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파이브 생일 합작 글 부문

참여자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합작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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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순서는 제출 순서입니다.

*2024년 파이브 생일 합작 참여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유난히 눈이 많이 왔던 겨울도 점차 사그러지고 있었다. 2월 초반, 겨울의 끝자락이 소복이 쌓인 눈에 비쳐보이는 때였다. 제아무리 봄이 머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린잎이 얼기라도 할까 겨울눈을 꽉 붙든 나무들은 여전히 앙상했다. 마음 급한 새싹이 무심코 빛을 쫓다가는 금세 시들어 버릴 추위였다. 아직 풍겨오지도 않은 봄내음이지만, 아직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겨울이지만, 꽃송이는 꿈에 찾아들었다.

"파이브,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거야?"

코마의 늘어진 목소리가 파이브를 불러냈다. 길게 늘어진 코마의 주홍빛 코트가 파이브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파이브의 발 밑에는 피어나다 얼어버린 수레국화가 뭉개져 있었다. 들짐승에 밟히고 바람에 찢어져 꽃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생김새였다.

파이브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쭈그리고 있었던건지 다리가 잘 펴지지도 않았다. 파이브가 저린 다리를 두드리자 코마가 그를 한심한 듯바라보았다. 그러다 파이브를 두고 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같이가!"

파이브도 서둘러 코마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잠시 간의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가득 찼다.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음에도 파이브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짙게 낀 안개 사이로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새하얗게 덮인 하늘로 새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기에 오두막에서 하늘이 퍼져나가는 것도 같았다. 김이 낀 창문 안에서 아른거리는 빛은 하얀 설원 위의 등대 였다. 하지만 자꾸 깜빡거리는 탓에 심각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이기는 했다.

창백한 코마의 손이 오두막 문 위에 올라갔다. 코마가 가볍게 힘을 주어 문을 열자 바깥 공기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오두막 가운데서 온기를 나누는 작은 촛불과 그 아래 탁자 만이 오두막의 전부였다. 오두막 전체를 밝히기에는 턱없이 작은 초였다.

"어, 일찍 왔네?"

옝이 당황한 듯 말했다. 유치할 정도로 밝은 민트색의 재킷을 입은채였다. 옝의 뒤에서는 티푸가 다급하게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왜 벌써 왔어요?"

어디선가 혜비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딱히 해줄 말도 없고 그래서 파이브는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선하도 파이브한테 가서 뭔가를 물으려다 습히 뒤로 물러갔다. 파이브가 선하를 쳐다봤 지만 선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 미안, 늦었다~!"

행크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매서운 바람이 오두막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짙은 남색의 후드를 뒤집어쓴 채였다. 그에 답하듯 파이브도 작게 손을 흔들었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을 때, 오두막은 이미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행크가 오두막 안쪽에 자리를 잡자 우토가 파이브 옆으로 와서 섰다. 뒷짐을 진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우토의 등 뒤로 청량한 색이 얼핏보였다. 파이브가 우토를 쳐다보자 우토의 얼굴에 민망한 웃음이 번졌다.

이윽고 푸른 꽃잎들이 파이브의 앞을 가득 메웠다. 이 겨울 중 어디서 구해온 건지 수수한 꽃들이 제각기 다른 파랑에 휩싸인 채로 흔들렸다. 짙은 파랑의 빛 뒤로는 부드러운 하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작고여린 잎들이 눈 내리듯 떨어져 수레국화 위에 앉았다. 파이브는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이게 뭐야?"

"생일이잖아!"

선하가 벽 근처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답했다. 선하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파이브가 입을 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생일축하해~"

파이브의 뒤에서 티푸가 작게 외쳤다. 갑작스럽게 들린 티푸의 목소리에 파이브가 몸을 돌렸다. 티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발갛게 열이 오른 그의 얼굴 아래에는 초라한 케이크가 있었다. 소심하게 들어올린 케이크가 작게 떨려오고 있었다.

케이크는 볼품없었지만 그 위에 올라간 장식들은 꽤 봐줄만 했다. 어두운 군청빛 크림 위에 뿌려진 금가루는 밤하늘을 연상케 했다. 케이크 상단의 수레국화는 우토의 꽃다발에서 급하게 따온게 분명했지만 화사하게 빛나는 꽃의 조각들이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엉성하게 발린 크림도 친숙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파이브가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받아들었다.

양손 가득 모두의 진심이 담긴 선물들을 들고 있었다. 파이브의 얼굴에 작지만 또렷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곧 그의 입가로 흘러나온 웃음소리에 옝의 시선이 파이브를 향했다. 그러고는 저도 파이브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옝을 타고 행크를 건너 모두에게 닿아 파이브에게 돌아간 그 웃음은 어느새 작은 오두막을 따뜻하게 뎁히고 있었다.

"진짜 이게 다뭐냐..."

"우리가 진짜 열심히 준비했다고."

"아직 끝 아니다."

우융이 꽃다발을 든 파이브의 손목을 낚아챘다. 파이브가 눈을 크게 뜨고 우융을 응시했다. 우융과 파이브를 필두로 모두가 오두막 밖을 향해 달려나갔다. 또 한 번 문이 닫혔을 때, 오두막 안에 들어차있는 따듯한 불빛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봄은 멀었지만 꽃송이를 마음에 품은 누군가에게서는 일찍부터 꽃내음이 맴돌았다. 겨울 사이에서 봄을 찾아내는 사람들이었다.

김세모(@kimtriangleeee)



  파이브.

  생일 축하해.

 

  깜박, 세상이 빠르게 점멸했다. 하얗고 검은 화면들이 순차적으로 지나가다가 뒤섞였다. 잠에 들었나, 아니면 의식을 잃었나. 그런 생각조차 무의미해질 정도로 어지러웠다. 무언가 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멀어지는 느낌. 무너지다가 뭉개지다가 녹았다가 다시 합쳐지는 감각. 아마, 어쩌면, 따위의 수식어만 늘어나고 정작 명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때.

  파이브는 눈을 떴다. 세상이 새하얬다. 벽과 천장과 바닥의 구분이 없었다. 도화지 위에 떨어트린 먹물처럼 파이브 혼자 이질적인 존재였다. 저기요. 파이브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메아리 없이 목소리는 한 번만 파이브에 귀에 닿았다. 저기, 누구 없어요? 이번에도 목소리는 발음할 때만 울리고 그쳤다.

  이곳은 모르는 곳이었다. 명백했다. 파이브가 지금껏 쌓아온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장소였다. 꿈을 꾼다기엔 꼬집은 볼이 아팠다. 이곳이 어디든 현실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파이브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세상은 새하얬다. 고작 한 걸음으로 무언가 바뀌는 걸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하기 위해선 걷는 편이 더 도움되었다.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아무리 걸어도 새하얗기만 한 세상을 걸으며, 파이브는 이곳에 오기 전 기억을 더듬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랬다. 겨울의 끝물답게 눈은 오지 않았고, 밤은 점점 더 짧아지고 있었다. 개학까지는 이주하고도 며칠. 디스코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의 놀림과 다른 아이들의 한탄으로 소란스러웠다. 이따금 욕설과 게임할 사람을 모집하는 목소리 사이. 조금 특이한 것이 있다면, 흔치 않게 코마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얘들아, 우리.

  파이브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다음이 기억나지 않았다. 누군가 강제로 잘라낸 듯했다. 아마 이어질 시간은 평소와 비슷했을 터였다. 쓸모없는 이야기를 떠들고 마인크래프트나 발로란트를 하다가 컴퓨터를 끈다. 유튜브를 보다 4시나 5시쯤에 잠들었을 것이다. 그 평소와 같은 하루 속에 공백이 있었다. 잊어버렸다기엔 너무나도 깨끗한 공백이었다.

  정리하면 잠든 뒤에 여기로 왔다는 거지. 파이브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이야.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굳이 소리내어 말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입을 연 건 아무 소음도 없는 적막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귓가에서는 이명인지 혈관에 피가 흐르는 소리인지 모를 무언가가 맴돌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정교한 삐, 삐. 일정한 소리가. 파이브는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상황은 이해를 벗어났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걷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 더 많은 걸 생각하다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지 몰랐다.

  그렇지만 파이브 자신도 알고 있는 건, 애초에 이곳에 목적지는 없다는 것이었다. 동서남북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전부 새하얘서 구분이 의미 없는 세계. 차라리 유행하던 백룸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곳에는 벽과 천장, 바닥의 구분은 있었다.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선 나아가는 것과 물러서는 것의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멈췄을 때. 훅, 하고 바람이 불어왔다.

  비릿한 풀 냄새가 흙먼지와 함께 소용돌이쳤다. 바람 소리가 잡음처럼 깜박였다. 파이브는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시야 끝에 점이 보였다. 흰색이 아닌 다른 색이었다. 눈을 깜박여도 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꼭 파이브가 이곳으로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파이브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곳은 파이브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아무리 애써도 알 수 없다면 차라리 부딪히고 싶었다. 점에 닿을 수 있든 없든, 자신의 착각이든 아니든. 다시 한번 숨을 마시고, 파이브는 힘차게 땅을 박찼다.

  점은 점점 더 가까워져 끝내는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파이브가 백색의 공간을 벗어났을 때, 눈앞은 까마득한 하늘과 공중에 드문드문 떠 있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까 전까지 있었던 새하얀 공간은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세상이 다채로웠다. 파이브는 다급히 뒤를 돌았다. 하얀 세상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대문 없는 오두막 같은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온통 각진 공간이 파이브를 마주했다. 다시 고개를 돌린 곳에는 파란색 침대가, 공중에 떠 있는 섬들 역시 서로 다른 색의 침대를 가지고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공간, 그러나 현실에서는 결코 마주할 리 없는 공간에, 파이브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배드워즈였다.

  공기가 진동했다. 시야 구석에서 숫자가 깜박이다 줄어들기 시작했다. 시작은 고요하고 재빨랐다. 이미 뒤에서는 철 주괴와 금 주괴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파이브는 다급히 자원이 나오는 곳으로 뛰었다.

  바닥에 흩어진 철과 금을 주워 담던 도중, 어디선가 알싸한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자연과는 어울리지 않는,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낯선 냄새였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나, 생각해도 출처를 떠올리긴 어려웠다. 파이브는 천천히 숨을 뱉었다. 중요한 건 냄새의 출처보다 현재였다. 익숙한 침대, 익숙한 섬, 그러나 엄연히 낯선 풍경.

  파이브.

  파이브는 기지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레드팀 쪽 섬을 바라보았다. 온통 붉은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저 무언가도 밖에서는 배드워즈의 플레이어일 것이었다. 파이브가 죽여야 하고, 파이브를 죽이려 드는 존재였다.

  듣고 있어?

  현실과 컴퓨터 속은 꽤 거리가 있었다. 배드워즈에서 수많은 플레이어를 죽이고 정점에 오른 파이브여도, 현실의 파이브는 전투와 거리가 먼 남고생이었다. 검을 쥐고 휘두른대도 상대에게 정확한 딜이 들어갈지는 알 수 없었다. 파이브는 주민과 교환한 양털을 손에 쥐었다. 한 손으로 들기에 벅찬 크기였지만 무겁지는 않았다. 현실과는 다른 물리법칙이 작용한다고, 지레짐작하며 설치한 양털은 멀쩡히 공중에 떠 있었다.

  고작 손을 휘둘렀을 뿐인데도 길은 완성되었다. 레드팀을 없애는 것 역시 쉬웠다. 레드팀은 파이브의 칼질 두 번에 맥없이 섬 밖으로 떨어졌다. Red Team has been eliminated! 문구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시야에 남아 있었다.

  레드팀 옆에 있는 옐로팀까지 제거했을 땐 어느 정도 플레이에 익숙해진 후였다. 파이브는 주민에게서 철 갑옷과 철 검을 샀다. 아직도 노란색 침대를 부쉈을 때의 폭죽 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평소 게임을 할 때보다 더 순조로웠다. 누군가 침대를 부수러 달려오지도 않았고, 양각조차 잡히지 않았다. 점검을 마쳤을 땐 그레이팀이 탈락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기면 어떻게 되는지는 몰랐다. 이긴다고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이기고 싶었고, 이겨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순수한 욕망과 본능에 가까웠다. 마땅한 이유도 논리도 없이, 파이브는 미드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검을 휘두른 끝에야, 핑크는 연기로 사라지며 에메랄드를 두 개 떨구었다. 파이브는 에메랄드를 주워 들었다. 주워 담은 에메랄드는 주머니에 들어가자마자 무게가 사라졌다. 지금까지 모은 에메랄드는 네 개. 가장 가까운 그린팀의 기지는 양털 방어에 비어 있었다. 그린팀 침대를 부수고 재정비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파이브는 다시금 땅을 박차고 달렸다.

  그린팀의 기지는 양털을 다 부쉈을 때까지도 비어 있었다. 트랩도 없이 양털만 얼기설기 쌓아놓은 방어였다. 파이브는 침대를 부수려다 말고 그린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핑크 기지에서 두 형체가 꾸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린은 핑크 기지에서 싸우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것이 척 봐도 피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파이브는 침대에 손을 얹은 채 초를 세었다. 삼, 이, 일…….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린팀이 탈락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 메시지 뒤로 파란색 양털 위를 걷는, 파이브의 팀으로 달려가는 아쿠아가 보였다.

  파이브는 다급히 양털 다리 위로 뛰어올랐다. 그린 기지와 파이브의 기지는 가운데에 다이아몬드 생성기를 두고 있었다. 서두르면 침대를 부수기 전에 막을 수 있을 터였다. 다이아 생성기를 뛰어넘어 다시 양털 다리 위로 뛰었다. 침대를 감싼 양털이 부서지는 게 보였다. 조금만 더 빨리, 조금만……. 다리에 중간까지 이르렀을 때, 파란색 양털이 부서졌다. 아쿠아의 손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파란색 침대가 부서지며 화려한 폭죽이 하늘을 수놓았다. 낮인데도 불꽃 하나하나의 색이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파이브는 걸음을 멈추고 검을 고쳐 쥐었다. 한 줄의 양털 위에 선 다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남은 팀은 아쿠아와 핑크. 눈앞에 있는 아쿠아는 이미 침대가 부서진 상태였다. 침착하기만 하면 되었다. 가죽갑옷을 입은 아쿠아는 명백히 자신보다 불리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기지로 뛰어내리려던 참이었다.

  폭죽보다 더 화려한 불꽃과 연기가 시야를 집어삼켰다.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며 뒤집혔다. 이명 때문에 온 세상이 먹먹했다. 연기 사이로 희미하게 핑크가 화염구를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간신히 내려다본 아래엔 발을 디뎌야 할 양털이 사라져 있었다. 아, 미친. 험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추락했다. 섬이 점점 멀어지다가 끝내 아주 점으로 남아, 그 점조차 사라질 때까지.

  Blue Team has been eliminated!

 

  ■

 

  눈을 떴을 때는 기차였다. 기차는 조용히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다. 아주 작은 덜컹거림조차 없었다. 파이브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쪽에서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렸지만, 곧 코마의 목소리에 묻혔다. 창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코마의 말이 끝나면 곧바로 누군가가 뒤이어 목소리를 높였다. 히터 소리가 이명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파이브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패러다이스 아이들이 보였다. 갈색이거나 파랗거나 검은색이거나, 혹은 분홍색, 하얀색, 그보다 더 많은 색이 좌석마다 활짝 피어나 있었다.

  얘들아. 우리 조금만 조용히 하자. 애기 깬다. 이따금 우토가 말리는 목소리에도 아이들의 목소리는 좀처럼 낮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 코마의 옆에 앉은 티푸는 돌아갈 땐 자리를 바꾸자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다 같이 기차를 탄 기억은 없는데도, 어색하지 않고 활기찬 분위기가 이어졌다. 출발지도 목적지도, 하다못해 목적도 모르는 기차 안. 파이브는 말없이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공기가 나른해 어쩐지 잠이 오는 기분이었다. 말 소리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부유했다. 뭉개진 발음들이 자장가처럼 파이브를 간지럽혔다.

  우리 어디 가고 있어?

  파이브는 옆자리에 앉은 우토를 쿡쿡 찔렀다.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야, 야, 찌르지 마. 익숙한 목소리가 잡음 없이 맑게 울렸다. 파이브는 고개를 들어 우토의 눈을 마주했다. 평소와 비슷했다. 그렇지만 낯설었다. 우토는 질린다는 투로 되물었다.

  지금 나 놀리려고 묻는 거지?

  그게 아니라, 이상하잖아. 왜 우리 다 같이 기차를 타고 있는 거야?

  일순간 히터 소리가 꺼졌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한번에 사라졌다. 끊겼다기보단 증발한 쪽에 가까웠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세상이 고요해졌다. 파이브는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창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고요히 기차를 파묻고 있었다. 눈앞에 우토가 있는데도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웃고 있나, 아니면 무표정인가. 애초에 어디를 보고 있는지조차. 눈이 쌓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우토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야 파이브. 오늘은.

 

  ■

 

  세상이 어두워졌다가 한순간에 밝아졌다. 파이브는 그제야 자신이 누워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다시 하얀색의 세상이었다. 검도 양털도 침대도 상대도 기차도 없었다. 코마도 우토도 티푸도 다른 아이들도 없었다. 오로지 하얀색뿐이었다. 파이브는 애써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무슨 날인지. 이곳에 오기 전의 오늘은 겨울 방학 중 하루였으나, 이곳은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되지 않았다. 되짚은 기억에서도, 잠깐 스친 알 수 없는 순간에서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다시금 파이브는 백색의 세상에 있었다. 이번에는 앉아 있는 채로.

  파이브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떨어질 땅도 없는데 한 걸음만 내디뎌도 추락할 것 같았다. 발끝으로 앞을 툭툭 치자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적어도 이곳에선 걷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왔나. 파이브는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파이브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겨울의 찬 공기도 히터 소리도 없는 세계를 걸었다. 조금 전의 풍경을 계속 머리에 떠올렸다. 기차에 아이들이 앉아 있었고 창 밖에서는 눈이 내렸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분명 게임 얘기일 터였다. 혹은 평소처럼 쓸데없는 주제거나. 그러나 파이브의 기억 속 패러다이스 아이들이 함께 기차를 탄 적은 없었다. 패러다이스가 아니더라도 또래 아이들과 기차를 탄 기억은 전무했다. 풍경은 지나치게 생생해 도리어 거부감이 느껴졌다. 낯선 감각을 뛰어넘은 불쾌감이었다.

  그 불쾌감이 기시감으로 바뀔 만큼 걸었을 무렵, 파이브는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파란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파이브의 머리색보다 쨍하고 새파란 꽃잎이었다, 손으로 만지면 손끝이 파랗게 물들 것 같았다. 파란 꽃잎은 한 줄로 쭉 흩어져 있었다. 파이브를 인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도 힌트가 될지 몰랐다. 배드워즈가 펼쳐졌던 것처럼, 또 다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파이브는 꽃잎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오로지 바닥만 본 채 걸음을 재촉했다. 이따금 뭉텅이로 흩어진 꽃잎들도 있었고, 꽃 하나가 통째로 떨어져 있기도 했다. 어디선가 본 꽃 같은데. 파이브는 중얼거리며 꽃을 밟았다. 세 번째 꽃을 밟았을 때, 하얀색이 끝나고 연두색이 보였다. 또다시 다른 세계였다.

  여전히 꽃잎 행렬은 앞으로 이어져 있었다. 파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탁 트인 초원이 펼쳐졌다. 산들바람이 파이브의 뺨을 간지럽혔다.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 있고, 잔디들이 발목을 스치며 흔들렸다. 파이브는 멍하니 파란 꽃잎 행렬의 끝을 응시했다. 그 끝에 까만 무언가가 보였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창백한 피부가, 그리고…….

  우융?

  파이브의 목소리에 검은 사람이 뒤돌아보았다. 역안의 눈동자가 파이브를 빤히 응시했다. 햇빛에 그림자가 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입이 조금 벌어져서,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뱉을 것 같다는 것만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파이브는 그 자리에 자라난 잔디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우융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이런 잘못된 장소에는 자신만 있어도 충분했다. 파이브는 애써 우융을 응시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우융, 너 왜…….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우융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울렸다. 화염구를 맞았을 때보다 웅웅거려 귀가 먹먹했다. 파이브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산뜻한 풀 냄새가 사라지고 비릿한 냄새가 감돌았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파란 꽃잎들은 어느새 붉은 꽃잎으로 바뀌어 있었다. 파이브는 자기도 모르게 몇 발짝 뒷걸음질쳤다. 우융의 얼굴은 명백한 적의였다. 혹은 당황스러움이었다. 그 둘의 거리가 가까워 어느 쪽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잠깐만, 우융. 파이브가 말을 뱉기 무섭게 우융은 파이브에게 네더라이트 검을 겨누었다. 입으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커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돼. 내가. 행크가. 내가…….

  파이브.

  너는 이미 내가.

  죽였다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파이브는 그제야 흩어져 있던 파란 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수레국화. 하드코어의 생에서 파이브가 심었던 꽃. 파이브의 무덤에 심어진 꽃. 이곳은 파이브가 죽은 세계였다. 파이브는 검 대신 허공을 움켜쥐었다. 우융이 다가온다면 칼을 빼앗을 셈이었으나, 우융은 다가오는 대신 검을 내렸다. 가슴에 박힌 하얀 하트가 규칙적으로 깜박였다.

  아니지. 네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

  일순간 세상이 고요해졌다. 정확히는 풍경이 멈추었다. 오로지 눈앞의 우융만 움직이는 세계. 파이브는 똑바로 우융을 바라보았다. 그림자 대신 노이즈가 우융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너한테 이런 걸 보여줘서는 안 되잖아.

  세상이

  깜박였다.

  아주 빠르게.

  점멸하듯이.

  그러다

  한꺼번에

  사라져

  버릴 듯이.

 

  ■

 

  파도 소리가 거칠게 귓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파이브는 눈을 떴다. 바다가 눈앞에 있었다. 드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위로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오며 부서졌다. 눈은 여전히 그치지 않고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였다. 코마와 켈로인은 파도에 발을 적시며 놀고 있었고, 플래그와 우융은 두꺼비집을 만든다며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쟤네는 춥지도 않은가 봐. 웃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까부터 계속 눈 오네. 겨울은 지났는데.

  2월까지는 겨울이잖아.

  파이브는 고개를 들어 옆쪽을 응시했다. 예엥과 행크가 보였다. 둘이 나누는 이야기가 음질 나쁜 라디오 방송처럼 귀에 스며들었다.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가 잡음처럼 끼었다.

  며칠 전에 입춘이었거든.

  진짜? 이번 봄은 왜 이리 빨리 오는 것 같지.

  항상 입춘은 이맘때였어. 우리가 몰랐던 거야.

  장난스럽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바보야, 멍청아, 하며 서로를 지칭하는 말도 간간이 들렸다. 이곳도 마인크래프트의 세계일까. 파이브는 예엥과 행크를 바라보았다. 둘의 옷은 지극히 평범했다. 예엥은 코트를, 행크는 숏패딩에 목도리를 둘렀다. 구름은 네모나지 않았고 눈은 손가락에 닿자 맥없이 녹아내렸다. 그럼 이곳은 어디일까. 왜 이곳에 다함께 있는 걸까.

  파이브의 시선을 깨달은 듯 행크가 손을 흔들었다. 파이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거북함이 들 정도로 다정했다. 파이브는 일어나 둘의 곁으로 다가갔다. 신발에 모래가 들어갔지만 거슬리지는 않았다. 예엥이 툭툭 친 자리에 앉자 알싸한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바다와는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잠깐만요. 아니에요.

  기분이 어때? 행복해?

  파이브는 잠깐 행크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온통 의문스러운 것들 투성이었다. 멍하고 나른한, 부유하는 느낌에 붙잡혀 자각하기 어려울 뿐. 조금만 위화감이 느껴지면 그 즉시 온 세상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한참 만에 내뱉은 말은 더듬거렸다. 아냐, 행복하지 않아. 모르겠어.

  아니야, 파이브. 분명 행복할 거야.

  행크가 웃었다. 분명 눈꼬리까지 휘어 웃었는데도 파이브에겐 입만 보였다. 파이브. 익숙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른 무언가가 겹쳐 들렸다. 어쩌면 행크는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전부 제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오늘은.

  다시금 세상이 고요해졌다. 이번에는 내리는 눈조차 멈추었다. 뒤를 돌면 코마와 켈로인도 멈춰 있을까. 플래그와 우융도 멈춰 있을까. 파도도 거품도 그 자리에 부자연스럽게 정지해 있을까. 파이브는 느리게 점멸하는 시야 속 행크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사라져 버린 예엥 대신 한 무더기 쌓인 눈을 바라보았다.

  파이브.

  이곳의 ‘오늘’은 무엇이길래.

 

  ■

 

  파이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새하얀 세상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익숙해지지는 않았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겪어온 일인 듯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나 지났을까. 하루, 이틀, 어쩌면 한 달, 그보다 더 긴 시간일지도 몰랐다. 파이브는 손가락으로 초를 헤아리다 그만두었다.

  여전히 하얀 세상 속에서 답은 걷는 것뿐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왜 이런 곳에 떨어졌는지. 그런 의문은 서서히 가라앉고 ‘오늘’만이 떠올랐다. 오늘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았다. 파이브는 숨을 내뱉었다.

  어디선가 폭죽 소리가 들렸다. 배드워즈에서 들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선명한 소리였다. 파이브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는 하얀색이었던 공간에 거대한 광장이 보였다. 그 뒤로 수많은 건물과 거대한 동상들. 크게 떠올릴 것도 없이 SMP, 패러다이스 서버였다. 화면 속에서도 컸던 동상들은 현실로 보니 짓눌릴 만큼 거대했다. 저걸 쌓느라 개고생했는데. 이번에는 소리내어 중얼거리지 않았다. 더 이상 소리를 내야 할 이유도 없었다.

  파이브는 아이들을 찾아 패러다이스를 돌아다녔다. 코마야. 겉날개를 끼고도 들어가기 힘든 집을 내려다보고. 우융? 하늘의 성을 올려다보며 갈 방법이 없어 발을 구르고. 큐지구. 지구를 향해 소리쳐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고. 거대한 돌벽을 따라 걷고 또 걸었지만 살아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적어도 광장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딱 하나.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무언가가 광장에 서 있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길게 흩날렸다.

  제가 다 설명할게요.

  분명 멀리 있는데도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파이브’라고 움직이는 입 모양이 선명해 발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광장에 다다랐을 때. 파이브는 무릎을 짚은 채 거친 숨을 쉬었고, 선하는 미동 없이 파이브를 바라보았다. 보라색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꼭 이곳에 새하얀 세상이라는 것처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애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선하.

  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을 언급한 것치곤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질감과 위화감이 섞여 마음이 붕 떴다.

  너 누구야?

  만족스러워? 행복해?

  대답 대신 되묻는 목소리가 밝았다. 파이브는 선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선하의 보라색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늘이 언제야?

  알고 있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는걸. 당연히 알 수밖에 없지.

  선하의 목소리에 잡음이 섞여 들렸다. 이명처럼 삐, 삐. 혹은 뭉개지는 발음들. 대답하라는 파이브의 말에도 선하는 방긋 웃기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머리카락이 흩날릴 때마다 샴푸 향 대신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파이브,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선하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끊어졌다. 누군가 강제로 소리를 먹는 것처럼 고요와 소리가 번갈아 터졌다.

  구태여 돌아갈 필요는 없다는 거야.

  노이즈가 점점 선하의 얼굴을 좀먹기 시작했다. 우융 때와 달리 얼굴부터 전신까지 퍼져나가고 있었다. 파이브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세상이 아주 느리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세상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을 때. 선하의 목소리라기엔 지나치게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파이브. 그건 분명 옳은 선택일 거야.

  파이브. 제발…….

 

  ■

 

  신호등이 고장났나 봐. 파이브는 고개를 돌렸다. 쪼만의 옆에서 코마가 아이스크림을 문 채 웅얼대는 게 보였다. 계속 깜박여. 빨간불인데도 계속. 코마의 바지 밑단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코마 뒤 신호등은 말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파이브가 지금까지 겪어왔던 세상처럼. 깜박, 깜박.

  여기 어디야?

  고작 다섯 음절이 몇 번이고 숨을 골라야 뱉을 수 있을 만큼 길었다. 그럼에도 주변을 둘러보기 전에 뱉어야만 하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세상이 멈추지 않았다. 눈도 계속 내렸다. 대신 쪼만이 볼멘소리를 뱉었다. 얘가 머리가 돌았나. 기차 타러 가고 있잖아.

  파이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코마와 쪼만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우토는? 아까 선하랑 혜비랑 케이크 사러 갔어. 나머지는? 너 때문에 우리만 늦게 출발하는 거잖아. 둘의 목소리는 시끄러우면서도 거슬리지는 않았다.

  뭐야. 행크님 왜 저기 있어? 행크님!

  코마의 목소리가 두드러지게 귀를 찔렀다. 고개를 내리자, 횡단보도 끝에 서 있는 행크가 보였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멀어서 목소리가 안 들려. 파이브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눈에 닿은 뺨이 간지러웠다. 상황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면 이번에도 파이브는 백색의 세상에 떨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떨어지다 보면 무언가 알 수 있을 거라고. 기차와 바다의 풍경을 되짚으며 파이브는 손 흔드는 행크를 바라보았다.

  점멸하던 빨간불이 꺼졌다. 파란불은 바뀌자마자 깜박, 빠른 속도로 점멸했다. 신호등 멀쩡한 거 맞아? 쪼만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코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램프가 고장난 거라서 그래. 먼저 뛰어가는 코마를 따라 파이브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덩달아 뛰는 쪼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차량신호등이 여전히 초록색이라는 건, 자동차 경적이 들렸을 때야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이 점멸했나? 점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세상이 새하얘졌다가 한순간에 어두워지고, 화염구를 맞은 것처럼 몸이 붕 뜨는데. 어쩌면 세상이 멈춰버린 건 아닐까?

  파이브. 곧 오늘이.

 

  ■

 

  다시 새하얀 세상이, 아무 상처도 없는 몸이, 그리고 벽도 바닥도 천장의 구분도 없는 곳이. 유일하게 다른 것은 앞에 거울이 있었다. 파이브를 다 비추고도 한참 남는 크기였다. 파이브는 일어나 거울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입은 자신이 비쳐 보였다. 파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자신을 바라보았다. 파이브. 처음 마주하는 자신이 거울 속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파이브는 뒤돌았다. 발자국이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발자국 위에 발을 올리자 크기가 꼭 맞았다. 앞은 여전히 새하얬고,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파이브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걷기 시작했다.

  새하얀 세상 속에선 점도, 꽃잎도, 폭죽도 없었다. 그저 떠올리지 못했던 기억만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고요했던 세상에서 떠올리지 못했던 말들이 파이브의 걸음을 이끌고 있었다.

  얘들아, 우리 여행 가자.

  코마가 뱉었다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몇 번이고 되물은 끝에 바다 가고 싶다며 떼쓰는 본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 파이브 생일이니까 맞춰서 가자. 안 그래도 파이브 요즘 피곤해 보이더만. 이번에도 코마답지 않은 말투였다.

  다시 알싸한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파이브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디선가 삐, 삐, 불규칙적으로 깜박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야 파이브.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즐거운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우토는 해사하게 웃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이전에도 몇 번 보았던 익숙한 얼굴이었다. 바다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숙소에서 케이크 사다가 초도 불자. 우토의 목소리가 유독 밝았다. 따라 웃을 수밖에 없는 미소였다.

  왜냐하면 오늘은 네 생일이잖아.

  오늘만큼은 네가 제일 행복하면 좋겠어. 행크는 그렇게 말하곤 오글거린다며 웃었다. 옆에서 예엥이 행크의 어깨를 치며 깔깔 소리를 냈다. 

  미안해.

  조금만 있으면 오늘이 끝나.

  누구의 목소리일까? 파이브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생각했다. 누구였지? 낯선 얼굴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너는 스킨이랑 똑같이 생겼다. 너는 목소리랑 똑같다. 깔깔대며 웃다가 기차 좌석을 찾고, 그리고.

  이곳은 어때?

  평생 들어왔던 목소리가 들렸다. 기억과는 조금 달랐지만, 앞으로도 평생 들을 목소리였다. 파이브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이유 모르게 손이 떨렸다. 긴장할 필요 없다고, 매일 해왔던 일과 비슷하다고. 두어 번의 중얼거림 끝에야 파이브는 고개를 돌렸다. 새파랗지 않은 색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안녕, 파이브.

  눈앞에는 파이브가 있었다. 현실의 파이브. 파란 머리와 파란 눈이 아닌 검은 머리와 검은 눈, 교복을 입은 ▒▒▒. 노이즈가 낀 것처럼 떠올린 이름이 흩어졌다. 앞으로 일 년 더 입어야 하는 교복이 보였다. 현실의 파이브가, 열아홉 살 남자 고등학생의 파이브가 55555_55555의 이름을 가진 파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나를 여기까지 이끈 거야?

  네가 너를 찾아서 이곳까지 온 거야.

  파이브는 웃었다. 검은 눈동자를 깜박이며 웃었다. 나는 웃을 때 저렇게 웃는구나. 파이브는 애써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 생각했다. 익숙했지만 어색했다. 편집할 때 듣던 목소리도 직접 귀로 닿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분명 같은 나인데도 낯선 구석이 드는 건 왜인지.

  파이브.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알고 있어. 너는 나니까.

  파이브는 말없이 파이브를 바라보았다. 손바닥이 아렸다. 자기도 모르게 꽉 쥔 주먹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고 있었다. 자신이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며 뒤로 뺀 주먹이 희미하게 떨렸다.

  스트레스도 받고, 쓸데없는 가십거리도 많고. 그러니까, 이건 기회야.

  파이브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투였다. 설득보다는 강요에 가깝게 느껴져, 파이브는 한 걸음 물러섰다.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기억하는 자기 자신보다 더 여린 느낌이었다.

  이곳은 완벽하게 우리가 원하는 세계야. 네가 걸어왔던 세계가 전부 여기 있어. 주변의 시선도 사소한 다툼도 신경 쓸 필요 없어. 오로지 즐기면 돼.

  파이브.

  완벽하고 안전한 기억 속에서. 

  듣지 못해도 말해야 해, 그치.

  파이브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검은 눈동자를, 파이브를,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문득 눈앞에 파이브가 작게 느껴졌다. 열아홉 살의 파이브인데도 아홉 살처럼 보였다.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전부.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괴로워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파이브는 종종 생각했다. 기분 상할 일이 없었는데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 존재하기도 했다. 꿈을 꾸는 게 싫어 가장 늦게 디스코드에 남아 있던 날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괴로웠냐고 물으면, 대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나는, 그러니까.

  있잖아, 파이브. 오늘은 내 생일이지?

  파이브는 그렇게 뱉고 미소 지었다. 어느새 주먹이 스르르 풀려 손바닥엔 손톱자국만 남아 있었다. 더 이상 아리지도 따갑지도 않은 자국이었다.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파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돌아갈 거야. 파이브는 그 말을 내뱉고 한 걸음 다가갔다. 처음으로 파이브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파이브에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겠지만, 파이브는 꿋꿋하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

  그 모든 일이 있더라도, 결국 나는 즐거웠어.

  서로의 눈에 서로가 비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이르러, 파이브는 자기 자신을 꽉 끌어안았다. 어린아이를 끌어안는 것처럼 팔에 힘을 주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너도, 나도, 생일 축하해. 파이브는 아이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삼 초를 세고 자기 자신을 놓아주었다. 눈앞에 파이브는 여전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무언가 한동안 침묵이 둘 사이를 오갔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며 말을 삼켰다.

  이해할 수 없어. 한참 만에 들린 말에 파이브는 웃었다. 나도 나를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니까. 덧붙인 말은 조금 더 간단했다. 그래도, 돌아가야 해. 그게 맞아.

  순간 세상이 깜박였다. 파이브의 뒤에 문이 생겼다. 발 디딘 세상과 달리 온통 새까만 문이었다. 파이브는 파이브를 지나쳐 문고리를 잡았다. 이 문으로 나가면 현실이 있을 것이었다.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 뒤에서 파이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작 그것만으로 돌아가려는 거야?

  아니.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

  파이브는 문을 열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파이브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림자도, 노이즈도 없어 표정이 잘 보였다. 웃는 것 같으면서도 걱정되는 얼굴. 어쩌면 울먹이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 파이브는 멈추어 선 채 파이브를 바라보았다.

  여긴 현실에서 생일 축하해주는 애들이 없잖아. 이곳에는 내일이 없으니까.

 

  □

 

  흐릿한 시야 속에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확실한 천장이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기계음, 주렁주렁 연결되어 있는 링거, 뿌옇게 숨이 맺히는 산소호흡기. 파이브는 억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적어도 살아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목소리를 쥐어짜기도 전에 간이침대에 앉아 있던 코마가 다급히 일어났다.

  파이브. 파이브! 괜찮아? 의사쌤 불러올게, 잠깐만…….

  ……코마야.

  코마는 일어나려다 파이브에게 시선을 돌렸다. 코마가 지을 수 있을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붉어진 눈가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 파이브, 부르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애들은 밖에 있어. 의사쌤이랑 같이 데리고 올게. 아, 다른 말을 해야 하는구나. 미안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전부 내……

  코마. 오늘이…… 언제야?

  코마의 눈동자가 커졌다. 예상치 못한 말인 듯 잠깐 멈칫하다가, 다급히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켰다.

  11시 55분. 아직, 네 생일이야. 2월 15일이야.

  ……그럼,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다른 말이 더 어울리잖아.

  코마는 말없이 파이브를 내려다보았다. 파랗지 않은 눈동자가 파이브를 담다가,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려 환하게 웃었다. 평소처럼 장난스러우면서도 해사한, 파이브가 줄곧 생각해 왔던 웃음이었다.

  파이브, 생일 축하해.

  시계의 초침 소리가 기계음만 가득한 방안을 울렸다. 코마는 정말로 의사와 애들을 부르러 가겠다며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초침 소리와 기계음이 뒤섞였다.

  아마 아이들이 돌아올 때는 12시가 지나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축하를 받을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눈을 마주 보고, 공중에 떠 본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농담도 하고, 걱정과 잔소리를 주고받다가 한바탕 웃음을 터트릴 터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마주 본 채, 생일 축하해.

  고작 다섯 글자를 듣는 것만으로도 돌아올 만한 가치가 있었다. 적어도 파이브에게는 그것이 파이브로 남을 수 있는 이유였다. 파이브는 복도에서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생일이, 오늘이 끝나가고 있었다.


치즈(@cheese_ovo)


글 부문으로 합작에 참여해주신 김세모님과 치즈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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