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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피스/상디] 성장통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상디는 눈을 떴다.

마감 청소를 끝내고 잠이 든 지 두시간 만의 일이었다.

 

"...으...."

 

무릎을 감싸쥐며 소리죽여 짜증스러운 신음으로 이 늦은 밤 굳이 저를 지명해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맞이했다. 손톱 끝을 세워 관절 사이를 꾹꾹 눌러보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아픈 통증은 시원하게 쪼개지지 않았다. 재료 창고를 들락날락 하는데 평소보다 고작 한층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고 이러나.

 

“...으, 음....”

 

잠꼬대를 하는 척 신음을 가리고, 이불을 좀 더 끌어올려 완전히 파묻힌 상태로 상디는 무릎을 완전히 끌어안은 채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펴든 펴지 않든 아프다면 차라리 숨길 수 있는 게 나았다. 성장통이 당장에 낫는 법이라는 건 없으니까.

 

...자야 해.

 

이불 안의 어둠을 쳐다보다가 입안의 여린 살을 물어 입을 다물고 눈 역시 힘주어 감는다. 낫지 않는 증상을 견디는 데에는 잠만한게 없다. 잠을 자지 않으면 내일 일에도 영향이 간다. 통증 때문에 사라진 잠이라고 해도, 이 통증을 이기는 데에는 잠 밖에 약이 없다.

 

약. 진통제.

 

그 단어에 저도 모르게 발라티에 한 구석 의무실 기능의 방에 놓인 진통제 병의 형상이 떠오르려는 것을 상디는 애써 이불에 제 머리통을 짓눌러가며 지우려 애썼다. 약은 안 된다.

 

언제든지 자신을 꼬맹이 취급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망할 놈들의 야유는 뒤지도록 싫지만 결국 별거 아니라는 것도, 멀쩡히 들을 약이 있는 데도 꾸역꾸역 참아보려는 건 무식하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늘상 바다 위에 부상 중인 배에서는, 그리고 온갖 위험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는 레스토랑 주방에서는 언제든 그러한 약이 필요하고 간절해질 이유가 너무나 많다는 것 역시도 잘 안다.

 

있는 것을 일부러 손대지 않는 것은 의지의 문제지만 없는 것을 견뎌야 하는 것은 결핍의 문제다.

 

- 돈은 있는데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다니 웃기지 않냐?

 

감은 눈 속에서 쟁쟁이 울리는 목소리에 상디는 좀 더 힘을 주어 눈을 감았다.

 

그 결핍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겪은, 때문에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 통증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빌어먹을 노친네에게 뒤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니까 괜찮다. 참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성장’은 기쁜 일이니까.

 

두 손으로 간신히 쥐던 재료를 한 손으로 가득 움켜쥐게 되고, 달음박질치며 비질하던 외부 갑판의 거리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닿게 되고, 그렇게 한뼘한뼘, ‘어른’으로 다가가고.

 

하지만 다른 ‘형제’들이라면, 이런 시시하고 번거로운 과정이 없었을텐데 말이지이.

 

...시끄러워. 평소에는 떠올리지도 않았던 언젠가의 기억을 껴입고 떠오르는 부정적인 말을 가리듯 상디는 귀마저도 꽉 틀어막았다.

역시 반갑지 않았다. 쓸모없어 잊어버린 것들이 떠오를 만큼 나약하게 만드는 통증 같은 건.


 

물건이라는 건 아무리 아껴써도 결국은 망가지고 소모되는 법이다. 아무리 최고급의 레스토랑에서 조심스레 다루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식기와 각종 집기는 부서지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선박도 삭아내린다. 사람 또한 다르지 않아서, 아무리 여기저기서 문제만 일으키고 굴러들어온 폭탄덩어리 요리사들이라도 뭍과 완전히 연결이 끊겨 고립되어서는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발라티에의 사람들은 외부인들의 상상보다는 뭍과 자주 오가는 편이었다. 믿을만한 거래처와의 관계 유지를 위한 확인, 소모된 집기의 재구매, 스태프들의 생활용품 보충, 하다못해 개개인의 휴가 등 이유는 다양했고 오너 셰프는 별다른 이유가 없는 한 그런 상륙에는 딱히 제약을 두지 않았다. 그 스스로가 그다지 나가지 않는 것을 차지하더라도.

 

“....”

“왜.”

“...대체 이번엔 왜 나온거냐고.”

 

그런 오너 셰프가 몇 달만엔가 부두에 내려서는 모습을 보며 상디는 감추지 못하는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풋내기 녀석이 날붙이 잘못 골라서 엉뚱한 짓으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 보단 낫겠지.”

“내가 그 정도도 모르는 줄 알아!?”

“아직 자기 팔다리 가늠도 못하는 녀석이 말만 많아서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평소 같은 걷어차기도 없이 제프가 앞서서 걸어 나갔다. 분통이 터짐과 동시에 초조함이 새어나왔다. 이러면 안되는데.

 원래대로라면 다른 녀석과 함께 나왔을 상디는 발라티에의 물품 조달 뿐 아니라 전용 셰프 나이프 구매와 병원 방문이라는 개인적인 볼일을 계획 중이었다. 제프의 말마따나 자란 몸에는 어린아이의 작은 손에나 맞던 나이프로는 효율이 나지 않기도 하며- 이제야 비로소 개인의 셰프 나이프 소지를 허가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병원으로 가 발라티에의 상비약을 구매하는 김에, 통증에 대비한 개인의 진통제를 살 생각이었다. 동행 예정이던 녀석에게 둘러댈 만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생각해 두었으므로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갑자기 제프가 자신도 이번엔 뭍에 다녀와야겠다며 떠나기 직전 배에 몸을 실을 때까지는.

 

“뭐하냐 꼬맹이. 빨리 와라. 갈 길이 바쁘다.”

 

앞서서 걸어가던 제프가 고민에 빠진 이쪽을 돌아보며 턱짓을 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있는대로 얼굴을 찡그리며 상디가 그 옆으로 따라 붙었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처음으로 칼 고르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린다. 요리사에게 칼은 제 몸의 연장선이니까. ”

“안다고.”

“까불지 말고 들어라. 아무튼 그런 중요한 것, 한 번 구한 건 오래 쓰고, 닳아서 새 것을 구해도 그와 비슷하게 좋은 것을 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처음에 어떤 것이 좋은 지를 잘 알아둬야 하지 않겠냐.”

“그러니까 내가 그 정도는 혼자서 할 줄 안다니까....”

“그런 중요한 첫걸음을 신경 써주는 게 스승의 일인 거다. 멍청한 제자 놈아.”

 

그의 말에 잠시 멈춰서는 상디를 두고 제프는 말 없이 먼저 걸어나갔다. 이미 오래전에 익숙해진 의족은 오랜만에 흔들리지 않는 뭍을 딛는데도 덤덤히 걸어갈 뿐이었다.내내 안고 있던 걱정과 짜증이 순간적으로 불식했던 감각에 상디는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여간 열받게 하는 노친네였다. 약해지지 않은 순간에도 사람에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게.

 


 

상디는 셰프 나이프 뿐 아니라 몇가지 종류의 나이프를 넣고 둘둘 말은 보관 파우치의 묵직함을 느끼며 제프가 제가 한 말을 지켰으며, 저 혼자서 왔다면 새 칼을 쥔 느낌에 분별력 없는 애송이처럼 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음은 들러야 하는 곳도 있으니까 서둘러라.”

 

상디의 예상보다 더 깐깐하게 칼을 골라보며 빛나고 있던 제프의 눈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꾸러미도- 위대한 항로에서 들어온 신기술로 만들었다는 처음보는 조리도구- 한몫 했겠지만 자신이 한 말대로 실현된 것이 뿌듯한 것으로 보였다.

 

“알겠어.”

 

그래. 덕택에 질 좋은 칼도 손에 들어왔을뿐더러, 종류도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살 수 있었다. 상디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에 병원에 슬쩍 빠질 수 있는 찬스만 있으면 생기면 괜찮을 텐....

 

“...정형외과? ”

“오냐.”

 

제프가 앞서 도착한 곳의 문패를 보며 상대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지만 제프는 간판을 읽은 것 만으로는 칭찬할 게 없다는 듯 시큰둥한 목소리를 내었다.

 

“노친네 어디 아파?”

“그럴 리가 있겠냐. 볼일이 있으니까 오는 거지. 꼬맹이 주제에 누굴 걱정하는 거냐.”

 

남은 걱정을 친절하게 무시하고 냅다 문을 여는 통에 화를 낼 틈도 없이 상디는 허둥지둥 뒤를 따라 들어갔다. 제프는 뒤에서 따라오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다는 듯 단번에 접수 데스크에 섰다.

 

“아, 안녕하세요, 셰프님!”

“그래. 예약시간을 좀 넘어 왔는데. 많이 늦었나?”

“아뇨. 딱 맞게 오셨어요. 다음 손님이 나오면 들어가시면 될 것...아, 지금 들어가세요!”

 

몇 번이나 왔었던 사람을 마주하는 듯한 쾌활하게 마주하는 접수원 누님의 목소리에 덤덤하게 대꾸하는 제프를 보면서도 이게 무슨 일인가 파악이 안되는 와중에 진료실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제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먼저 가지 않고 뒤를 돌았다.

 

“자꾸 얼 빼지 말고 빨리 움직여라, 꼬맹이.”

 

그가 말하지 않아도 지금 자신은 제대로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이고- 이거 제법 아플텐데 어떻게 그냥 버틸 생각을 했습니까. 낫는 약은 없지만 도움될만한 파스나 찜질기는 드릴테니 쓰시죠. 낮에는 별로 안 아프다고 무리하면 밤에 더 아프니까 신경 쓰시고, 일과가 끝나고 자기전 가급적 마사지 같은 거 잘 해주고.”

“대신 먹는 약은 없나?”

“없어요. 없어. 워낙에 자라는 속도도 빠르니 만큼 아프기는 할텐데. 앞으로는 무리하지 않게 신경 써주시죠.”

 

제 무릎을 보던 의사가 안쓰럽다는 듯 말한 뒤 책상 위의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어내려갔다. 상디는 얼떨떨하게 바짓단을 내렸고, 그 얼떨떨한 상태는 진료실을 나와 접수처 앞에서 수납을 기다리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언제 알았어?”

“언제고 자시고, 요 근래에 네 녀석의 작업복이 작아지고 있는 거나 잠 설쳐서 낮에 비실거리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모르겟냐. 마침 뭍에 올 시기이기도 하니 이때 병원에는 가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여기요. 들어가세요, 셰프.”

“고맙네.”

 

마침 나타난 접수원이 건넨 꾸러미를 또 덥석 들어 먼저 병원을 나서는 제프의 곁에서 상디가 허둥지둥 따라 붙었다.

 

“그거 줘, 내 거잖아.”

“됐다. 공용 상비약도 있는데.”

“....”

 

그렇게 말하며 덤덤하게 걷고 있는 제프의 옆모습을 보며 상디는 오늘 뭍에서 내린 이후 내내 겪는 이상한 기분을 다시 한번 느껴야 했다. 어떻게 해소하는 지 방법을 알 수 없는 묘한 것.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심해지는 듯한 그런.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다.”

“뭐?”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무덤덤하게 내미는 목소리 사이로 의족이 도로에 부딪히는 규칙적인 소리가 중간중간 섞인다.

 

“성장통도 그렇고, 기술을 배우는 도제가 자기만의 도구를 쓸 수 있게 되는 것도. 누구든 성장이라는 걸 하면 다 겪는 일이다. 다 겪는 일이라는 건 너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배운 놈들은 그게 어떤 건지 다 알고 있단 이야기야. 그걸 가지고 이상하게 혼자 끙끙댈 필요는 전혀 없어. 주변 녀석들도 다 알거다.”

 

제프가 들고 있는 약 꾸러미와 상디가 들고 있는 칼 파우치가 툭툭 부딪혔다.

 

“... 그 주변 놈들이 조금 빌어먹을 놈들이 많다만.”

“‘조금’이 아니라는 건 알긴 하지?”

 

답지 않게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얼버무리듯 흘린 말에 척수반사적으로 딴죽을 걸 수 있는 것은 떠올리고 있을 면면이나 그 인상이 그닥 틀리지 않을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상디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무튼 정말 별거 아닌 일에 피도 안 마른 머리 시끄럽게 만들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제프의 걸음이 반 발자국 빨라졌다. 그 살짝 어긋난 리듬 사이로 상디는 생각 했다. 별거 아닌 일이라면. 그렇다면.

 

“…영감탱이.”

“왜.”

 

그 별 거 아닌 일로 인해 자꾸 이상해지는 기분은 혹시나.

 

“...오늘 고마워.”

 

똑같이 별거 아닌 것으로 되돌려주면 되는 걸까.

 

“....알았으면 빨리 와라. 이번에야 말로 식당 예약 늦겠다.”

 

의족이 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기분은 여전히 이상했다.

그렇지만 더는 불안하지 않았다.

 

“...식당까지 예약했어?”

 

의족의 소리와 어긋나던 제 발소리를 고치고, 어깨에 맨 파우치를 다시 한번 고쳐 매며 멀리 벌어지지 않은 거리를 따라잡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 순식간이었다.

 

“이 근처에 전에 알던 녀석이 낸 가게가 생겼어. 솜씨가 괜찮지. 제대로 된 요리사가 되려면 많이 경험해봐야 한다.”

“당신이 사는 거지?”

“내가 급료 주는 애송이 호주머니를 털어 밥을 먹으라고? 차라리 바닷물을 퍼먹지.”

“그건 맞는 말이네.”

“건방진 애송이가.”

 

살갑지 않은 도제가 흔들리지 않는 거리를 걸어 나갔다.

아무 것도 아니게. 그냥.


다시 원피스에 빠진 지인이랑 이야기 하다가 지인 최애인 상디로 생각난 이야기입니다.

놀랍게도? 20년 전 본진으로 잡았을 때 포함해서 상디 이야기는 처음으로 써봤습니다. 아니 진짜로;

그치만 예전에 원피스 덕질할때(대략 20년전)는 상디의 과거가 지금처럼 드러나질 않았어서 그땐 정말 못 썼을 거 같네요.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쓰게 되었는데 제법 신기한 경험이에요.

사춘기…성장통이 올때쯤을 생각하고 썼는데 그 나잇대의 남자애의 너무 멘탈이 말랑하지 않나 싶긴 한데

아프면 맘도 약해지고 사춘기니까 그러려니 해주세요.

원래는 원피스 덕톡하자고 약속한 자리에 두 분에게 책자로 만들어서 드리고 싶었는데 마감을 못 맞춰서…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봐주실거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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