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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어둠을 네게 (커미션)

2차 커미션 / 2023. 05. 11

마비노기 멀린 드림 커미션

멀린 X 스텔라

 

 

밀레시안은 구태여 잘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잠들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 수면을 취하지 못해서 죽어가는 밀레시안이라니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허나 멀린은 제 눈앞의 광경을 인정해야만 했다. 스텔라는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려 며칠째 애쓰고 있다. 눈가가 퀭해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스텔라가 눈을 감고 다시 뜰 때까지는 약간의 시차가 있다. 그 짧은 어둠 속에서 별은 과연 빛나고 있는가.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하려 애쓰는가. 멀린은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잠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스텔라는 잠들 수 없다. 남자가 든 촛대의 불이 일렁인다. 양초가 녹아가면서 은은한 아로마 향이 났다. 아름다운 별이 불빛을 반사한다. 시선이 양초와 멀린 사이를 오간다. 시선은 끝내 아무 데도 머물지 않는다.

“스텔라.”

“멀린.”

시선이 마침내 한 곳에 멈춘다. 두 존재가 입에 담는 건 각자의 이름이다.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멀린은 근처에 촛대를 내려놓는다. 불은 부드럽게 유영한다. 소파에 누워 있던 여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잘 거면 침대에서 자지.”

“……”

남자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두 사람이 앉기에 소파는 어쩐지 좁은 감이 있다. 허나 남자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밀레시안은 잠들 필요가 없다. 잠들 장소도 필요 없다. 그럼에도 스텔라의 집에는 침대가 있었다. 설령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밀레시안에게 그 존재의 도움을 구하는 이들은 끊이지 않았으므로. 스텔라의 집은 어쩐지 ‘스텔라’의 집이라기보다는 모두가 머무는 휴식처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정적이 촛불마냥 일렁인다. 불편하지 않은 정적이어야만 했다. 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정적도 빈번한 법이니까. 그런데도 한 사람은 이 고요함이 불편했다.

“있잖아, 멀린.”

“응.”

듣기 좋은 목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이름의 주인은 즉답한다. 스텔라는 또 한참 말이 없다. 여자는 눈을 감는다. 잠들지 않는다. 여자의 호흡이 서서히 떨려 온다. 심호흡을 거듭해도 변함없다. 멀린은 기다릴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여자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여자는 눈을 뜨지 않는다. 남자가 손을 거두고 나서야 스텔라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왜 계속 여기 있어?”

“난.”

“날 지키겠다고, 맹세했으니까?”

“그거 반만 정답이야.”

멀린은 가볍게 웃음을 뱉어낸다. 그건 어쩐지 털어내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이미 숱하게 나눈 대화였음에도 그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그래. 널 지키겠다고 맹세했으니까. 평소에는 늘 그 말만을 뱉곤 했다. 허나 오늘은 다르다. 왜 하필 오늘이었을까. 날짜를 고르는 데에는 아무 이유도 없다. 오래 살면 그렇게 되는 법이다. 긴 시간을 살아온 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조금은, 그저 이 상황이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스텔라의 낯에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는다. 늘 그랬다. 여자는 대개 그저 말갛게 웃을 뿐으로 다른 표정을 짓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이면에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지는 않았다. 남자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여자는 제가 구하지 못했던 자들을 곱씹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었다고 해도. 스텔라는 그런 존재였으므로. 오래 살다 보니 별걸 다 보네. 웃기게도 그게 스텔라를 향해 품은 최초의 인상이었다.

“나머지 반도 알려줄까?”

“멀린이 말하고 싶다면.”

여자의 허락이 떨어진다. 남자가 천천히 목을 가다듬는다. 그는 어쩌면, 제가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능성의 일종이었다. 살면서 이런 적이 있었던가. 애초에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던가. 수백 년의 세월을 손에 쥐어 샅샅이 훑어본다. 세월은 부드러운 모래처럼 빠르게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속에서 걸리는 것은 눈앞의 어떤, 존재뿐이다. 그는 스텔라를 완벽하게 수식할 수 있는 말을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다. 처음에는 그냥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녀석 정도로만 생각했고 그다음에는 동정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동정이었다. 너무 짙어서 무를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저 단순히 한 발짝 떨어진, 완전한 타인으로서의 동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지나치게 개입하고 말았다.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개입하고 싶었다.

“난, 스텔라를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옆에 있고 싶어.”

그제야 스텔라가 고개를 돌린다. 정면을 응시하던 여자가 그를 올려다본다. 멀린은 사뭇 진지한 얼굴을 했다.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으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털어놓은 감정이었다. 그 말에 실린 감정이 단순히 친애나 우정이 아님을 두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알아야만 했다. 알아주기를 바랐다. 스텔라가 답지 않게 긴 한숨을 뱉어낸다.

“그래. 고마워.”

“스텔라, 무슨 반응이 그래?”

“ 아무튼, 멀린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거잖아. 난 그거면 됐어. 괜찮아.”

“나 상처받는다.”

두 사람 사이에 느릿한 정적이 흐른다. 멀린은 어울리지 않게 제 이마를 짚는다. 이상하다.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 게 아니었는데……. 아니다. 애초에 반응을 기대한 적도 없다. 스텔라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텔라가 그 일을 수행하는 동안 그 곁에 제가 있기를 바랐다. 기댈 수 있는 장소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의 반응은 너무나도 허망했다.

“멀린.”

“응.”

“깨어 있으면 계속 나쁜 생각이 들어.”

“……”

“이 생각을 그만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스텔라.”

멀린은 손을 뻗는다. 자연히 그리되었다. 그가 아는 스텔라의 표정은 정말,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오늘 제가 본 표정 목록에 하나를 새로이 추가했다. 결코 보고 싶지 않던 얼굴이었다. 푸른 눈이 눈물을 가득 담는다. 눈은 온전히 그것을 거둬들이지 못한다. 투명한 액체가 곧 뺨을 타고 흐른다. 스텔라는 제 뺨을 닦지 않는다. 애초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그렇기에 멀린은 스텔라가 해야 할 일을 대신했다. 손가락에 눈물이 묻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스텔라 역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천천히 손을 떨어트린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한낱 동정이라는 것도 알지.”

“잠깐. 스텔라, 나는…….”

“굳이 네 감정을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돼.”

“……”

숨이 턱 막힌다. 남자는 말을 잃었다. 스텔라는 다시 눈을 감는다. 여자는 어둠 속에서 말을 이어 나간다. 멀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저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어쩐지 사형 선고 같았다. 스텔라는, 잔인했다. 수많은 사람에게 자비를 흩뿌려 왔으면서도 왜 제게는 이렇게 잔인한지. 그렇게 생각하니 그 잔인함 또한 일종의 축복 같았다. 스텔라의 미간이 작게 좁혀 진다. 남자는 그런 작은 변화들을 쉬이 눈치챌 수 있었다. 스텔라는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기린다. 그런 녀석이었다.

“나는 말이지, 여태까지 여러 사람의 사랑을 봐왔어. 그중에 단 한 명도, 절대로 동정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아.”

말이 드문드문 이어진다. 당장이라도 잠들 사람처럼. 허나 멀린도 스텔라도 안다. 이번에도, 스텔라는 잠들 수 없으리라. 여태 그러했듯이. 남자는 제 감정을 안다. 이건 한낱 동정 따위가 아니다. 감정의 주인인 만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물론 한 때는 호기심이었고, 동정이었으며, 가벼운 호의였으나 이제는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넘은 곳에 바로 사랑이 있었다.

“이건 동정 같은 게 아니야.”

“틀려, 멀린. 넌 날 동정하고 있어.”

“스텔라. 내 감정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스텔라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멀린 역시 소파에서 몸을 떨어트린다. 촛대를 챙긴다. 초가 많이 녹았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스텔라는 침실을 향해 발을 옮긴다. 오늘따라 유독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자주 떨어진다. 침실은 어두웠으며 냉기가 맴돌았다. 도저히 누군가가 잘 법한 공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스텔라는 아무렇지 않게 어둠을 헤치고 침대로 다가간다. 멀린이 가는 길에 빛을 드리웠다. 몸을 눕히기 전에 스텔라가 가만히 멀린을 올려다본다.

“그치만…… 설령 한낱 동정일 뿐이라도, 나와 함께 있어줘.”

“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게 해. 당연히 같이 있을 건데.”

동정이라도 좋으니 옆에 있어 달란 말을, 그가 놓칠 리 없다. 그가 기꺼이 손을 뻗는다. 스텔라는 그 손을 피하지 않는다.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인다. 스텔라는 그 감각이 싫지 않았다. 싫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당연히 같이 있을 건데. 그 말이 스텔라를 잠재우는 주문이 된다. 아주 오랫동안 잠에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모든 것이 변해 있어도 멀린만은 곁에 있어 줄 것만 같았다. 그제야 여자는 안심하고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멀린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다. 스텔라가 당장이라도 눈을 떠 자신을 찾을 것만 같아 남자는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스텔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도 먼저 알 수 있는 건 자신인데도 도저히 거리를 둘 수가 없었다.

남자는 잠든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며칠을 고생하다 겨우 얻은 잠이다. 깨우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살았음에도 아직 제가 겪지 못한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겨우 알았다. 그 사실을 일깨워 준 건 눈앞의 여자였다. 스텔라는 지금까지 수십 번 가까이, 멀린의 의사를 물어왔다. 떠나지 않을 거냐고. 물음과 물음 사이에는 아주 긴 시간이 있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묻고, 뒤를 돌아보고는 재차 물어보곤 하였다. 그는 언제나 같은 답을 했다. 떠나지 않겠노라고. 질문은 한 단계 나아갔다. 이제 스텔라는 제게, 떠나지 않는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게 조금, 좋았다. 떠나지 않겠다는 사실만은 인정받은 것 같아서. 이제는 다음 질문에 답을 고할 시간이었다. 여자가 다른 질문을 내뱉기 전까지, 왜 여기 있냐는 질문만을 반복한다면 그 역시 답을 반복할 뿐이다. 너를 좋아하기에 여기 있노라고. 멀린은 촛불을 조심스레 껐다. 자리를 뜨지 않는다. 사소한 행동이, 스텔라를 깨울 것만 같았다. 그저 머무른다. 여자가 눈을 뜰 때까지. 멀리서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그는 이 공간에 어둠을 가져온다. 그건, 대마법사에게 눈을 깜빡이듯 쉬운 일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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