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오버

롤러코스터

19화까지 봤어요

정노을은 요새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 같다.

일반적인 기구가 아니라 내리는 문도 제동 장치도 없는 것에 덜렁 올라탄 기분이다. 이 미치광이 놀이 기구는 제멋대로 하늘 높이 올라갔다 갑자기 곤두박질치고, 360도 뱅뱅 돌기도 하며 혼을 쏙 뺀다. 올라갈 때는 마음이 구름 위에 둥둥 뜬 것 같다가, 아래로 처박히면 밤에 잠 못 이루고 가슴 퍽퍽 쳐댈 정도로 괴로워진다.

마음대로 내릴 수 있다면 정노을의 이성은 탈 때마다 바로 내렸을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은 득보다 실이 훨씬 많으니까.

하지만 마음대로 내릴 수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릴 마음도 별로 없는 게 지금의 정노을이었다. 이성적이지 않다는 자각은 있다. 상승이든 하강이든 정노을이 경계해온 아웃라이어 상태인 것도 안다. 그러나 상승 주기의 짜릿함이 너무나 커서, 중독된 것처럼 앞만 보며 올라가달라 간절히 바라느라 다른 생각할 여지가 없다.

이 롤러코스터의 이름은 연애라 한다.

정노을은, 송다빈과 사귀고 있다.


지금은 졸업한 선배들이 그랬다, 연애하지 말라고.

썩 와닿지는 않았다. 일단 선배들은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다. 훈련 전후에 라커룸에서 옷 갈아입을 때, 몸은 분주해도 입은 한가하니 수다를 엄청 떨었다. 누가 수다는 여자들의 전유물이랬나. 경험상 전혀 아니올시다. 어찌나 말 많고 목청은 기차 화통 삶아먹은 것처럼 크면서 말하는 중간에 끼어들어 대는지, 듣고 있다보면 골이 울릴 지경이었다.

주된 이야깃거리는 아무래도 야구였고 그 다음이 여자였다. 다른 스포츠나 게임 얘기도 많이 했지만, 연애 얘기할 때만큼 열렬하진 않았다.

여자친구 있는 사람은 몇 되지도 않으면서 소재가 끊임없이 나왔다. 정노을이 보기엔 집단으로 나르시즘에 빠져 이야깃거리를 자가 창출하는 수준이었다. 자기가 배트를 쥐고 나올 때마다 관중석 몇 번째 줄에 앉은 여학생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느니, 단체 관람 온 여학생들의 교복을 보고 자기들한테 관심 있는 것 같다며 단체 미팅 잡자고 설레발을 친다든지, 일반인의 사고 방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자기애가 난무했다. 그럴 때마다 시합 중에 한눈 파니 성적이 그따위라고 비꼬고 싶었지만, 결말이 뻔히 보여서 가만히 입 다물었다. 어차피 훈련 빡세서 시간도 없을테고.

간혹 그 없는 시간을 쪼개고 용기를 낸 선배가 나타났다. 끝은? 상대 쪽에서 먼저 다가온 게 아닌 이상 당연히 파국이었다.

학교까지 찾아가서 교문 앞에서 공개 고백하고 무참히 차인 선배가 자초지종을 얘기하다 북받쳐 자기는 연애 따위 안 할 거라며 오열했다. 일정 문제나 성격 차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헤어진 선수들이 서로를 다독거리며 연애해봤자 쓸모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근거는 본인들이라 설득력은 별로 없었지만, 여하튼 정노을에게 큰 감흥을 준 광경이었다. 연애가 뭐길래 사람을 저렇게 구차하고 멍청하게 만드나. 그런 데 쏟을 여력이 있다면 힘내서 펑고나 받았으면.

말 많던 선배들이 졸업하고 정노을은 2학년이 됐다. 얌전한 편인 신하성이 주장이 되고 묵직한 존재감의 전초록이 확고하게 중심을 잡아주면서, 대장고 야구부의 분위기도 확 바뀌었다. 연애 놀음에 입방아를 찧어댈 시간에 건실한 피드백이 오갔다. 정노을로서는 바라 마지않던 아주 기꺼운 변화였다. 효율적이고, 팀의 승률도 높아지고.

아니, 기꺼워 해야하는 변화라는 말이 옳겠다.

왜냐하면 그 분위기를 몇 달 만끽하지도 못하고 정노을의 심경에 크나큰 변동이 생겼으니까. 말했듯 송다빈과 사귀기 시작한 것이다. 정노을이 고백했고, 송다빈이 응낙했다. 하루 24시간 중 잠 자는 시간 빼고 대부분 야구 생각만 하던 정노을의 일상에 송다빈의 비중이 점점 커져갔다. 정노을이 지향해온 삶의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했지만, 그래도 정노을은 돌아갈 맘이 거의 없었다.

연애하지 말라니,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이거, 사람 의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다빈아, 여기야, 여기!”

캐주얼한 차림으로 크로스백 끈을 꾹 쥐고 주변을 두리번대는 후배에게, 정노을은 크게 소리치면서 휘휘 손을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노을을 발견한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떠오르며, 이쪽으로 곧장 걸어오는 다빈이가 제일 중요했다.

“오느라 고생했어! 헤매지는 않았어?”

“네…. 많이 기다리셨어요?”

말 편하게 하라고 몇 번을 얘기해도 존댓말이 입에 붙었다는 후배가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정노을은 한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굳이 얘기해서 남자친구의 맘을 불편하게 만드는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방금 왔어.”

연애 시작하고 거짓말이 입에 붙었다. 시합 중 기만 전술 쓸 때랑은 다르다. 속여먹겠다는 의도 하나 없이 오로지 상대의 맘을 편하게 해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정노을도 자기가 이럴 줄 몰랐다. 다빈이의 낯에서 걱정이 씻겨져 내려가고, 기대와 설렘만이 남는 저 모습이 보고 싶다고 이렇게까지 하게 될 줄은.

“갈까?”

묻자 다빈이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노을은 준비한 스케쥴을 복기하며 다빈이와 팔짱을 꼈다. 맞닿은 맨살이 소름 돋게 좋다.

아, 하늘이 돕는지 날씨도 화창하고, 아침 햇살 받은 다빈이는 그리스 남신 조각상처럼 잘생겼다. 허파에 구멍 났나 싶을 정도로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너무 좋아서….

보기만 해도 이렇게 좋은데, 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겸손한 천재 루키 후배가 내 꺼라니.

이렇게나 좋은 걸, 왜 하지 말라고 해?


대부분의 격언은 뼈 아픈 경험 뒤에 나온다. 나는 이미 늦었지만 너희는 그러지 말아라, 같이.

하지 말란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머리털이 비쭉 설 정도로 쏜살같이 추락하는 롤러코스터 위에서, 정노을은 가슴을 치며 선배들의 말을 떠올린다.

연애하지 말 걸.

그럴 걸….


좋아한다는 건, 사람을 너무 구차하게 만든다.

하강 주기의 정노을은 구질구질하던 선배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쪽은 도끼병이고 이쪽은 연애 중이니 같은 선 상에 둘 수 없지만 여튼.

작용-반작용이랬던가. 다빈이를 좋아하는 만큼 싫어질 때가 있는데, 대부분 화살이 정노을에게 돌아온다.

정노을 본인이 미움의 화살 대를 잡고 촉을 자기한테 향하게 두는 것이다.

다빈이가 잘못한 경우도 분명 있지만, 정노을이 좋아하는 송다빈은 그대로인데, 정노을 속에 못된 생각이 움터서 그럴 때가 많다.

그 때마다 정노을은 혼자 의심하고, 비약하고, 자기 상상에 고통 받는다.

다빈이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이번에도 그랬다.

신린상고의 이로운과 다빈이가 친하게 얘기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둘이 어떤 사이인지 안다. 지금의 다빈이에겐 정노을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도.

하지만…

“다빈아, 구위가 더 올랐더라? 역시 우리 다빈이야!”

이로운이 다빈이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다빈이의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고,

“응…. 많이…가르쳐 주셔서….”

그 손길을 익숙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며 편하게 반말하는 다빈이를 보는 순간, 눈이 홱 돌아가 버렸다. 사고 치기 전에 화장실로 도망 가서 다행이었다.

화장실 칸에 숨은 정노을은 주먹으로 허벅지를 쾅쾅 내리치며 분노를 풀었다. 하나는 눈엣가시 같은 이로운에게, 둘은 경계심 없는 다빈이에게, 셋은 다빈이의 진심을 자꾸 왜곡하려 드는 자신에게. 솔직히…너무 빡쳤다. 당장에라도 신린 주전 포수의 멱살을 잡고 남의 라커룸에 맘대로 드나들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감독도 가만 두는 걸 정노을이 무슨 자격으로? 게다가 라커룸에 오지 말랬다고 둘이 남 몰래 만나면 어떡하나? 차라리 보이는 곳에 두는 게 나았다.

알지만, 알고 있지만!

여전히 화가 났다. 무엇에? 이로운의 존재 자체에!

마음 같아선 다빈이의 삶에서 이로운을 통째로 들어내고 싶다. 정말로 비이성적이고 쓸데없는 욕심이라 웃기지도 않는다. 이로운이 없었더라면 다빈이가 야구를 계속 했을 것 같지 않고, 그럼 정노을이 송다빈과 만나지도 못했을 거다. 어떻게 보면 정노을과 송다빈 둘 다의 은인인데, 그래도 싫다.

다빈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하필 정노을이랑 나이와 포지션이 똑같다는 것도, 다빈이가 반말할 정도로 맘 편한 사이라는 것도, 하나같이 전부 싫다. 따지고 들면 더 나올 거다. 야구 플레이 방식도 싫고, 이제는 얼굴만 봐도 싫다….

이로운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정노을과의 직접적인 비교 대상이다. 다빈이 안에서 정노을과 이로운은 어떻게 비교되고 있을까? 다빈이는 나와 배터리로 플레이하면서 중학 시절을 떠올린 적이 있을까? 객관적으로 보면 신린상고는 꼬박꼬박 최소 준결승전에 진출하는 강호고, 대장고는 십 몇 년 전의 영광 하나 남은 퇴물이다. 이로운은 그런 신린상고에서 1학년 때부터 그 배윤서의 공을 받으며 주전 포수로 자리매김했고, 리드는 조금 딸릴지 몰라도 힘이 훨씬 좋아서 공 잘 치는 타자기도 했다.

…바로 이런 게 싫다고.

행여나 다빈이가 정노을이 이로운보다 못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까 걱정하고, 지레짐작에서 비롯된 열등감에 짓눌리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못나서…그런데 망상을 멈출 수가 없어서,

“하….”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으면서 한숨만 푹푹 쉬어대는 것이다. 머릿속에선 아까의 두 사람이 끊임없이 반복재생됐다.

비슷한 경험을 몇 번 했었다. 정노을의 결정적인 실책으로 시합을 말아먹은 후, 며칠 내내 실수했던 장면이 루프 영상으로 계속 떠올랐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안 들어가고…엄청 괴로웠는데, 정노을 인생 통틀어 총 세 번 있었다.

다빈이랑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는 뭐…셀 수가 없다. 좋은 장면도 나쁜 장면도 계속 생각난다. 아무 일 없었는데 그냥 송다빈이라서 생각나는 경우도 있고.

생각도 감정도 정노을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완전히 제멋대로야. 좋은 날에는 한계를 깨부순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나쁜 날에는 되는 게 하나도 없고 멍청해지기까지 한다. 경기력을 생각하면 이런 상태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하는데, 떠올리면 또 심장이 쿵덕쿵덕 뛰면서 막아선다. 어딜 네 맘대로? 라고 하듯이.

돌아버리겠다고. 아니면 이미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나쁜 일은 연이어서 온다더니,

나쁜 일 첫 번째. 이로운이 있는 신린상고와 연습 시합이 잡힘.

두 번째. 이로운이 라커룸으로 다빈이를 찾아 옴.

세 번째. 연습 경기 패배.

네 번째. 다빈이에게 바람 맞은 귀갓길.

경기에 지장 없도록 최대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했지만 실패해서, 몇 가지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정노을 뿐만 아니라 다른 부원들의 잔실수도 많아서 상대적으로 묻혔지만, 결국 3-7로 처참하게 졌기 때문에 위안이 되지 않았다.

신린상고 선수들과 인사 나눌 시간을 준다길래 잠시 자리를 피했다가 돌아왔더니 신린도 다빈이도 없었다. “다빈이? 먼저 간다던데? 연락 못받음?” 껌딱지처럼 붙어다니더니 웬일이냐며 방범준이 놀려댔다. 주먹이 울었다. 지이잉-. 정노을이 주먹을 쳐든 순간, 타이밍 웃기게 진동 소리가 났다. 살짝 쫀 방범준을 뒤로 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니 다빈이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다빈이 답지 않게 장문으로 구구절절, 이로운이 다빈이의 할아버지를 뵙고 싶어해서 먼저 간다고, 갑자기 인사도 없이 먼저 가서 정말 죄송하고, 내일이 토요일이라 시간이 남아서 잠깐 들린댔다며 대리로 해명하는 내용이었다.

“…하.”

이 문자를 쓰면서 다빈이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지, 얼마나 미안해했을지 눈에 선했다. 동시에 이로운을 향한 적개심이 더 올랐다.

오늘 저녁엔 다빈이한테서 힐링 받고 싶었는데….

그래도 중학교 선배가 어르신 뵙고 싶다는데 다빈이가 뭘 어쩌겠어. 데려가는 수밖에…. 다빈이 집이 학교에서 먼 것도 아니고, 잠깐 정도야 거절할 방법이 없었겠지. 정노을은 이해했다.

“야, 야…. 글케 화났어? 놀려서 미안해….”

옆에서 방범준이 눈치를 보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사과하지 않았다면, 정노을은 자기가 표정관리를 잘 한 줄 알았을 것이다. 분명히 웃고 넘기려고 했는데…꺼진 핸드폰 액정에 비춘 얼굴은 웃음기라곤 한 톨 없이 힘줄만 툭툭 불거져 있었다.

다빈이가 무척 보고 싶었다. 이로운 빼고.


나쁜 일 다섯 번째. 연적과 함께 있는 남자친구를 목격함.


지이이잉- 지이이잉-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이고 진 책상도 같이 떨었다.

커텐 치고 불 끈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액정만 밝게 빛나다 진동이 멎으면 까매졌다. 곧 다시 반짝, 불 들어오며 지이이잉.

책상 앞 의자에 몸을 구겨 무릎을 안고 앉은 정노을은 하염없이 화면을 내려다 봤다.

뒤를 돌아보는 다빈이의 얼굴 사진과 선명하게 박힌 글자 [우리 다빈이].

가능하면 티 내지 말자고 약속해서 고르고 골라 저장한 이름이, 지금은 야속하다.

이로운이 다빈이를 부르는 애칭이라서.

모를 때 지었지만, 안 후에도 수정하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탓이다.

하지만 간혹 열등감이 쑥쑥 자라날 때마다 다빈이는 이 호칭을 들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할까, 나랑 같이 있으면서 이로운 생각을 했을까, 따위의 음습한 생각을 했다.

바꾸면 될 일인데 어쩐지 지는 것 같아서 그러지도 않고….

진짜 못났다, 정노을….

왜 이렇게 심통났나. 그건….

아무래도 다빈이를 봐야 맘이 풀릴 것 같아서 다빈이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로운은 잠깐 들린 댔으니 이미 볼일 마치고 갔을 거라고 좋을 대로 속단하고. 그렇게 대비 못한 상태로, 다빈이의 집 근처에서 친밀하게 딱 붙어 걷던 두 사람을 봤다. 다빈이의 머리에 붙은 뭘 떼주겠다고 말하며 불필요한 스킨십을 하는 이로운과 거의 본 적 없던 편안한 표정의 다빈이가 함께 있는 모습이 정노을 보기에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질투가 났다. 두 사람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고 싶었다.

정노을 질투심 많은 거야 정노을도 알고 송다빈도 아니까, 그건 큰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두 사람에게 발각되자마자 그 자리에서 도망친 자신이다. 차라리 얼굴에 철판 깔고 난입해서 기싸움을 했어야 했다. 유치해도 그게 정노을다웠다.

하지만 맞서는 대신 도망쳐 버렸다. 왜? 끼어들 엄두가 안 나서.

정노을이 영영 알지 못하는 두 사람만의 옛날이 너무 질투나고 겁나서….

화면이 또 꺼졌다 켜졌다. 벌써 열 일곱 번째였다.

문자는 스무 통 넘게 왔지만, 화면 잠금을 해제하지 않아서 알림 개수만 늘어났다.

걱정시켜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전화를 받아도 할말이 없었다.

정노을의 남자친구는 기본적으로 호불호가 그리 세지 않고 배려가 몸에 배어 있어 고질적인 부분을 제외하곤 거의 정노을에게 맞춰줬다.

순전히 밴댕이 소갈딱지만한 정노을의 아량과 오락가락하는 감정 탓인데, 전화를 받고 싶지가 않다.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질 것 같을 뿐이다.

이 와중에 우습게도, 받을 생각 전혀 없으면서 다빈이의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안도한다.

성격에 문제 많은 줄 알긴 했다만 연애 시작하고 자신의 최저점을 갱신하는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못났지….

노을은 무릎 사이에 턱을 묻는다. 방금 뚝 끊어진 전화가 언제 다시 걸려올지 기다리면서.

하지만 이번에는 잠잠하다.

열 일곱 번으로 끝인가 보다.

마음을 추스리고 반성해야지. 이로운도 다빈이에겐 소중한 인연이다. 다시는 이런 모습 보이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아야지….

정노을은 속으로 중얼대면서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둠에 익숙해져 핸드폰의 모양이 그대로 보일 때까지, 망부석처럼 그냥 그러고 있었다.

지잉-

휴대폰이 짧게 울었다. 전화 아닌 문자였다.

이제 그만 기다리고 잘까…한숨을 폭 쉬며 고개를 돌렸다가, 갑자기 변덕이 끓어 화면 잠금을 해제했다.

충동적으로 문자를 확인한 정노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불부터 켜고 침대 밑에 쳐박아둔 가방을 꺼내 내용물을 와르르 쏟아버리고, 옷가지를 마구잡이로 쑤셔넣는다.

얼굴에선 한순간에 그늘이 싹 사라졌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짐을 챙기는 경쾌한 손놀림.

띠링,

진동 대신 문자 알림음이 나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한다.

거기에는 정노을의 기분을 급변시킨 요인이 있다.

[형, 언제 도착하세요?]

송다빈의 문자다.

언제 고민했냐는 듯이, 다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정노을은 만면으로 웃으며 곧 간다고 답장한다.

정노을이 오매불망 기다렸던, 미치광이 롤러코스터 상승 주기, 시작.


연애는 야구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어쩌면 정노을이 아는 게 야구밖에 없어서 비교군이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공 하나에 일희일비하고, 기세를 타면 파죽지세로 더없이 쉬운 게임을 하지만, 잠깐의 방심이 빚어낸 실책으로 분위기가 급변할 수 있으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야구처럼,

연애는 상대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 울고 웃고, 감정을 제어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에 타게 만든다.

만나서도,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작은 오해와 불신으로 관계가 틀어질 수 있을 만큼 예민하다.

열한 명씩 두 팀, 도합 스물 두 명이 마운드에 오르는 야구와 달리 연애는 단 두 명뿐이라, 투구도 포구도 타구 수비 주루 모두 각자의 어깨에 실린다는 점이 다르다.

정노을의 뛰어난 동체시력과 빠른 판단은, 이 연애라는 마운드 위에선 큰 이점이 되지 못한다.

현실 야구와 달리 두 사람이 주고 받는 공은 물리 법칙 하의 정상 궤도로만 오는 게 아니라, 가끔 사라지기도, 머리 위에서 뚝 떨어지기도, 빙빙 돌기도 하니까. 그럴 때면 정노을이 누누이 말했듯 상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무미건조한 확률과 논리가 아닌, 그 말과 행동이 나온 배경과 그 순간 상대방의 감정을 토대로.

확실한 건, 어쨌건 공은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는 사실이다. 눈 앞에서 사라지든, 하늘에서 추락하든, 마운드 위를 몇 바퀴고 빙빙 돌든, 한 사람의 손에서 떠난 공은 상대의 손 안에 반드시 들어간다.

이것이 정노을과 송다빈의 연애다.

집에 놀러오라는 송다빈의 문자를 받고 뛰쳐나간 정노을은, 본인이 던진 공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형, 놀러오실래요.]

[할아버지 친척집 가셨어요.]

[내일 오신대요.]

문자를 확인한 직후에는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로운은 갔구나! 하는 생각이 맨처음 들자마자, 음침했던 생각들이 싹 씻겨내려갔다. 다음은 다빈이네에서 외박한다는 설렘과 조금은 음흉한 기대가 스믈스믈 차올랐다. 집히는 대로 옷을 쑤셔넣은 바람에 지퍼가 닫히지 않을 만큼 빵빵해진 가방처럼, 가슴이 뻑적지근할 정도로 벅찼다.

부모님께 외박을 통보하고 현관을 나서자마자 전력질주했다. 안될 도루는 시도조차 안했던 정노을 생에 제일 빠른 달리기였다.

머릿속이 온통 다빈이였다. 숨이 턱을 넘어 머리 끝까지 차서 혼미한 가운데, 러너스 하이와 함께 찾아온 감정은 환희라 부를 만했다. 땅 파고 들어갔던 만큼, 아니 반동으로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간 마음. 기대 심리가 직전에 제일 높듯이, 방해꾼 없이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생각에 감당 못할 정도로 행복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자기가 뭘 했는지도 까맣게 잊고 말이다.

송다빈 입장에선 남자친구가 집에 찾아왔다가 자신이 친한 선배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후 정색하고 뛰쳐나갔으니, 오만가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던 롤러코스터는, 현관문 사이로 다빈이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우뚝 멈췄다.

어두운 안색, 평소보다 내리깐 눈, 물어뜯은 자국 남은 입술…, “어서오세요…” 힘없는 인삿말을 듣고서야 정노을은 본인이 저지른 일을 자각했다.

행복? 나 따위가? 바로 90도로 꺾여 추락하는 것이다. 응당 그래야만 했다. 자각한 순간 마법처럼 자기 잘못과 다빈이의 심정이 해일처럼 몰려왔으므로. 고양감이 휩쓸려 지나간 자리에는 자책과 후회가 남았다.

“미안….”

하고 싶은 말이 무진장 많았는데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은 저 한 마디 뿐이다. 다빈이는…정노을의 자격지심에 갑자기 얻어맞은 셈이니까…. 적절한 질투는…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 정노을의 질투는…특히 이로운과 엮이기만 하면 정도를 지나친다. 알지만 매번…갈수록 심해진다.

다빈이는 정노을을 책망하거나 원망하는 대신, 심경 복잡해보이는 얼굴을 들어 눈을 맞춰왔다. 안 그래도 짙은 다크서클이 더 깊어보였다. 생각 많을 때마다 그랬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현관 등 아래서 속눈썹의 긴 그늘이 파르르 떤다.

잘못한 건 알아서 입 꾹 다물고 있으려던 정노을의 정신을 쏙 빼앗고 입 벌어지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걱정고민으로 음울해보이는 낯색이 되려 정노을이 사랑해 마지않는 송다빈의 얼굴에 깊이를 더해주었다. 먹으로 그려낸 듯한 눈썹, 겨울 밤바다처럼 가라앉은 남색 눈…그림자마저 길게 쭉 뻗은 콧날과 피 비치는 도톰한 입술….

그야말로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얼굴…. 염치를 모르고 헤실헤실 웃음 나오려는 찰나, 입술이 열리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형이 제일 좋아요….”

이어지는 말.

“다…아시잖아요….”

정노을은 염치고 나발이고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방을 내던지고 사랑하는 후배를 꽉 껴안고 말았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는 사실, 그것을 확신하는 이 마음이, 송다빈에게 정노을이 유일무이하다는 증명이 되니까.

방금 전까지 미안해서 찔끔 날 뻔했던 눈물이 기쁨의 눈물로 탈바꿈되는 순간이었다.

이 짧은 하루동안 몇 번의 변곡점을 맞이했는지.

야구 빼곤 평탄했던 일상이 감당 안될 정도로 역동하고 있으나, 누군가 정노을에게 하차용 버저를 쥐어준대도 누를 생각이 전혀 없다.

모든 게 상대에게서 비롯된다면 슬픔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올라가는 롤러코스터 위에 탄 정노을은 생각한다.

연애해서 참 행복하다고!


정노을에게 고백 받아 사귀기 시작한 이래로 송다빈에게 큰 고민이 생겼다.

노을이 형과 함께 있으면 잔뜩 사랑받는 느낌으로 충만해지고, 형이 좋고, 시간이 몇 배로 빨리 간다. 형이라면 절대적으로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 다빈이 형에게 얻는 좋은 기분 그 이상을 주고 있다는 효용감, 그리고 닿으면 싫지 않은 체온….

형이라면 모자란 자신을 옳은 길로 이끌어줄 거라는 믿음도.

이게 사랑이라면, 로운인…?


승객이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향하는 미치광이 롤러코스터의 운행은 끝나지 않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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