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The Scene

비지터x그레이맨

underwater by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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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지를 점검하던 ‘그’는 불현듯 느껴지는 기척에 눈살을 찌푸린다. 주역이 등장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고,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불유쾌한 예감은 평범한 인간에게서 비롯될 수 있는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몇 없다. 그는 귀찮은 표정으로 한 마디 뱉는다. “나오시죠.” 그러면 까만 중절모를 눌러쓴 청년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태연한 낯짝으로 문틀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모자와 마찬가지로 검은 장갑을 제외하면 온통 회잿빛 일색의 차림인 그것은 이가 다 보이도록 환한 미소로 ‘그’에게 웃어 보인다. 저를 똑바로 향하는 불편한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청객은 세팅이 다 끝난 스테이지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와, 이런 취향이셨군요. 생각보다 단정하고 뭐랄까, 고전적이라고 할까요? 역시 심플 이즈 더 베스트. 훌륭하네요. 그것은 부러 과장된 동작으로 소리내어 박수를 친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는다. 저런 태도야 고릿적부터 이어져 온 것이기도 한 만큼, 달리 어떤 의도가 있거나 성질을 돋우려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구태여 흥분했다가 괜히 트집 잡힐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한동안 스테이지를 휘젓고 돌아다니던 그것은 팔짱을 끼고 선 ‘그’의 앞에 다가와 뒤늦게 정중한 자세로 양손을 모은다. ‘그’는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다.

“다름이 아니라,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당신을 위해 특별히 장기말을 제공해 드리려고 합니다. 할당량 채워야 하잖아요? 그러니 서로 돕자는 겁니다. 때마침 처치 곤란한 인간이 하나 있거든요. 그만한 실패작은 내 취향도 아니고. 이죽대는 남자를 향해 ‘그’는 다시 인상을 쓴다. 누굴 폐기물 처리반으로 아나. 그렇지만 벌써 한 해의 막바지가 다가오고 있는 지금, 이런 제안은 차라리 반가운 것이다.

“날짜는요?”

“일주일 안으로 배달해 드리죠.”

“좋습니다.”

이제 꺼지세요. ‘그’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돌아서며 일갈한다.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그것은 짐짓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나는 당신 손님인데요. 그 말에 뒤를 홱 돌아본 ‘그’가 노란 눈을 번뜩이며 쏘아붙인다. “남의 대사 뺏지 말고 얼른 꺼져요.” 원하던 반응을 얻은 청년은 씩 웃으며 지체 없이 사라진다. 하여간 상종하기 싫은 족속이라니까. ‘그’는 잇새로 욕설을 짓씹으며 마지막 점검에 나선다. 소품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다. 세트의 상태도 완벽하다. 오늘의 주역은 저녁 여덟 시 종이 울리면 칼같이 무대 위로 등장할 것이다. 이후는 뻔한 일이다. 지겨운 일이기도 하고. 뭐, 가끔은 즐겁지만.

그것이 준비했다던 특별 할당량이라는 건 또 어떤 말종들일까. 스테이지 밖으로 내려온 ‘그’는 객석 의자에 한껏 드러누워 눈을 감고 킬킬댄다. 저와 같이 무대의 뒤편을 누비는 존재는 흔하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무에도 묶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단지 흥미 본위로만 움직인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이 가진 자유가 부럽지는 않다. 무릇 어떤 존재든지간에 최소한의 규율과 원칙을 따르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아,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그’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한다. 황갈색 재킷의 라펠을 매만지고, 청록빛 넥타이를 고쳐 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한켠에 소중히 기대어 놓은 기타를 둘러메는 것이다. 공연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그늘 속에서 연주자들이 하나둘 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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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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