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오버

걔 여자친구 없다고요

14화까지 봤어요

라커룸이 또 뒤집어졌다.

대장고 야구부 소란스러운 날이야 하루이틀이 아니었지만, 이번 건은 확실히 특별했다. 과묵하고 음침하며 수줍음 많은 막내 투수 송다빈이 미모의 20대 여성과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된 것이다.

평소보다 상기된 주장 신하성이 “얘들아,”하고 말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별일 아닌 줄 알고 옷을 갈아입던 부원들은, 이어진 말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다빈이가 어제 엄청 예쁜 누나랑 같이 마트 들어가더라?”

“다빈이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1학년생 중 누군가가 비명처럼 되물었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다른 모든 부원들의 심정을 대변했으리라.

“예쁜 누나??” “뭐? 송다빈 누나 예쁘다고?”

제보다 젯밥에 꽂힌 3학년들은 고개를 홱 돌리며 사냥감을 포착한 매처럼 눈을 번쩍 빛냈다.

예상보다 열렬한 시선에 일점사 당한 신하성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자, 선배고 후배고 할 것 없이 인상이 험악해졌다.

정노을도 마찬가지였다. 짬만 됐으면 신하성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을 것이다. 잘못 본 거 아니냐며 윽박 지를만 한 사안이었다. ‘내’ 투수가 그럴 리 없다고.

“어허이, 귀중한 정보원님이세요. 인상들 펴십시다. 선배님, 천천히 하나씩 얘기해보시게요.”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는 참새가 있을까? 2학년 타자 방범준이 혀를 쯧쯧 차며 튀어나왔다. 장점인 빠른 발을 이슈 수집과 전파에도 적극 활용하는 취미가 있다보니 간혹 야구부 격을 떨군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으나, 이번 등장은 아주 적절했다.

자칭 비공식 기자답게 수첩과 필기구를 들고 나온 방범준이 능숙하게 신하성을 달래 중요한 정보를 정리했다.

누가: 1학년 투수 송다빈이

언제: 어제저녁 약 7시경

어디서: ㅁㅁ동 마트 앞에서

무엇을: 예쁜 누나랑 같이 장을 봤다.

어떻게: 웃으며 둘이 한 카트를 밀면서 마트로 들어갔다.

왜: ?

“엄청 친해보이더라구…. 여자분이 다빈이 팔뚝 만져도 웃기만 하더라.”

“예뻤어여?”

“…응. 많이.”

신하성이 난처한 듯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하필 오늘 송다빈이 훈련 불참이라길래 가볍게 운만 떼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범준의 유도신문에 넘어가 줄줄이 다 불고 말았다.

어느새 주변을 에워싼 부원들은 더 많은 정보를 요구했다. 만족스럽지 않으면 안 보내줄 눈치였다.

다빈아, 미안하다…. 잠시 망설이던 하성이 꼬물꼬물 핸드폰을 꺼내 갤러리를 열었다.

“야…!” “와.” “헐…진짜네?”

부원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매사에 빈틈 없으려고 노력하는 모범생 신하성이 증거 사진까지 찍어온 것이다.

하성이 얘기한 그대로 한 카트를 같이 밀며 마트로 들어가는 남녀의 뒷모습 사진이었는데, 남자는 누가 봐도 송다빈이었고, 고개를 살짝 틀고 다빈을 바라보며 웃는 여자는 긴 생머리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이렇게 예쁜 누나 있으면 얘기를 해줬어야지!”

“다빈이 누님이랑 몇 살 차이인지 아는 사람?”

눈이 돌아간 3학년들이 자리에 없는 당사자를 타박하고 헛소리를 하며 설레발을 쳐댔다.

정노을은 눈살을 찌푸리며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 여자는 누구길래 저렇게 친한 척하는 걸까? 누나? 그럴리가.

정노을은 송다빈의 거의 모든 걸 안다. 가족관계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송다빈 누나 없어요.”

정노을이 일단 틀린 정보를 정정하자,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

“누나 없다고?? 그럼 여자친구야??”

“다, 다빈이, 여, 여자친구…?”

“저 예쁜 누나가 다빈이 여친이라고?!?”

더 난리가 났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공 던지는 법밖에 모르는 줄 알았던 막내 루키가 티 하나 안 내고 연애 중이었다고? 포커페이스가 투수의 덕목이라지만 이 정도면 MLB급 아니냐는 성토, 재능에 여친까지 다 가졌냐며 배신감에 치를 떠는 목소리….

“다빈이 여친이랑 몇 살 차이인지 아는 사람?”

이 와중에 꿋꿋이 호기심을 채우는 3학년까지 뒤섞여 그야말로 혼파망이었다.

부원들은 간만의 대형 떡밥에 신이 나서 근처 대학을 나열하며 여친의 신상을 추측했다. 자기 집이랑 가깝다는 이유로 어디 대학이면 좋겠다느니, 자기는 어디가 더 좋다느니….

정노을 보기에 코웃음밖에 안 나오는 광경이었다.

“여친은 무슨,”

생각보다 싸늘하게 흘러나간 정노을의 목소리가 시장통 같은 소란의 맥을 끊었다.

“사이비겠죠.”

산통 깨지 말라는 눈초리에도 꿋꿋했다. 이것이 팩트니까.

“송다빈한테 여친? 심지어 연상? 어림도 없죠.”

딱 잘라 말하고 논쟁을 마무리하려던 정노을의 의도와 다르게 분위기가 어째 요상하게 흘러갔다. 갸우뚱하는 모습들을 보아하니 공감하지 못하는 모양.

고개를 갸웃하며 ‘송다빈, 여친, 연상’을 반복해서 되뇌던 대장고의 대들보 전초록마저 턱을 매만지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빈이한테 여친이 있다면…아무래도 연상이겠지.”

그러니까 걔한테 여친이 있을 리가 없다니까요?! 정노을은 갑자기 울화통이 터져서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대장고에서 송다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정노을이고, 정노을이 판단하기에 송다빈은 절대, 네버, 죽어도! 야구 말고 다른 데에 팔 정신이 없다니까!

근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자명한 사실인데 왜 모르는지 이해가 안 갔다. 아니, 딱 보면 아는데 왜 이걸 모르지?

만약 정노을이 평소 수준으로 이성적이기만 했어도 따박따박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겠지만, 사진을 본 순간부터 머리에 열이 확 올라서 제대로 된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어떻게 알아? 물어봤냐?”

허준이 삐딱하게 쏘아붙였다.

가십거리를 가져오는 방범준더러 야구부를 대장고가 아니라 쫄병고급으로 만든다고 비판했던 당사자면서, 본인은 아까부터 후배 여친 친구들 소개받을 생각에 몸이 잔뜩 달아있었다.

자꾸 초를 치는 정노을이 못마땅하던 차에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자, 즉각 2차 공격을 가했다.

“어림도 없다고? 네가 뭔데? 송다빈 엄마라도 됨?”

정노을은 완전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목구멍에 시멘트를 들이부은 느낌이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사안이고…송다빈네 엄마 집 나간지 오래라고요…. 후자는 절대로 말 못할 사실이고, 그렇다고 1학년 앞에서 3학년을 콱 들이 박아 버릴 수도 없고….

이마에 솟으려는 힘줄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웃는 얼굴을 장착한 정노을이 이를 악물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그럼, 내기하실래요? 저는 사이비에 한 표.”

최대한 억눌렀지만 이를 뿌득 가는 소리가 살짝 새어나왔다.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은 허준이 아까의 정노을보다 크게 헹! 코웃음 치며 응수했다.

“그래? 그럼 나는 여자친구에 한 표. 오천 원빵 콜?”

“콜! 콜! 나도! 나도 여자친구에 한 표!”

“질투나니까 사이비 한 표.”

“여자친구에 한 표 추, 추가요. 제, 제가 기록하겠습니다….”

성시율이 자진해서 서기로 나선 덕분에 오늘 내기의 명단이 정리됐다.

대장고 야구부의 제342회차 내기.

‘그 예쁜 누나는 송다빈의 여자친구인가? 아닌가?’

배팅 항목은 3학년 허준이 제시한 ‘여자친구’ vs 송다빈 전담투수 정노을의 ‘사이비’.

마감된 배팅 비율은 7:3.

프린트한 것처럼 깔끔한 글씨체로 행과 열을 딱딱 맞춰 정리된 명단을 보면서 정노을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다들 송다빈이 연상 여성이랑 연애 중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EQ 바닥인 거 다 알면서도? 심지어 이게 대세라니.

“그럼…오늘은 이만 해산하고, 내일 다빈이 오면 물어보는 걸로~”

전초록의 해산 선언에 정노을은 가방을 들처메고 이를 박박 갈았다. 이 송알못들. 그래봤자 어차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고,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두고 보자고.

*

“옆집 사시는 분이신데요….”

눈에 초점이 나간 송다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송다빈은 라커룸으로 들어오자마자 몰이 사냥하는 기세의 부원들에게 떠밀려서 구석에 딱 붙은 채로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을 때부터, 이미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그 상태로 그제 만난 누나가 누구냐는 질문에 최면 걸린 것처럼 고분고분하게 대답해주기는 했지만, 부원 중 70%가 예상했던 답안은 아니었다. 오히려 절대 여자친구일 리 없을 정도로 거리감이 팍팍 느껴지는 건조한 답변이었다.

“에에이~”

실망한 과반수 이상의 부원들이 탄식하며 뿔뿔이 흩어지자, 송다빈의 파란 동공에 해일을 동반한 지진이 일었다.

무리에 끼지 않고 고고한 한 마리 학처럼 가운데 벤치에 앉아서 신발끈을 정돈하던 정노을은 속으로 크게 웃었다. 제가 뭐랬어요. 송다빈 여자친구 없다고 했죠? 마음 같아선 허준 선배 앞에서 손가락질을 하며 박장대소하고 싶었지만 득될 게 없으니 참았다.

한편 자기한테 실망한 분위기를 기민하게 읽어낸 송다빈은 더욱 움츠러 들었다. 뭘 잘못했는지 과거를 되짚으며 맹렬하게 고민해 보지만, 어느 누구도 추리 못할 일이었다. 애초에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같이 장 보는 사이면 친한 거 아니야?”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선배가 물었다. 다빈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딱 한 번이었고…. 저보다…저희 할아버지랑 더 친하세요….”

“그 예쁜 누나가…너희 할아버지랑 더 친하시다고?”

“네…. 같이 산책도 거의 매일….”

대답하는 동안 주변에 남아있던 부원 중 몇이 추가로 떠나갔다. 다빈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가방 스트랩을 꽉 쥐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다빈이라도 이쯤 되니 선배들이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어렴풋이 알았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엄청 기대하고 계셨나본데 낙심시켜드려서 죄스러울 뿐….

가방끈을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정노을은 저것만 보고도 제 투수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잘못한 건 김칫국을 사발째로 퍼먹던 선배들인데 엄한 송다빈이 땅을 판다. 송다빈의 죄를 굳이 대라면 공을 잘 던져서 대장고 야구부에 입부한 죄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선배를 잘못 둔 죄.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선배들 외에 믿음직한 포수 선배 정노을이 있다는 점?

마침 사정 없이 흔들리던 시선이 정노을에게 와닿았다.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었다.

정노을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옆집 분 얘기, 처음 듣는데. 언제 친해지신 거야?”

이럴 때는 흐름을 바꿔줘야 한다. 내기 항목 중 여자친구는 아웃되었어도 아직 사이비가 남아있지 않냐고.

“지지난 주에…이사 오셔서…떡 주신 후에요….”

“2주만에 매일 같이 산책 다닐 정도로 친해졌다고? 너네 할아버지랑?”

“네….”

“다빈이 너랑은…?”

“제가 없을 때…주로 오셔서….”

“마트는 어쩌다?”

“집 가는 길에…마주쳤어요. 할아버지께서 좋아하는 반찬…만드는 법 알려주신다고 하셔서….”

들을수록 이상했다.

신하성의 핸드폰으로 문제의 사진을 확대해 보던 허준도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화면을 끄고 송다빈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평범한 상황은 아니었다. 정노을의 말대로 정말 사이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나고 같이 가자.”

정노을이 통보했다.

여자친구일 확률이 0%일 뿐, 정노을이 골랐던 사이비 외에도 다른 가능성들이 있었다. 아주 드문 확률로 단순한 선의였을 경우를 제외하곤 죄다 다단계, 방문판매, 도둑 등의 심각한 문제라 그렇지.

정노을은 주전 포수로서 자기 투수의 멘탈과 피지컬을 관리할 책임을 졌다. 평탄한 가정 환경도 범주 안에 들어갔다. 차라리 뭔 일 터지기 전에 알게 돼서 다행이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송다빈은 중언부언하지 않고 수긍했다.

*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정노을은 송다빈네 옆집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가는 길 내내 송다빈과 머리를 맞대고 짜낸 대응 방안들도 못 썼다.

빈집이었으니까.

옆집 문을 두드려보지도 못했다. 올라가는 계단에서 집주인의 아들을 만나서 옆집이 계속 비어있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야구부원들이 열광한 예쁜 누나는 결국 시꺼먼 속을 품고 다빈의 할아버지에게 접근한 사기꾼이었다….

집주인이 CCTV와 공동현관 보안 장치를 설치한 이후론 그 여자의 코빼기도 안 보인다고 한다.

다빈의 할아버지가 좀 상심하셨을 뿐, 다행히 다른 피해는 없었다.

내기는…며칠 후에 송다빈이 할아버지 방에서 발견했다며 사이비 관련 책자를 가져다줘서, 최종적으로 사이비파가 이겼다.

증거물 수집에 딜레이도 있었고 학교 근처에서 포교하는 교단의 책자라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이유로 허준이 정노을과 송다빈의 커넥션을 의심하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당사자인 송다빈이 부인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노을은 내기 상금으로 주전부리를 사서 상심하신 송다빈의 할아버지께 갖다 드렸고, 이후로 주말마다 다빈의 집에 들러 할아버지를 뵙는 루틴이 생겼다.

하나부터 열까지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떠오르는 루키의 가정의 평화를 지켰고, 내기에서 이겨서 상금도 탔고, 송다빈의 할아버지에게 점수를 땄고, 대장고에서 송다빈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역시 정노을이라는 공증도 받았다.

제일 흡족한 걸 꼽으라면…송다빈에게 여자친구가 없다는 사실 그 자체.

부원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서 “옆집 사시는 분"이라는 답을 듣고 탄식한 그 순간에, 정노을은 강 같이 잔잔한 평화를 얻었다.

후배가 솔로인 게 왜 좋냐고 묻는다면 현재의 이성적인 정노을은 따박따박 근거를 댈 수 있다.

멘탈 관리의 변수가 줄어드니까, 야구부 내 기강이 흐트러지지 않으니까, 연애놀음하는 거 꼴뵈기 싫으니까, 송다빈이 더 노력하지 않으면 전국대회에서 우승할 수 없으니까, 기타 등등….

하지만 정노을이 모르는 게 있었다.

감정은 때때로 이성에 상태 이상 효과를 부여해서, 오히려 비이성적일 때의 생각이 진심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감정 하나만으로 후배의 연애를 부정했던 때처럼.

이성이 제시하는 근거가 허울뿐일 때도 있다는 걸, 정노을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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