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우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3

10 / 15세

원고 by 인간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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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지금 양명 선생님이랑 같이 있습니다.”

“책은?”

“오백 권 다 쓴 지가 언젠데요. 다 쓰기 전이었으면 약용이 오기 싫다고 했을겁니다.”

“애 나이가 몇인데…. 그래, 됐네. 차는?”

“녹차 있습니까?”

“바닷가에선 못 마실 품종이 많지. 며칠 전에 상단이 다녀갔거든.”

“서호용정도 있습니까?”

“수인이 좋아하는 거라서. 안길백차도 있고.”

“그럼 그걸로 주세요.”

흰빛을 띄는 찻잎이 다구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천전은 맹가의 앞자리에 앉은 채 굳은 살 박힌 손이 쟁반 위를 이리저리 누비는 걸 지켜보았다. 저 손이 뼈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언월도의 대를 쥐던 게 벌써 십여 년 전이다.

“올 때 뭐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엔 또 뭘 가져왔지?”

“이런 산속에서 못 보실만한 것들요. 마침 어보도 거의 다 써 가서.”

“다 쓰면. 옮겨갈건가?”

“아용이 바란다면 그렇게 하겠죠.”

“안 바라면? 다산 홀로 두고 가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럼 그 해역의 전문가가 되지 않겠습니까.”

“말 돌리는 솜씨가 늘었어. 자, 여기 안길백차. 제대로 다도 지킨 적은 오랜만이라 잘 우려졌을지 모르겠군.”

잔받침 위로 올라온 찻잔이 따뜻했다. 대화하는 새에 더운 물로 잔을 한 번 덥히고 거기에 차를 따라준 것 같았다. 천전은 무어라 대꾸하는 대신 세 번에 걸쳐 전부 털어마시곤 잔을 내려놓았다.

“아이는요?”

“하곡이랑 같이 보냈네. 선산 안에서만 살았으니 바깥 구경도 시켜줘야지.”

“용케- 키울 생각을 하셨네요.”

“순황도 그 소리를 했어. 그 애의 선성에 모든 걸 걸고 있는 것 뿐일세.”

“도박을 즐기셨습니까?”

“아니.”

맹가는 다음 질문을 기다리는 듯 절도 있는 자세로 차를 홀짝였다. 반절 정도 빈 찻잔이 맹가의 낯을 비추며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희는 죄가 없어.”

“다만 주희Zhu xi는 죄가 있죠.”

“같은 발음으로 읊는 이름은 맞네. 낯도 똑같고. 다만, 육체가 같다고 해서 영혼이 같을 거란 보장은 없지.”

“영혼이니 육체니 하는 것은 논하지도 않으신 분이요?”

“계속 비꼬기나 하려고 만남을 청한 것 같진 않네만.”

“저는 왜 맹자께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천전의 항의는 정당하다. 천 단위로 전국에 퍼진 피해자들 중 가장 오래도록 고통받은 자가 그의 친족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맹가는 하얀 찻잔에 꽂혀있던 시선을 들었다. 쨍한 햇빛과 바다와 함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빛바래지 않은 눈동자가 맹가를 향했다. 양보할 수 없는 것만 남은 이들의 시선이 허공에 날카로운 흔적을 남겼다.

“아이는 무관해. 전후 조사를 통해 폭군과는 관련이 없음을 확인했네.”

“폭군과 같은 낯인 건요? 언제까지 약용에게 숨길 생각이셨습니까?”

“천전, 자네의 허락 없이는 희가 다산과 마주할 일이 없는 건 자네가 제일 잘 알 텐데. 나는 분명 명시해두었다. 그 애를 다산이 받아들이는 건 자네 입김도 일부 작용할 거라고.”

“약용에게 먼저 알리셨어야죠.”

맹가는 다시 기다렸다. 천전 앞에서 대리인이 할 말은 많이 없었다. 다산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은 것도 맹가의 선택이었고, 십 년 가까이 주희의 존재를 숨긴 것도 맹가의 선택이었다. 천전의 항의는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다. … 주희를 다산에게 먼저 알리고자 한 건 예상 외였지만.

“저는 약용을 이기지 못합니다. … 예, 제가 반대해도 아용이 그러기를 바란다면 저는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니 제게만 알리시는 게 아니라 아용에게도 물어보셨어야 합니다. ‘유’가 폭군과 같은 낯의 아이를 임시로 보호하고 있다, 네 의사를 묻고 싶다, 하물며 네 의견을 우선으로 고려해보겠다. 같은 말이라도 하셨어야 했습니다.”

천전은 동생의 이야기만 하면 꼭 그를 아용이라고 불렀다. 서른이 넘은 사내여도 여전히 형의 눈엔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탓이다.

맹가는 천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 전 기억을 헤메는 듯 비워진 찻잔을 훑던 천전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모든 소문을 막을 순 없습니다. 바람은 자유로우니까요.”

“… 단속한다고 단속했는데 얼마나 부풀려졌는지 모르겠군.”

“그 애가 ‘주희’의 존재는 아는 게 다행이지요. 만날 일은 없겠지만.”

천전이 몸을 일으켰다. 탁자가 흔들리며 난 끼익거리는 소리가 다 비워지지 못한 찻잔 위로 쏟아졌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 그래. 조심히 가게.”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목책 앞에 순황이 서 있었다.

“사 오라고 한 건?”

“어디 보자, 사과랑 배랑, 참, 필요하시다던 약재도 몇 봉투 사왔고요.”

“너네 간식 먹었니?”

하곡이 바로 대답했다.

“아닌데요.”

순황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왔다. 양명에게 약을 내어줄 때처럼 엄한 낯이었다.

“희야.”

“… 안 먹었어요!”

“내가 간식 먹이지 말라고 했지.”

“아, 아야, 아파요, 아! 간식 안 먹으면 무슨 낙으로 장 보러 간답니까?”

“이렇게 단 거 먹이면 저녁 안 먹는다니까!”

주희의 맞장구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나가서 놀고 와라.”

“진짜요?”

“저는 왜 맞은거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안에 어른들 와 있어.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저녁은 같이 못 먹겠다.”

“그래요. 음, 희야. 좀 더 놀고 올까? 저녁 때 공연을 크게 연다던데.”

주희는 저를 안아올리는 하곡의 팔을 물끄럼 바라보았다. 손목 밑으로 쓸리고 까졌다가 굳은 흉터들이 얼핏얼핏 비쳤다.

논집에서 그러지 않았던가. 황제가 직접 심학자 한 명을 친국했노라고. 시선을 올리자 목깃 사이로 화상 흉터가 보였다. 여지껏 눈치채지 못한 이유를 모를 정도로 선명했다.

“희야?”

“… 좋아요, 괜찮아요.”

“그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말고.”

순황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주희는 팔락이는 옷깃 사이로 남은 흔적을 눈으로 좇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패의 공연은 화려했고, 하늘로 쏘아보내는 폭죽은 요란하고 웅장했다. 당밀을 입힌 산사열매 꼬치는 맛있었고 하곡이 사 준 부적 -장명쇄- 도 맑은 방울 소리가 들리는 게 마음에 들었다. 희는 애써 하곡에게 웃어보였다. 그럼 하곡이 말간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그게 못내 견디기 어려웠다.

선산으로 겨우 걸음을 돌렸을 땐 해가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곡은 주희와 다르게 마을 사람들에게 인망이 좋았다. 남아있는 유과를 보따리채로 받은 하곡이 헤실헤실 웃으며 가게 주인에게 칭찬받는 것을 본 주희는 슬쩍 자리를 벗어났다. 조금 떨어진 길가에서 기다릴 요량이었다.

“…….”

모래색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당연하게도, 주희는 그 사람을 안다. 삼 년 전에 제게 달려들던 광인을 가장 먼저 막아주던 자였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람을 다시 안다. 천전 정약전. 혁명의 공신. 폭군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는데 공헌한 여유당전서의 일원. … 폭군 주희를 원망하는 사람들 중 한 명.

희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천전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어린 아이를 죽일 정도로 무정한 사람이 아닐 것 같단 확신이 들었으나 땅거미가 양 어깨에 내려앉은 낯은 기이하기만 했다. 천전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 하곡의 것이다. 주희는 하곡이 어떻게 걷는지 알았다.

“여기 있었, … 선생님.”

“… 저녁은? 오늘은 같이 안 먹나요?”

“장날이잖아요. 애도 처음 내려오고.”

하곡은 왼발을 약하게 절었다.

이제 하늘에 해는 보이지 않았다. 그 잔상만 남아 파란 하늘에 일렁였다. 천전은 하곡이 제 뒤로 물린 어린 주희를 가만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곤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저 지내는 곳의 열 살 아이들은 일곱 살 때보다 훨씬 커 있던데 이 애는 어째선지 계속 작고 어렸다. 주머니를 뒤져 당과 하나를 쥐여주자 주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

“가, 감사합니다.”

당밀을 녹여 굳힌 것 같은 모양새였다. 주희는 제 손바닥 위로 올라온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상냥한 사람이었다. 손에 남은 흉터나 굳은살의 모양새를 보면 기계도 잘 다루는 것 같았다. 뱃사람이란 이야기는 양명에게 들었다.

그런 사람을, ‘내’가 탄압했구나. 단순히 성리학이 아닌 다른 학문을 익히고자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논집에 적혀있던 문장이 다시금 떠올라 주희의 손끝을 천천히 베어냈다. 주희는 따끔하고 서늘한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논집에서 본 글자가 그에게 통증의 형태로 속살였다. 네가 감히, 공림의 한켠에 자리잡기를 바라는구나. 朱熹의 발음을 쓰는 주제에, 감히. 주희는 멀어지는 천전과 제 어깨를 감싸잡은 하곡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알아. 지학만 되면 나갈거야.”

하곡이 주희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다.

“이제 가자, 희야. 맹자께서 기다리고 계실거야.”

주희는 애써 웃었다. 입꼬리가 덜덜 떨리는 걸 하곡이 몰랐으면 했다.

열세 번째 생일이 지나고 나서는 홀로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즈음에 맹자께서 ‘유’가 보호하고 있는 아이라며 공표해준 덕이 컸다.

이제 더 가르쳐줄 것이 없으니 직접 생각하고 정리해보라며 서고가 열어준 것도 그즈음이었다. 주희는 한동안 서고에 틀어박혀서 십 몇 년 전에 남은 기록을 뒤적였다. 몰래 주고 받았던 쪽지, 폭군의 죄를 낱낱히 고한 고발서, 그를 파문함을 기록한 문서…. 다산이 쓴 오백여 권의 책, 집행인의 재판기록, 증언서, 세논집이 논어와 대학 사이에 어지럽게 섞여있었다.

주희는 읽고 또 읽었다. 보지 않고도 읊을 수 있을만큼 계속 읽었다. 촛불을 켜 두면 폭군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 같았고 유교서를 보면 비틀려있던 성리학이 생각났다. 하곡과 양명의 진료 기록을 보면 속 어딘가를 도려내는 것 같았고 그건 곧 머릿속에서 아주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주희의 마음을 긁어댔다.

그는 서고에서 폭군을 마주했다. 줄글로만 적힌 모든 것이 주희의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내려갔다 온다고?”

“새 책이 온대서요.”

“같이 가 줄까?”

“괜찮아요.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래,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고.”

“희 나가니? 나가서 간식 사 먹고 오면 안 된다.”

“애 나이가 몇인데 그런 이야기를 해.”

“내려갔다 온다고?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삿갓 꼭 쓰고.”

분명, 폭군도 이런 풍경을 봤을 것이다. 전시였음을 감안하더라도 어느 곳에는 분명 누군가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어린아이를 걱정하는 어른들, 다정한 타박 같은 것들.

주희는 그 평온 속에서 이질감을 찾았다. 제 머리를 쓰다듬는 하곡의 팔에 남은 고문 자국, 몇 년 전보다 잔기침이 더 심해진 양명, 가끔 주희가 모르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순황, 그리고 그 속에서 홀로 고요한 맹가…. 그는 이제 순황이 누굴 그리워하는지, 맹가가 어째서 홀로 고요한지 알았다. 그 대부분은 폭군이 만들어낸 것이다.

요대에 걸어둔 주머니가 손등을 스치며 붉은 자국을 남겼다. 마을에서 버려진 옷을 기워 만든 것을 걸치고 있는데도 다들 모르는 척 하는건지, 정말 모르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되었든 좋았다. 주희는 그가 ‘유’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두고 갈 셈이었으므로.

목책 문을 열자 양명이 조심해서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히고, 이제 그의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게 될 때, 주희는 뛰었다. 마을로 향하는 길의 반대편으로 무작정 뛰었다. 어디든, 선산만 아니면 된다. 선산을 등지고 아주 멀리까지 갈 요량이었다.

그의 나이 15세 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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