― 형태없이 사라져버린 산은 돌아오지 않는다. 붉은 머리 소년과 함께했던 추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추억도, 집도, 소년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호열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를 눈을 감는 것으로 삭히고, 눈을 뜨는 것으로 등 뒤에서 안아오는 백호의 온기를 기억했다. 추억은, 이제 없다. 남은 것은 기억 뿐이다. 회상으로만, 꿈으로만 만날 수 있는. 기억. 호열이 지워버린, 백호의 기억. 기억의 꿈. 남은 것은 호열 뿐이다. 백호는 기억하지 못 한다. 앞으로도 기억하지 못 할 것이다. 기억의 몫은 오롯이 호열이다. 감내하기로 했지 않은가. 호열은 제 손에 흥건히 적셔진 뜨끈하고 끈적한 피의 감각을 잊지 않았다. 열기로 뜨거운 백호의 손과는 다른, 붉게 물든 괴물의 손. 내가 끝을 알 수 없는 삶을 마감하고, 다시 태어나야만 먼저 손을 뻗어 만져볼 수 있는 소중한 사람. 호열의 손 끝이 조심스레 백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태섭이 했던 말이 웅웅 울렸다. 사랑하게 될 줄 알았다는 말, 그 말이 이후에도 이루어지길 바란다. 백호의 영혼은, 호열의 암녹색 눈에 온전히 새겨졌다. 호열은 백호가 무엇으로 태어나도 그를 기억하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만지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네가 나를 만지는 것은 얼마든지 좋아. 하지만 내가 너를 먼저 만지는 일은 없을거야. 나는 여전히, 너와 같은 존재로 마주하기를 원하니까. 그런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지만, 얼마든지 받아줄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네가 나를 만지고, 부르고, 닿아올 때마다 나는 크게 솟아오르는 파도를 억누르기 위해 항상 싸워야겠지만 그래도 좋아.
마을도, 숲도, 산도. 함께 했던 추억도 사라졌다.
백호가 떠올리려 했던 기억 역시 사라졌다.
그 모든 것은 호열이 안고 있다.
눈에 새겨두었다.
다음에, 같은 존재로 다시 만날 때까지 비밀로 하겠다는 결심은 여전하다. 견고해진다.
그것이 백호를 사랑하는 호열의 방식이니까.
호열의 시선이 어둠으로 완전히 물들어버린 하늘을 본다. 시선 끝은 어두워진 하늘 그 너머를 향해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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