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주아케] 강을 건너지 못하는 자와 뱃사공
언젠가의 아마미야 렌과 아케치 고로
어디를 가나 꽃, 붉은색에서 푸른색까지.
자신에게 꽃가루 알러지가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지난길에서 앞길까지 꽃들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철쭉, 개나리, 벚꽃… 그리고 쓸데없이 꽃의 이름을 맞춰보기나 하고 있는 건 그것 외에 달리 눈에 띄는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분명 햇빛을 받아 맑은 연두로 반짝이는 잎사귀나 나무가 드리우는 푸른빛 그늘이 아름답다고 감탄도 했을지 모르나 이제는 그 시점도 지났다. 그나마 이 틈바구니에서도 코가 꽃향기에 마냥 무뎌지지 않은 채 어디에서 어른대는 향을 맡을 수 있는 건 이곳에 그만큼이나 다양한 향기가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 감각이 지친다싶으면 또 어디선가 새로운 색과 향이 흘러왔다.
새롭게 느껴지는 향이 어디선가 맡아 본, 동백꽃 그림이 그려진 향수와 비슷하다고 느낄 즈음 아마미야 렌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이 길고 지루한 숲길에서 단 하나 변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풀벌레도 산새도 울지 않던 적막 가운데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면 무엇이 나올지도 모르고 정처없이 걷느라 목이 마르기도 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렌은 걸음을 좀 더 재촉했다.
“아.”
빽빽하던 꽃덤불이 조금씩 듬성해지며 길을 만들어내는 끝에는 역시나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꽤 폭이 넓어보이니 물줄기보다는 강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강이 완전히 앞길을 가로막은 모양새로 있다는 점이 안좋은 소식이었지만 바로 곁에 조각배가 매여있다는 건 좋은 소식일 것이다. 분명 이것과 비슷한 보트를 타 본 적은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어서 그 곁의 인영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조각배에 걸터앉아서 올려다보는 소년의 시선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엇나지 않고 렌을 향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는지, 혹은 수풀을 헤치고 오는 걸음 소리를 듣고 있었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소년이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상냥하지 않다는 것만은 렌도 알고 있었다. 도리어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거두곤 배에 묶여있던 끈이나 풀어내기 시작했다.
“잠깐, 너ㅡ”
“일단 타. 이야기 할 시간은 많지 않겠지만.”
어서, 라고 소년은 무심한 눈짓으로 렌을 재촉한다. 끈이 풀린 조각배는 끄트머리에서부터 강의 물결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타려고 한다면 얼른 올라타야한다. 렌은 배 안으로 발을 들이면서도 조금은 입을 삐죽이며 한 마디를 꿍얼거렸다.
“아케치는 항상 설명이 부족해.”
이어서 배에 올라와 자리잡고 앉은 그는 가볍게 그의 투정을 무시하고서 양 손에 노 하나씩을 쥐었다. 자신이 노를 저어야할까 잠깐 고민했던 렌의 손이 엉거주춤 거둬지며 마주앉자면, 엇나있던 두 소년의 시선이 그제야 딱 좋은 높이로 들어맞았다. 뱃사공을 자처한 아케치가 젓는 노는 흐름이 거의 없어보일 정도로 잔잔한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어디로 가는 걸까. 질문할 것이 많을텐데도 어쩐지 렌은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생각은 못 한 채 눈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강물의 흐름을 확인하던 아케치는 한 박자 늦게서야 힐끔 시선에 화답한다. 여전히 다정함이라곤 없지만.
“사람을 빤히 보는 게 실례란 걸 꼭 말해야 해?”
“반가워서 그러는 거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잘도…”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도 안 될 정도로 담담히 받아치는 말에는 역시나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코웃음이 돌아왔다. 이상하다, 자신도 그저 지기 싫다는 느낌으로 한 말일 뿐일텐데도 제 말을 슬며시 넘겨버리는 그가 야속하게 느껴져서 렌은 어쩐지 꽁한 표정이 되었다. 아랑곳 않은 채 아케치가 모는 조각배는 렌의 등이 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양 옆에 색색의 꽃이 우거진 수풀을 두고서, 물결의 흐름을 반대로 갈라가며. 어라? 건너편으로 태워주는 게 아니었어? 꽁하니 묶여있던 얼굴이 배가 가는 방향을 깨닫고서 바보같이 풀리는 때서야 아케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강을 건너게 해주는 건 간단하지. 금방 갈 수 있을테고.”
“해주면 되잖아.”
그 말에 아케치의 시선이 잠깐 렌으로부터 떨어진다.
“…됐어… …솔직히 말하자면.”
별 이유도 없이 괜스레 렌의 눈을 피하려 옮겼을 뿐인 시야에는 느릿한 물 위로 흘러가는 수국의 꽃송이가 보인다. 조각배의 항로는 여전히 그 반대 방향이다.
“건너편까지 가는 시간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너무 짧다는 거야.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소설의 명탐정마냥 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읽어낼 수 있는 건 아니라서ㅡ”
그 말을 할 즈음 제 무릎 위로 턱을 괸 아마미야 렌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상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끼고 무심코 그것을 마주한 아케치는, 일견 무표정한 얼굴이 단순히 무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쪽 눈가를 움찔 떨며 말끝을 흐렸다. 그가 자신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인지 단순히 제 발 저리는 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쪽이건. 둘의 관계는 끝까지 뻔뻔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쪽이 한 수 접어야한다는 식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니 이 이상 빙빙 돌려 말할 수는 없었다.
“너, 웃지말고 들어.”
양 손에 노를 쥐고있어 마른세수도 할 수 없는 아케치가 한껏 미간을 구긴 채 말한다.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달라고.”
“…….”
조금은 명확치 않은 목소리가 끝난 후 이어지는 침묵. 렌의 입가가 올라가는 것을 견디려는 듯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 이상할 것도 아니지만 렌이 이런 식으로 웃음을 견디거나ㅡ혹은 견디지 못해 터뜨려 버릴때 아케치가 함께 웃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렌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여전히 미간을 구긴 아케치의 부릅뜬 눈이 자신을 향할 때는 입가를 슬쩍 가린 채 헛기침했다.
“크흠, 아케치, 이럴 때는.”
금방 내려간 렌의 손 아래에서 꽤 기분좋게 말끔한 미소가 드러난다.
“보고싶었다고 말해야하는 거야.”
아케치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 그리고 그저 간극. 렌은 그가 한숨 이상의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즉 자신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 아케치의 모습에 문득 무언가가 마음 한켠을 작게 두드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잘난체 하듯 말끔했던 미소가 멈칫 흔들린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나도 보고싶었어’ 따위의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한 건 역시나 그 이유 때문이다. 아케치의 앞에서 뻔뻔함을 유지 못했다는 그거. 그건 정확하게는 고작 보고싶었다는 말 한 마디가 뻔뻔함을 둘러야 할 정도의 무게를 갖고 있다는 의미겠지.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다. 별로 고민해보진 않았지만, 보고싶다고 해야 할 정도로 그와 오래 떨어져 있었던 건 아닐지도 모른다.
좌우간 결과적으로 한 수씩 물려야만 했던 두 사람은 당초의 용건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의 답에 대하여.
“솔직히 이렇다 할 만큼 특별한 일은 없었던 것 같아.”
괴도단이 이름 날리던 때에 비하면 뭔들 평범한 일이겠지, 하고 아케치가 헛웃음을 흘린다. 뭐 그건 그렇긴 한데. 잠깐 고개를 위로 들어 기억을 조금씩 되짚어보는 렌의 코트 위로 분홍빛 꽃잎이 하나 바람에 실려와 떨어진다. 코스모스일까, 이름은 잘 모를 꽃잎을 수면으로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랑 별 다를 바 없이 지냈지. 거기다 네 말마따나 괴도단이 활동할 때보다 힘든 일 같은 건 더 일어나지도 않았고.”
“이제 웬만한 일은 힘들지도 않은가보지.”
“꼭 그런 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만한 일들─무려 세상을 걸고 싸우는 일을 겪었다 해도 그 후에 이어지는 일상들이 전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3학년이 된 후의 대입 준비라던가, 힘들게 들어간 대학에서의 밀려오는 과제나 시험이라던가. 절대값으로 비교하자면 한없이 가벼운 것들이지만 과거와 현재의 차이란 그런 데에 있을 것이다. ‘이미 지난 일’과 ‘이제 견뎌내야 할 일’에는 절대값으로 잴 수 없는 정도의 간극이 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나무 그들이 드리운 아래에서 꽃향기를 맡으며 유유자적 보트를 타고 있자면 자신의 일상들도 ‘지난 일’처럼 느껴지기는 한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이곳도 갈 데를 가늠하지 못해 막막하던 길이었다. 이제야 이 풍경을 온전히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건 함께 있는 사람 덕일 것이라고 내심 생각하는 것을, 렌은 굳이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대신 물가쪽으로 손을 뻗으면 닿는 꽃송이 하나를 손 안에 담아서 살짝 힘주어 꺾었다.
“허.”
그러는 것을 무심히 보던 아케치는 그 꽃이, 자신의 귓가에 꽂히자 어이가 없다는 양 목소리를 냈다.
“음, 아케치는 빨강이 잘 어울려.”
“꽃놀이 하러 왔냐고…”
귓가에 꽃을 둔 아케치의 모습을 이리저리 눈에 담아보기도 한다. 그의 중얼거림이 어지간히 불만스러운 듯해서 이 이상 장난을 쳤다가는 정말로 혼날 분위기라, 결국 붉은 꽃은 다시 렌의 손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렌은 작게 웃으며 아케치의 불만을 받아쳤다.
“안될 건 없잖아. 이왕이니 돌아가기 전까지는…”
잠깐 꽃놀이 기분을 즐기는 것도.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두 사람의 입이 꾹 다물리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기이하고 혼란스러운 감각이 렌의 머릿속에 들이찼다.
나는 어디로 돌아가지?
어디로라니? 당연히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야지. 그런데… 그래야하나? 조리에 맞지 않고 앞뒤 없는 의문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 생각들을 차분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저와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시선을 주고 있는 아케치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보자면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자신이 저런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으리라고 짐작했다. 가라앉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의 침묵은 렌을 차분하게 하기는커녕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왜 그런 얼굴로 보는 거야. 마치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나는 네가 무엇을 하고싶은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어느 것 하나 모르고 있는데.
“…아케치.”
부름에도 아케치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은 채 묵묵히, 천천히 노를 젓고 있었다. 미미한 현기증이 도는 듯한 시야 옆으로 흐릿하게 여러가지 색이 지나간다. 그러고 있는 모습을 포함해서 무언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전혀 이상하지 않다. 자신은 여기에 있어야해서, 그래서 이곳에 온 것이지 않은가. 그 증거로 아케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분명하게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보고싶었다는 말도 했는걸. 그의 이름을 부른 후에 잠깐의 침묵.
“…나는… 여기에 있으면 되는 거지?”
“뭐?”
확연한 부름과는 달리 바람이 흘러가듯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에서야 아케치는 확연한 반응을 보였다. 노를 젓던 손길이 멈칫하고, 풀어져 있던 미간에 힘이 들어가 좁아진다. 하지만 역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저건 마치, 마치…
“네가 기다리고 있었잖아…”
언젠가 봤던 표정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언제였더라.
“당연하게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했어.”
“……”
그 ‘언젠가’가 얼마정도의 과거였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애매한 걸 보면 아주 오래 지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아닌가? 그저 잠깐 그런 때도 있는 법이다. 일상이 바빠서 바로 오늘 아침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거나. 내가 방금 뭘 하려고 했더라, 그런 바보같은 소리를 하게 된다거나. 그래. 분명 그런 거다. 그러니까 지금 아케치와 함께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고작 어제라도 아케치와 만났을 것이다. 일상에 휩쓸려서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아? 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는 렌에게, 아케치는 말한다.
“강 건너편에 뭐가 있는지 알아?”
혼란 속에 물음은 더해진다. 하지만 글쎄. 바로 답을 하기에는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기에 렌은 반사적으로 제가 바라보고있지 않았던, 자신이 걸어온 반대편의 땅에 시선을 주었다. 저쪽으로부터 강에 맑은 그림자를 늘어뜨리는 것은 고운 보랏빛의 등나무 꽃, 눈아프게 선명한 철쭉, 그리고 그 안의─무언가를 확인하기 전에 렌의 앞에 있던 손길이 그의 턱을 붙잡고 홱 정면으로 돌려 버렸다. 여전히 언짢은 얼굴로 미간에 주름이 잡힌 아케치의 얼굴과 마주하는 얼굴은 여전히 얼빠졌고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한 눈을 하고 있어서, 아케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 필요 없어. 어차피 저쪽으로 데려다 줄 생각은 없으니까.”
“어?”
데려다 줄 것처럼 말하더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럴 것이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렌 자신이, 스스로가 저쪽으로 건너가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뿐.
“당연하잖아. 이런 수상쩍은 곳에서 언제까지나 있을 생각을 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하지만… …수상쩍은 곳이라고?”
전혀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배는 아케치가 이끎에 따라, 물의 흐름을 거슬러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강가에 핀 수선화의 옅은 향기가 물을 타고 이쪽까지 흘러오는 듯했다. 그 즈음에서 렌은 머리가 한 번, 크게 흔들리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이제까지의 혼란과는 조금 달랐다. 그건 오히려 엉망으로 어질러진 방을 정돈하기 위해 모든 짐들을 꺼내놓는 것만 같은, 정리 직전의 혼잡함과 짐을 쌓아두는 무게의 충격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렌은 기억 해 낸다.
“벚꽃, 수국, 코스모스, 동백…”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알아봤던 꽃들의 이름을 홀린 듯이 읊어 본다. 꽃에 관심이 없었으면 차라리 멍청한 소리라도 했을지 모를텐데, 다행일지 불행일지 아마미야 렌은 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었다. 또 유감스럽게도 그때 주워들은 지식들이 아직 머릿속에서 다 사라지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그 꽃들이 피는 계절이 전혀 맞지 않다는 걸 알아챌 정도로는. 아, 하고 렌의 입이 벌어졌다. 느슨하게 앉아있던 렌이 다급히 뱃전을 짚고서 아케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바람에 배가 한 번 크게 출렁였으나 아케치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배가 물이 흐르는대로 밀려나지 않도록 그것을 거스르는 데에 집중할 뿐.
“아케치, 여긴…”
“기다리고 있었어. 너는 분명히 바보같은 구석이 있으니까.”
“……”
“그러니까 언젠가 당연히 제때에 맞지 않게 이곳에 올줄 알았거든.”
“나는, 여기에… 아직은…”
잡다한 꽃 향기가 단번에 섞여서 돌풍처럼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 어지러운 색색의 꽃송이들 사이에 자신을 마주하고 앉은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분명 그에게 그렇게 눈아플 정도의 색은 없는데도, 그 틈에 있자면 그가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풍경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있자니 곧게 뻗어나가던 강이 한쪽으로 틀어지는 바람에 배의 방향이 함께 바뀌었다. 그제서야 아까 미처 보지 못했던 저 너머의 풍경이 보인다. 사계절의 꽃으로 장식된 무한히 어두운 입구를.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닿을 것이 분명한 무형의 문을.
그 모든 것을 등지고 그가 강의 흐름을 거스르는 노를 젓고 있었다. 배는 오래 지나지 않아 무언가에 툭, 가볍게 부딪혔다. 뱃사공이 강가에 뱃머리를 부딪혀 정박시킨 탓이었다. 충돌로 배가 흔들리는 통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면…
“─.”
깎아지르는 절벽과 그 틈에 흐르는 폭포. 렌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인 건 바로 자신의 뒤에 곧게 떨어지는 벼랑의 높이 탓이 아니었다. 여지껏 평범한 강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영상의 시간을 되감은 듯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지. 이제, 정말로. 모든 계절이 존재하는 동시에 어떤 계절도 없으며, 강물이 위를 향해 흐르는 이곳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좋을까? 그건 더이상 의문이 될 수 없다. 이 강을 건너면 세상을 벗어나게 된다고 한다면, 분명히.
“너는 아직 여기 오면 안돼.”
아케치의 양 손이 쥐고있던 노를 내려놓았다. 그것을 인지함과 거의 동시에, 렌은 자신의 어깨를 아플 정도로 강하게 떠미는 충격을 느껴야 했다. 강물이 아래가 아니라 위로 흐른다면 이 벼랑에서 아래를 향해 떨어지는 존재야말로 세상의 이치에 부합할 수 있는 존재다.
“아─”
아케치. 이렇게 여기서 벗어나는 게 맞다는 것을 이해했으면서도 렌은 무심결에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런 식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거라면 왜 함께 갈 수는 없는 거야, 어째서 너는 여기에 남아있어야 하는 거야, 또다시 나를 언제까지고 기다리고만 있을 거야?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싶을 마음일 따름이었다. 분명 그가 안다면 또 꾸중을 하겠지만,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꽃그림자로 어둡게 가려진 인영이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추락감이 온 몸을 집어삼킨다.
아마미야 렌은 저승의 문턱에서 벗어난다.
“으, 헉.”
침대에 뉘어있던 몸이 크게 요동쳤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한 아득함 끝에 의식이 돌아오는 감각은. 그렇게, 깨어났다고 분명 스스로도 느끼는데도 아직은 시야며 청각이 온전하지 않았다. 그저 귓가에서 웅웅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몇몇 들려오고 눈앞이 애매하게 흐릿할 뿐이었다. 누군가가 말을 주고받으며 바쁘게 오가는 것 같았다.
렌, 정신 들었어? 괜찮은 거야? 아직 대답을 못하는 것 같은데, 일단 간호사…
그런 말들이 드문드문 귀에 꽂혔다. 아,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무어라 답할 목소리는 도무지 나오지 않아서 눈을 한번 질끈 감고, 묘하게 답답한 얼굴 위를 손끝으로 더듬어 봤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그러지 못한 건 손등에 꽂혀 링거에 이어진 주삿바늘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주사를 맞으면서도 자신이 손에 무언가 꽉 쥐고 있었단 것을 그제야 알아챈 탓이었지. 눈을 몇 번 깜빡이는 동안 시야는 서서히 제대로 된 상을 잡아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반대쪽 손 끝으로 그것의 촉감을 감지해볼 즈음에서야 렌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이 무의식중에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서는 시간을 못 이겨 끝이 조금 해진, 한쪽밖에 남지 않은 가죽 장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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