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

우주의 법칙 2

같은 대학 AU 명헌X백호


2. 사랑은 어떤 형태로 남는가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우주의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For small creatures such as we the vastness is bearable only through love.)

-<Contact>, 1985

한 달 후, 백호는 미국으로 떠났다. 명헌보다 빠른 시간에 살고 있던 그 애는 위치이동을 함으로써 그와 속도를 맞춰주었다.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을 거라더니 북산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된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끝으로 정말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그렇게 되뇌이며 명헌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프로팀에서의 출전 횟수가 늘어가고 있었다. 강백호라는 우주에서 살아도 그는 농구선수였기에 자신의 자전주기를 지켜야 했다.

“너 어디 아프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도 ‘이선좌’ 가 되면 좋을 텐데. 아니면 ‘중복된 질문입니다‘ 이런거. 이번 달에만 벌써 마흔 번째 듣는 질문에 대충 흘려 대답하며 명헌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면 짜증보단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왜 감독과 코치, 동료팀 선수를 포함해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 줄줄이 그에게 괜찮냐고 물어오는 걸까. 이제는 습관이 된 아침 러닝,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는 훈련. 명헌은 천천히 자신의 일상을 검산해 봤지만, 특별히 문제 되는 것은 없었다. 그럼, 지금 몰래카메라를 당하는 중인 걸까. 풀지 못할 난제였다.

이 상황에 대한 해답을 알려준 것은 우연히 발견한 한 통의 이메일이었다. 수십 통의 메일이 쌓여있는 메일함에서 발굴된 그것은, 고교 시절부터 구독하고 있던 과학 잡지의 구독권 갱신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알림이었다. 그리고 명헌은 대학 졸업 이후 이 잡지를 한 번도 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날 경기는 엉망진창이었다. 한숨도 잠들지 못한 탓에 집중력이 흐트러졌고 불필요한 동작들이 많아짐에 따라 체력 소비도 훨씬 컸다. 결국 1쿼터 이후 교체되어 벤치로 돌아와야 했다. 평소 명헌의 컨디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독과 코치가 파악하고 있었던 터라 큰 질책은 없었지만, 그 스스로가 용서할 수 없었다. 자전축부터 비틀려 있었으면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결국 시즌 마무리를 한 달 남겨두고 명헌은 무너져 내렸다. 세간에는 신인왕 선수의 추락이라는 기사가 떠돌아다녔다. 누구는 가지고 있던 열강이 여기까지였다 평했고 다른 이는 여자 문제 일 거라고 입을 댔다. 그런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동료들이 분개했지만, 명헌은 여자는 아니지만 연애 문제가 맞으니까 하며 순순히 수긍했다. 그렇지만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게 된 것은 못내 아쉬웠다.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명헌은 머리맡에서 째깍대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새벽 다섯 시를 맞이하고 있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 자연스럽게 백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애가 말하던 사랑의 다른 형태에 대한 것을 생각했다. 어쩌면 이 불면증도 사랑의 다른 형태가 아닐까? 저 멀리 밀쳐두었던 이불을 끌어모아 안는다. 강백호가 보고 싶었다.

알람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을 때는 9시였다. 무거운 머리를 일으켜 침대 밖으로 발을 뻗자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바닥이 피로를 쫓아낸다. 구단에서 예약해 놓은 상담이 12시였으니 외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도 4시간이나 자다니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상담은 큰 이득 없이 끝났다. 의사는 으레 스트레스니, 긴장을 풀어야 한다고 말했고 명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의 문제에 대한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분전환을 위해 돌아오는 길은 일부러 두세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내려 걸어왔다. 팔목에 걸린 약봉지를 흔들며 걷고 있자니 바람에서 봄 내음이 맡아졌다. 벌써 4월이던가. 명헌은 자연스럽게 신입생 강백호를 떠올린다. 남들보다 배는 큰 덩치로 친구들 사이에 옹기종기 끼어있던 모습. 모든 것이 어색해 눈만 굴리고 있던 모습. 미국에서도 그러고 있는 걸까. 생각에 빠지자 멀리 돌아온 보람도 없이 금세 도착하고 말았다.

공동현관을 무심코 지나치려던 명헌은 우편함에 엄청난 양의 우편이 꽂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과금이 밀린 게 있던가? 자동이체를 해뒀을 텐데. 꾸깃꾸깃하게 박혀 있는 편지 중 하나를 빼내어 겉봉투를 확인하자 너무나도 잘 아는 글씨체가 그를 맞이했다. 백호의 글씨체였다. 명헌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계단으로 마구 뛰어올라갔다. 그의 집은 10층에 있었다.

명헌은 신발장에서 기절할 뻔했지만 턱 밑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기절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소중히 품에 안고 온 스무 장의 편지를 식탁에 늘어놓자, 겉봉투에 1번부터 20번까지의 번호가 적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무슨 뜻일까. 같이 스무고개를 해 줄 백호가 없으니, 명헌은 1번이라 적힌 편지부터 열어보기로 했다.

첫 번째 편지는 도착한 날에 쓴 편지였다. 국제 전화는 비싸니까 편지를 부치려고 편지지를 한 움큼 가져갔다고 쓰여있었다. 그 애가 끌고 갔던 커다란 캐리어 두 개가 떠올랐다. 그 속에 자신을 위한 편지지도 있었구나. 그런데 왜 이제서야 도착했을까? 모난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유치하게 굴지 말자, 스스로를 부여잡으며 명헌은 두 번째 편지를 열었다.

구한 집 주변에 우체국이 없다고 했다. 도심은 집값이 너무 비싸 외곽으로 구했더니 차를 타고 우체국에 가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편지를 자주 부치지 못하니 양으로 승부하겠다는 당찬 포부가 적혀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강백호다운 사고방식에 명헌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렇게 차례대로, 명헌은 도착한 편지들을 읽어나갔다. 스무 통의 편지에는 편지 이외에도 여러 가지 것들이 들어있었다. 출퇴근용으로 사용하는 버스티켓, 맛있다던 중화 음식점의 전단지(특별히 좋았던 메뉴 위에 마구 낙서가 되어있었다), 명헌이 생각나서 샀다던 오리 모양의 메모지. 손 글씨로 적혀있던 백호의 일상 조각들이 함께 들어있었다.

모든 편지의 말미에는 사랑한다고 적혀있었다. 50통에 달하는 러브레터를 적었던 경험치가 그대로 녹은 다정한 문장이었다. 그 부분을 아껴서 읽고 다시 읽고. 명헌은 최선을 다해 편지가 끝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편지지가 구겨지지 않게 고이 접어 넣은 명헌은 스무 통의 편지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백호를 안으면 언제나 품이 가득 차다 못해 벅찼는데 지금은 안고나서도 한참 몸을 웅크려야 했다. 그래도 이전처럼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형태를 바꾼 강백호의 사랑이, 40일하고 13시간 만에 명헌의 품으로 돌아왔다.

편지를 받은 다음 날 명헌은 백화점으로 달려가 작은 시계를 하나 구매했다. 그리고 시계를 백호가 지내고 있는 곳의 시간으로 맞춰두었다. 스무 장의 종이로 그 애의 큼지막한 일상은 대부분 파악했으니, 시계를 보기만 하면 백호의 일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규칙적인 명헌과는 다르게 백호는 일상의 틈새 사이로 특이한 경험을 할 테지만. 명헌은 조급해하지 않고 그 이야기들을 담고 도착할 강백호의 사랑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명헌의 침대 탁상에는,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가 나란히 놓여있다.


2-1. 사랑은 어떤 형태로 남는가.

이명헌을 넘어트린 것도 사랑,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사랑이었다. 비록 그의 사랑은 넓디넓은 태평양 건너에 있어 그에게 돌아오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지만, 명헌은 그의 옛 동료만큼은 아니더라도 인내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의 부활에 구단은 대단히 기뻐했고 팀 동료들은 회복의 비결을 궁금해했다. 명헌은 그럴 때마다 그저 사랑의 힘이라며 마법 소녀적인 대답만 남길 뿐이었다.

백호의 편지는 평균적으로 32일을 주기로 15통 정도가 도착했다. 그리고 받은 편지를 명헌은 2~3일에 한 통씩 열어보았다. 이렇게 하면 다음 편지가 도착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편지를 이어볼 수 있었다. 종종 남아있는 편지들을 모두 뜯어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긴 했지만, 그는 극한의 자기 절제와 평정심을 가진 자타공인 돌부처였다. 다 읽은 편지를 구겨지지 않게 파일첩에 넣어 보관한다. 40페이지짜리 비닐 속지가 벌써 끝을 보이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편지가 도착하는 걸까. 다음 날 명헌은 문방구에 들러 하트가 가득 그려진 파일첩 두 개를 샀다.

10월이 찾아오고 끝을 모르고 올라가던 기온이 한풀 꺾였다. 미국에서 오는 편지는 벌써 세 번째 파일첩을 채워가고 있었다. 명헌은 18일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 둔 달력을 바라보았다. 백호가 몇 번이고 강조했던 NBA 리그 개막일이었다. 편지에는 7월에 진행한 서머리그 결과가 좋아 주전 멤버가 될지도 모른다고 적혀있었다. 백호는 그 사실을 적으면서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안 그래도 제멋대로인 글씨가 더욱 별나라 언어가 되어있었다. 그 때문에 명헌은 편지의 내용을 해독하기 위해 꽤 공을 들여야 했다. 오늘이 16일이니 앞으로 이틀 후면 움직이는 강백호를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 애가 벤치 멤버라도 되어야 해당하는 일이지만. 착실히 나아가고 있는 두 개의 시계를 바라보며 명헌은 진지하게 타임머신이나 순간 이동장치에 대해 고찰했다.

명헌의 고요한 새벽을 깨운 불청객은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전화벨이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한 채 시계를 확인하자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작게 욕을 읊조린 명헌은 손만 뻗어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뿅, 자?”

하는 발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 순간 안개가 낀 듯 흐리멍덩했던 사고가 깨어나고 명헌의 몸이 자동으로 침대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니”

“아니긴 목소리는 완전 잠겼는데”

수화기를 타고 백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은 지금 새벽이라니까! 백호의 뒤에서 날아오는 잔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자, 명헌은 황급히 할 게 있어서 아직 안 자고 있었다고 뒷말을 이어 붙였다. 저 말에 백호가 전화를 끊어버리면 한국에 사는 명헌이 제일 손해였다. 지금 뒤에서 말하는 거 송태섭이지. 남의 연애에 입대지 말라고. 초조함에 명헌은 다리를 덜덜 떨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우리 형 아직 안 자고 있었대! 나 전화할 꺼야 나가!

-얼씨구 저게 기껏 신경 써줬더니

만담 같은 대화 내용이 희미하게 흘러들어오자, 명헌은 남몰래 숨을 돌렸다. 한국이 지금 새벽이든 한 낮이든 그에게는 시간 따위보다는 백호의 전화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더 중요했다.

“뿅, 잘 지내고 있어?”

이어지는 다정한 인사말에 명헌은 눈물이 나올 뻔했다.

백호는 개막 경기의 벤치 멤버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화했다고 했다. 벤치라 시합에는 안 나갈지도 모르기만, 명헌에게 제일 먼저 전하고 싶었다고. 축하해야 마땅할 소식에도 명헌은 가슴 속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마구 뒤엉켜 한동안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무척 기쁘기도 했고,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기도 했으며 한편은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 것도 같았다.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을 뒤로하고 명헌이 입 밖으로 꺼낸 말은 보고 싶다는 한 마디뿐이었다.

“나도. 나도 많이 보고 싶어”

그리움에 젖은 목소리가 명헌의 귓가를 간질인다. 두 개의 시간을 넘어 연인의 밤과 낮이 깊어져 간다.

아침이 밝아왔다. 명헌은 백호와의 통화를 끝낸 후, 한두 시간을 바짝 몰아 잤다. 그리고 정확히 7시 반에 기상하여 9시 반에 시작할 NBA 중계 녹화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그리고 대망의 9시 30분, 10명의 선수가 코트 위로 올라오고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29.5인치의 공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놀랍게도 백호는 그날 코트 위로 올라왔다. 3쿼터 중반에 등장한 그 애는 쿼터 종료 5초를 남긴 시점, 수비 2명을 제치고 림에 공을 쑤셔 박는 화려한 덩크를 선보였다. 향후 20년간 두고두고 화자 될 레드 크러셔의 등장이었다. 백호는 경기 시간 종료까지 코트 위에 서 있었고 강백호의 팀은 개막 경기를 무사히 승리로 마무리했다.

미국에서 오는 편지는 끊기게 되었지만, 그 자리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걸려 오는 전화가 채우게 되었다. 명헌의 파일첩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대신 강백호의 경기 녹화 비디오가 생기기 시작했다. 명헌은 비디오를 보관하기 위해 수납장을 하나 장만했다.

11월이 되고 한국 리그가 시작되었다. 경기를 진행하면서도 명헌은 비디오 녹화를 놓치지 않았다. 철저하게 계산된 스케줄 관리와 예약 녹화 기능으로 백호의 모든 순간을 담아냈다. 3점 라인에서 백호가 슛을 날린다. 2년간 수도 없이 보았던(정대만이 교정시킨) 깔끔한 폼이었다. 림에 공이 말려들어 가고 백호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주먹으로 심장 부근을 두드리고 윙크한다. 애교 어린 모습에 중계 해설진들은 팬서비스가 풍부한 선수입니다 하며 웃어넘겼지만, 명헌은 이 행동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이 정도 암호문은 강백호 애인 경력 3년 차 진행 중인 명헌에게는 껌이었다.

백호는 NBA의 데뷔 시즌을 화려한 별명에 걸맞게 우수한 성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팀이 파이널 리그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개인 선수로써는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종종 백호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명헌 또한 7개월간의 대장정을 무사히 끝마쳤다. 아쉽게 통합 2위로 시즌을 마무리했지만, 기어올라갈 곳이 있다는 것은 더욱 정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시즌도 끝났겠다 슬슬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까? 라는 설레는 마음을 품고 명헌은 백호에게 귀국 일정을 물어보았다. 당연히 돌아오겠다는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백호는 말끝을 흐리며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명헌은 백호가 미국에서 막 자리를 잡은 신인의 입장이라는 것을 이해하기로 했다. 힘든 건 타지에서 지내는 백호도 마찬가지일 테니 억지 부리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러나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는 명헌에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은 백호였다.

“아니, 나 안 보고 싶어?! 왜 한 번에 납득해?!”

“아, 아니 그런 게 아니…”

“그럼 뭔데!”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나가는 백호를 달래기 위해 명헌은 얼마나 보고 싶은지, 만나면 뭘 하고 싶으니 스무 가지의 이유를 쥐어짠 이 후에야 폭군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대만에게서 의문의 문자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인 금요일 아침이었다.

혀가 긴 대만답지 않게 짧은 문자는 명헌이 그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내용을 확인한 명헌은 묵묵히 문자를 보관함에서 삭제했다. 이걸 확인한 시간이 아까웠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는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대충 껴입었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알아볼 예정이었다. 백호가 오지 못한다면 사정이 되는 내가 가면 되는 거지. 놀라서 휘둥그레질 연인의 눈망울을 상상하고는 명헌은 음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앉아서 마우스를 만지기를 10분. 적당한 시간대의 표를 찾아 구매하기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띵동- 초인종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명헌은 문밖의 불청객이 잡상인일 확률을 생각했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는 공동현관 출입 시 비밀번호가 필요한 곳이었다. 따라서 평범한 잡상인의 확률은 현저히 낮았다. 그렇다면 아침에 의문의 메시지를 보낸 정대만? 명헌은 미간을 살포시 찡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머리를 어느 정도의 힘으로 쳐야 사람은 안 상하고 기억만 날아가게 할 수 있을까. 정대만에게서 자신이 동기였던 시절을 제거하고 싶었다. 항공권 예매 페이지를 뒤로 하고 초록 검색창에 성인 남성 둔기, 기억손상 등의 검색어를 집어넣던 명헌은 재촉하듯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리자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 쪽으로 다가가며 명헌은 불청객(정대만으로 확신하고 있는)에게 쏟아낼 욕설을 가득 장전한 채로 거칠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

“집에 있었네?”

천진한 얼굴의 백호가 명헌을 맞이했다. 그는 문을 연 그 상태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린 백호가 명헌을 끌어안고 문 안쪽으로 밀고 들어온다. 미국으로 갈 때 들고 갔던 대형 캐리어 하나, 짐이 가득한 배낭. 백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철저하게 준비하고 귀국한 사람이었다. 허겁지겁 백호를 끌어안던 명헌의 마음속에서 뒤늦게 억울함 한 줄기가 피어올랐다.

“한국 못 온다면서”

“서프라이즈!”

“공항에서는 어떻게 왔어”

“만만쓰가 태워줬지”

“…뿅”

한참을 끌어안은 채 재회의 기쁨을 누리던 백호가 아직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명헌을 두고 쏠랑 샤워실로 들어갔다. 명헌은 여전히 말문이 막힌 채 닫힌 샤워실 문을 한 번, 현관에 놓여있는 백호의 짐을 한 번씩 번갈아 보다 쇼파에 대충 던져놓았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 대만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두어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대만은 명헌의 상태를 알고 있는 듯 여보세요 조차 말하지 않았다.

“나한테 효도하라고, 알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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