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크로

[도플크로] 요람

원피스 by 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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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도플라밍고는 쓰레기장에서 살았다. 안락한 저택에서 쫓겨난 이래로 그에게 집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는 언제나 그 악취가 나는 쓰레기장뿐이었다.

어머니가 죽은 곳. 아버지를 살해한 곳. 동생이 그를 버리고 도망친 곳. 그러나 동시에 그가 새 가족을 만나고 함께 살아온 곳.

장소가 바뀌었다 한들 그곳이 쓰레기장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저마다 비슷한 처지의 하자품들이 모인 커다란 쓰레기장. 그것이 그의 집이었다.

그 사실이 때로는 참을 수 없이 지긋지긋하기도 했지만 그는 결국 그곳을 사랑했다. 그야 집이니까. 그의 가족들이 살아가는 아늑한 보금자리. 그가 있을 곳. 그래도 되는 장소.

그러나 그마저도 잃은 그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그로서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임펠다운의 가장 밑바닥. 외부에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세계 최악의 악당들만이 모인다는 이 더러운 구덩이는 의외로 조용했다. 다른 층의 요란하고 조잡한 고문 따위는 이곳의 죄수들에게 통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무료함. 끝없이 이어지는 지루함뿐이었다.

빛 한 점 들지 않아 어두컴컴한 내부는 바로 앞도 식별할 수 없다. 어둠에 익숙해진다 한들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렴풋한 기척 뿐. 잘난 견문색도 해루석 수갑을 찬 채로는 무용했다. 수감자의 대부분이 악마의 열매 능력자이니 고통을 주는 방법으로는 썩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어둠은 가장 원초적인 공포라고도 하지 않던가.

임펠다운 LEVEL 6 안에서도 내밀한 곳에 위치한 도플라밍고의 독방 또한 적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바깥에서 스며든 습기로 인해 쿰쿰해진 공기, 오래된 피와 오물이 섞여 내는 악취가 맴도는 그곳에는 다른 죄수들이 내는 소리조차 닿지 않았다. 암살을 우려한 것인지 마젤란을 비롯한 간수들이 종종 오가기는 했지만 옴짝달싹도 할 수 없도록 사지가 묶인 그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나마 아직 신문을 들여올 정도의 입김은 남아 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일까.

도플라밍고는 매수해둔 간수에게서 바깥의 소식을 전해 들을 때 외에는 대개 가만히 누운 채 시간을 죽였다. 언제 나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무료한 일상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한 번 침입을 허용했다 한들 여전히 임펠 다운은 철통방어를 자랑했고 탈옥 사건 이후로 경계는 더 삼엄해졌다. 애당초 금사자 시키 같은 정신 나간 방법이 아니고는 탈옥을 허용한 적이 없던 장소다. 그런 곳이 한 시대에 두 번이나 뚫리기를 바라는 건 허무맹랑한 꿈에 불과했다.

하지만 비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도플라밍고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박살 내고자 했던 이들의 발아래에 비참하게 갇혀있는 꼴이 되었을 텐데도. 아끼던 패밀리 또한 임펠 다운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될 테고, 아마도 LEVEL 6에 있는 그로서는 영영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음에도 그의 마음은 평온했다. 스스로도 조금 놀랄 정도였다. 좀 더 끔찍한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래.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은 있었다. 급작스러운 몰락은 그와 그의 패밀리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기반은 얼마든지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다. 칠무해의 칭호 또한 편리한 수단일 뿐, 대체할 길은 많다. 하지만 잃어버린 이들은 되찾을 수 없고 깨어진 신뢰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돈키호테 패밀리는 명백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장난감 왕국이 무너지고 숨기고 있던 비밀이 드러나면서 얻게 된 원한, 무산된 거래로 인한 채무는 온 바다에 퍼져 있다. 천운이 따라 탈옥에 성공한다 해도 약화된 그의 패밀리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울 터였다. 그가 알고 있는 수많은 정보들은 또 어떻고. 임펠 다운에 갇힌 뒤로도 천룡인들은 끊임없이 자객을 보내오고 있었다. 오히려 이곳의 철창과 간수들이 그를 지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리어 편안한 기분이 드는 건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이었다. 도플라밍고는 오래전부터 지쳐 있었다. 8세에 하계로 내려온 이래로 그의 삶은 마치 어두컴컴한 터널을 걷는 것과 같았다. 언제 끝날지 모를 긴긴 터널을 빛 하나 없이 걷는 삶. 그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고, 함께 걷는 '가족'들의 온기에 기대어 밤의 추위를 이겨내는 나날.

그를 지금껏 움직이게 한 것은 관성에 가까운 분노였다. 그렇기에 지난 수십 년 간 쌓아 올린 것들이 무너지고 좌절되고 만 지금, 그는 무력감과 함께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그것이 비록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에 불과하며 일시의 착각일 뿐일지라도 괜찮았다. 휴식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그러니 한동안은 커튼 뒤편의 방관자로서 무대 위를 구경하며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몰랐다. 지금의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러웠고, 곳곳에서 소란이 터져 나왔다. 그의 부재가 불러온 파문이 시대의 움직임과 맞물려 예상하던 것 이상으로 거대한 파도가 되고 있었다.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변해가는 꼴이 얼마나 유쾌한지. 긴 휴가를 위한 여가로는 차고 넘치는 유흥이다. 이만하면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생활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상한 옷을 입은 남자가 손끝으로 그를 가리키며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아앗~!! 제로쨩, 여기여기! 밍고 발견~!!!"

여러 의미로 지나치게 요란한 남자는 다소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글쎄. 임펠 다운 최하층의 독방에서 마주칠 만한 인물이 아니리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너무 오래 잔 나머지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걸까. 현실감이 들지 않아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데, 임펠 다운의 간수들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점잖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런 곳에 처박혀 있었나. 독방이라, 신세 한 번 좋군."

"크로커다일...?"

익숙한 시가향이 코끝을 스쳤다. 도플라밍고는 이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하지만 어째서 그가 여기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매의 눈과 천냥광대가 함께라면 침입 자체야 불가능하지 않을 테지만 그들이 재차 임펠 다운을 습격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크하하하! 얼빠진 얼굴 말라고. 겸사겸사 들렀을 뿐이니까. 여기에 볼 일이 있었거든. ...일손이 부족하기도 하고. 설마하니 그 사이 개과천선 해버린 건 아니겠지, 도플라밍고?"

당황스러운 심정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크로커다일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2년 전의 전쟁에서 도플라밍고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그의 어조는 익살스럽고, 어쩌면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덩달아 웃음이 났다.

"물론이야, 악어 자식.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은 기분인 걸."

충동적인 대답을 내뱉은 건 그 탓일 것이다. 답지 않은 크로커다일의 태도에 왠지 모르게 유쾌해져서, 조금은 어울려줄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좋아. 특별히 거둬주지, 애송이. 사바세계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의 답을 들은 남자는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리며 웃었다. 제 이름처럼 서늘하고 교활한 분위기를 풍기는 짓궂은 웃음은 등줄기를 오싹하게 할 만큼 위협적이었으나 동시에 지독히도 매혹적이었다.

"훗훗훗. 감당할 자신은 있나? 난 꽤 적이 많은데 말이지."

"자기 개가 벌려놓은 것도 수습하지 못하는 놈은 주인 자격도 없지."

이번만큼은 저를 깔보듯 내려다보는 시선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도플라밍고는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악마의 아가리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래도 괜찮다. 지옥이라도 제게는 즐거울 테니.

"아아, 이런. 개 취급인 건가! 뭐, 좋아! 따라가 주지!"

즉흥적인 결정이었지만 어쩐지,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돈키호테 패밀리는 순조롭게 크로스길드에 섞여들었다. 간부 대부분과 진작 안면이 있던 사이였기에 새삼 적응을 할 것도 없었다. 일종의 사업적 경쟁자였던 버기즈 딜리버리의 일원들과는 약간의 갈등이 생길 뻔했으나-

쨍그랑-!

"끼아아아악~~!!!"

"엇, 버기 단장?!" 

"우오오오!! 버기 단장께서 오셨다! 자리 내어드려!"

"여긴 웬일이십니까? 역시 몸소 신입들의 기강을 잡으러?!" 

"어, 어어? 그, 그렇지! 크흠! 전에는 경쟁자였다지만 이제는 이 버기즈 딜리버리! 아니, 크로스길드의 단원이 되었으니 말이지!"

크로커다일이 버기를 그 사이에 던져넣자 곧바로 해결됐다. 창밖으로 내던져진 버기가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으며 인파에 파묻히나 싶더니 어느새 도플라밍고의 패밀리와 버기의 부하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연회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됐나?"

"슈거 주변에 인형 밖에 없는데, 이래도 괜찮은 건가?"

"...설마 저게 전부 버기의 부하들이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맞는 것 같은데."

"...."

작은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웃어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놀림당하기 쉬운 피카마저 문제 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나니 딴죽을 걸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이래로는 평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의 패밀리는 종종 크로스길드의 다른 직원들과 함께 임무를 나갔다 돌아왔고 도플라밍고 또한 버기즈 딜리버리와의 연회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로 제 옆을 떠나지 않게 된 슈거와 함께 시답잖은 일을 처리하러 이따금씩 외출을 했다.

임펠 다운을 탈출할 때에 각오했던 위협은 없었다. 사황의 이름값 덕인지 아니면 크로커다일의 수작인지는 알 수 없다. 도플라밍고에게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구태여 들쑤실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떠한 위협도, 문제도 없는 평화는 때때로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는 날이 갈수록 몸집을 불리는 불안감에 몸서리를 쳤다.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처음 크로스길드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짐작할 수 있던 사실이지만, 크로스길드의 업무 대부분은 크로커다일을 통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크로스길드의 창립자이자 경영자, 출자자는 버기가 아닌 크로커다일이었으므로 결정권 또한 대개 그의 손에 있었다. 그 사실은 커다란 위험을 수반했다. 크로커다일에게 도플라밍고는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닐 테니까.

애당초 친분이 있다고 하기도 어려운 관계였다. 불규칙한 만남들 속에서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약속도 존재하지 않았다. 미래를 기약하는 것은 물론이요 조그마한 감정조차도 명명되지 않았다. 그 관계에 구태여 이름을 붙이자면 섹스파트너, 그리고 유용한 거래 상대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고작 그 정도의 연결고리는 해적의 비즈니스에서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실제로 크로커다일이 칠무해의 칭호를 박탈당하고, 임펠 다운에서 탈옥한 뒤로 그들의 개인적인 만남은 끝이 났다. 같은 칠무해라는 얄팍한 안전장치 없이는 성립될 수조차 없는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하물며 사업적으로도 해적으로서도 닮은 구석이 많은 상대다. 도플라밍고와 크로커다일은 서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동시에 지독할 정도로 욕심이 많았다. 마치 아귀와 같다.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명령을 듣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릴 경쟁자를 용인할 해적은 없었다. 도플라밍고 자신이 크로커다일과 같은 입장에 있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격변하는 정세를 헤쳐가기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하다. 한껏 부풀려진 위명의 털 끝조차 닿지 못하는 연약한 우두머리를 가진 크로스길드에게 돈키호테 패밀리는 분명 최선의 선택지였겠지.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당장의 일일 뿐이다. 강대한 세력에는 언제나 강자가 모인다. 잠깐의 틈만을 메우고 나면 그들의 쓸모는 끝. 그때부터는 크로커다일이 구태여 그들을 감내할 이유가 없었다. 돈키호테 패밀리는 그에게 있어 쉽게 쓰다 버릴 소모품에 불과했다. 제 체면을 신경 쓰는 남자이니 총알받이로 내몰 정도로 노골적으로 굴지는 않겠지만 그뿐이다.

임펠 다운을 떠나올 때에 느꼈던 영문 모를 고양감은 칼라이 바리 섬에 도착할 무렵에 이미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순진한 낙관을 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나이가 들었고, 많은 것을 지고 있었다. 물밑의 견제 정도는 마땅히 기다리고 있을 난관이다. 다가올 모든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플라밍고는 늘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그렇기에 몇 달이 지나도록 지속되는 평화는 그를 두렵게 했다. 크로커다일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버거운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편할 정도였다. 때때로 사황의 이름값을 노리는 간 큰 멍청이들은 나타났으나 대개 도플라밍고가 나설 새도 없이 처리되었다. 혼란을 등에 업은 사업은 순항만이 계속됐다. 해적왕을 향한 레이스 역시, 의외로 그리 격렬하지는 않았다. 그런 안락한 생활에 차츰 젖어 드는 감각은 그야말로 늪과 같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보호받는 기분과도 닮아 있었다. 

그를 인지한 순간 문득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플라밍고는 자신이 어느새 긴장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기야 인간인 이상 발휘할 수 있는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런 위협도 없는 나날 속에서까지 계속해서 경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무슨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란 말인가. 순진함이 도가 지나쳤다. 잠깐의 평화만으로 벌써부터 해이해진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그는 서둘러 정신을 다잡았다. 이 또한 크로커다일의 책략의 일부임이 분명했다. 수십 년 간이나 영웅 행세를 하며 시민과 해군 모두를 감쪽같이 속인 남자다. 그가 사람의 심리를 뒤흔들고 믿음을 주는 데에 능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트릭에 당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다. 도플라밍고는 마치 다짐하는 것처럼 제게 되뇌었다. 모든 건 단순히 저를 방심시키기 위한 계획에 불과하다. 진실은 단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거짓된 모래성일 뿐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도플라밍고는 크로커다일로부터 새로운 일을 받았다.

"처리할 놈이 있다."

"그래? 훗훗, 마침 심심하던 차였는데 잘 됐군. 슈거를 불러오마."

"아니. 이번에는 나와 간다. 상대가 꽤 거물이야. 네놈이면 부족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때에 괜한 위험부담을 질 수는 없지."

둘만의 외출. 상대가 선장의 목에 8억의 현상금이 걸린 거물이라고는 하지만 크로커다일이 함께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밑의 떨거지들은 슈거만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위험부담을 질 수는 없다고? 그런 거였다면 꼭 크로커다일일 필요는 없었다. 조직의 운영을 모두 떠맡은 만큼 크로커다일은 몹시 바빴고, 섬을 벗어나는 일은 드물었다. 도플라밍고는 그가 드디어 위선을 집어치우고 본심을 드러내려는 것이라 확신했다.

함정일까? 어쩌면 정면으로 부딪혀올 생각인지도 모른다. 교활한 남자이지만 그는 자존심도 강한 편이니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그가 무엇을 준비해두었든 맞받아칠 자신이 있었다. 먼저 선수를 쳐도 좋을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하던 분노와 호전성이 조금 누그러졌다 해도 도플라밍고의 근본은 여전히 해적이었다. 적극적으로 빼앗지는 않을지언정 걸어온 싸움은 마다하지 않는다.

크로스길드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을 뿐, 신뢰나 유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다. 크로커다일의 입버릇처럼 비즈니스에 불과한 이들이 패자의 손을 들어줄 리 없었다. 이 세상은 승자만이 정의. 해적에게 약탈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죄는 빼앗긴 약자에게 있다. 도플라밍고가 크로커다일을 죽이고 돌아온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출항일은 바로 이튿날이었다. 그들은 항해를 보조할 선원이 필요하지 않은 소형선을 타고 항구를 나섰다.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함이라고는 해도 의아할 만한 일이었다. 악마의 열매를 먹은 이들은 모두 바다의 저주를 받는다. 도플라밍고야 하늘길을 통할 수 있기에 비교적 운신이 자유롭다지만 크로커다일은 아니었다. 배가 난파하기라도 하면 그는 꼼짝없이 죽게 된다. 그런데 아무런 방책도 없이 저와 단 둘이 배를 탄다고? 도플라밍고가 손짓 한 번 하기만 해도 이 변변찮은 배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 텐데도 크로커다일은 경계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자만에서 비롯된 방심인지, 아니면 자신을 속이기 위한 계략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고작 하루 남짓한 짧은 항해건만 도플라밍고는 내내 크로커다일의 눈치를 살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긴장을 늦추는 순간 물어뜯어 주겠다고 자신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선뜻 이를 드러내지 못했다. 여느 때와 같이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한 크로커다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드러내지 않았다. 무방비한 듯도, 부러 틈을 내어주는 듯도 한 그의 태도는 도플라밍고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작전은 단순해. 놈의 세력은 규모가 상당하지만 내실이 없다. 3년 전 아카이누에 의해 해적단이 괴멸하고 혼자 도망친 이후로 뒷세계의 떨거지들을 그러모아 만든 조직이라니 알 만 하지. 네놈의 패왕색으로 적당히 쓸어버리고 놈의 목을 치면 끝. 이의 있나?"

"글쎄. 고작 그 정도로 충분한 상대라면 네가 함께 온 이유를 모르겠는데. 나도 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 목에 걸린 값에 비해 별 볼 일 없는 놈이다. 후후훗. 단지 그만한 놈을 상대로 위험부담을 운운한 거라면 나를 얕보는 걸로 밖에 들리지 않는걸..."

날카로운 도플라밍고의 시선에도 크로커다일은 작게 한숨을 내쉴 뿐, 일말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뻔한 소리를 하게 만들지 마라. 놈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지도 알 텐데? 놈은 10여년 전부터 세계정부 가맹국을 집요하게 공격해왔다. 머저리 같은 짓이라는 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지. 하지만 아직 살아 있잖나? 오랫동안 해군의 손길을 피했을 뿐더러 아카이누와 마주하고도 죽지 않았다는 건 뭐라도 숨겨놓은 한 수가 있다는 뜻이다. 강운이든 뭐든. 더군다나,"

그는 반쯤 타들어 간 시가를 모래로 만들며 도플라밍고와 눈을 맞췄다.

"세계정부 가맹국의 왕이 되겠다는 그 멍청한 목적이 뭐 때문에 시작되었는지는 뻔한 것 아닌가? 호되게 데이고 나서는 몸을 사리고 있던 놈이 이제서야 슬금슬금 기어나와 하필 우리를 건드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주제넘은 경쟁심이라도 명백히 네놈을 의식하고 있는 상대다. 직접 부딪혔을 때 어떻게 나올지 몰라."

성가신 기색이 역력한 그의 눈빛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화는 나지 않았다. 그에게서 다른 속셈을 읽어내기 어려운 건 그의 노련함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모든 게 도플라밍고 자신의 착각에 불과한 걸까.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의 짧은 브리핑이 끝난 뒤에도 도플라밍고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 순 떨거지들 뿐이군."

배가 목적지에 도착한 직후 시작된 작전은 사실상 도살에 가까웠다. 그들은 어떠한 방해도 없이 모두 육편과 모래로 된 길을 만들며 목표물의 거점 중앙까지 파고들었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목표물이 눈을 까뒤집고 덤벼들었지만 그조차도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크로커다일의 우려와 달리 단 두 합 만에 목이 떨어진 놈을 뒤로 하고 그들은 텅 빈 거점을 뒤져 장부와 거래서, 모아둔 재화를 모두 챙겨 섬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크로커다일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지루해 보이는 낯으로 덤벼드는 날벌레들을 모래로 만들었고 거점을 턴 뒤에는 곧장 배로 돌아갔다. 도플라밍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의 뒷모습을 쏘아보다 마지못해 배에 올랐다. 키를 잡고 해도를 훑던 그는 뚱한 기색의 도플라밍고를 돌아보지조차 않고 입을 열었다.

"이왕 나온 김에 식사나 하고 가지. 바로 다음 섬에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이지? 이번에야말로 본색을 드러내려는 셈일까? 여전히 확신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꺼림칙한 거부감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곧장 패밀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피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도플라밍고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침묵으로 수긍의 뜻을 대신하고 선실에 들어박혔다. 크로커다일이 말한 섬에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니 잠시나마 쉴 수 있을 것이다.

레스토랑은 해변에 있었다. 미리 예약을 해두기라도 한 건지 직원은 크로커다일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들을 텅 빈 꼭대기 층으로 안내했다. 도플라밍고는 곧바로 식탁을 채우는 음식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나칠 정도로 준비가 되어있는 것은 제쳐두더라도, 메뉴 선정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차라리 바비큐를 내어왔다면 나았을 지도 모른다. 이러나저러나 불쾌하기는 마찬가지겠지만 랍스터를 메인으로 한 해산물 요리 만큼은 아니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도플라밍고가 크로스길드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들은 단 한 번도 식사를 함께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행위 전에 기분을 돋우기 위한 술 한 잔이 전부였다. 도플라밍고의 탈옥 이후에도 연회에서나 종종 함께했을 뿐, 이런 식으로 마주 앉은 일은 이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하게도 크로커다일이 자연스럽게 그의 기호를 알게 될 기회는 없었다. 거창한 비밀 따위도 아니니 크로커다일이 조사를 통해 알게 되는 거야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건 또 다른 일이다.

단순한 배려에 불과할 리는 만무했다. 크로커다일이 저를 배려한다니,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소리도 없을 것이다. 정보력을 과시해 압박하려는 의도였다기에는 하잘 것 없는 시도였고 방심시키고자 한 것이라면 오히려 역효과다. 도플라밍고는 입맛이 없는 척 음식을 뒤적거리며 크로커다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식탁 위의 음식을 음미하고 있었다.

"변방의 섬에 있는 레스토랑 치고는 나쁘지 않은 맛이야."

후한 평론에 이어 또 다른 메뉴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을 보면 그가 정말 식사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플라밍고는 평소보다 조금 처져있던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훗훗. 네가 먼저 식사를 다 권하다니 별난 일이 다 있군. 유혹이라도 하려는 건가?"

능청스러운 물음에 크로커다일의 미간이 조금 삐뚤어졌다. 도플라밍고는 아직 답이 없는 그를 향해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렇잖아. 늘 그렇게 차갑게 굴었으면서 갑자기 단둘이 데이트라니. 그러고 보면 네가 칠무해를 나간 뒤로는 줄곧 소홀했지. 그동안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걸. 다른 상대를 구했나?"

"흥. 같은 취급 하지 말아주시지. 누구처럼 발정이 나진 않아서 말이야. 단순한 기분전환이다. 그 악취미적인 섬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기분이 울적해지니까."

그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일축하고는 음식을 꽂은 포크를 도플라밍고의 입에 쑤셔 넣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도플라밍고는 움찔 몸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크하핫! 웃긴 얼굴이군."

"너..."

"너무 열 내지 마라. 독 같은 건 들어있지 않으니 마저 식사나 하자고. 설마 내가 그런 치졸한 수를 쓸 것 같나?"

피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악인이다. 하지만 도플라밍고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입 안의 음식을 씹어 삼켰다. 탱글탱글한 랍스타의 집게살이 잘게 부서져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크로커다일은 섬의 보석상을 뒤져 반지를 몇 개 샀다. 짧지 않은 쇼핑이 끝나고야 그들은 칼라이 바리 섬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하루가 조금 넘게 걸리는 항해는 전과 마찬가지로 순조로웠다. 섬에 도착하고 크로커다일의 집무실에 들어설 때까지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그만 쉬어도 좋아."

전리품들을 집무실에 내려두자마자 크로커다일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벌써부터 서류에 고개를 처박은 그의 모습에 맥이 탁 풀렸다. 줄곧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줄이 느슨해지면서 오히려 부아가 치밀었다.

"어이, 악어 자식."

"또 뭐냐."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거냐."

펜을 꺼내 들던 크로커다일의 손이 우뚝 멈추어 섰다.

"이제 그만 솔직해지자고. 이런 시시한 소꿉장난도 끝낼 때가 됐잖아? 고작 그런 곳에만 써먹을 거였다면 나를 빼낼 이유가 없지. 아니면 뭐, 자선사업가가 되기라도 한 건가?"

쏘아붙이는 말에 그가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옅은 짜증과 피로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얼굴이 도플라밍고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으나, 그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크로커다일이 선수를 쳤다.

"너까지 날 귀찮게 할 셈이냐, 도플라밍고?"

질린 것 같은 어조에는 발뺌하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틈을 주지 않고 마저 말을 이었다.

"기껏 일정을 빼서 산책까지 시켜줬잖나. 스릴을 찾는 건 미호크만으로 충분해. 버기가 치는 사고를 감당하기도 빠듯하다. 이미 여유가 없어. 최대한 힘을 아껴둬도 모자랄 판이야. 아무 데나 싸움을 걸 수는 없단 말이다."

지친 표정으로 퍼붓는 말에 도플라밍고는 당황을 금치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물러서기에는 그 또한 신경줄이 한계에 가깝게 닳아있었다.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야! 나는 그저,"

"그럼 뭐. 왜 널 그냥 놔두냐고? 진심으로 그런 게 궁금한가?"

페이스를 되찾고 다시 말을 하기가 무섭게 크로커다일이 치고 들어왔다. 다른 소리를 하나 싶더니 갑자기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찔러오는 말에 저절로 입이 다물렸다. 크로커다일은 흥미를 잃은 것처럼 서류를 향해 시선을 돌린 채 대답했다.

"내부 견제 따위를 위해 일을 벌이는 건 낭비다. 거기다, 뒤늦게 들어온 애송이에게 고꾸라진다면 내가 고작 그 정도 그릇 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던 거겠지. 유감을 가질 생각은 없어. 그리고 적어도 당장은 넌 내 수하지 않나. ...쓸만한 개를 삶아먹는 머저리는 아니야. 날 물거나, 늙어 죽거나. 그 전까지는 잘 보살펴주지."

냉담하게마저 들리는 말이지만 도플라밍고는 그 안에 담긴 미적지근한 온기를 눈치챘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는 허탈한 기분이 들어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았다.

"뭐야, 그게..."

저도 모르게 맥없는 말을 토해낸 그는 어쩐지 홧홧하게 달아오른 뺨을 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제 모습이 꼴사나우리라는 것도, 그것을 크로커다일에게 보일 수는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으나 몸을 일으킬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크로커다일은 그런 그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한 듯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계속됐다. 그 규칙적인 소음이 도플라밍고를 차츰 잠에 빠져들게 했다. 느리게 깜빡이던 눈꺼풀이 완전히 닫히고 굳어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무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도플라밍고는 오래된 꿈을 꿨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유년기.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잠들던 어느 날의 풍경이었다. 일을 하는 아버지의 사각거리는 만년필 소리, 동화를 읽어주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품에 안긴 어린 로시난테의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그를 감쌌다.

고른 숨소리에 고개를 든 크로커다일은 어린아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잠에 든 도플라밍고를 흘긋 바라보고는 후,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애송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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