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민] 러브인더비엘. prol.
김남준x박지민
[인기 웹소설 '선비님의 고양이' 드라마화 확정!]
“대박. 기사 쏟아지는 속도 뭐지? 이 정도는 기대도 안 했는데!”
태블릿을 바쁘게 두드리는 강 대표의 목소리가 한껏 들떴다. 계약한 이래로 포털과 각종 커뮤니티, SNS에 지민의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된 날이니 그럴 만도 했다. 카톡. 카톡. 카톡. 그러잖아도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선후배까지 톡이 오는 걸 보며 지민은 작품의 화제성을 실감했다. 연락처는 대체 다들 어떻게 갖고 있던 건지 모르겠다.
이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 배우가 주목받는다니, 다시 없을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다. 간간히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느라 사무실 구석에서 바쁜 매니저의 목소리도 밝다. 몸값이 적을 때 미리 선점하려는 건지 벌써 자잘한 광고 문의가 들어오는 모양이다. 자그마한 사무실의 공기가 전에 없이 화사했다.
반면 지민의 얼굴은 이상하게 어두웠다.
“왜 그래. 응? 너무 일찍 깨워서 그래? 미안해, 미안. 아니, 답 달라고 성화들이잖냐. 같이 추슬러보려고 그랬지. 지금 뭐 거의 전쟁통이다, 지민아. 근데 행복한 전쟁. 그치?”
얼르고 달래는 기색이 역력하다. 대표는 지민의 눈치를 살폈다. 아침 꼭두새벽부터 지민을 호출해 밀려드는 스케줄 제안을 함께 체크하자고 성화했다. 평소 아침잠이 많은 탓에 일찍 일어나는 날은 미리 언질을 주었는데, 오늘만큼은 비상이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지민 본인이 가장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막상 사무실로 들어오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대표는 계속 지민을 힐끗거리며 분위기를 띄우려 애썼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야. 진짜 그 말이 백번 맞아. 안 그래? 처음에 게이 드라마래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냐고. 근데 이렇게 빵 터질 줄 알았나? 지민아, '차린 건 개뿔도 없지만'에서까지 연락왔다? 대박이지.”
대표의 말이 길어질수록 지민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분위기 이거 왜 이래. 고개 숙인 아래 언뜻 보이는 눈빛이 처음 보는 재질이라, 대표는 어쩐지 초조해졌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라면 매니저가 벌써 체크해서 전달했을 텐데. 이제부터 달려야 하는데 아프면 어째.
대표는 곁눈질로 지민을 살피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상대 배우 갈아치워진대서 이거 안될 판인가 했는데, 웬 걸. 김남준이 다 뭐야. 나 진짜 소리 질렀다?”
이렇듯 감당하기 어려운 행복을 불러일으킨 원인. 김남준. 그저 그런 웹드라마로 끝날 줄 알았던 작품이었으나 상대역이 A급 배우로 바뀌었다.
[긴 공백을 깬 김남준의 차기작, 동성애 다룬 사극 드라마 '선비님의 고양이'로 낙점.]
박지민은 마스크도 좋고 전공도 연영과라 내실도 탄탄하다. 흐름만 타면 나쁘지 않은 재목이었다. 헌데 아무리 밀어 넣어도 좀처럼 대본이 들어오지 않아 애가 닳던 차였다. 운이 따르지 않았는지 단역조차 연결이 안 됐다. 아무리 소규모라지만 나름 기획사 대표인데, 자신의 안목이 인정받지 못한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프로필 돌린 지 1년 반쯤 된 시점에서야 온 첫 연락이 '선비님의 고양이' 드라마였다. 비록 이벤트성 웹드라마고 작은 제작사지만, 주연 제안이라기에 장르 따지지 않고 무조건 등 떠밀었는데 얼결에 큰 판이 됐다. 하루아침에 쏟아지는 러브콜에 대표는 망설이던 지민을 설득한 자신을 얼마나 칭찬했는지 모른다.
“…대표님.”
지민이 긴 침묵 끝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슨 소원이라도 들어줄 것처럼, 대표가 몸을 숙이고 지민에게 귀를 기울였다.
“어어. 말해, 말해.”
불안과 걱정과 기대와 기쁨으로 뒤섞인 대표의 눈과 마주친 지민의 시선이 흔들렸다. 지민의 도톰한 입술이 여러 번 달싹이다 도로 붙어버리는 걸, 강 대표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렸다.
Love in the BL
러브인더비엘
prol.
“저…….”
이거 안 하면 안… 안 되겠죠...?
지민의 목구멍이 꽉 틀어 막혔다. 저 얼굴에 대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희끄무레하게 동이 터올 때 즘에서야 겨우 눈을 붙였더랬다. 어제 막 받은 첫 작품, '선비님의 고양이'의 대본을 살피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로맨스 상대역이 남자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뭐 어떠랴. 역할은 역할일 뿐. 정말 잘 해내고 싶어서 몇번씩 대사를 읽어보다 대본을 안은 채 잠들었다.
- 지민아!!!!!! 로또다, 로또!
깊은 기절 잠 속 요란한 벨 소리에 얼마나 놀랐는지. 그래도 고함을 지르는 대표의 기차 화통보단 덜했다. 전화에서 터져 나오는 강 대표의 두서없는 설명은 알아듣기 힘들고 요란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요? 진짜요? 그래도 성실히 추임새를 넣어보려던 지민이었는데, '김남준'이라는 이름 하나에 머릿속이 하얗게 휘발되어 버렸다.
…잊고 지냈는데. 어떻게 잊은 이름인데.
이름을 잊었다는 것은 사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비유적인 표현, 그런 거다. 상징적인 것. 지민의 세계관에서만큼은 ‘김남준’이란 이름 석 자란 금기어였다. 불행히도 지민이 속한 현실 세계에서는 그 이름이 잘 나가는 인기 배우의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R은 김남준을 위해 태어난 캐릭터다.’
냉철하기로 소문난 평론가가 김남준의 데뷔작 역할을 극찬했다. 당시 강렬한 내면 연기로 조연 ‘R’에 세간의 이목이 쏠렸고, 신인으로는 드물게 전문가와 관객층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그것이 단발성 화제가 아님을 증명하듯 후속작마다 연이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눈빛, 목소리, 대사가 상흔처럼 관객들에게 새겨졌고, 맡은 역할마다 영혼을 갈아 끼운다는 말이 그의 이름 앞에 매번 수식어처럼 붙었다. 명실상부 탑 주연 배우였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광고계를 점령하던 그가 돌연 잠적한 것도 커다란 이슈였다.
그랬던 그의 복귀작 발표라니. 연예계가 들썩일만했다.
“응? 뭐. 뭐든 말해. 뭐……. 어디 아픈가? 몸이 안 좋아?”
“그런 건 아니고요. 그… 드라마 말인데요…….”
“어어. 드라마. 안 그래도 상대 배우가 변경되어서 정말 미안하다고, 꽃바구니를 다 보냈더라? 아, 뭐 먹지도 못할 거, 저런걸 보내고 그래.”
어떻게 봐도 지민의 기획사가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인데 도리어 사과한다니. 지나칠 정도로 예의 바른 대접이다. 대표는 그게 몹시 기꺼운지 여태 보아온 날들 중 입꼬리가 가장 올라붙어 있었다. 슬쩍 가리키는 손가락 끝이 머무른 곳엔 커다란 꽃바구니가 자리하고 있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저 커다란 걸 눈치채지 못했다.
…예쁘다.
예뻤다. 너무 예뻤다. 그런 꽃바구니는 처음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대단했다. 화려하게 핀 꽃들이 성인 몸만 한 바구니 가득 담겨있어 무게도 상당해 보였다.
“근데 저게 무슨 꽃인지 모르겠어. 색도 되게 특이하지 않냐. …비싼 건가? 난 세상에 보라색 꽃 있는 줄도 몰랐다, 꽃 무식이라.”
“클레마티스…요.”
“클레, 뭐?”
“꽃 이름이, 클레마티스예요.”
지민의 말에 대표가 크으으, 감탄사를 내뱉으며 쌍 따봉을 흔들었다. 동시에 소낙비처럼 칭찬이 쏟아졌다. 지민은 그 꽃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돌린 시선 너머 하늘이 몹시 파랬다. 꼭 그날 같다.
스물 두 살의 김남준에게 클레마티스를 건네며 스물한 살의 박지민이 고백했던 그날.
- 어, 지민아. 왔어? 웬 꽃?
- 저… 선배. 이거. 선배 탄생화인데. 생일 축하해요.
- 내 탄생화? 와… 예쁘다. 언제 이런걸 준비했어, 나랑 밥 먹어주는 게 선물인데. 고맙다. 내 평생 처음 받아보는 꽃이네. 입학, 졸업식 꽃 제외하고.
꽃을 받아드는 기색은 긍정적이었다. 환한 그 미소에 용기를 얻었다.
- …어, 선배. 저, 사실은요. 할 말이… 있어서요.
- 응. 뭔데? 뭐 부탁할 거 있어?
- 음……. 그게, 이미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는데요….
- 아, 미리 미안. 눈치 못 챈 거면 어쩌지? 만에 하나 나 혹시 모르더라도 이해해줘. 내가 은근 둔하잖아.
- 알아요.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는 건데…….
왜 확신했을까.
- 저……. 저, 선배.
그 사람이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왜 그 다정함이 사랑이라고 착각했을까.
- 있잖아요, 선배, 제가 조… 좋아해요.
어째서 그 따뜻함을, 배려를 홀로 독점한 것이라 여겼을까. 오만하게도.
- 어……? 어. 나도, 좋아하지.
아마 풋풋한 나이에 세상에 나와 처음 맞이한 사랑이어서 그랬을 테다. 처음 만들어낸 사랑의 모양이 온전하리란 기대감. 그게 반쪽짜리인 줄도 모르고.
- 후배들 중에 지민이 네가 제일, 좋지.
지민은 어색해져 버린 남준의 미소에서 단호한 거절을 읽고 생애 첫 절망을 만났다. ‘김남준’이란 이름은 박지민의 세계관에서 첫사랑이자 첫 실연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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