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

우주의 법칙 1

같은 대학 AU 명헌X백호


1. 이지와 미지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하여 30분 러닝을 한다. 오후의 스케줄은 월요일과 수요일이 웨이트, 화요일과 목요일은 유산소를 동반한 체력 단련. 금요일은 토요일에 있을 연습 시합을 위한 단체 연습, 연습 시합 후에는 경기 녹화 영상 분석. 일요일은 근육 회복을 위한 사이클을 돌린다. 단조로울 만큼 일정한 대학생 이명헌의 일상이었다.

이지를 사랑하는 만큼 미지를 사랑한다. UFO나 외계인에 관한 기사가 있으면 결국 조작된 이야기인 것을 알면서도 주의 깊게 살펴본다. 흥미와 취미는 수수께끼에 두면서 자신의 일상과 심지는 규칙적이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명헌은 ‘모순적’이라는 단어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잔잔하게 흘러갈 것 같았던 명헌의 일상에 크고 시끄러운 변화가 생긴 것은, 3학년이 되던 해의 봄이었다. 신입생 명단에서 발견한 낯익은 이름에 가물한 기억을 되짚던 그는 공을 쫓아서 고꾸라지던 빨간 머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리바운드는 꽤 잘했었지. 실력은 좀 늘었으려나. 심심한 감상을 가진 명헌은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강백호를 맞이했다.

직접 경험해 본 강백호는 정말 힘겨운 존재였다. 명헌은 그제야 정대만이 강백호와 만나는 것을 기대하면서도 두려워하던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 애는 고장이 난 자판기였다. 인풋과 아웃풋이 엉망진창이었으며 강백호 스스로조차 어떠한 결과가 도출될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기준과 법칙들은 강백호에게는 어떠한 중력작용도 일으키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4월의 이명헌은 강백호를 다루는 것이 부담스러워 살이 내렸다. 긴 시간 명헌과 함께해온 동오는 생전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세상이 끝난 것처럼 굴었다. 다행히도 5월엔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초월적인 인내의 끝에 이명헌은 별나라 주민 강백호의 취급법을 습득했고 무사히 체중도 복구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한 학기를 무사히 마무리하기 위해 모든 대학생이 분주하게 전공책을 펼쳐보는 6월. 이명헌은 천재지변처럼 강백호를 좋아하게 되었다. 머리색부터 재능까지, 모든 것이 규격 외인 주제에 그 애의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했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던 바보는, 결국 이명헌의 7월을 모두 앗아가고 나서야 8월에 손을 맞잡는 것을 허락했다.

동화처럼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연애는 아니었다. 강백호는 이명헌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는 죽을 만큼 둔했지만, 그가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명헌이 그어놓은 선과 계획을 무자비하게 짓밟았으며 명헌이 가진 모든 것을 원했다. 추리 영화와 로맨스 영화. 오래된 팝송과 유행하는 아이돌 노래. 맞는 취향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명헌이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것을 강백호가 가지고 있었고 그게 꼭 짝이 맞는 퍼즐 같았다. 그리고 겁 없이 영원을 이야기하는 그 아이를 따라 영원을 자신의 입에 담았을 때, 명헌은 자신의 심지마저 백호에게 휩쓸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을 노래하는 편지를 즐겨 쓰던 문학도 강백호와는 다르게 이명헌은 세상 모든 것을 수치화하는 사람이었다. 끝을 모르는 것처럼 구는 백호를 품에 안으면서 명헌은 종종 이 사랑의 끝을 생각하고는 했다.

에너지에는 총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이명헌은 강백호의 급하고도 과격한 사랑이 자신의 사랑보다 더 일찍 소멸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다. 사랑이 사라진 너는 나의 규칙을 흩트려놓고 아무런 미련 없이 너의 별이 있는 우주로 돌아가 버릴 테지. 너무 불공평한 일이었다. 명헌은 백호와 같은 속도와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애타는 마음을 그 애는 역시나 단 한 줄도 알아주지 않았다.

명헌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모순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강백호가 떠나가더라도 자신이 자신인 채로 있을 수 있도록. 그는 이지를 사랑하는 만큼만 미지를 사랑해야 했고 사람의 마음의 합은 1이지 2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 절대적인 우주의 법칙을 위해 명헌은 졸업식에 맞춰 자신을 위한 꽃다발을 들고 있는 백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가 이별을 말하자 백호가 이유를 물어보았다. 명헌은 자기 자신을 되찾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자 백호는 명헌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을 한 채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

백호가 너무나도 순순히 등을 돌리고 떠나간다. 이별을 위해 명헌이 세워놓았던 계획들이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이명헌은 이것이 강백호에게 침범당하는 마지막 순간이기를 바랬다.

이별 이후 명헌의 전화기가 폭발했다. 동오는 걱정했으며 대만은 입으로 불을 뿜으며 지랄했다. 너희가 싸웠을 때마다 내가 산 술값을 합치면 차를 뽑았을 거라고. 이렇게 헤어질 거면 술값을 다 뱉어내라며 빚쟁이처럼 집요하게 그를 쫓아다녔다. 그러거나 말거나, 명헌은 마음이 비어버린 만큼 규칙과 안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 프로팀에 입단했다는 적절한 변명거리도 있었기에, 스스로에게도 강백호에 대한 것을 미룰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어주었다.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하여 30분 러닝을 한다. 월요일에는 팀 미팅에 참석하고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단체 트레이닝, 토요일은 개인 연습으로 하루를 보내고 일요일은 근육 회복을 위한 사이클을 돌린다. 그렇게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또 일 년. 강백호의 졸업 날이 다가왔다.

강백호는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졸업 시즌부터 많은 곳에서 러브콜이 왔지만, 옛 선배가 뛰고 있는 곳을 콕 집었다고. 명헌은 미국에서 제법 활약하고 있다던 작고 깡다구 있던 가드를 떠올렸다. 억지로 되돌려 놓았던 균형이 삐걱거린다. 그 나라 국기에 별이 그렇게 많던데 그중에 네가 살던 별도 있는 걸까. 강백호에 대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 명헌을 휩쓸었다. 그리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 채 명헌은 강백호의 졸업식 뒤풀이에 끌려가게 되었다.

대만의 배신은 예상할 수 있었지만, 동오마저 가세할 줄은 몰랐다. 명헌의 원망 어린 눈빛에도 동오는 드물게 단호한 얼굴을 하며 너를 위해서라는 한마디를 남길 뿐이었다. 나를 위해서? 겨우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는데. 집요하게 자신을 붙잡는 손을 채 떨구기도 전, 이름을 부르는 대만의 목소리에 왁자지껄한 무리 사이에서 빨간색 머리카락이 불쑥 튀어 올랐다. 그렇게 명헌은 사람들의 배려 아닌 배려로 인해 2년 만에 옛 연인과 재회하게 되었다.

강백호는 그사이 키가 좀 더 자란 것 같았다. 이 정도 덩치라면 서양인들을 상대로도 쉽게 밀리지는 않겠지. 미국은 땅이 커서 시차가 천차만별이라더라. 네가 가려는 곳은 한국보다 13시간이 느리대. 백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명헌은 밤사이 검색했던 것들에 대해 떠올렸다.

“나한테 할 말 없어?”

가로등 그림자에 의해 가려져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불만에 가득 찬 백호의 눈썹이 하늘에 닿을 듯 치솟아 있었다. 평소보다 더욱 험악해진 얼굴임에도 명헌은 자신이 두렵다기보다는 그립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아닌 감성에 젖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명헌을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을 한 백호가 다그쳤다. 그제서야 정신을 찾은 명헌은 고개를 저어 강백호의 표정을 토라짐에서 분노로 바꾸는데 성공시켰다.

“왜 없는데!”

없으니까 없겠지. 명헌은 차마 그렇게 답하지는 못하고 침묵을 고수했다. 그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준비한 말도 떠오르는 말도 없었을뿐더러 연애 관계에 있어서 명헌은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명헌의 태도에 드디어 인내심이 끊겼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인 백호가 버럭 소리를 친다.

“빨리 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 안 해?!”

구체적으로 뭐에 대해서 사과해야 하는 걸까.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한 것? 근데 너는 알겠다고 했잖아. 울지도 않았으면서. 차오르는 의문에 명헌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러나 명헌이 모를 뿐 백호가 원하는 답은 정해져 있을 터였다. 이제부터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결과가 나왔는지 추리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눈물 나게 그리웠던 과정이었다.

몇 차례의 스무고개 끝에 명헌은 백호가 원하는 답을 알 수 있었다. 백호는 애초에 그와 완전히 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진짜 왜일까, 돌려 말하지도 않고 정확하게 헤어지자고 말했었는데. 강백호는 여전히 명헌의 상식을 어지럽히는 존재였다.

한 참 뜸을 들인 후 명헌은 그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백호는 이유를 물었을 때, 내가 싫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하고 답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아무 연락도, 얼굴도 비추지 않는 이를 2년 동안 기다릴 수 있는 걸까. 당황한 명헌은 그제서야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던 백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불량하게 치켜 올라간 백호의 눈썹 아래로 잔뜩 젖은 눈가와 일렁이는 눈동자가 있다. 명헌이 외면하는 동안 그가 두고 간 사랑이 그 크기를 더 키우고 있었다.

“진짜 나랑 헤어지려고 했던 거야? 왜? 나 싫어?”

2년 전에 명헌이 건넸던 이별을, 이제야 알아차린 백호가 울음을 터트린다.

입이 댓 발 나온 백호가 코를 훌쩍인다. 손수건도 하다못해 휴지 조각도 가지고 있지 않은 명헌은 무릎을 꿇은 채 눈치를 보다 소매 끝을 젖은 뺨 가까이 가져가 대었다.

“치워!”

우렁찬 꾸짖음에 명헌은 조신하게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다음에 나올 강 판사님의 판결을 기다렸다.

“나는 과학도 수학도 잘 몰라. 근데 좀 공부했거든? 완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

강백호의 성적을 빤히 알고 있는 명헌은 약간의 감동과 함께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너지의 양이 정해져 있다는 건, 그게 다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래. 모양이 바뀔 뿐 똑같은 양으로 거기 존재한대”

그리움과 원망으로 붉게 짓무른 눈이 명헌에게로 향했다.

“분명 내 사랑도 그럴 거야”

이 순간 명헌이 미지에 완전히 침략당한다. 그렇게 이명헌의 우주는 강백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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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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