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살점 2
아이는 힘없이 녹색 비단공을 쥐고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울면서 절의 한 방에 앉아있었다. 방 안에는 장지문이 커다랗게 있었는데, 그 곳에는 새 한 마리와 매화꽃이 함께 있는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아이는 눈을 뜨고 있었다. 뜨고는 있었는데 시시각각으로 삶이 아이를 떠나는게 보였다. 절이라 어머니는 크게 울지 못했다. 울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아드님, 이 어미가 아드님을 꼭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해질녘이 되었다. 스님 한 명이 조용히 들어왔다. 그의 입술 위에는 검지 손가락이 놓여있었기에 어미는 자신의 눈물이 부처님께 실례가 되었나보다고 오해를 했다.
여인이시여, 이 곳에는 아드님을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스님이 여인에게 속삭였다. 그럴 리 없었다. 맨발의 여인은 스님의 옷자락에 메달렸다. 아이의 상태만이라도 봐달라고.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아직 머리를 틀지도 못한 어린 아이이니,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스님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 여인의 귀에 비밀히 속삭였다.
신에게 장가를 보내십시오.
어머니는 머리 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스님의 얼굴은 커다란 삿갓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입술은 곧고 정했다. 여인은 아이를 안고 비틀거리며 산을 내려갔다. 스님이 그 다음엔 어떻게 했는지는 모른다. 어머니를 놀렸는지도 모른다.
갔나?
안타깝게 됐지만, 돈도 지위도 명망도 없는 필부를 들일 수는 없지.
아무튼 이제 청소를 하고 돌아갈 수 있겠네요.
어린 스님들이 조심조심 말하는 것이 여인의 맨발에 붙어 땅에 밟혔다. 그 다음 해 절은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저를 부르십시오. 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새벽제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깼다. 전화가 왔는지 벨소리가 요란했다. 한숨을 내쉬었다. 일은 아직까진 잘 흘러가고 있었다. 중간에 배신이 있었지만. 그건 지금 치우면 되고.
여보세요.
약방으로 보낸 사람들이었다. 시신은 병원으로 가 부검을 마쳤고, 고혈압으로 인한……. 대충 그런 사인으로 처리되었다고 했다. 시장통 사람들도 나이 많은 사람의 돌연사를 의심스러워하지 않는다고. 이제 약방을 누구에게 맡겨야하는지 고민했다. 아니, 그 이전에. 새벽제비는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놓은 “한약” 봉지를 쳐다보았다. 원하는 양 만큼 나왔지만, 정말 그게 자신이 원하는 약일거라고 누가 보장하는가?
아무튼 알았으니, 입단속 잘 하구.
새벽제비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들의 운명에 흠집이 나있다. 새벽제비가 낸 것이었다. 구부릴 필요도 없는 하찮은 것들. 새벽제비는 얻어맞은 콧대를 만지작거렸다.
할멈, 날 배신하지 않았으면 천수를 누리고 얼마나 좋아.
던지듯 핸드폰을 놓았다. 가만히 앞을 주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도망갈 거면 도망가라는 듯 천천히, 위협적으로. 그러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해서 시선이 닿은 방향으로 직접 몸을 움직였다. 빈 방이나 다름 없는 작은 방에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새벽제비는 문 틈에 눈을 댔다. 잘린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드리웠고, 그 아래 로젠의 몸이 놓여있었다. 육신은 곤히 잠들어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숨을 들이쉬면 위로, 내쉬면 아래로. 지금 깨운다면 되려 의심받겠지. 새벽제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사라졌다.
기다린 시간이 이천년이야. 더는 못 기다려.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새벽제비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문간에서 떨어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로젠은 벨소리에 크게 놀라 소스라치게 잠에서 깼다. 숨을 크게 들이키고 자신의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더듬어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론 조사 기관…….
에라이, 로젠은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었다. 던지듯 핸드폰을 놓았다. 새벽 세 시에 할 수 있는 만큼 화풀이를 해봤지만, 쿵쿵거리는 가슴은 어쩌지 못했다. 그건 단순히 꿈이었을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왔으니까.
여론 조사를, 새벽 세 시에 하나?
로젠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두루뭉술한 공포와 의문이 “여론 조사” 라는 이름으로 현실이 되었다. 도저히 그 방에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갈 수는 없었다. 로젠은 자신의 품위를 최대한 지키며 방을 나갔다. 상상 속 여론 조사 ARS 음성은 기괴하게 변형되고 깨져 로젠을 괴롭혔다. 다행이 부엌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한약” 봉지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있었고, 새벽제비의 것이 분명한 핸드폰이 놓여있었다. 곧 잠금화면으로 돌아갈 것 처럼 흐릿하게 화면이 켜져있었다. 로젠은 새벽제비의 방 쪽으로 눈길을 한번 던지고 핸드폰 화면을 터치했다. 통화 목록이 떴다. 마지막 통화는 불과 5분 전이었다. 로젠이 자고 있을 때. 로젠이 새벽제비가 전화를 받는 꿈을 꿨던 바로 그 때. 새벽제비의 생각과 감정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바로 그 때.
여보세요?
로젠이 새벽제비의 핸드폰에 대고 물었다. 전화번호가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론 조사 기관…….
새벽제비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전화를 끊고 다시 빈 방으로 들어갔다.
아, 폰 두고 갔어.
새벽제비가 쭝얼거리는 소리. 터벅터벅 발소리. 잠시 정적. 다시 터벅터벅 발소리. 문 닫히는 소리. 내 방에는 절대 들어가지 마, 위험한 것도 많고 들키기 싫은 것도 있으니까. 로젠은 얌전히 자는 척을 했다. 눈을 떴을 때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눈을 감은 지금은, 새벽제비가 눈을 뜨고 자신을 지켜보며 생활 소음을 입으로 흉내내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면 위로, 숨을 내쉬면 아래로. 다시 위로, 다시 아래로. 공포에 맞서는 단순한 움직임이었다. 숨을 고르게 쉬는 것에 집중을 했다. 귓가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 꿈을 보내드리지요.
로젠의 발치에 녹색 비단공이 떨어졌다. 꿈에서 본 아이가 들고 있던 공이었다. 주인을 찾아줘야 해. 로젠은 비단공을 집어들었다.
어머니, 공이 저만치로 굴러갔습니다. 조심해서 찾아오겠어요.
아직 어린 남자 아이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로젠은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았다. 너훌거리는 옷을 입은 아이가 활랑이며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는 비단공을 보더니 아! 하는 맑은 소리를 냈다.
죄송하지만 제 공이 맞는지 볼 수 있을까요?
꼬마야, 네 공이 맞는 것 같아. 가져가렴.
로젠보다 약간 작은 아이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새파란 눈. 새카만 곱슬머리. 로젠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천천히 손을 올려 아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촉감까지. 남자 아이의 얼굴은, 로젠의 얼굴과 거의 비슷했다. 아이가 로젠의 손을 잡아 내렸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부디. 평안하시길.
아이는 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르더니 다시 활랑이며 오르막길을 날듯 뛰어올랐다. 나머지는 로젠의 몫이었다. 로젠은 올곧은 눈빛으로 아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부디. 평안하시길. 로젠이 속으로 말했다. 꼬마야. 너도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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