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우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그러니 우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4

16세 - 흑산

원고 by 인간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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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선생님! 어디 가셔요? 수업은 어제까지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아…. 저, 사천에, 가려고요. 여비도 어느정도 생겼고.”

“하남에서 오셨다고 했나?”

“예, 장강 타고 쭉 내려왔습니다.”

“장강 타고 광동까지 왔어? 크게 돌아오셨네. 사천엔 무슨 일로 가세요?”

선착장엔 고기잡이배와 빈객용 배가 뒤엉킨 채 떠다니고 있었다. 경매가 있는 날이라 다른 날보다 소란스러웠는데도 그 목소리만큼은 귀에 꽂히는 매력이 있었다.

사내는 오래 거래한 어부가 건네주는 물고기를 받고 동전을 건네며 그 대화 내용에 고개를 기울였다. 수업이라니, 이런 강가에서 학당이 열린 적이 없었는데.

“왜, 저 선생에 관심있어?”

어부가 사내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삿갓 위에 천을 드리워 고정시킨 것을 쓰고 있는 탓에 청년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못 봤던 것 같아서요.”

“아~. 학당은 아니고, 여비를 구한다고 애들 돌봐주기를 자처한 서생이여. 우리야 물질하는데 애를 데려갈 순 없으니 저 사람이 도움을 많이 줬지. 애들 글공부도 가르쳐주고.”

“뭘 가르치는데요?”

“심학이던가. 성리학은 거의 사장됐으니.”

강바람이 거셌다. 거친 천이 펄럭이며 그 아래 낯이 내다보이나 싶더니만은, 청년은 급하게 천을 잡아내리며 사공의 손을 잡고 배에 올랐다. 주강 하류로 향하는 배였다. 다시 장강 쪽으로 향하려면 육로로 한 달은 족히 넘게 걸어서, 상선을 타고 장강삼협 어귀에서 내려 또 며칠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사천은 주나라의 구도심이었다. 수도를 세우기 전 황제가 잠시 기거해서 자연히 번영했다. 저 청년이 그걸 알고 있을진 모르겠다…. 사내는 어부가 건네준 거스름돈을 전낭에 쑤셔넣고 청년의 뒤를 밟았다. 나룻배 하나에 삯을 쥐여주자 뱃사공이 순순히 배를 건네주었다. 눈빛이 오갔다. 나룻터에서 밀려난 배가 소리없이 물살을 갈랐다.

“주강 하류로 가려고요?”

“네, 거기서 다시 장강으로 갈까 합니다.”

“이 날씨에 삿갓 계속 쓰고 다니는 것도 대단하신데. 안 더우셔요?”

“아…. 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강바람도 잘 부는걸요.”

천 아래로 붉은 머리칼이 얼핏 비쳤다. 사내는 제 눈을 의심하지 않았다. 붉은 머리카락, 유학을 가르쳐주고 다니는, 황제가 승하한 지 약 십오 년 만에 나타난, 그 소란스러운 장터에서 사람을 끌어모으는 목소리를 가진 청년. 의심할 수 없었다. 그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다만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래요? 그러면 뭐 됐고,…….”

“…… 안 벗는다고 했잖습니까, 제가.”

“선생, 붉은 머리야?”

서강 항구는 강으로 나서기 전까지 어선과 빈객선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형세를 띈다. 오가는 배는 많았지만 자원이니 인력이니 하는 문제로 항구를 증축하지 않아 벌어진 형태였다. 강을 도하하는 나룻배며 어선 따위가 매일같이 뒤엉키는 곳이라 뱃사공도, 청년도 사내가 탄 나룻배를 의심하지 않았다.

사내는 손쉽게 삿갓과 천을 낚아챘다. 때마침 바람이 그를 도왔다. 일순 햇빛이 들이치면서 선착장에 새붉은 빛이 흩뿌려졌다. 청년을 태운 뱃사공이 무어라 이의를 제기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폭군이다!”

그건 일종의, 우레와도 같은 것이라…. 천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엉망진창으로 엉킨 군중들 사이로 체념한 듯의 낯의 청년이 보였다. 강 위에 떠 있던 모든 뱃사공들의 시선이 우레가 꽂힌 곳으로 돌아갔다. 폭동은 한순간이었다. 눈이 쨍할 정도로 내리꽂히는 햇빛 아래 누군가가 청년의 옷깃을 붙잡아 끌어내렸다. 방금까지 마을 아이들을 돌봐준 상냥한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치들이 앞장서서 폭군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순 공간을 만들어낸 배들 사이로 삿갓과 성긴 천이 떠다녔다. 누가 무어라고 명령한 것도 없이 장대를 든 사공들이 수면을 사정없이 찌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하의 모든 강이 그렇듯, 황하 다음으로 혼탁하다는 주강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자연은 대체로 모두에게 다정한 경향이 있었다.

천전이 그 청년을 다시 발견한 건 항구에서부터 한참은 더 걸어내려가야하는 하류 어귀의 한 구석이었다. 콜록거리며 물을 뱉어내고 있긴 했어도 죽을 낯은 아닌 게 목숨줄이 길었다.

흠뻑 젖은 옷에 모래가 잔뜩 묻어 반짝였다. 도망치기를 택한 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치장이었다. 청년은 곧 옷을 대충 털고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거기로 가면 죽어요.”

“… 아, 간만에 뵙습니다, 선생님.”

저 나이에 맞지 않은 예법도 거진 오 년 만이다. 천전은 맞인사 대신 햇빛에 눈살을 찡그리며 이리 나오라고 손짓했다. 그늘 속에 선 주희가 눈을 깜박였다.

“익사하려고 작정했어요? 거기서 더 가면 바다였는데.”

“… 말 놓으셔도 됩니다, 선생님.”

“그게 중요한가, 지금?”

붉은 머리가 푹 젖어 뺨이나 이마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이제 저와 눈높이가 엇비슷해진 주희를 바라보던 천전이 손을 뻗었다. 주희가 어깨를 확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안 쳐요.”

“… 죄송합니다.”

“미안할 일이 뭐 있다고.”

얼굴이 상처투성이였다. 천전은 내색하지 않고 -있으면 안 될 곳에 남은 상처에 놀라지 않는 법은 몇 년 전부터 배웠다- 주희의 손목을 붙들고 사구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강이 바다로 향하는 지류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럼 시신도 못 찾았을테니.

“나는 또, 하남에서 왔다길래 웬 수도승이 강호행을 나왔나 했네. 진짜 사천 가는 길이에요?”

“예, 뭐, 어디든…. 하남을 등지고 가는 중이라.”

“하남성은 왜. 거기가 수도라서?”

“그런 걸로 하죠.”

“선산을 등지고 온 건 아니고?”

오, 이게 정답이었나. 천전은 제 손을 내친 청년의 낯을 본다. 표정 하나 없었다.

이제 고작 지학이나 되었을텐데 저리 구는 건 어디서 배웠나 싶다. ‘유’에서 저런 걸 가르쳐주진 않았을텐데. 내쳐놓고는 어쩔 줄 몰라하는 티는 다 나는 것이 우스웠다. 그는 다시 주희의 손목을 붙들었다. 손이 닿을 때마다 주희가 몸을 움츠렸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식사했어요?”

“아직… 인데요.”

“숙소는? 아니다, 자고 가요.”

붙잡힌 손목이 움찔 떨렸다.

“그, 괜찮습니다.”

“열여섯 살 된 애를 두고 갔다고 하면 맹자님이 날 혼낼걸.”

“괜찮아요. 아마 모르실 겁니다.”

“내가 말하면 어쩌려고?”

“그럼 저도 같이 혼나겠죠. 그러니까 이 손, 좀…….”

사박, 모래톱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천전은 반 박자 늦게 발소리의 주인을 깨달았다. 이만하면 항구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다. 이런 곳에서 들릴 인기척이라곤 한 사람밖에 없지 않은가.

“… 실례했습니다.”

“형님, 거기서-”

말소리 두 개가 겹쳐 들렸다. 천전은 순식간에 제 시야에서 사라진 아이의 흔적을 눈으로 좇았다. 사구 위로 물방울이나 발자국 따위만이 점점히 남았다가,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경위를 모르는 이가 보면 바다에 빠져 죽은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 누가 있었나요?”

“아니… 그냥 지인이다. 가자, 아용아.”

“예.”

포말이 눈부시게 빛나는 날이었다.

다산이 그 사내를 만난 건 칠주야하고 이틀이 더 지난 때였다.

진흙이며 잡초가 뒤엉킨 채 머리칼과 얼굴 위에 엉망으로 덧발라져 있었다. 성긴 옷 위로 피가 튀어있었고 낯은 수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낯 위로 드러난 게 서늘하고 온화한 웃음이라 다산은 그 사내가 폭군이 아님을 깨닫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써야 했다.

“… 웃고 있네요.”

“아, 제가요. 제가… 웃고 있습니까?”

황제를 닮았던 웃음이 일그러진다. 사내는 허탈한 소리를 내더니 이내 얼굴을 쓸어내리며 소리없이 웃었다. 손이 얼굴을 가린 탓에 들썩이는 어깨만 보였다.

“그럼 제가 드디어 미쳤나 봅니다, 선생님.”

그 다음으로 나온 말이 그런 것이라….

해풍에 그 사내- 사내라고 불러야 할까? 감정을 갈무리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자를 성인으로 대해도 되나? 그 청년의 몸이 흔들렸다. 눈을 떼면 저 바다로 뛰어들 것만 같았다. 다산은 바람결에 새어들어온 -천전이 불철주야 노력하며 막았던- 소문을 떠올렸다. 산둥성에 폭군이 산다, 그것이 깨어나 송을 없애고 주를 다시 세울 것이다, 배신자를 처단하고 그 목숨을 취해 영생을 살 것이다…. 청년이 들을 법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 소문의 당사자가 되기에 눈앞의 청년은 너무 어렸다.

“쉬었다 가십시오. … 초당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주희.”

다산은 충동적으로 권했다. 아이의 이름을 쉽게 유추했는데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붉은 머리칼과 유학자라는 단서만을 가지고 소문이 그렇게 부풀진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를 주희라고 불렀고, 그게 고착화되어 아이의 위에 덮어씌워진 것일테지…. 숲과 바다가 맞닿는 경계에 서 있던 주희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다산은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보았다. 그 언젠가 돌아가지 못하고 서 있던 제게 천전이 그랬듯.

“… 제안은,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돌아온 말은 극도로 정제된 거절이었다.

아래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주희는 발목에 남았을 손자국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다산이 쓴 책을 전부 읽어봤고 -천전이 선산에 들를 때마다 몇 권씩 서고에 넣어주고 갔으므로- 그 안에서 황제 주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읽었다. 혁명 이후 17년이나 지났건만 천하가 여전히 황제의 그림자 아래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 분명 어느 곳은 그 그림자를 불태우고 있을 것이다. 기실 중원의 대부분이 그랬다. 주희의 존재가 그러지 못하게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폐하, 폐하! 어찌 신을 버리시나이까…. 접니다, 폐하의 즉위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 그러니 공신이 앳된 낯의 주희를 붙들고 있지 않았겠는가. 주희는 저보다 머리 하나가 큰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미친 사람처럼 제 팔을 붙잡은 채 폐하니, 공적이니 하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문장이 어그러져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저는 폐하만 믿었습니다, 어찌 저를 버리신단 말입니까, 제게 약속하셨지요… 영광과 부를 쥐여주겠노라고!’

영광과 부? 이학을 탄압하고 무고한 이를 죽여가며 얻은 영광과 부가 정말 명예로운 것인가? 주희는 되는대로 말을 내뱉었다. 미치광이에게 얼마나 통할지는 몰랐다. 사내는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소맷단 끝은 헤져있었다. 주나라 시절에는 소위 ‘잘 나가는’ 대신이었을 것이다. 혁명 이후 공신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변방으로 쫓아냈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 떠돌며 지냈을 것이고…. 주희는 제 팔을 붙잡은 오른손 말고 왼손에 성긴 천이 들려있는 것을 깨달았다. 서강 항구에서 삿갓을 벗겨낸 치가 눈앞의 사내임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억세게 붙잡힌 팔이 통증을 호소했다. 주희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의 손을 밀어내려 어깨를 비틀었다. 공포, 기대, 간절함 따위가 뒤섞인 표정으로 사내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더욱 괴이했다. 시야 가장자리가 새까맣게 물드는 것 같았다. 희는 반쯤 공황에 빠진 채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자네가, … 자네가 몰락한 것이, 내 잘못인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가 마구잡이로 흘러나왔다. 자의가 아니었다. 누군가 조종하는 것 같았다. 일그러진 낯을 수습도 하지 못한 채 주희가 중얼거렸다.

“내 늘상 말하였지, 사물의 이치를 찾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개인의 수양에 따라 달려있다고. 자네는 무얼 했지? 내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여기서 나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자네의 번영을 도모했겠지. 아니 그런가….”

사내가 중얼거린다. 아닙니다, 폐하. 저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폐하를 걱정했을 뿐입니다. 이 충심을 믿지 않아주시는겁니까, 폐하. … 군주를 아비처럼 여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세상의 어떤 자식이 아비를 걱정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럼 ‘주희’가 다시 내뱉는다.

“오, 아니라고? 그것 참 안 되었군, 그래. … 나를 아비처럼 여기는 건 좋은 자세야. 군군신신부부자자라고….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것은 기쁘네. 정말이야. 하지만 공, 나를 찾아서,”

하지 마. 주희가 중얼거렸다. 입밖으론 나오지 않았다.

“내게 매달리려는 목적으로 거경을 해 왔다면 그건 실망인데.”

그리고 사내가 무어라고 했지? 주희는 흔들리는 숲속에서 멍하니 기억을 되짚었다. 사실 그즈음의 이야기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나는 건 성리학 이론을 이런 곳에 쓰면 안 된다고 중얼거렸던 자신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냐면.

“내가 자네였다면 자립한 후에야 날 찾아 주의 복권을 도모했을 것 같다만. 이리 내 앞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치지가 어려운 모양이야, 그렇지. … 아, 알아들었다니 다행이군. 이제 무엇을 해야할 지 알겠나, 공?”

역겨워….

사내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지금이 기회였다. 주희는 속에서 올라오려는 위액을 꾹 삼킨 채 걸음을 돌렸다. 산 깊숙히 들어가려는 찰나 뒤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안하십시오, 폐하.’

그리고, 어떻게 되었냐면.

… 주희가 평생 잊지 못하는 것이 있다. 제게 웃어주던 하곡이라던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맹가라던가, 생일마다 제게 간식을 쥐여주던 순황과 양명, 그런 것들을 덮으며 질척한 피웅덩이가 발치로 밀려들었다. 짚신에 피가 물들어 덧신까지 붉게 적신다. 발에 피가 닿, 는다. 논집의 글자가 다시금 그에게 속삭였다. 뜨거운 피의 온도와 끈적한 촉감으로. 네가 죽였구나, 희야. 네가 폭군의 그림자를 뒤집어씌우고 사람을 죽였어. 주희가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죽였구나. 내가 사람을 죽였어. 내가 유학의 가르침을 어기고, 생의 귀천을 구별하지 못하고 죽였구나. … 잔적의 분별이 어디에 있나. 주희는 정말 잔적이 아닌가? 살인은 인의를 어긴 것이 아닌가? 이 죄는 폭군의 죄였던가?

아니! 이건 오롯이 희의 죄다! 생명의 존귀함을 알면서도 자리보전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그것에 대해 회피하려 들었으며, 스스로 결정했음에도 그 책임을 타인에게 미루는 무도한 자다! 사내는 주희의 품으로 쓰러졌다. 숨이 사라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 주희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폭군의 탈을 쓰고.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 부분만큼은 누가 도려낸 듯 인상이 희미했다. 진흙을 덧발라 위장해, 제일 처음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시신 수습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었던 것 같다. 장정들이 수습을 위해 산길을 올라가는 걸 보고나서는 저도 모르게 또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온몸에 혈향을 묻힌 채 황제의 피해자였던 사람을 마주보고 있지 않나. 주희는 몇 없는 이성을 겨우 끌어모아서 쉬었다 가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아무리 그가 멍청하기로서니 염치까지 없는 치는 아니었다.

다산은 상냥한 사람이었다. 멀리 있지 않았으니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혈향을 맡았을 텐데도 기꺼이 손을 내어주는 걸 보면 상냥한 사람이 맞았다. 주희는 겨우겨우 옷매무새를 갈무리하며 뒷걸음질쳤다. 그 모습을 본 다산이 눈가를 약하게 접으며, 다소 어색하게 웃었다.

“… 갈 곳이 없으면, 언제든 와도 괜찮습니다.”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한 제안이었다. 주희는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도망쳐나온 숲속으로 몸을 들였다. 헤진 짚신이 끊어지며 맨발에 돌밭이 밟혔다. 썩 아프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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